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감자 들깨탕

2009/06/18 00:08 베껴쓰기

적린님의 [채식 감자탕] 에 트랙백으로 소개하는 "두부 감자 들깨탕"

두부로 담백함을 더하고, 풋고추로 여름 느낌을 살리는 하얀 감자탕이다.

(두부 요리만 모아 놓은 <에브리데이 두부> 책에 나온 걸 좀더 간단하게 만든 버전)

 

재료

두부 반 모, 감자 2개, 동글납작하게 썬 연근 한 주먹, 마른 표고 4개, 풋고추/홍고추 각 1개, 들깨 4큰술, 다시마 가루 1작은술, 국간장 1/2큰술, 들기름, 소금, 물 2와 1/2컵

 

요리하기

1. 감자는 솔로 깨끗이 씻어 껍질 채 한 입 크기로 깍둑썬다.(영 낯설다면 껍질을 벗겨도 좋지만, 껍질에 영양분이 참 많단다) 감자와 연근 썬 것을 물에 담궈 변색을 막는다.

2. 풋고추와 홍고추도 씨를 빼고 1cm 크기로 큼직하게 어슷썬다.

3. 표고는 물 1컵에 살짝 불린 후 건져 2등분한다. 불린 물은 그대로 둔다.

4. 두부는 반 모 크기로 것을 노릇하게 지져서 길개 반으로 자른 후 5mm 두께로 썬다(두부가 일종의 고기처럼 씹는 맛을 주는 요리인 셈)

5. 들깨는 믹서에 물 1컵을 넣어 간 후, 체에 한 번 거른다(겉껍질이 살짝 껄끄럽다). 남은 물 반 컵으로 믹서를 헹궈 들깨즙 낭비를 막는다.

6.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손질한 표고, 감자, 연근을 볶는다. 여기에 다시마 가루, 국간장, 표고 불린 물 1/2컵을 넣고 끓인다.

7. 국물이 끓으면 들깨즙과 남은 표고 불린 물을 붓고 두부와 고추도 넣어 한소끔 끓여 낸 후 소금으로 간한다.

 

이런 건 해장국으로도 좋고, 현미밥 말아 먹으면 탱글탱글 밥알과 구수한 국물이 끝내 준다. ^ ^

생들깨가 없으면... 5번 빼고 6번까지 진행한 후, 7번에서 들깨즙 대신 하얀 들깨가루1와 분량을 맞춘 물을 넣어 끓이면 된다.

 

트랙백인 만큼... 채식과 욕망의 자제에 관해서 몇 줄.

한참 채식을 할 때는 많이 먹는다는 게 또한 하나의 문제였다. 야채의 깊은 맛에 눈을 뜨니 자꾸 손이... 당시에 합정동 근처의 어떤 호프집에 갔는데, 특이하게도 야채접시라는 메뉴가 있는 것이다. 값도 불과 5000원, 아주 저렴했다. 시켜 보니... 무, 피망, 배추, 당근, 오이 등이 한 접시 나왔는데... 내가 무와 피망까지 아삭아삭 씹어 먹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좀 질려하더군(이후로 요리하면서 생재료를 잘 집어 먹는 버릇이 생겼다. 생감자, 생양파, 생우엉, 생연근, 생도라지..... 본래 맛을 알아야 요리한 뒤의 맛도 상상할 수 있다).

여하간... 채식이든 잡식이든 덜 먹는다는 건 단순히 욕망을 자제하는 문제와 다르다. 인간 신체는 축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고등학교 때 배운 지방간의 원리^ ^)...  적은 양을 먹으면, 그만큼 그 적은 부피의 음식 안에 있는 모든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더 많이 노동을 하게 되면서(이것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게 단식이다. 단식 기간엔 1차적으로 핏속의 불필요한 성분들—콜레스테롤, 혈당 등—이 기초대사를 위한 에너지원으로 활용된다), 신체 전체의 활성화가 이루어진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푹 익은 스파게티보다 오독오독 씹히는 알덴테의 스파게티가 사실 소화가 더 잘되는데, 이유는? 더 잘 씹어서 먹기 때문이다. 오래 씹는 동안 침도 더 많이 나오고, 혀 운동을 많이 하면서 혀와 연동된 식도와 위도 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충분히 하게 된다.2 비슷한 이유로 통곡물이 더 소화가 잘 될 수도 있다. 보다 많은 무기질과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균형 잡힌 영양 섭취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론  덜 먹고도 든든하고. 그러니까 채식은 욕망의 자제가 아니라 에너지를 쓰는 방법과 욕망의 출처를 바꾸는 것이다. 많이 먹고, 소화시키는 데 애를 쓰다 보면... 빨리 늙는다(아, 이런 걸 10대에 알았더라면- -;;) 밥 먹고, 소화시키고 내보내는 과정을 간단하면서도 충분하고, 멋지게 만들고... 남은 에너지로, 각자 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나한테는 그런 문제다. 고기를 참는 문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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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얀 들깨가루: 껍질 벗긴 들깨를 가루낸 것을 이른다. 추어탕이나 순대국 먹을 때 나오는 검은색 들깨가루는 껍질 채 간 것임.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여기서 나의 인문서론, "인문서는 알덴테 파스타다"가 나오기도 했지. ^ ^;;텍스트로 돌아가기
2009/06/18 00:08 2009/06/18 00:08

축축한 유월 밤

2009/06/15 00:21 생활감상문

유월 첫주엔.... 그냥 가만히만 있는 주말이 너무 절실했다. 자체 입원 모드를 바랄 만큼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머리를 쉬게 하고 싶었다. 쫓기며 일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난 것도 아닌데... 그냥 마감으로 시작해 어버이날/스승의 날 지내고, 중간중간 사람 만나고 국상 분위기의 한 주간까지 겪으니 너무 많은 일들에 접속한 기분이었다. 그냥 가만가만히 있는, 리셋하는 이틀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지난 주 일요일 밤에 생각하니... 무슨 무기력증이 온 거 같더라. 그러고 월요일을 맞으려니 기분이 또 갑자기 초조해졌다.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시커멓게 부은 얼굴로 출근했는데, 오백 년 만에 싸이 방명록으로 후배 Yeon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월/화/수 시내에서 연수가 있어, 간만에 칼퇴근을 할 수 있으니 저녁을 먹자고. 화욜은 사내 강의로 MSG샘의 지젝 강의가 있고, 수욜은 불어 수업. 시간은 당일인 월요일밖에 없다. 재작년에 함께 일본 여행 다녀왔다가 가을에 Yeon의 동기인 Soo 결혼할 때 만나고 처음 보는 거라... 제법 수다거리는 많았다. 늘 그렇듯 주로 내가 떠들었지만.

마침 그 전 주일에 T/V 선배인 HJ옹이 뭐 부탁할 거 있다면서 전화하고, 당일에는 權's와 통화한 터라 선배들 흉까지 사알짝~. 후배들 소식도 뒤늦게 입수. 한 학번 아래인 Yeon의 동기들도 유날리 결혼들을 열심히 한 터라... 이제 날만 잡으면 되는 쭌~을 제외하면 Yeon만 솔로[아, 그러고 보면 내 동기들도 결혼들 열심히 했는데... 그나마 우린 나까지 두 명인가 세 명 남았던가? 1월에 L군이 결혼했음에도 결혼에 대한 나의 지지부진한 생각은 별로 변화가 없으니].

적성에 안 맞는 은행에 어쩌다 들어가 초반에는 덤벙대는 성격 때문에 고생하고, 웬만큼 자리를 잡은 지금에는, 그 놈의 책임감 강한 성격 탓에 야근 너무 당연시하고(이게 우리 T/V 출신들의 문제이긴 하지) 그러면서.... 몇 년을 만나도 생활의 변화 없이, 그렇다고 돈 버는 재미가 있다거나 은행 때려치고 뭐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결혼에 대한 의식도 없이, 나이만 먹고 있는 Yeon이다. 바로 전날까지도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주제에... 또 선배랍시고, 변화를 추구하라고... 회사에서 적성에 맞는 부서로 바꿔 보던지... 이래저래 꼬여 못 쓴 논문... 경력에 도움 될 만한 주제로 바꾸어서... 새로 써서, 인사고과라도 높이던지... 어줍잖은 충고를 한다. 이렇게 무기력 혹은 귀차니즘에 빠진 직장인들이랑 얘기하고 있을 땐... 그래도 내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고, 남들에게 도움도 되고, 어쨌든 생계도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건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 그러면 열심히 해야 하는데.

