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 정치(적 행위)가 할 수 있는 일

말년에 알튀세르는 '우발성의 유물론'을 말한다.

거기서 그는 유물론(적 철학)자를, 열차에 몸을 싣는 여행자에 비유한다.

 

그의 주장을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면,

주체는, '호기'의 뒷받침이 없다면, 결코 충분히 멀리까지 갈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이로써 알튀세르는 정치(적 행위)의 문제를

거대한 필연성의 바다 안에 허무주의적으로 익사시키고 만 것인가?

 

우리는 아무리 뛰어도 열차처럼 빨리 갈 수 없다.

하지만 열차가 올 때 정거장에 도착해 있을 정도로는, 빨리 갈 수 있다.

역량이 적은 자와 많은 자의 차이는,

정거장에 10분 먼저 도착하느냐, 10분 늦게 도착하느냐 라는

참으로 미미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로 열차에 타느냐 마느냐가 좌우되고,

이로써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게 된다.

 

물론 사태는 훨씬 더 복잡하다.

일단 역사의 열차에겐 예정된 시간표 따위가 없다.

역량이 출중해 너무 일찍 도착한 사람은,

일찍 도착한 시간 + 역사의 열차가 연착한 시간만큼을 목놓아 기다리다가

불과 몇 분 있다 도착할 열차를 만나지 못한 채 지쳐 떠날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즉 오직 역량이 아주 출중한 사람만이 탈 수 있을 만큼

이른 시간에 열차가 도착할 수도 있다.)

반면 꼴찌나 다름 없이 늦게 온 이가 '때맞춰' 도착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열차가 '타이타닉'이 될 수도 있다...

열차를 타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 비길 데 없는 행운이 될 수도 있고,

일찌감치 포기해 다른 곳으로 간 이가 제대로 된 열차를 탈 수도 있다.

너무 힘들어 쉬던 곳에 문득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 같은 게 도착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일어날 수 있었을',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그렇다고 해서 '일어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수많은 사건들의

마주침과 엇갈림,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안에서 살아간다.

(내가 이해하기에, 데리다가 문학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이 과소결정된 사건들을 과잉결정된 것으로 체험케 함으로써,

세계를 다른 식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운명 개념을 복잡화하고, 예정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전제로,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주체의 정치(적 행위)는

정거장에 당도하는, 단 몇 분에 불과한 미미한 차이,

심지어 그 순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고

오직 그 순간 이후의 사후적 전개 속에서만 분화를 낳는

그런 '특이점'(singular point)에서의 '차이 없는 차이'

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런 한에서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역사의 열차가 울리는 우렁찬 기적 소리가 점점 더 분명히 들리기 시작하는 이 때,

(물론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몸체보다 소리가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

우리의 청력과 시력을 그러나 우리의 각력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설사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하더라도

저 변덕스러운 열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정거장을 지난다고 할 때

저 열차가 휘날리는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움켜쥘 악력,

설사 움켜쥐었다 하더라도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나오듯 열차의 잔등에 타지 못하고

땅바닥에 질질 끌려갈 때 떨어져 나가지 않고 버틸 완력과 지구력,

그것이 우리에겐 여전히 부족하지 않은가?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을 갖추어 열차에 올라탄 결과, 빙산에 부딪쳐 침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로써 역사와 힘을 겨뤄 보기라도 하는 것이,

열차가 떠난 뒤에 스스로에 대한 온갖 자책에 휩싸이는 것보다는,

그 종착지 여부에 관계없이 훨씬 덜 후회스러운,

그리고 극한에서는 다만 아쉬울 뿐인 삶이라는 것이다.

선인들의 말대로,

주체의 정치(적 행위)의 영역은 '진인사'(盡人事)일 뿐이고,

그 다음은 '대천명'(待天命)일 것이다.

 

패는 분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판돈을 마련하고, 판돈을 걸고,

만약 가능하다면, 아마도 손목을 걸어야 하겠지만,

밑장빼기라도 연습해 두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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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16 17:08 2008/11/1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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