이금이, <유진과 유진> 중

<차는 바닷가를 낀 채 달리고 있었다. 바다는 도로의 형태나 위치에 따라 바로 옆에 있다, 먼 곳에 있다, 낮은 곳에 있다 하며 따라왔다. 하지만 어느 바다든 여전히 아우성치고 있었다. 엄마의 침묵이 차츰 내 마음을 짓눌렀다. 침묵의 무게가 더 할수록 가슴 밑바닥에선 내뱉고 싶은 말들이 바다처럼 아우성치고 있었다.

"왜 그랬어! 그때 왜 그랬어? 내 잘못도 아닌데 왜 그랬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끼익, 차가 급정거를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얼굴은 혼이 달아난 듯 퀭했다. 뒤에서 빠앙! 하고 화난 듯한 경적이 울렸다. 엄마가 정신이 든 듯 차를 갓길로 옮겼다. 그 도로는 높지는 않았지만 절벽이었다. 파도가 쉴 새 없이 절벽에 와 부딪쳤다. 절벽에 몸을 부딪쳐 멍이 든 것처럼 그 바다는 검푸른 바다였다. 엄마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데도 나는 조금 전에 내가 정말 소리를 질렀는지 아니면 상상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 이금이, <유진과 유진> 中 pp. 261~2, 푸른책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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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 씨는 최근 아주 흥미롭게 읽는 작가다.

아이들 수업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어른들이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특히 위의 장면은 너무 인상적이다.

내가 가장 강하게 동조하는 정서가 억울함이어서 그런 것도 있고,

침묵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느닷없이 'acting out'을 한 뒤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하는 차, 혼이 달아난 엄마 얼굴, 뒤에서 울리는 화난 경적 소리, 도망치듯 간 곳에 펼쳐진 절벽, 파도의 부딪침, 멍든 바다,

그리고 이 장면에 관한 실재적이면서도 상상적인 체험...

 

아마도 이런 탁월한 묘사가

문학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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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23 15:58 2008/11/2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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