가끔은 남들에게 호기심 덩어리, 열정 덩어리라는 얘기도 듣는다(실력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늘 무언가를 배우면서 일할 수 있다는 보람도 크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뭔가를 못 넘어서는 게 있다. 수영도 동작은 다 배웠지만 결국 혼자 하질 못하고, 자전거도 탈 줄 알지만 운동장에서만 맴돌며, 등산도, 인라인도, 요가도, 재즈댄스도 마찬가지. 일도 어떤 면에서 분명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데, 실수가 잦다. 사람도 많이 좋아하지만, 매달리질 못한다. 무엇에도 강박을 갖지 않는 게 내 유일한 강박이란 우스개를 대학 다닐 때 한 적이 있는데, 여전히 그런 거 같다. 아마추어로 살면 안 될까 하는. 팔 만한 능력을 상품으로 갖는다는 게... 지금까지는 꽤 성공적이었는데, 참 갈수록 힘들다. 화요일 지젝 강의에서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선생님께 물어보고 싶었다. 완벽하지 않은 부모의 오류를 덮지도 않고, 부모를 떠나지도 않고 사는 히스테리증은 그럼 어떻게 되냐고. 워워~ 선생님은 지젝 연구자이지, 임상 상담가가 아니라고...- -;;

수욜에 프리랜서로 함께 일하는 북디자이너 O실장님을 만나서... 일 얘기 후에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쨌든 목표는 10년차 편집자 되기. 하지만 독하게는 안 살기가 목표라니깐...... 일에 지면 안 된단다. 이만큼만 하면 되지...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때부터 일이 재미 없어진다는 충고(그 냥반도 이 바닥에서 20년. 보통 선수는 아닌 것이다)

후닥닥 불어 수업 듣고, 나와 퇴근 전에 마무리 안 되었던 일이 어찌 되었나 전화를 해본다. 일단 다시 회사에 들어가진 않아도 되는 상황. 우물쭈물하다 찜찜할 것 같아 시청에 갔다. 그날은 6.10이었던 것이다. 낮에 신간 편집 후기에... 거부의 말을 되찾자. 기막히다고 입도 다물고 살진 말자... 이렇게 썼는데 곧장 귀가하긴 그랬다. 6.10을 의식해서 챙긴 적도 없건만. 그냥 5.29 영결식 이후에 광장에서 모일 수 있을까 없을까가 나한텐 더 중요했다. 전날 밤에 시청광장을 지키니 어쩌니...해서... 이미 광장 뺏기고 상황 종료된 거 아닌가 했더니 9시쯤 도착한 광장은 초만원. H양은 낮부터 사전행사 다니다가 막 귀가하는 길. M선배는 학교 행사 있어서 못 왔다고 상황 어떠냐고 전화만. 나중에야 통화된 M군은 다른 일로 다망하시어 오지도 못하고, 문자에 답도 안 하고. 10시 반에 문화제 막 끝났을 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평일이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까. 사람도 많고, 이거 뭐 너무 분위기 널널한 거 아냐? 한 것은 완전히 나의 착각. 시청에서 광화문 걸어가는 사이에, 2중 3중으로 쫘악 깔린 전경들.... 뭐야 완전히 차벽 안에서 집회한 꼴이잖아? 평화롭게 끝나지는 않겠구나...라는 느낌이 들면서 꼭 먼저 도망가는 기분이 들더군.

기분이 나쁜 것도 기운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다만 할 말이 없는 상태. 혹은 욕망이 없는 상태. 결핍은 많은데...... 이것저것 모두 우물쭈물하는 상태랄까. 금욜에 엠티 가서도 평소처럼 나서서 요리하고, 재미있게 놀면서도 피곤하고. 술은 맛이 없고. 그래서 일찍 잤다. 그 와중에 집이랑 잠깐 통화. 몇 달 잠잠하시더니, 아버지는 선을 보라 하셨다. 작년 여름부터 선은 안 보고 있는지라... 그냥 안 본다고 했다. 올해로 두번째 거절이던가, 세번째 거절이던가... 아버지도 더는 채근 안 하신다. 뭐지?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보고 싶은 건 아니기도 하고. 혼자 헛웃음. 갈 때도 올 때도, 운전하는 동료들 심심하게 할 말도 없고, 잠은 오는데 잠이 들지는 않고.... 내가 이렇게 말이 없을 수도 있구나 싶어 스스로 낯설었다.

엠티 끝무렵에 양평장이 장날이길래... 장터 구경을 했는데,  갓 농장에서 따온 느타리버섯이랑 빨갛게 무친 무말랭이 한 근을 샀다. 느타리버섯은 양파랑 볶아 주고, 주중에 만든 멸치볶음이랑 김치까지 곁들이니 주말 밥상이 깔끔하니 맛나다. 제철인 오디 한 그릇 사다 잼도 한 병 만들었다. 빨래 세 판 하고, 이탈리아 여행 간 Y양 대신 화분에 물 주고, 그 화분에 자란 로메인이랑 토마토 따먹고, 낮잠자고, 라면 끓여 먹고, TV 보고, 겨우 겨우 집청소를 했다. 10시 반에 H군이 저녁을 못 먹었다고, 집에 밥 없냐고 문자가 왔는데, 딴 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전화를 걸었더니... 생각해 보니 너무 늦어서 그냥 삼각김밥 사서 집에 들어가겠단다. 담주에 마감이라... 이렇게 늘어질 때가 아닌데..... 갑갑하니까 안온한가 싶기도 하고, 뭔가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게 아닐까?

다들 느끼겠지만, 참 안온하기가 힘든 때여서... 자꾸 주저 앉고 싶은가 보다. 새벽에 소나기가 온단다. 빨래 걷으러 마당에 나가니 흐린 저녁 공기가 축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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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00:21 2009/06/15 00:21

봄과 여름 사이의 한때

2009/06/05 00:02 생활감상문

레슬리 파이스트, 머셔붐, 2004

 

지난 주 중반부터 두통 때문에 잠을 못 자다가 일요일 밤엔 두세 시간이나 눈을 붙였나? 월요일에 헤롱헤롱하다가... 월요일 밤엔 그나마 깊은 잠을 잤다. 봄과 여름 사이 이불 두께를 조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다음주에 드디어 데란다 책(들뢰즈의 자연과학적 재구성)이 끝나는데, 지난 주에 생각 많아 잠 못 잔 만큼 컨디션 관리에도 고민이 많았는데, 어제오늘... 저녁 시간에 좀 여유를 가질 일들(그래 봐야 30분?)이 있어서 그런지 잠을 잘 잤다. 시간적으로는 하루 다섯 시간 자기는 매한가진데, 한결 몸도, 마음도 가볍다. 심지어 오늘은 9시부터 졸리더군(버뜨 너무 일찍 자면 새벽에 깨기 때문에 3시간을 버텼더니 그만 두통이...... 그래도 자야지). 

