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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 실수

 

‘인위적 실수’, 올해 가장 엽기적인 말 가운데 하나가 될 듯합니다. 황우석은 줄곧 말을 바꿔왔지만 사이언스에 실렸던 배아줄기에 대한 논문이 결국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희 작은책은 일찍이 황우석의 문제점에 대해서 특집으로 밝힌 바 있습니다. 황우석에 대해서 다시 한번 냉철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주) 도서출판 작은책 11월호에 실렸던 특집 글입니다.

(주)도서출판 <작은책> 02-323-5391 http://www.sbook.co.kr/


특집 황우석표 천지창조

(주)도서출판 <작은책>

황우석 신드롬과 '스타 과학자'만들기

김동광

지난 5월 19일 황우석 교수팀이 배아줄기세포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우리 사회는 ‘황우석 쓰나미’ 또는 ‘황우석 신드롬’이라 불릴 만한 집단 흥분 사태에 빠졌다. 배아줄기세포 논란은 무척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진행되었다.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논쟁, 더구나 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킨 복잡한 논쟁을 다룬다는 것은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곁에서 들여다보면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황우석 교수가 두 차례에 걸쳐 배아줄기세포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빚어진 일련의 사회적 현상들을 주로 ‘스타 과학자 만들기’와 거기에 편승하려 했던 사회 기득권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황우석 영웅 만들기

작년에 황우석 교수와 문신용 교수팀의 인간배아 복제 연구 결과가 처음 알려진 것은 2월 13일이었다. 국내 언론들은 일제히 토종 과학자의 쾌거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 뒤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를 둘러싼 흥분 사태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태극기를 꽂고 왔다’ ‘국내 최초’ ‘토종 과학자’ ‘세계 언론의 주목’ 같은 낱말들은 국민들의 정서에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사이언스> 보도가 알려진 직후에 한국생명윤리학회에 윤리 특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황우석·문신용 교수팀의 연구에 대한 한국의 생명윤리학자들의 견해가 전해졌다. 그 뒤 학회, 시민단체, 종교단체 같은 데서 토론회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쪽으로 쏠린 지지 분위기에 힘을 얻은 황우석 교수는 2월에 선언했던 연구 중단 의사를 철회하고, 10월 21일에 더 이상 윤리적 문제로 연구를 미룰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연구재개’를 선언했다.

지난 5월에 황우석 교수가 배아줄기세포 연구 진전 상황을 밝힌 이후 나타난 사회적 열광 분위기는 2004년보다 훨씬 심했다. 거의 나라 전체가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칭송하면서 영웅 만들기에 나서는 상황에서 선뜻 다른 목소리를 내기 부담스러운 분위기였다. 종교 단체와 윤리학자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했지만, 인터넷에 실린 댓글은 거의 판에 박은듯이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고 윤리적 지적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상태는 조금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스타 과학자 만들기’의 정치 경제학

배아줄기세포 논쟁은 사회적 측면에서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첫째, 정작 해당 연구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보다 열광하는 분위기에 따르려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둘째,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결과 발표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사회적 갈망이 분출하는 ‘대리 출구’ 구실을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는 애국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예상, 불치병 치료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 이공계 위기를 돌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같은 요소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정치권, 재계, 이공계, 언론은 이른바 ‘황우석 효과’에 편승하기 위해 ‘황우석 영웅 만들기’에 적극 가담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셋째, 스타 과학자에 대한 갈망은 윤리와 사회적 측면에 대한 논의를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황우석 교수는 쏟아지는 특강 요청에 분주했고, 사회 여러 분야에서는 황우석 교수를 노벨상 후보로 만들자는 몹시 흥분된 분위기가 지배했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 재계, 학계, 언론계 모두 모처럼 맞은 좋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였다.


