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리는 세계

창작과 비평사에서 "세상 밖의 세상"(기억이 가물 -_-) 이라는 시리즈를 펴내겠다면 출판한 책이다. 시리즈 기획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출판된 <조작된 공포>가 같은 시리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안'에서는 온전히 볼 수 없는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말인 듯도 하고 지금의 세상을 넘어선 세상을 그려보자는 말인 듯도 한데 출판사의 기획의도를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라는 부제를 달고 누구에게나 익숙한 열두가지 신화를 깨나가는 작업이 책의 의도다. 신화와 그에 대한 저자(프란시스 라페)의 주장은 이렇다.

 

1. 식량이 충분치 않다

-> 식량은 충분하다.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된다. 심지어 과체중이 될 정도로 생산된다.

 

2. 자연 탓이다

-> 자연재해가 식량부족의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자연재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식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정치,사회적 원인들을 은폐한다. 때로는 자연재해라고 불리우는 것조차 농업생산양식과 사회구조의 병폐에 기인하기도 한다.

 

3. 인구가 너무 많다

-> 인구증가를 막는 것만이 식량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며 출산율 감소를 위해 피임기술 등을 널리 보급하자는 의견은 식량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령 출산율 감소가 필요하더라도 여성교육기회의 증진이나 사회적 빈곤의 해결 등의 정책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4. 식량이냐 환경이냐

-> 식량생산의 증진이 반드시 환경파괴를 불러오지는 않는다. 초국적 농업기업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생산방식이 환경파괴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던 많은 농민들을 굶주림으로 내몰고 있다.

 

5.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 유전자 조작 등을 이용한 녹색혁명은 생태를 오히려 취약하게 만듦으로써 장기적으로 보면 식량생산을 감소시키고 있다. 종자나 농약에 대한 독점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자나 농약의 사용으로 인한 피해가 농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6. 정의냐 생산이냐

-> 식량생산의 증대보다 시급한 것은 정의다. 굶주림을 끝내기 위해 반드시 사회, 경제적 부조리가 종식되어야 한다.

 

7.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 자유시장은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지 않는다. 자유시장은 오직 이윤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며 굶주림을 끝내기는 커녕 악화시킨다.

 

8. 자유무역이 해답이다

-> 비교우위론은 현실을 적합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역적 조건에 따른 비교우위라는 가설은 거의 무의미하다. 자유무역은 오히려 제3세계 국가들의 부정의를 조장하고 굶주림에 취약한 사회구조를 강요한다.

 

9. 너무 굶주려서 저항할 힘도 없다

-> 굶주림에 저항하는 운동은 당사자들의 투쟁을 통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지만 그/녀들은 이미 너무 지쳐있고 저항하려들지도 않는다는 입장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을 보지 않고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미 굶주림에 저항한 운동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이를 지원해야 한다.

 

10.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 미국의 원조는 대상국의 구조조정을 강요하는 빌미가 될 뿐이며 실제로 원조가 시급히 필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미국의 원조는 굶주림을 강요하는 미국의 압박을 은폐하는 효과를 지닌다.

 

11. 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

-> 우리의 경제성장을 위해 특정국가의 굶주림은 불가피하다는 의견은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사실과도 다르다. 경제성장이 미국의 모든 사람들의 풍요로움과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12. 식량이냐 자유냐

->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큰, 혹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어조보다 다소 강경한 느낌으로 정리된 듯하다. 이 책은 굶주림을 지탱하고 악화시키는 시장의 자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시장을 부정하거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반세계화 운동의 한 주류인 공정무역 운동보다 한발 더 나아간 정도쯤인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이나 그 근거가 되고 있는 통계, 정보들에 대해 한번쯤은 귀기울여볼 만하다. 굶주림의 문제는 가까운 문제가 아닌 듯도 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굶주림의 이미지는 까만 얼굴에 까만 몸을 가진 예닐곱살 되어보는, 배만 불룩 나와있고 팔다리는 앙상한 어린이의 이미지다. 그것이 세계의 기아문제를 모두 대표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 굶주림의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도처에 널려있다.

 

옷장 안에서 죽어간 한 어린이의 모습에도, 부실한 도시락이라고 비판받았던 그 도시락을 지금도 먹고 있을 결식아동들의 존재에도 굶주림의 그늘은 있다. 강력한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할 지 모른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고발했던 절대적 영양부족의 현실이, 지금은 덜 보편적일 수 있으나 웰빙을 좇아 유기농식품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고급매장들이 고급주택가를 중심으로 활개를 펴고 있는 때에 단무지가 소세지로 바뀐다고 굶주림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극단적인 형태의 굶주림에 익숙해지고 그에 반응하도록 요구하는 미디어의 목소리는 마약과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일종의 위안마저 제공하는.

 

좀더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굶주림에 대하여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 아닐 뿐더러 이미 우리는 충분한 생산력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단지 아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한국의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지만 자가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가구의 비율은 반에 못 미친다는 사실 등. 익숙한 풍경에 당연한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 부당함에 대한 끊임없는 폭로와 선전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굶주리는 사람들과 '우리'들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아마 미국의 중산층 정도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듯하다. 그/녀들이 싸울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중요한 지적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녀들이 아닌 '우리'의 입에서 당사자의 투쟁을 강조하는 발언들이 나오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나 역시 너무 쉽게 '당사자(라는 표현이 그리 적절하다거나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라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도 된다.

기차를 출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달리고 있는 기차에 몸을 싣고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있지만 막상 어떤 실천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이미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만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어야 하고 설익은 관념으로 누군가를 조직하겠다는 무모함도 아니어야 할텐데...

 

어쨌든 그런 실천에는 용기뿐만 아니라 예민함도 필요할 듯하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면 끓기 전에 한참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러다가 막상 끓기 시작해지면 소리는 오히려 잠잠해진다.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기 십상인 요란함에 현혹되지 말고 조용히 끓어오르고 있는 분노에 귀기울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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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9 16:51 2005/04/1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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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일리톨 2005/04/18 10:4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사랑방 활동은 어떠세요? 스파르타적 분위기(?)에서 재미나게 지내고 계신거죠?

  2. 미류 2005/04/18 14: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오늘 첫 '출근'이예요. 아직 분위기 파악 안되요. ^^

  3. rivermi 2005/04/18 16:0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에서 난 그들일까 우리일까? 또 당신은? ㅠ_ㅠ;
    미류님~~첫출근을 마구마구 추카드림돠^^

  4. 미류 2005/04/19 16:4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감사함돠 ^^
    전 '우리'인 것 같아요. 아직은... 그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

  5. sanori 2005/04/20 09:0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 책 보면서 내가 너무 많은 왜곡과 거짓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했지요..

  6. praxis 2005/04/20 11:2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거 번역한 사람이 허남혁 씨 맞죠? 후배 남편인데...멋진 사람이죠~ 그 후배도~

  7. 미류 2005/04/20 17:1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산오리, 우리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요? ^^;;

    praxis, 맞아요. ㅎㅎ 그렇군요. 이름도 멋있어요.

  8. 콩!!! 2005/04/22 07:5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 좋은 책을 찾아내고 꾸준히 읽어가다니 훌륭해! 나는 뭐하고 살길래 책하나 못읽나 하는 반성도 들고... 흠 그나저나 허남혁씨라면 내 친구 오빠되시는데...'멋진 사람', '이름도 멋있다'는 말을 전하면 친구녀석 펄쩍 뛸 모습이 눈에 선하네 ㅋㅋ

  9. 미류 2005/04/23 13: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세상이 좁다더니 근처에 번역자를 아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네요. 신가하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