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후배랑 얘기하면서 생각난 몇 가지

어제(오늘 새벽인가? TT) 한 후배랑 이야기하면서 생각한 것.

 

첫 번째는 결정과 책임, 선택과 정정에 관한 것이다.

나를 데리다의 정치 개념에 처음 입문시켜 준 리샤르 비어스워스는

데리다의 결정 개념이 'less violent'(말하자면 '차악')의 논리를 따른다고 본다.

그가 볼 때 모든 결정은 예외 없이 폭력과 배제를 포함한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결정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그렇다고 모든 폭력이 같진 않다.

폭력 안에는 정도(degree)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최소화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등등.

 

내 생각에 이런 사고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은

결정과 선택을 요구하는 상황이란 결코 유쾌하지 않다는 견해다.

특히 선택이라는 관념은, '선택의 자유'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선택이 가능하지 않은 일괴암적인 상황에 비해 긍정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여기서 데리다는

근원적이고 비극적인 '유한성'이라는 문제를 선택과 결정에 추가한다.

말하자면, 신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

선택한다는 것은 여러 갈래의 길을 동시에 가지 못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인데

정의상 전지전능하고, 만물에 편재(omnipresent)하는 신은

무언가를 버리면서 무언가를 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한자인 인간은, 선택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어서 선택한다.

즉 모든 것을 다 취할 수 없고,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선택한다.

이렇게 보면 선택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한에서, 선택의 기준은 가장 덜 폭력적인 상황,

선택으로 인해 배제되는 가능성들을 최소화하고

그 배제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된다.

 

데리다가 선택/결정만큼이나 '책임'(responsibility)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책임을 진다는 것이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일관성' 쪽보다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에 대한 경청이고 응답인 것은,

선택과 결정이 열어놓은 것이 다름 아닌 끊임없는 '정정'의 시간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라진 길들의 소리를 듣고 곁에 눈길을 주는 것,

그게 내가 이해하는 데리다적인 책임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택과 결정은 불가피한 갈라짐과 분기이지만

그/녀들이 책임을 행하는 한에서,

갈라진 길들의 실천적 거리는 의외로 가까울 수 있다.

모든 길들의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수렴하게 되어 있다는 본질론/목적론이 아니라

이 모두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며 누르고 쫓아낸 목소리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하는 마주침과 수렴의 가능성이 나온다.

공통적 본질은 이질성과 차이에 돌이킬 수 없이 자리를 내어 주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대화와 교통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정세의 객관성과 당파성이라는 난문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던져 준다.

정세는 객관적이지만, 각자의 관점과 당파성 없이 정세를 파악할 수도 없다는 역설.

내 생각에 '대중들'(the masses)이라는 개념이 입장하는 곳은 바로 여기다.

왜냐하면 대중들이란, 성층론적인 계층론을 비판하는 심지어 맑스적인(곧 관계론적인) '계급' 개념

으로도 약분할 수 없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실존하지 않는

동일성 형성/동일화의 복잡성과 불균등성을 묘사하고 또한 처방하는 개념

(더 정확히는 '비개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각자의 관점과 당파성을 가지고 정세를 파악한다.

그것이 객관적인지 여부는, 대중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대중들 안 깊숙한 어딘가에 모종의 공통적 본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애초에 취한 입장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복잡성과 이질성들이

우리의 관점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해체함으로써 우리를 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거대한 충돌과 긴장의 공간('주체'가 아니라)이 바로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곳은 막대한 폭력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점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물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다.)

그렇지만 이것과 대면하지 않는 한 어떤 진리도 만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발리바르와의 워크샵 정리문

(http://www.mcrg.ac.in/Report_Etienne.htm)에서

나는 발리바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관련된 부분은 다음이다:

 

In the History of 20th C, Heidegger in his seminal work on Time and Being analysed the category of the ‘event’. Certain contemporary philosophers also contributed to the theory of the event. In Foucault and Althusser’s work the category of “event” was part of the critique of the teleological time. In this context he reminded us that philosophy of the “event” is also about philosophy of the “present”. This is explicit in Foucault’s later interest in Kant’s Essay “What is Enlightenment?” For the first time Philosophers were debating with their own ideas; i.e, what makes the time singular and specific and how the old and new are fighting together. The leanings of these ideas can be found on concrete analysis of “concrete” moment.

In this context Balibar highlighted that the concepts of “over determination” and “under determination” should be taken together. Concept of “conjecture” is some kind of trope. Althusser and Foucault break away from the conventional use of “event” and instead uses it in a radical sense. He recalled his conversation with one of his friends when he went to Algeria as a Peace Corps Volunteer. His friend was the leader of the Maoist Students organization who felt that he was obsessed with theory. Prof. Balibar reflected on what drives him to find the subject of the theory. One possibility could be divine intervention; the other possibility, and the relevant one is “masses”. Masses have been the center of Mao’s writings. For Balibar, this question obsessed him throughout his life. 

It is through encounter with masses, meeting people and institutions one can locate the spirit of the times. It is important to disentangle the “social” of social movements, to understand the differences and crystallize discourses, practices and institutions. His personal experience is that “differences” are never absolute which make communication and sharing of experiences inexplicable. This is why he is favour of “‘dialogic’ way of making philosophy” as it speaks of “plurality of voices”.> (강조는 나)

 

물론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후배와 대화하면서 생겨난 착상을 가지고

그가 얘기한 것을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는 사고 실험을 한 것이다. 또는 역으로

그의 얘기가 활동가들의 고민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한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알던 후배들 말고 전에 몰랐던 후배들을

이렇게 많이 본 게 참 오랜만인데,

문득 과학생회, 학회 시절이 생각났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한국 사회 그 어떤 공간에서도

그만큼 풍성한 대중운동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후배들을 만나면서 그 시간과 다시 마주치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렇듯 삶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을 열어 준다.

그래서 사는 게 재밌는 것이겠지.

많은 자극을 준 후배들께 건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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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16 19:51 2008/11/1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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