“20일 오후 5시 서울 삼성동 코엑스 인터콘티넨털 하모니볼룸에서 열린 `’황우석 교수 후원회 결성식’에서…… 한국의 과학 분야 첫 노벨상 수상을 향한 온 국민의 염원을 반영하듯 한국의 정·재계, 학계, 언론계의 내로라하는 유명인사 120여 명이 대거 얼굴을 내비쳤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행사 시작 전 황우석 교수와 악수를 하며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정책적인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

서울대 72학번 동기 자격으로 축하 인사를 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도 제2, 제3의 황우석 교수를 탄생시키기 위한 정책·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과 오명 과기부 장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서울대 정운찬 총장, 윤병철 우리금융그룹 전 회장 등 정·관계와 금융, 학계의 유명 인사들도 황 교수의 연구 업적을 칭송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연합뉴스〉, 2004년 4월 20일)


위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갈망들을 보여줬고, 이러한 갈망들이 분출할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러 집단들은 이 사태를 성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용하는 데 골몰했다. 그런 의미에서 황우석 스타만들기는 여러 사회 집단들의 갈망이 빚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신드롬과 연관된 주요 사회집단들의 이해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언론 : 특종 생산자, 뉴스 공급원

정부 : 스타 과학자의 인기에 편승해서 떨어지는 지지도를 만회할 수 있는 호재

정치권 : 여야를 막론하고 스타 과학자의 높은 인기를 정치인 개인이나 정당의 정체성과 일치시켜서 이미지를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

과학계 : 이공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

재계 : 경제적 불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


따라서 황우석의 연구에 대한 신비화는 피하기 힘든 현상인 셈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배아복제 논쟁의 경우 신비화가 국가주의와 결합하면서 집단 흥분 현상이 한층 심해졌다는 점이다. ‘애국적 과학’, ‘토속 연구자’, ‘국보급 연구자’, ‘미국의 거액 연구비 제의를 거부했다’ 같은 이미지는 특정한 연구 주제나 연구자를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신비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신비화는 추측이나 예상을 사실로 쉽게 둔갑시킨다. 그것은 신비화라는 메커니즘 자체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은 갈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무성한 논의는 대부분 앞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예상’과 ‘추측’이었지만, 두 차례의 논쟁을 거치면서 어느덧 이러한 추측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사실이 아닌 사실(주장)에 불과한데도 사실로 두루 쓰이게 되는 내용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 : 배아 연구가 정보 기술보다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의료 :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암, 에이즈를 비롯한 불치병을 치료하고 수퍼맨을 다시 날게 해 줄 것이다.

과학계 : 황우석 교수와 그이의 연구가 이공계 기피현상을 극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권 : 황우석 교수와 그이의 연구가 지지도 상승에 기여할 것이다. 좋은 학습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논쟁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 논쟁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좋은 학습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다시 말해서, 배아줄기세포라는 민감한 주제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그동안 개발과 근대화를 위해 매진하느라 한쪽으로 제쳐두었던 과학과 윤리, 과학과 사회라는 밀린 주제를 사회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학습장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생명공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 사회에 그동안 경제 개발과 경쟁력 강화라는 일면적 가치에만 빠져 지냈던 과학자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는 정체성 수립을 모색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여러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미성숙함을 드러냈다. 특히 정치권과 정부는 이 주제를 소중한 사회적 학습 기회로 공론화시키기는커녕 한낱 이익집단의 수준에서 황우석 효과에 편승하기에 골몰했다. 한 가닥 희망을 주는 것은, 논쟁이 지속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차츰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힘겹고 지루하지만 나름의 학습 과정을 거치고 있는 셈이다. 



여성의 처지에서 본 배아복제

명진숙

작년 2월과 올해 5월, 황우석 교수가 진행한 연구의 사회적·윤리적 문제점은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배아복제를 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사실 배아복제 성공은 국내에서 이미 몇 차례 있었다. 소의 난자에 사람의 핵을 이식하는 이종 간 핵이식 실험이었다. 이와 같은 이종 간 핵이식 기법은 창출된 배아에 동물의 유전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실제 임상에의 적용이 어렵고, 인간과 동물의 유전자를 섞는 문제로 윤리적인 지탄을 받았다.