어제 디자인팀 L팀장님이 아프셔서 이틀째 결근을 하시어... 점심시간에 S과장님과 함께 죽 사들고 문병을 갔다. 어디가 아프신지, 어떻게 아프신지, 식사는 했는지, 아픈 원인이 뭔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단기적으론 마감 후유증, 중기적으론 이직 6개월차 적응으로 인한 체력/정신력 저하증이라는 야매 진단을 내려 드렸다. L팀장님 최근 변화에 대한 내적/외적 요구에... 변하고도 싶고, 지금까지 잘살았는데 변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고민이 많으시다(이직을 했든 안 했든 누군 안 그러겠냐만). 머리가 변하라는 것도 무조건 일을 잘하라는 것도, 부족한 능력을 야근으로 때우라는 것도 아니다. 작년 한 해 메신저 대화명을 "신체의 능력"이라 해두었다(요새는 다른 거다). 변화를 담지할 신체를 갖고 버티는 게 장땡이란 말이다(전부 나 자신에게 하는 얘기다)고, 나는 백지연처럼 나를 경영하는 건 못하지만, 나의 몸은 경영한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만큼 내가 부실해서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말이다. 태어나기를 약골로 태어나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남달리 밝은 잠귀, 입에 안 맞는 걸 먹느니 굶겠다는 주의지만 배고픔은 못 참는 자기 모순, 제 성질을 못 이기면 속병이 나는 성격까지 어쩜 다 그리 집안 내력 그대로인지... 뭐 여하간, 그래서 이 인구 밀도 높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남달리 노동 강도 높은 직업을 선택한 사람은 나니까, 방법은 하나다.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거다. 물론 나도 놀고먹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만(꼭 그 시절이 다 지나서가 아니라, 시절은 언제든 올 수도 있다. 공간과 배치만 적절하다면. 노는 것도 체력이긴 하지만) 돈을 벌려고만 하는 일이 아닐진데, 하는 일을 잘하는 게 내 삶 자체가 충실한 거 아닌가? 여기보다 어딘가에...에 대한 생각은 가끔씩만 하기로 했으니까.

여하간 어제 죽 안 좋아하신다는 데 억지로 식사하시게 해서 한의원 모셔다 드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교정을 보는데, <차이와 반복>을 인용해 지식과 배움의 차이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눈이 들어온다. "배움이란 누군가가 문제의 객관성에 직면할 때 수행되는 주관적인 행위에 대한 적절한 명칭이다. (......) 이에 반해 지식은 개념들의 일반성 혹은 해들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의 조용한 소유만을 가리킨다." 이직과 적응과 자기-됨 등에 대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L팀장님께 잘난 척 늘어놓은 장광설은 모두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어제는 오랫만에 파이스트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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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5 00:02 2009/06/05 00:02

▦▦ 잘 가요, 노무현

2009/06/01 00:13 생활감상문

2009년 5월 29일, 오후 1시 10분

노무현의 영결식 뒤에 이어진 노제 행렬 가운데에서.

 

노무현의 장례 행사에 다녀왔다. 사실 누군가 이번 주의 노무현 현상을 파시즘 운운할 때 성질이 좀 났다.  애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마음껏 애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남은 한이 없게 해야 차분해진 다음에 죽은 사람 때문에 수면에 가라앉을 이슈도 챙길 수 있는데.... 너무들 조급해하고, 화를 내고, 심지어 "저 세상에 가서는 미안해하라"고? 이래서 좌와 우는 통한단 소리가 나오는 거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일 뿐 아니라 산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이런 우아한 말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그에 대한 평가든, 이후에 대한 구상이든 말을 아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 봐야 몇 달도 아니고 불과 일주일인데. 상황의 전개를 조심스레 지켜보면서 근심할 수도 있었건만. [그런 가운데 장례란 엄숙히 치뤄져야 한다는 구식 생각을 고집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생각이란 걸 할 만한 시간이라는 것. 예(禮)란 마음에 격을 갖추어 표현하는 것이니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나와 상대와 우리의 관계를 보호하는 껍질 같은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이 일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동안 이래저래 떠드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 대해서보다, 그 사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나 내 감정을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통이란 미묘한 것이라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예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성질이 난 것조차 내 마음일 뿐이므로, 아무에게도 별 소리 안 하고 일주일을 보냈다. 다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노무현을 좋아하고, 미안해할 일이 있었던가 놀라울 뿐이었다. 일요일에 덕수궁 분향소에 다녀온 이후 나도 일하기에 바빴고, 몸도 좀 아팠다(아마 그것이 내 나름의 충격표현법이었을 수도). 유년 시절 놀이친구와 다름 없이 허물없던 막내 삼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도, 부모님과 함께 우리 자매를 키워 주신 큰이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치매와 노환 끝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우는 법을 몰랐던 내가 어떤 정치가가 비극적으로 죽었다고 울 리도 없었다. 기사들을 찾아 읽고, 블로그들을 돌아다니고, 필자들(주로 철학자들)과 통화할 때 "시국이 흉흉하여~" 정도의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상당히 쿨하고 이성적인 양반들인데도 큰 충격을 감추지 못했고, 중대한 상황국면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위로하면서 원고 일정을 추스리고, 미팅 일정을 잡고 할 일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장례에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에 광장이 다시 열릴 수 있을까? 나도 물론 근심했고 궁금했다. 광장과 함께 우리가 말을 열 수 있을까? 아니, 말과 함께 광장을 열 수 있을까? 극단적인 거부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숨죽여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어떤 분위기일까? 영결식을 서울에서 하기로 했다고 발표가 난 이후로 신경이 조금씩 더 쓰였다. 난 노무현을 사랑한 적도 없고, 미안할 것도 없다. 그를 신뢰한 적도 없고, 실망한 적은 여러 번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욕한 적도 별로 없다. 그래도 장례식은 가고 싶었다. 이런 게 촛불 중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뭐랄까, 역사적 순간.... 그렇게 부르기는 닭살스러워도(내가 무슨 자식이 있어 훗날의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역사 의식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적어도 내 삶에서 유일무이한 순간이고, 그냥 흘려보내는 건 꽤 오랫동안 찜찜한 기분이 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기엔, 자기 감정이 뭔지 너무들 오래 생각하고, 분향소 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상했다. 가고 싶은지 아닌지, 그건 그 순간의 어떤 맥락에 의해 평가하고, 논리적으로 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역사 위에서 갈지, 말지 몸으로 즉각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일이 너무 많았다(그 더위에 아스팔트에서 몇 시간 보낸 댓가로 파김치가 된 여파가 이틀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서... 직장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데미지가 꽤 크다). 2월에 엄마 수술 때문에 연차를 써서, 딱히 뽑아 쓸 연차도 없고 해서... 휴가를 내려면 낼 수도 있었지만, 그 시간에 담담하게 일을 하고, 주말에 어찌 되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러다 갑자기 가게 된 건, 목요일 밤에 걸려온 오클라샘의 전화. 선생님이 먼저 나에게 전화를 하시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밤중의 전화는 정말 뜻밖이었다. "너 혹시 내일 영결식 갈 거니? 나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없어서... 너라면 갈 거 같아서 전화를 해봤다." "아아~ 선생님, 저도 가고 싶습니다만, 일이 많아서..." 선생님은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새벽부터라도 가시겠다고 했다. "M선배가 갈지도 모르는데.... 음... 제가 물어봐 드릴까요?" "그, 그럴래?" 선생님은 내년이 환갑이시다. M선배는 이제 40대 중반. 나름 정이 있는 사제지간이긴 하지만 이런 데를 같이 간 적은 없는 상당히 뻘쭘할 조합. M선배 늘 그렇듯 한 번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 혹시나 전화해 본 H언니는 닷새 동안 너무 울어서, 장례식 가면 더 울까 봐 못 가겠단다. 아아... 어쩐다. 사람은 많을 테고, 날은 덥고, 선생님 혼자 가시게 하긴 걱정되고, 난 또 이런 식으로 '갈 것 같은 사람'으로 생각되었다는 데서 아, 이것도 내가 살아온 데 대한 평가인가 하는 생각에... 결국 주간님께 전화를 걸어 출근했다 점심에 다녀오는 것으로 외출 허락을 받았다.

