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서로 다르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최근 발리바르의 <맑스의 철학>을 다시 읽으며

이 테제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내기에 걸린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맑스는 요즘 말로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이론, 또는 보다 일반화하자면 '말'에서 탈출하는 것으로까지 이해되기도 했고

맑스 자신도 그런 열정에 사로잡혔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지만,

그렇게 되면 '道可道 非常道'의 역설, 즉 말로 표현하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지만

그런 도/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궁지에 이르게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론에서 실천으로의 이행', 또는 '이론 안에 있는 실천으로의 출구'

그도 아니라면 '실천이라는 이론외적 물질성에 의한 이론의 재편'

정도로 정식화 해 보자.

 

이 때 '해석'이라는 관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독일 관념론이 정교화한 '표상'(representation) 개념,

결국 세계 안에 '조화'로운 '질서'가 내재한다

(따라서 이론의 역할은 이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고,

정치의 역할은 이 질서를 구현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같은 기원적 질서를 파괴하려는 자('敵', '惡')들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다.

 

반면 맑스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그의 유명한 선언이 말하듯

세계가 갈등과 투쟁(그러나 이는 '무질서'는 아니다) 위에 서 있으며

그런 한에서 세계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역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이론은 이 갈등과 투쟁의 일부가 되는 한에서

실천적이 될 수 있다.

 

이는 '물질'의 관점, 심지어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해석', 따라서 '질서'라는 이념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면

실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념론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론이 객관성이나 과학성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투쟁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편과 저 편의 힘 관계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하지 못하는 이론이란

현실의 투쟁에 아무런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 해악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계가 정해진 방향과 질서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투쟁으로 이루어진 불안정한 힘의 균형 위에 서 있으며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 선험적/목적론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할 때,

스스로의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자부가 대개 저 편의 강점과 이 편의 약점, 객관적 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인식론적 장애물이 된다는 점을 깨달을 때,

이론은 실천적인 만큼 객관적이고, 객관적인 만큼 실천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론이 실천에 기여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대중들을 실천으로 조직하고 이 조직화가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자부' 곧 이데올로기다.

약간의 무리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여기서

이론은 실천적인 만큼 주관적/주체적이고, 주관적/주체적인 만큼 실천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에 기여하는 이론은

그 자체가 둘로 나뉘고 갈등한다. <과학-실천>, <이데올로기-실천>이라는

<이론-실천>의 두 복합체 사이의 갈등.

사태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물론, 이 복합체 두 가지가 갈등적으로 결합될 때에야

유효한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없는 과학은 무력하고, 과학 없는 이데올로기는 맹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맑스주의(하지만 그 이전에 마키아벨리즘)의 독특성을 사고하기 위해

'당파적 과학'이라는 일종의 형용모순

(이는 말하자면 '주관적 객관성', '특수적 보편성'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리고 그 형용모순과 갈등을 북돋는 데 맑스주의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많은 경우 이 갈등의 한 항을 억압함으로써 결국 맑스주의 자체를 파괴한 것은

아마도 위와 같은 모순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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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23 17:50 2008/11/2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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