이번 실험은 사람의 난자에 사람의 핵을 집어넣은 것으로, 사람의 난자를 사용한 것이 실험의 핵심으로, 기술적 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성의 난자를 재료로 이루어진 연구가 세계적인 쾌거로 인정받고 국가적인 경쟁력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여성의 몸은, 여성의 난자는 과학 기술의 진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마구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글은 여성의 입장에서 생명공학기술, 특히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는 인간배아복제를 중심으로 문제점을 살피고자 한다.


작년 2월, 세계적인 과학잡지 <사이언스> 온라인 판에 황우석 교수 등 14명의 연구자들이 세계 최초로 체세포핵이식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배아복제 줄기세포주를 확립했다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올해 5월 난치병 환자의 배아줄기세포 배양 성공이 알려졌다. 인간배아복제가 주목받는 이유는 의학적 가능성이 큰 줄기세포를 얻는 유력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줄기세포는 파킨슨병, 척수 손상, 뇌졸중, 심장질환, 당뇨병 등의 치료에 이용되는 대체세포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이와 같이 줄기세포는 난치병 치료의 새로운 방법으로 기대를 받고 있지만, 그 출처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줄기세포는 배아복제, 인공수태 시술 후 남은 잔여 배아, 탯줄, 태아 조직, 성체 조직 등에서 얻을 수 있다. 황우석 교수가 진행한 연구에 관한 문제 제기는 연구에 사용된 난자의 출처, 난자 채취 절차의 적법성, 연구비 출처 들과 같은 절차의 투명성과 적법성에 대한 것이다.

작년 2월 연구에서 황우석 교수팀은 16명의 여성으로부터 기증받은 242개의 난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채취된 난자 242개 중 연구에 적합한 양질의 170개 난자가 복제에 사용되고 그 중 단 한 개의 복제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얻었다고 한다. 1인당 평균 15개 이상의 난자를 채취했다는 계산이다. 올해 5월 발표에서는 18명의 여성으로부터 기증받은 185개의 난자를 이용해 11개의 줄기세포를 얻었다고 한다. 작년보다 효율이 15배가 높아졌다고도 한다.


알다시피 난자는 임신이 가능한 여성의 몸에서 채취된다. 정상적으로 임신이 가능한 여성의 경우, 한 달에 한 쪽의 난소에서 한 개씩의 난자가 배란이 된다. 그런데 시험관 아기 시술이나 인간배아복제 연구를 위해선 많은 수의 난자가 필요하므로 여성에게 과배란 유도제를 사용하게 된다. 난자 채취를 위한 과배란 유도는 월경이 시작되고 3~5일이 지나면 시작된다. 여러 개의 난자를 키우기 위해 여성의 몸에 호르몬 주사를 매일 놓는다. 날마다 일정 단위의 호르몬을 주사 맞는 여성은 호르몬의 혈중 농도를 체크받기 위해 일정 기간 간격으로 혈액을 채취당해야 한다. 호르몬이 투여된 지 일주일 후, 난자가 잘 자라고 있는가를 보기 위해 매일 생식기를 통한 초음파검사(질식 초음파)를 감수해야 한다. 난자 채취를 하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이 되면 약물이나 국소 마취를 한 상태에서 배란 직전의 난자를 난포 상태로 양쪽 난소에서 흡입 채취한다. 난자를 채취당한 여성은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과다한 호르몬 투여로 인한 후유증으로 갖가지 부작용(간장과 신장의 손상, 난소암 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지금껏 이렇게 많은 난자 기증자를 모집했던 복제 연구팀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미국에서 난자를 제공하는 여성은 관련한 경비와 신체의 위험을 가져올 불편함의 대가로 수천 달러를 받을 수 있다. 황우석 교수가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의 공동 저자인 시벨리 교수는 2001년에 인간복제 실험을 했을 때 20여 개가 채 안 되는 난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난자 확보에 실패해 연구를 중단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너무나도 쉽게 난자를 구할 수 있는 우리의 상황. 최근 외국의 유명한 대학과 공동 연구가 논의 중에 있고, 10월 말에는 줄기세포 은행이 설립된다고 한다. 이들과 공동 연구를 할 때 필요한 수많은 난자들은 생명공학기술에 대해 우호적이고 수용적이며 이와 관련한 사회적 규제가 미약한 한국에서 얻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는 국제적인 ‘난자공급소’로 전락할 것이다.