당일 아침 1시간 일찍 출근해서 오후에 예전된 회의 문건 만들고, 급하게 처리할 일 놓친 거 없나 확인하고, 진쿤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해놓을 일 체크하고, 10시 갓 넘어 서둘러 사무실에서 나와 약속장소인 광화문으로 향했다. 시청역에서 약속장소인 광화문사거리까지 걸어가는 좁은 길엔 경찰과 사람들로 넘쳐 10분 거리를 걸어가는 데 30분이 걸렸다.

 

막 영결식이 시작되던 참이었다. 선생님과 아침 무렵에 마음을 바꿔 나온 H언니와 나무그늘 밑 사람들 사이에 털퍼덕 주저 앉아 동아일보 전광판으로 영결식 장면을 지켜봤다.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들, 유모차 끌고 온 새댁, 구성은 분명 다양했다. 문제의 이명박 움찔 장면에선 거리에서도 사람들의 야유가 폭발적이어서, 나조차도 움찔했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여기까지 나올 사람들 정도면 벌써 많이도 울었을 텐데...... 한명숙의 조사 때 또 한참을 울더라. (사람들 우는 데 혼자 안 우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딱히 뻘줌할 것도 없었다.)

 

선생님이 시청이 아니라 광화문에 자리를 잡으신 건, 운구 행렬을 바로 뒤따르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영결식이 끝나고 행렬이 광화문 사거리까지 천천히 나오는 데 15분 이상 걸렸다. 미리 노란 종이비행기를 접어 놓은 사람들은 운구차가 지나는 순간 정확하게 던지려고 조바심을 냈다. 드디어 나타난 망자의 사진과 영구차.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들 소리를 쳤다. 이런 경우 이 사람들에게 망자는 죽은 자요, 아직 죽지 않은 자이다. 죽었다는 팩트와 이 사람과 자신이 맺고 있던 관계라는 팩트가 병렬해서 작동한다.

 

노제 행렬 속에서 뒤늦게 M선배가 합류하고, 스승과 제자 네 사람이 정말 살면서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조우한 느낌. 만나자 마자 M선배는 화를 낸다. 전에는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원한을 샀으니 이 죄를 어떻게 할 거냐고. 이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악마라고 불러도 된다고 이젠. 노제가 시작되고, 노란 풍선이 날리고, 울고,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몇 번씩 반복되고, 워낙 기질이 뜨거운 H언니는 그렇다 치고, 냉정하기로 소문난 오클라샘과 M선배마저 운다. 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들 모여, 이렇게나 슬퍼할 만 한 이유.... 정말 노무현이 가지고 있었나? 뒤늦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한편으론 난 "국민의 이름으로 노무현 대통령님을 보내드리려" 오지 않았어요 하는 반항심과 함께. 월드컵 기간에 굳이 파란색 티셔츠를 찾아 입었던 것처럼, 나는 그냥 나라는 개인으로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장례식에 오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장례식에서 무슨 구호 외치듯이, 모두가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쳐야 할까? 그보단 <상록수>나 <아침 이슬>을 따라 부르는 게 나았다. 노래 속의 인물들은 홀로 제 갈 길 가고 있으니까. 노무현은 노무현의 길을 간 것이고, 나 또한 내 갈 길을 가는 와중에 그의 장례식이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을 만났을 뿐이다. 그곳에 가는 것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나의 운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애도는 좋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평화적으로, 제대로 말도 못할 거면, 뭐하러 서울까지 와서 장례를 치르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통령으로 죽지도, 민간인으로 죽지도 못한 그 어정쩡한 상태는 장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뭐 하나 내 입맛에 맞는 게 없으니 나 역시 [그토록 피하려고 애썼지만] 입만 나불거리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기를 잘했다. 노무현 열풍이라는 파시즘적 현상에 대한 우려...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TV나 인터넷으로 느껴지는 광대한 스펙터클이 파시즘을 만들 것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나는 나 자신이 스펙터클의 일부가 되겠다. 스펙터클의 일부인 채 그 조성(composition)을 바꾸겠다. 그것이 내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국민이라는 호명에 응하지 않은 채, 그 엄청난 인파의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은 채, 나와 죽은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고, 그 현상을 눈으로 보고, 겪었다. 다녀오면서 확실히 생각이 더 많이 정리되었다.

 

23일 밤, 노무현이 죽었다고, 다시 한 번 촛불이 일어난다면, 그건 정말 웃기지 않냐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라 했을 때, M언니는 대답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현실이고, 정치의식이라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위에서 보자고. 그렇다. 어떤 당위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현실인지 알기 위해서도 일주일이란 시간은 필요했다.

 

블랑쇼가 말한 대로 정치가 통치가 아니라 소통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죽음을 가는 존재, 유일무이한 존재, 하나의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노무현의 죽음에,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는 인식에, 나는 그 사람이 애도받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가슴속에 노무현이 영원히 살아 있을 필요는 없다. 그가 저승에 가서 누군가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자기 몫을 했고, 더 내놓을 패가 없을 때 승부를 접었다. 결국 각자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운동을 하고, 정치를 한다. 나 역시 나의 현실 인식 위에서 앞으로의 내 정치를 배치해야 하는 것이다.

 

뭐 두서없지만, 그냥 쿨~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걸까? "잘 가요,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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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00:13 2009/06/01 00:13

편집자가 번역자에게 1: 원서검토서 작성법

2009/05/27 12:07 편집자–되기

모처럼 문서 폴더 정리하다가 발견해서 올려놓는다. 작년 봄에 번역가 K선생님 요청으로, 난생 처음 출판 관련 강의를 할 때 만든 강의안. 수강생은 막 번역자 과정을 마친 초보 번역자들... 내용은 "원서검토서 작성법". 불과 6년차이던 내가 이만 한 걸 쓸 능력은 안 되서... 『편집자가 작가에게』(주디 맨델 지음,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1)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요약해서, 거기에 작년에 정리한, '편집자가 동료 편집자를 위해' 작성하는 "원고검토서" 양식과 통합해서 준비한 것이다.

지금 보니까 철저하게 편집자(출판사) 입장에서 번역자에게 이렇게 하면 [자신의 번역력을] 잘 팔 수 있다고 강요하는, 꽤 자본주의 냄새가 많이 담긴 문건이다 싶다. 아무래도 미국 출판계에서 나온 책을 참조하다 보니... 일단 대상이 학술서 번역자들이 아니라 특히 실용서/교양서/문학 등의 영역에 막 발을 들이밀은, 직업 번역가들을 위한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출판을 산업(꼭 돈을 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책에 대한 낭만적인 접근법 위에서 편집자(출판사)와 대화할 때, 본인이 가진 전문성이나 장점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핵심은 놓치고, 분위기만 좋은 대화만 이어지고, 결과물은 없다. 이것은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좀더 프로페셔널한 분위기를 풍기는 법을 알려 주는 일종의 처세술을 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내가 편집자이다 보니, 번역가들보다는 내 동업자들에게 편리한 대로 요구하는, 나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은 접근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편집자를 위한’ 원서검토서 작성법

 

1. 왜 편집자를 위한 원서 검토서인가?
편집자를 당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서검토서는 담당 편집자와 번역자가 미리 하는 프로포절에 해당한다. 편집자는 번역자와 업무상 직접 접촉하는 사람이며, 출판 과정에서는 역자의 안내자이며, 번역자가 최선의 원고를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 제대로 된 검토서를 통해 제대로 된 번역을 제공할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 주어야 한다. 

1) 출판사에서 직접 의뢰하는 경우 이때는 출판사에서 해당 번역자에게 출간이 결정되면 번역도 의뢰하겠다는 전제가 어느 정도 깔려 있는 경우. 이때는 검토서뿐 아니라 완제품의 시안이라는 느낌으로 번역 원고를 보여줘야 한다. 외부 번역자에게 검토서를 의뢰하는 경우 출판사에서는 시간 절약을 희망한다. 그 부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2) 번역자가 출판사에 직접 출간 제안을 하는 경우 이때는 번역자가 기획까지 하는 경우로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된다. 이 책이 출간되어야 할 이유나 타깃 독자 등에 대해 출판사가 사전에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해당 언어권 출판 정보와 최신 외서 시장에 대한 이해를 갖출 필요가 있다.

 

2. 이상적인 검토서의 내용과 형식
편집자는 늘 텍스트에 치어 사는 사람이다. 샘플 번역을 제외한 검토서는 되도록 A4 2장 이내로 제한하는 편이 좋다. 간결하게 작성된 편지, 요약, 목차, 본문 가운데 한 챕터를 제출하면 아주 빠른 응답을 받을 수 있다. 편집자의 업무를 훨씬 쉽게 만들어 준다.
원서검토서는 어느 정도 동일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이 책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도, 상상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검토서를 작성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편집자들이 원고를 검토할 때 상상할 수 있도록 의심할 여지없는 충분한 자료를 갖추어야 한다.

— 도서 제목, 원서 표지, 출판사, 판형, 정가, 페이지 수, 일러스트 유무와 컷수 : 책의 내용과 출판 의의뿐 아니라 이 도서의 장정에 대한 세부 사항까지 알려주는 편이 좋다. 이 책의 판형과 장정 방식뿐 아니라, 페이지 수(서양어는 1.5배, 일본어는 1배, 중국어는 약 2배), 사진 수, 원색 및 흑백 사진의 수효까지 알게 해주면 출간 여부에 대해 편집자가 좀더 정확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편집자는 이 책을 출판하는 데 드는 비용을 산출하는 일도 한다. 출판사와 저/역자 사이의 비즈니스는 그 책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이 책이 갖게 될 상업성에 달려 있다.
— 개념에 대한 요약: 새롭고 참신한 요소가 발견되어야 한다. 독자에게 친숙하지 않은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최초의 독자로서 편집자가 거기에 열광하고 몰입해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위트가 있고 기발하며 재미있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 | 지극히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 | 독특한 것, 과거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것, 그렇지 않다면 과거의 아이디어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의 제시.
— 하이 콘셉트: 도서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확신을 주어야 한다.
— 포지셔닝과 유사 도서 : 인문/철학 등의 모호한 분야가 아니라 유사 도서를 조사해서 정확한 세부 분야를 제시하라.
— 목차의 흥미로운 번역: 주제를 확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 체제에 대한 분석도 유용하다. 목차뿐 아니라 각 장별로 구성을 설명한다.
— 장점과 단점 :장점만 나열하지 마라. 순수한 장점은 뒤집어 생각하면 취약점이 될 수도 있다. 단점을 정확하게 적고, 할 수 있다면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 샘플 번역을 해야 한다면, 제일 재미있는 부분을 골라 한 챕터를 전부 한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내용이 왜 중요한지. 그 분야에 다른 책들이 나와 있는지, 왜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다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장으로 고르라. 발췌번역으로는 구성의 맛을 볼 수 없다.
— 번역 원고를 언제 입수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정보, 즉 스케줄.

 

3. 검토서의 작성
편집자들은 자주 문장 호응이 일치하지 않거나 오자가 있는 제안서를 받는다. 그러한 관심의 결핍은 번역자의 기본적인 문장 감각을 신뢰하기 힘들게 한다. 제안서는 지적으로 우아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검토서는 그 책의 이력서다. 조심스럽게 작성하라. 요점을 설명하고, 장황하게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 책과 저자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모은다. 되도록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 해당 출판사 홈페이지 | 아마존 서평과 등수 | 퍼블리셔스 위클리 | 저자 홈페이지 |구글 검색으로 학술지 서평이나 저자 인터뷰 등 확인 | 해당 지역 대중매체 등, 추천사
— 검토서를 보내는 출판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항상 유익하다. 어떤 장르와 판형의 책을 출판하며, 대표도서(명성, 판매 부수)가 무엇인지 살펴보라. 단순한 감성에 의지한 상상보다 더욱 현실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출판사의 지향과 근접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출판사의 출판 내용과 그 출판사에 어떤 책이 가장 적합한 것인지에 더욱 초점을 맞춘 제안서일수록 출간 가능성을 높인다.
— 자기 자신의 언어로, 쉬운 용어를 사용하되, 적절한 품위를 갖추어서 작성해야 한다. 편집자들은 대체로 우리말에 대한 강박이 있다. 되도록 한국어로 쓰라.
— 감상보다는 팩트 중심으로 서술하되, 설득을 위한 글임을 가정해서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

 

4. 출간 여부 결정
출판사의 편집부는 보통 매주 편집회의를 한다. 편집자가 그 책을 원하지 않는다면, 즉시 되돌려 보낸다. 그러나 관심을 끄는 것이라면 아주 더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실제로는 작업 방식에 따라 어디서든지 신속하게 처리되기도 하고 아무 오래 걸려서 처리되기도 한다. 적어도 2개월.

— 그 책을 좋아하고 그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고 좋은 도서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편집자가 있는가?
— 그 책에 시장성이 있는가? 책이 나오기를 원하는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는가?
— 그 책을 독자들이 기분 좋게 지불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가격으로 출판할 수 있는가?
— 난해한 주제이거나 국제적인 독자층을 확보할 수 없다면 출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책이 영어판으론 판매 부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그것이 매력이 되어 출판할 수도 있다.
— 시장성이 있는지, 제작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지, 정가 책정 문제(그림이 많은 책의 경우 도판 저작권에 대한 지불 문제나 4도 분해 문제 등), 기타의 출판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리서치를 더 해야 한다면, 기간은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5. 함께 일하는 번역가가 되라.
아이디어와 전문성은 저/역자의 것이며, 편집자는 그 판단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복잡한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모두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 한 분야의 전문성을 획득하라.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라.
— 한 번에 여러 곳에 제안서를 보내지 말라. 책은 한 사람의 독자를 상정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기획안은 한 출판사를 상정하라. 그 출판사의 성격에 맞춘 출간제안서를 보내라.
— 도서란 잘 만들어지기 위해 제작하는 데 많은 기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편집자는 한꺼번에 여러 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 결국 편집자는 출판 계획이 잡혀 있고, 해당 도서에 대한 작업을 착수할 때에야 개별 도서에 시간과 노력을 집중 투여하게 된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 편집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작가는 권위 있는 본문을 창작하고 생동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전문가인 저널리스트가 완벽한 작가다. 저자뿐 아니라 역자도 해당 주제에 대해 박식할 뿐 아니라 열정적이고, 열광적이어야 한다. 이 주제에 완전히 전념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 본인의 아이디어만 고집하며, 본문 내용이나 디자인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제안을 경청하지 않으려는 저/역자는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 협력하면서 일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 번역 이외에 무엇을 더 제공할 수 있을지 여부를 고민하라. 서평, 저자와의 협력 등 모든 것이 유용하다.
— 전문가적인 태도는 책의 집필, 편집, 제작, 홍보, 판매의 과정에 대한 지식에서 나온다. 저/역자는 출판업계의 상황에서 그 책의 출판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 통상적인 계약 방식에 관해(그것이 불리하더라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 대신 계약에 관해 까다롭게 굴지는 말라. 편집자 혹은 출판사를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추정하고 의심하는 경우, 그 저/역자 역시 그렇게 보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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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12:07 2009/05/27 12:07

▦▦ 그는 죽었고, 나는 살겠다고 내 손으로 피를...

2009/05/24 00:08 생활감상문

숙취에 시달리면서 자다깨다를 반복하던 와중에, 11시 반쯤 H군으로부터 전화로 소식을 들었다. 그 사람이 죽었다고. 놀란 마음에 술병으로 난 두통이 심해져 종일 토했다. 오후엔 속 가라앉힌다고 사 먹은 칡즙까지 토한 다음에... 제 손으로 바늘을 꺼내 열 손가락을 모두 땄다. 붉은 피인지 검은 피인지... 술병 날 때마다 이 짓하면서... 술 끊어야지 생각했지만... 오늘은 살겠다고 피를 보는데, 죽은 사람에 대한 뉴스를 반복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더 웃겼다.