배아복제에 대한 윤리적 논의와 걱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배아복제는 배아와 여성의 난자를 수단화할 수 있다. 앞으로 치료를 위해 수많은 기증 난자가 필요하다. 이는 많은 여성들이 약물과 의학적 처치에 관련한 상당한 위험에 처하게 됨을 뜻한다. 동시에 잠재적 줄기세포를 얻기 위해 잠재적 생명체인 배아가 파괴되는 문제가 있다.


둘째, 다수의 난자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이미 난자 매매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체외수정 불임 클리닉에 난자를 기증하는 여성들은 4천~1만 달러까지 보상을 받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여대 앞에서 난자 기증 광고물이 돌아다니고 있고 이를 소개하는 벤처 기업도 있다. 난자 제공과 관련하여 여성들은 자신의 난자를 아무런 대가 없이 제공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더욱이 이런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이 그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로, 배아복제는 우생학을 촉발할 수 있다. 복제된 배아의 생산은 대물림되는 유전자 변형에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를 제공한다. 치료 목적이든 유전자 개선이 목적이든 대물림 가능한 유전자 조작은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물려줄지 알 수 없다.

넷째로, 인간 개체 복제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많은 나라들에서 배아복제에 대한 실제적인 규제와 감독을 할 수 있는 정부 기관이나 효과적인 법규가 없다. 이는 현재 인간복제를 시도하고 있는 의사나 연구자들이 성공할 가능성을 증가시킨다. 마지막으로, 배아복제에 기초한 치료법은 이것이 현실화된다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을 윤리적 관점에서 살핀다는 것은 이제 그 기술의 공공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공학기술은 치료와 예방, 그리고 복지라는 이름으로 우리 몸에 대한 개입이 정당화된다. 체외수정, 실험적 치료, 배아연구, 냉동수정란, 난자인공자궁, 유전자치료, 인간복제처럼 예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영역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공학기술시대에 맞는 생명윤리를 수립할 필요가 있고 이 과정에 다양한 시각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가 중요하다. 특히 재생산을 기본으로 한 생명공학기술의 특성상 출산할 권리와 능력을 소유한 여성의 입장과 경험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생명공학기술시대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개입과 이용이 정당화되고 사람의 몸이 이러한 기술에 종속될 가능성이 심화되고 있다. 과학의 순수성이나 가치중립성, 과학 연구의 자유를 주장하는 말들은 생명공학기술이 적용되는 사회적 맥락에서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배아복제를 할 경우, 필요한 난자를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그리고 줄기세포연구를 위해 필요한 배아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산전 유전검사와 산전 유전자치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수정된 배아는 누구의 자궁에서 자랄 것인가, 같은 문제는 바로 여성들이 직면하는 상황이다. 오래 전부터 불임클리닉에선 난자를 몸 밖으로 꺼내어 조작하고 다시 자궁에 넣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한편에선 부모 노릇이 버거워 출산을 기피하고, 다른 한편에선 완벽한 아이를 위한 소망으로 여성의 몸을 매개로 한 유전자 검사가 성행한다.


최근 생명공학기술의 연구를 둘러싼 문제는 ‘복지’와 ‘윤리’가 절충된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즉 연구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 아래서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심각하게 무시되는 것은 생명공학기술이 기반하고 있는 근본 원리로, 여성과 자연에 대한 착취와 종속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개발된 과학 기술의 내용 역시 성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한다면,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기술이 개발된 근본 논리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여성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생명공학기술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주된 까닭이다. 