 

충격의 강도와 색깔은 장국영이나 최진실 죽었을 때랑 좀 비슷한 듯도 싶다. 얼마 전 장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땐 (다녔던 학교, 같은 단대 건물이라 복도에서 뵌 적이 있기는 할 텐데, 딱히 기억은 없다) 안타까움과 아까움을 느끼면서도, (30년 세월을 함께 보낸 동료교수를 잃으신 오클라 샘의 심경만 걱정했을 뿐) 문상을 가야 한다든지 슬프다든지  이런 건 없었다.

 

슬프다기보다는 "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왜 죽었어? 그러지 말지"라는 느낌이지만, 심란하고 착잡한 건 나도 남들과 같다. 머리는 계속 아프고, 생각이란 건 계속 할 수밖에 없지만... 일단 사람이 죽었을 땐 사람들이 말을 좀 아꼈으면 좋겠다. 서거가 아니라 자살이라고 적는 게 기자라고 생각하는 미친 노인네한테 열받기도 싫고, 누구 죽음이 누구 죽음보다 더 대단하다고... 이 죽음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도 짜증이 나고, 이런 일을 겪고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혹은 한다면, 결국 이런 일을 통해서나 무언가 반전을 꾀하게 되려나... 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나의 그 주춤거림도 싫다.

 

사태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고... 그걸 오늘은 생각하질 못하겠다. 아니면 입 밖에, 혹은 손끝으로 내놓는 건 안 하겠다겠지만. 아침에 정신 차리면 덕수궁에 분향을 하러 가야겠다. 사람이 죽었는데... 거기 또 경찰들을 풀어놓은 인간들 때문에 열도 받고, 겁도 나지만... 어쨌든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근거와 상관없이, 그래야 할 것 같다. 생각이든, 말이든, 행동이든 그 다음에 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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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00:08 2009/05/24 00:08

올해의 연습곡

2009/05/22 01:17 베껴쓰기

 

 

JE TE VEUX 너를 원해.

 

J'ai compris ta détresse 나는 알아. 세상에 혼자인 듯한 네 괴로움을.
Cher amoureux 내 고운 사랑아.
Et je cède à tes vœux 그리고 나는 너의 바람에 순종하지

Fais de moi ta maîtresse 너의 연인이 되도록 해주어.
Loin de nous la sagesse 지혜로부터 멀리 달아나
Plus de tristesse 더 많은 슬픔이 오더라도
Et j'aspire à l'instant précieux 나는 지고의 순간을 희망해.  

Où nous serons heureux 우리가 행복할 그 때를...
Je te veux 나는 너를 원해.

 

Je n'ai pas de regrets 후회하지 않아 
Et je n'ai qu'une envie 다만 바랄 뿐이지.
Près de toi là tout près 네 곁에서, 바로 네 곁에서.
Vivre toute ma vie 내 온 생을 살아가는 것.
Que mon corps soit le tien 네 몸은 내 것이 되고,
Que ta lèvre soit la mienne 내 입술은 네 것이 되고,
Que ton coeur soit le mien 네 심장은 내 것이 되고,
Et que toute ma chair soit tienne 그리고 내 모든 육신은 네 것이 되는 것...

 

J'ai compris ta détresse 나는 알아. 세상에 혼자인 듯한 네 괴로움을.
Cher amoureux 내 고운 사랑아.
Et je cède à tes vœux 그리고 나는 너의 바람에 순종하지

Fais de moi ta maîtresse 너의 연인이 되도록 해주어.
Loin de nous la sagesse 지혜로부터 멀리 달아나
Plus de tristesse 더 이상의 슬픔도 없이
Et j'aspire à l'instant précieux 나는 지고의 순간을 희망해.  

Où nous serons heureux 우리가 행복할 그 때를...
Je te veux 나는 너를 원해.

 

Oui je vois dans tes yeux 그래, 난 네 눈 속에서 봐.
La divine promesse 신성한 약속을.
Que ton coeur amoureux 사랑에 빠진 네 심장이
Vient chercher ma caresse 다정한 내 손길을 찾아오는.  
Enlacés pour toujours 끊임없이 포옹하고,
Brûlant des mêmes flammes 같은 불꽃을 태우며,
Dans un rêve d'amour 똑같은 사랑의 꿈속에서
Nous échangerons nos deux âmes 우리는 두 영혼을 서로 나누지

 

J'ai compris ta détresse 나는 알아. 세상에 혼자인 듯한 네 괴로움을.
Cher amoureux 내 고운 사랑아.
Et je cède à tes vœux 그리고 나는 너의 바람에 순종하지

Fais de moi ta maîtresse 너의 연인이 되도록 해주어.
Loin de nous la sagesse 지혜로부터 멀리 달아나
Plus de tristesse 더 큰 슬픔이 오겠지.
J'aspire à l'instant précieux 나는 지고의 순간을 희망해.  

Où nous serons heureux 우리가 행복할 그 때를...
Je te veux 나는 너를 원해.

 

타로의 사티 연주 앨범을 입수한 다음, 천천히 한 번씩 들어보면서 단박에 마음에 든 곡은 그 유명한 (너를 원해). 전에도 이런저런 버전(음~ 조수미?)으로 몇 번 들어봤는데... 화사하거나 정확한 그 노래들은 그냥 유명한 노래다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중년의 아줌마가 부른 이 버전은... 뭐랄까? 천천히 사그러드는, 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그런 사랑의 느낌이다. 그런 사랑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에 억지로 물을 붓고 연기 속에서 눈물을 한참이나 쏟고, 거울 속에서 부은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굳세게 살아가지만, 여전히 꿈속에서는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버리는... 그래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순간 이를 악물고, 한기를 느끼며, 그 순간 [그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에야 겨우 안심해서 잠들 수 있는. 그걸 버티고 버티다 서로들 나이 들어 만나서,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런 사랑일 것만 같다. 그러니까 그건 "너를 원해"가 아니라 "나는 너를 원해"다. 그렇게 서늘하고도, 아리고도, 순한, 자기 긍정.

마음에 들어서 4월 이후 꽤 자주 들었고... 불어 공부도 새로 시작했겠다 해서... 불어 공부하면 샹송 하나쯤은 다들 부르는 줄 아는데(예지원만 "빠로레"를 부르는 건 아니라서, 가끔 Y양에게도 시키는 사람이 있다) 나도 뭐 한 곡쯤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올해의 연습곡으로 삼아서(연습해서 어디서 어케 부르려고?ㅋㅋ) 연마하겠다고 떠벌이기까지 했는데... 사실 노래 뜻도 제대로 모르다가... 오늘 갑자기 생각 나서, 남들이 번역해 놓은 것도 보고, 앨범 재킷에 들어 있는 불어, 영어 가사도 섞어서 보고, 나한테 들리는 노래 느낌도 반영하고 해서(아아, 내일 푸코 강의 마지막날이라 사실 오늘 일찍 자야 하는데...) 적어본다. 이렇게 해두면, 정말 연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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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2 01:17 2009/05/22 01:17

농땡이 모드로 쓰는 아침 일기

2009/05/13 09:24 생활감상문

간만의 아침운동으로 기분이 좋아,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옷 입고, 밥 먹고, 양치질하고, 가방 싸고, 화장하고, 선글라스 쓰고, 가방 멘 다음... 또 노트북 앞에 주저않아 봄노래 따라 부르며 쓰는 아침 일기. 이미 9시인데... 후딱 쓰고 휘리릭 회사로 날아가야지 .

 

봄이 되니까 해가 일찍 뜨고, 그래서 계속 아침에 6시 반이면 귀신같이 눈이 떠져서 아주 미칠 지경이었는데... 왜냐하면 살짝 불면증이 생겨서 암만 일찍 누워도 새벽 1시 전에 잠드는 일도 별로 없고, 수면 품질도 별로라서 3시쯤 깼다가 다시 잠드는 일도 자주 있어서... 그러면 늦잠이나마 자야(8시에 일어나도 출근에는 전혀 지장이 없단 말이다) 회사 가서 강도 높게 일할 수 있는데... 아침에 늘 찌부둥하니... 뭐 그랬단 말이다.

 

어제도 낮부터 골골해서 저녁때 보도자료 쓰는 진쿤한테 1차 코멘트만 해주고, 마무리하라고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초저녁에 또 심장이 오그라드는 제작사고-나의 경험이 좀더 풍부했다면 막을 수도 있었을지도 몰랐을-가 일어나서 몸에 기운이 쭉 빠진 다음) 집에 와선... 또 그냥 바로 가만히 누워 있으면 좋겠다만 그러지는 못하고, 주말에 교정 본다고 제낀 방청소하고, 빨래 개고, 그 와중에 아프니까 비타민 섭취한다고 오렌지 두 개씩이나 먹어주고, 쉽답시고 <내조의 여왕> 잠깐 봐주고... 그러고 자야지 자야지 하다가 왜 잠이 안 오나 생각했더니.... 하루 종일 뭘 빼내기만 했지, 넣은 건 없더라(먹을 거 얘기가 아니다). 아... 맞다. 마감이 아니니까 책을 읽을 수 있구나.... 읽던 단편소설 책은... 음~ 오늘은 소설책 필이 아니야...

 

뭐 그러면서 이 책 저 책 뭐 볼지 마음 정하는 데만 또 한참 걸리고... 서문이 마음에 들어 읽어야지 하고 4월이 지나가 버린 <폭력의 예감> 1장 읽다가(난이도도 난이도지만, 주제가 환기하는 느낌이... 침대에서 누워 볼 책은 아니었다) 1시 다 되어서 불 끄고 누었는데... 잠이 정말 한 개도 안 오는 건 아니고... 피곤해서 가사 상태인데 사념들은 머릿속을 막 헤집고 다니는.... 책의 중심 주제인 오키나와라는 지명이 자꾸 울리고, 처형 장면이 묘사되어서 그런지... <색/계> 마지막 장면에 인물들 즉결처형되는 장면도 생각나고... 내가 자는지 깨어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내가 잠이 들었다가 평소처럼 3시~3시 반쯤 깬 줄 알았다. 화장실 다녀와서 다시 잠을 청할까 하고 일어나 보니... 겨우 2시... 한 시간 동안 뻘짓했구먼.

 

음악이나 들으며 긴장이 풀리면 잠이 좀 올까 하고... 모터 소리 없는 라디오를 틀었더니... 아뿔사... 하필이면 오늘이 전파 정리하는 날이라 클래식 채널 안 나온다. 다른 채널은 말 많아서 수면에는 방해되는데... T T

 

뭐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방황하다가 겨우 3시쯤 잠들었는데.. 오늘도 6시 반에 어김없이 눈이 뜬 것이다. 엄마가 2주 전에... 무슨 땀복인지.. 운동복 비슷한 것도 한 벌 주셨고 해서... 그동안 몇 번 망설였던 아침 운동을 나갔다... 극동방송국 옆골목인 집에서 산울림극장 앞 삼거리까지 걸어갔다가 와우산 공원 아래까지 언덕을 올라가 다시 산중턱을 돌아 홍대 남문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 30분쯤 걸렸다. 와우산엔 아카시아꽃이 피었더라. 꽃향기에 기분이 꽤 산뜻.

 

예전에 평촌 살 때는 봄에 우울하다가도... 사당역에서 평촌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남태령 넘을 때 창문을 열어두면 풍겨오는 아카시아 향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특히나 학교에 있기 싫어서 초저녁부터 집에 들어가는 날에... 그렇게 기분이 좀 좋아진 다음에 집에 가서 엄마가 차려주신 저녁을 먹고는 긴장을 풀어서 잠을 잘 자곤 했다.

 

아카시아가 지기 전까진... 아침운동을 다녀야겠다. 그런데 이렇게 결심하면 내일부터 8시에 잠이 깰 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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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3 09:24 2009/05/13 09:24

근황: 벽지 바꾼 기념 포스팅

2009/05/12 00:47 생활감상문

EM님의 [노닥노닥] 에 관련된 글.


 

EM님이 블로그 스킨 슬쩍 손 보신 데 필도 받았고, 오늘 아침에 갑자기 사무실 내 자리에 22인치 와이드 모니터가 들어오는 바람에(회사 전체가 DTP 툴을 인디자인으로 바꾸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도입한 디자인팀에 30인치 모니터가 지급되는 바람에, 주인 잃은 모니터가 뜻하지 않게 나에게 콩고물로 떨어졌다) 전에 깔았던 벽지가 새 모니터의 화면 비율과 안 맞기도 하고, 뭐랄까... 그것은 약간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을 때의 봄기분(낙엽들 사이에 슬며시 고개 내민 제비꽃)이라... 봄비 속에 새싹이 신록이 되어 가는(또 얼마간 초여름의 더위도 느끼게 하는) 요즘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 그리하여 바람에 날리는 버들잎으로 새 벽지 깔았더니만... EM님이 [벽지만 바꾸지 말고] 근황 글도 하나 쓰란다. 긁적긁적.... 그리하여 가장 최근 근황은 모니터 새로 생겼다 뭐 이 정도? 

 

근황을 말하자면... 무진장 바빴다. 전에 쓴 대로 마감이 두 개였는데... 첫번째 마감은 필름 출력한 다음에 사고가 있어서 4월 말부터 고대했던 '뜨거운감자' 콘서트를 당일이라고 환불도 못 받고(그나마 H양 덕분에 50%에 예매한 덕분에 손실도 50%) 못 가고... 겨우 사태 수습하고 다음날 눈 빠지게 데이터 확인해서 다시 마감. 그리고 중간에 다른 마감이 하나 끼어 들어서 책 두 권을 세 번에 걸쳐 마감. 그리고 다음주에 다시 남은 두번째 마감 예정.

 

이 와중에... 저녁때로 옮겨진 불어학원 다니느라 헥헥. 금욜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경제학 책 OK교 받아서... 뭔가 너무 압축적이다 싶은 캡션 한 줄 알아내느라 EM님 블로그에서 댓글로 실시간 대화(여긴 아침, 거긴 한밤중)... 그러곤 저녁에 낑낑거리며 푸코 강의 들으러 갔다가 SSG샘이랑 3시 반까지 술 마시고, 다음날엔 Y양이 조직한 어버이날 모임 출연해서 처음으로 아바마마부터 막냉이까지 전가족 출동한 가족모임에 낀 R군(Y양의 남친으로서 사윗감으로 윤허를 받은 옴므 홀랑데)에게 아바마마 좋아하시는 한국식 예법 알려주고(어른이 안쪽에 앉으셔야 한다, 어른이 오시면 일어나서 악수를 받아야 한다 etc.인데... 사전에 의도 설명 없이 살짝 피곤한 말투로 이렇게 앉아라 저렇게 해라... 해서 Y양은 또 나의 대장 기질 나왔다고 짜증냄) 점심부터 돼지갈비에 백*주 석 잔 마시고... 생전 처음으로 가족끼리 외식하고, 우아하게 커피집까지 갔다는.... 다들 가르치는 거(즉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가족이라 같이 있으면 서로 짜증 내는데... 우리끼리 한국말로 티격태격하다가 R군에게 뭔가 짧은 영어로 설명해 줄 때는 모두 친절한 모드... 영어 거의 못하시는 엄마는 계속 불편하셨는지... 나중에 Y양 커플과 헤어진 다음에... R군 왜 한국어 안 배우냐고... 한국말로 하라고 하라고 짜증내심. 그리하여 밤잠도 부족한 데다 낮술까지 마셨으니 아바마마께서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시는 동안 한숨 졸고.... 