황우석은 가난한 이들의 대안이 아니다

박주영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세계 최초로 복제된 인간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당장은 병원비가 걱정돼 치료를 못 받아도, 황우석 교수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성공했다는 뉴스에 모두 아픈 자식들이 다 나은 것처럼 사람들은 환호했다. 당장 불치병은 없어지고 장애인도 벌떡 일어설 수 있는 미래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황우석과 나의 건강은 어떤 관계가 있길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더 많은 난치병과 희귀병을 고칠 수 있고 지금 아파서 고통받는 내 가족과 친구, 동료들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런데,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성공하면 노동자 농민들의 건강도 나아질 수 있을까? 돈 걱정 없이 치료받고 병원에 갈 수 있게 되는 걸까? 물론, 의료 과학을 비롯한 여러 차원의 기술적·학문적·제도적 발전이 건강 향상에 기여한 공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만 건강을 생각할 때 우리는 뭔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먼 훗날 희귀병이나 난치병에서 자유로운 후손들을 탄생시킬지는 몰라도, 근육통으로 고통받는 자식들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우리 서민의 아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수술비가 없어서 제 손으로 머리를 꿰맨 환자나, 치료비가 없어서 백혈병 환자인 딸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내야 했던 아버지는 돈이 없다는 그 까닭 하나만으로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했고 제 손으로 딸의 목숨을 거두어야 했다.


2005년 4월에 나온 통계를 보면, 건강보험에 가입한 지역가입자 중에서는 23%가 3개월 이상 보험료를 못 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건강보험 혜택도 못 받고 있고 그 규모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고소득층 사람들은 1997년보다 병원 가는 횟수가 21%만큼 증가했는데, 저소득층은 1997년과 비교해서 43%만큼 감소했다고 한다. 보험 혜택을 못 받거나, 병원비가 아까워 병원에 못 가고 병원에 못 가면 건강 수준은 낮아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이런 것이다. 뇌 연구나 노화, 치매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치매 환자로 버거워하는 수많은 가정의 현실에 처한 어려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약자를 생각하지 않고, 연대가 전혀 없는 형편에서 공공병원은 이익을 내기 위해 구조조정을 세우고 있다. 우리 나라의 보건의료 정책이나 국민 건강을 논할 때 돈이 없다는 까닭만으로 병원을 찾지 못하며, 병을 키우고 있는 많은 잠재적 환자들은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암의 정복’이나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성공’이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건강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와 함께 세계 최초로 복제된 인간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성공한 미즈메디병원의 이사장 노성일 씨가 지난 9월 28일 민주노동당의 발표로 불법으로 정부의 연구비를 집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1월 1일부터 시행된 생명윤리법에 따르면 인간 배아 연구는 보건복지부 장관의 승인을 얻은 뒤에 실시해야 한단다. 그런데 노성일 이사장은 복지부의 승인도 다 받지 않은 채 인간배아연구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부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승인도 받지 않은 노성일 이사장의 인간 배아 연구에 대해 지난 4월 22일, 7월 18일에 각각 1억7500만 원씩 총 3억5천만 원의 연구비를 지급했다고 한다.