 

잠깐 주간님/사장님께 전할 말 있어 귀갓길에 회사 들러서 일본어 과외 공부 마치고 점심 드시고 오는 양반들 기다려 할 말 마치고 오며가며 읽던 단편소설 마저 읽다가 세 쪽인가 남은 순간 나의 등산친구이자 울 회사 앞에서 자취하는 MY언니가 저녁 먹자고 전화. 어버이날 치르느라고 돈 없다고 밥 사달라니 사준단다. 나름 좋아라 나갔더니.. 사실은 술이 마시고 싶단다. 아아... 24시간 내에 3끼 연속 술이로구나. 그래서 맥주 두 잔 마시며... 새로 들어간 회사는 보스가 헤매서 발전 가능성이 없어 보이며, 하던 공부는 기운이 빠져서 전처럼 열의가 안 느껴지고, 나이는 먹어서 연애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자기 결론은 외국 남자랑 연애를 해야겠단다... 뭐 좋은데... 이 냥반이 이 결론에 얼마나 결의에 차 있던지.. 겨우 맥주 두 잔인가 마셔 놓고는... 3시간 같이 있는데... 그 말을 15번쯤은 불쑥불쑥 계속 하는 거다(내가 R군 친구 중에 알아봐 준다고 대답마저 했건만)... 그래서 결국 나의 대답은... "외국 남자랑 못 사귀기만 해봐라... 내가 버럭 화를 내줄 테닷!" (이럴 때 보면... 나름... 뭐하고 살아야 잘살까 고민하기보단 지금 하는 일을 조금 더 잘할까만 고민하자고 결심한 나는 나름 복 받은 사람이다 싶기도 하고...)

 

뭐 이러고 집에 와서 괜히 술이 깨서 새벽까지 TV리모콘 괴롭히며 뒤숭숭해하다가... 일요일엔 저자 방한 일정에 맞추어 오늘까지 마감해야 할 예의 그 경제학 원고를 다시 떠듬떠듬 원서 및 사전을 참조하다가... 막히면 혼자 승질내다... 그러다 이러면 혼잣말 심해져서 정신건강 해칠까 봐 H양에게 메신저로 투덜투덜... 그러면서 간만에 선생님 댁에서 하기로 한 스승의 날 참석 연락 돌리기... '아니 다들 일요일에 뭐 하는데 전화들을 안 받는 건데? 난 평일엔 바빠서 연락할 시간이 없다고...' 또 혼자 궁시렁궁시렁...

 

뭐 그러고 회사 가서... 글 시작처럼 모니터 바꾸고, 오늘 들어온 신입들에게 J팀장, P팀장과 함께 점심 사주고... 점심 먹고 와서는 스승의 날 모임 참석여부 확답 안 한 인간들에게 전화 돌리고, 모처럼 그의 무관심을 드디어 믿게 되어 주말에 참석여부 알려달라고 문자를 보냈던 J씨가 전화를 걸더니... 안 온다던 풍문과 달리 오겠다고 의지 표현하며 내게 관심을 보이며 근황을 묻고, 그새 더 이뻐졌냐는 말에 전화 끊고 나서 살짝 머리가 아픈데도) 목표한 대로 퇴근 시간 전에 OK지 털어 주고 퇴근해서... 낮에 생협에서 배송된 먹을거리 들고 들어와 냉장고에 정리하고, 다시 나가서 아프리카 공예품점 가서 스승의 날 선물할 만한 신상 있나 구경해 주고... 사장님이랑 미리 가격협상하고... 다시 집에 와서 어버이날 엄마가 만들어 오신 반찬에다 새로 들어온 먹을거리까지 냉장고가 터질 듯(지난 주에 먹을 게 하도 없어서 생협에 주문했는데... 엄마가 어버이날 외식자리에 반찬에다가 옥상에서 키운 상추까지 가져다 주실 줄이야...)해서... 내일 도시락이라도 싸 가야 상해서 버리는 일은 없겠구나 하고... 동태찌개 끓이고, 잡곡밥 하고, 무나물 볶고, 설거지를 하고, 까먹고 있던 빨래 삶고, 지난 주 새로 받은 불어 MP3를 들으며 한 시간 동안 근황을 정리했다.

 

이렇게 바빠서야 잡념이란 도무지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입밖에 내기가 그래서 그렇지 여전히 잡념 천지이나, 어떤 생각을 진지하게 발전시켜 무언가 결심하고 이런 건 하지 말자는 것으로, 언젠가 내가 믿었듯이... 일상이 쌓이면 방향성이 생기고, 그 방향성들이 지금까지 나를 유지시켜 온 그나마의 힘이라는 정도라서... 뭐 딱히 그리하여 고민하는 것은 없고 근황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근황이 궁금하다는 EM님 댓글 한마디에 그만 마음이 약해져서 이런 글을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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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00:47 2009/05/12 00:47

일주일 새 세번째 새벽 3시

2009/04/25 09:44 생활감상문

일주일 새 세번째 새벽 3시에 넘어서 들어왔다. 의도치 않은 방탕(?)한 생활 그리고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아팠던 수요일의 결근을 포함하여] 주간 활동 골골. 어제 술자리 분위기도 그렇지만, 속으로 에라이 모르겠단 생각이 있어서 그랬는지...... 더 웃겼다. 다음주가 진쿤 마감만 아니(그래서 오늘 잠깐 회사 나가겠다고 말만 안 했)었어도 아예 철야를 하고 지금쯤 뻗어 있을 수도.

 

어제는 푸코 통치성 수업 뒷풀이에서 철학강의를 처음 듣는 동급생이 SSG샘에게 "그래서 세계는 누가 바꾸나요?"라는 질문(맥락이 좀더 복잡했지만 여하간 질문은 그랬던 거 같다. 2001년 스승의 날에 밤새 놀 때 가보고 처음 간 선*골 민속주점의 김치랑 동동주, 파전이 어찌나 맛있던지 남의 질문에 집중 안 함ㅋㅋ)에 대한 선생님 답을 듣다가... 음 첨으로 actor, agent, subject의 구분이 명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 가지를 비교해서 생각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수업시간보다 뒷풀이에서 깨달음이 오다니 좀 웃기긴 했지만... 선생님한테 약간 썰을 풀어서 물어보니까 대충 비슷한 얘기라신다. 그래서 나의 최종 결론은 "주체에겐 얼굴이 없다"(머릿속에서 그런 문장이 들려서 선생님한테 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하고 물어보니 선생님은 처음 들으신단다). 구글에서 불어로 검색("le sujet n'a pas de visage")해 보니까 없는 거 같다. 음, 나름 유니크한 문장이로군(지난 1년여 간 만든 세르 책+들뢰즈 주해서+블랑쇼 책 et 푸코 강의의 결과로 요거 한 문장이닷).  나중에 또 써 먹어야지. 

 

여하간 사람들이 많이 일찍 가기도 했고, 지난 주에 엄마도 오시고 몸도 아프다고 수업 빠진 것도 죄송하고, 일부러 푸코랑 들뢰즈 다큐멘터리 DVD로 구워주신 것도 감사하고, 마지막까지 함께한 SYS씨의 새침하면서도 도발적인 말투도 재미있었고... 그리하여 또 새벽 3시 귀가(그 양반들은 그 시간에 3차 하러 갔다. 요즘 나의 술자리 태도... 막차는 무조건 빠진다?)... 4월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자 했는데... 어째 술자리가 열심히가 되는 건가? 아냐아냐... 9월에 불어 시험도 보기로 결심하고 소문도 냈고, 당장 마감도 2연타로 있고, 스승의 날에 오클라샘 뵙고 오면 또 격려도 해주실 테고... 그러니까 꽤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이얌.  

 

일단 오늘은 1시간만 더 자고 회사에 가자꾸나. 아아, 정말 나는... 그냥 쭈욱 자면 되는데 술 마신 다음날도 제시간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빨래나 청소까지 하고 나서] 다시 졸리단 말이야. 그래서 결국 더 지치고 늦게 나가게 된다는.T T

 

에에... 술 별로 안 마셨는데, 이 두서없는 아침 일기를 보니... 꼭 술이 안 깬 것 같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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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5 09:44 2009/04/25 0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