언론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장관의 승인 없이 연구비가 지급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보건복지부의 공식 해명이다. 사실 보건복지부는 7월 29일 이 연구에 대해 ‘검토 보류’판정을 내려서 승인을 거부했지만, 연구비 회수 조치 등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사례들이 이미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데도, 황우석 사단의 연구라면 무조건 환영하는 분위기에 가려 이런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는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순서 문제 이전에 이미 배아줄기세포 연구 자체에 대해서 의학계 안에서조차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배아줄기세포가 환자에게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이미 동물 실험에서 관찰된 바 있듯이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해서 병을 치료하려다가 도리어 암이라는 치명적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고, 체세포로 만든 배아줄기세포는 이미 노화한 것이라 배아줄기세포 치료는 일시적 효과만 줄 것이라는 걱정도 있다. 장기 배양도 지금은 불가능하다. 줄기세포를 필요한 특정 세포로 분화시킬 수 있는 조절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장기를 얻기 위해서 배아줄기세포를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키고 장기가 만들어질 때까지 몇 달을 기다리면 이때는 이미 배아줄기세포는 세포가 아니라 태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유전자 결함이나 면역 거부 반응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답을 찾아야 하고, 동물 대상의 검증과정도 선행되어야 하니까 배아줄기세포를 난치병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런데도 언론과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무조건 환영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현대 의료가 철저하게 상업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의료는 사람들이 ‘더 건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부추기고 건강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한다. 비아그라, 호르몬대체요법, 성장호르몬, DHA, MBP……. 신문 하단을 차지하고 있는 동충하초, 인진쑥, 상황버섯, 누에, 생식의 광고 문구들.

황우석 교수의 연구 또한 이런 광고 문구들처럼 좀 더 선정적이고 좀 더 과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상품성을 발휘하기 때문에 불법적인 정부의 지원도, 몰아주기식 언론의 조명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생명공학과 관련된 주식값이 폭등하고 생명공학과 관련된 벤처기업과 사업체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사기꾼들까지 꼬이는 현상은 그만큼 ‘돈 되는 장사’를 알아보는 안목 덕택이다. 결국 그런 방식으로 우리도 ‘건강’해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경제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황우석 교수는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의 학계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5월 13일 보건복지부가 <의료서비스육성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이래 9월 말에 구성된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의료를 좀 더 ‘산업’적으로 발전시킬 방안을 의논하는 곳이다. 재정경제부, 보건복지부 등 주요 정부인사들이 모두 참가하는 이 위원회는 영리법인 병원을 허용하고 민간의료보험을 더 많이 활성화시켜서 돈 있는 사람들이 더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게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지금도 소외되고 있는 저소득층과 빈민, 없는 사람들의 의료 서비스는 점점 더 줄어들어 그나마 반쪽자리던 건강보험과 턱없이 부족한 공공병원들까지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형편이다. 이런 형편에서 황우석의 연구에 무조건 박수만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황우석의 연구가 성공하느냐 마느냐,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못사는 사람들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못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현상 자체가 주목받지도 못하는 것이다. 길거리에 나앉은 실업자와 노숙자, 한시라도 더 많이 일하고 한 개라도 더 많은 물량을 작업해야 하는 노동자, 반쪽짜리 건강보험에 불만만 쌓여가는 사람들, 사회양극화, 빈곤의 심화……. 언론에서도 많이 떠들어대지만, 정작 건강 문제는 이런 양극화의 맥락에서 짚어지지 않는다. 황우석의 연구가 우리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키우고, 우리 나라가 세계 속의 생명공학 강국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환상을 키우지만, 그것이 정작 빈곤한 환자들의 병원비를 보태주지는 않는다.


마치 황우석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삼성’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삼성이 내세운 세계 일류의 구호가 거대자본이 행하고 있는 불법적인 행위를 숨기고 자신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듯이, 황우석 연구 또한 그 연구의 명분만 갖고 그 뒤에 진행되는 본질적인 문제를 모두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불법적으로 혈세를 집행하고 오히려 부자와 기업만을 위한 의학적 성공에 몰두하는, 그래서 결국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 없는, 아니 보통 사람들의 건강은 더 나빠지는 그런 현실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질문을 던져 봄직도 하다. 왜 이 사회는 건강에 관해 우리를 기만하는가? 왜 건강해지려는 우리의 요구는 정부, 의료인, 학자들의 이런저런 변명과 투정, 어려운 학술적 개념과 통계수치 속에 묻혀 버리는 걸까?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업적을 이루었다고 환호하거나 제도나 정책을 바꾸었다고 생색내는 정부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건강을 우리의 힘으로 다시 정의해 나가야 한다. 의료의 공공성을 더 강화하고 노동자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 빈민의 건강도 보장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황우석의 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황우석의 연구보다는 노동자와 농민, 전체 국민이 건강에 대해 생각하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황우석의 연구는 결코 우리의 건강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체세포핵이식과 무병장수의 꿈

강신익


지금 우리에게는 체세포핵이식이나 배아복제라는 과학적 용어보다는 세계 최초로 그 기술을 인간에 적용하는 데 성공한 연구팀의 우두머리인 황우석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친근하고 알기 쉽다. 그래서 그이가 한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보다는 그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더 많은 관심과 찬사를 보낸다. 나 또한 그이와 다른 연구원들이 감내해 낸 인고의 시절과 그이들이 이루어낸 과학적 성과에 격려와 찬사를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연구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평가에 적용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 연구에 대한 내 나름의 비판을 가해 보려고 한다. 이 작업은 세 가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과학 안에서의 문제들이고 둘째는 이런 과학적 연구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며 셋째는 이 기술 속에 내포된 사회적ㆍ정치적 함의에 대한 것이다.


먼저 과학적 줄기에서 살펴볼 때 이 기술은 중심가설이라는 과학적 독단에 갇혀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 가설은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단백질을 만들고 그 단백질이 하나의 형질을 결정한다는 유전학의 단순 도식이다. 이 가설은 20세기 후반 유전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휴먼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될 즈음에 이르면 이론적으로도 더 이상 쓰일 수 없다고 입증된, 유용하지만 진리일 수는 없는 개념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세포의 핵 속에 들어 있는 유전자가 생명체의 모든 운명을 결정한다는 가설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


하나의 유전자가 여러 형질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하나의 형질을 발현시키기 위해 여러 유전자가 협동을 하기도 한다. 23쌍의 염색체에 나열된 염기서열 중 형질 발현에 관여하는 부분은 5%밖에 안 되며 나머지 95%가 어떤 구실을 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DNA가 RNA로 전사되고 단백질로 번역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오류가 발생하는데, 이 오류들은 세포질 속에서 수정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어렸을 때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주던 유전자가 나이가 들어서는 암이나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항하여 유전자와 세포 내 환경, 유기체의 생물학적 상황, 그 유기체가 살아가는 자연적ㆍ사회적 환경이 상호 작용하여 각종 형질들이 만들어진다는 후성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체세포핵이식 기술은 이러한 이론적 논란이나 형질이 드러나는 복잡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이 실험은 생체의 발생이 정자와 난자의 수정과 자궁 내 착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뿐 유전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가설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연구는 체세포 핵 속의 유전 정보가 그것을 이식해서 만든 배아와 줄기세포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이 연구 결과에 환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정을 받아들이기 때문인데 그 가정 자체가 확인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둘째로 이 기술은 생명의 가치와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물음을 던져 준다. 이 기술은 세포를 제공한 두 사람의 성인과 두 사람의 세포가 결합한 결과 생산된 배아, 이렇게 세 생명 사이의 관계에 토대를 둔 것이다. 성인 두 사람이 반드시 남녀일 필요는 없지만 난자를 제공하는 한 사람은 반드시 생식이 가능한 여성이어야 한다. 이 연구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첫 번째 생명이다. 연구자와 미디어들이 강조하듯이 이 기술은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 전환점을 부여한 것인데, 여기서 난치병 환자는 제공된 체세포 핵의 주인이며 이 연구의 두 번째 주인공이다. 마지막으로 제공된 난자와 체세포 핵의 융합으로 탄생한 배아가 세 번째 주인공이다. 이렇게 생산된 배아가 과연 생명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배아가 체세포를 제공한 사람과 동일한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고 이 동일한 유전 정보로 인해 거부 반응 없이 망가진 신체 부위를 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 전제인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생성된 배아를 자궁에 이식할 경우 복제인간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연구에서는 그 중간 단계에서 배아를 파괴해 줄기세포를 추출한다.


그렇다면 이 연구의 두 주인공(난자 제공자와 배아)은 어떤 이익도 없이 두 번째 주인공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물론 배아에게 온전한 생명의 지위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난자를 제공한 여성은 과 배란 유도를 위한 주사를 수없이 맞아야 하고 한 달에 하나가 아닌 10여 개의 난자를 생산한 다음 도관을 통해 이를 빼내는 수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 고통과 위험의 대가는 인류 복지를 위한 희생이라는 찬사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진정으로 이 찬사를 인정하더라도 그 희생을 가임기 여성만이 떠맡아야 한다면 이는 정의로운 기술이라 할 수 없다.


이 기술이 난치병 치료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기본 성격상 불평등의 기술이 될 가능성이 무척 크다. 편익의 흐름이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난자를 제공한 가임기 여성과 핵이식의 결과 생산된 배아는 모두 난치병 환자의 생명 연장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다른 생명을 착취하는 기술인 셈이다.


우리가 이 기술에 환호하는 이유는 이것이 환자 한 사람만을 위해 디자인된 맞춤 의학이라는 데 있다. 맞춤 의학이란 시험관에서 만들어진 세포를 거부 반응 없이 이식할 수 있다는 면역학적 가능성에 근거한다. 하지만 그런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면 그 한계가 금방 드러난다. 맞춤 양복이나 구두를 주문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듯이 줄기세포를 주문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이나 권력이 무척 많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피를 팔아 음식을 장만하던 예전의 매혈자들이나 은밀히 장기를 팔아 생계에 보태는 지금의 극빈자들처럼 자신의 건강을 담보로 난자를 생산하여 판매하는 생체공장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과거에는 옷이나 구두를 맞춤으로 만들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이 싼값의 기성복과 기성화를 애용한다. 지금은 연구 단계에 있으므로 많은 난자가 필요하지만 곧 대체기술이 개발되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기세포는 신체 사이즈만 맞으면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기성복이 아니다. 이것은 사이즈가 아니라 조직적합성이라는 무척 까다로운 조건을 맞추어야 하는 아주 낮은 확률의 생물학적 가봉 과정이다.


생물학적 가봉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체세포핵이식을 통해 배아와 줄기세포를 만드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백혈병 치료를 위한 골수 이식에서처럼 많은 사람의 생물학적 정보를 모아 서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짝지어 주는 성체줄기세포 이식법이다. 조직 적합성이 맞는 환자와 골수기증자가 도움을 주고받고, 다시 기증자가 필요할 때 다른 기증자를 찾아내는 ‘도움의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것이다. 앞엣것이 맞춤 의학이라면 뒤엣것은 기성복 의학이다. 전자는 특정한 환자를 위한 기술이지만 후자는 여러 사람이 서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다. 전자가 다른 생명을 이용해 한 생명을 구하는 착취의 기술이라면 후자는 여러 사람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상생의 기술이다. 전자가 개인을 위한 기술이라면 후자는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생명 나눔의 기술이다. 전자가 불평등을 조장한다면 후자는 평등을 지향한다.


나는 이 기술이 잠재적 생명인 배아를 파괴하므로 전면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체줄기세포라는 대안이 있다고 해도 배아를 통한 연구에서 질병 치료를 위한 중요한 전기가 마련될 수 있다면 합리적 절차를 통해 허용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허용 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위에 제시한 과학적ㆍ철학적ㆍ사회적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연장하려는 생명의 가치와 그것을 위해 지불해야만 하는 사회문화적 비용에 대한 심각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병장수의 꿈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네트워크,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인식, 그리고 과학의 엄밀한 검증을 통해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가능성이지 핵이식으로 만들어진 줄기세포나 그것을 만들어낸 과학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식의학에서 많은 ‘세계 최초’ 사례를 가지고 있는 영국이 마련한 무척이나 촘촘한 과학적ㆍ윤리적 통제 장치를 참고로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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