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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석 샘 글

 

내가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거부하는 이유


이용석


   나는 2006년에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정직3월의 징계를 받은 교육노동자이다.


   내게는 6살짜리 아이가 하나 있다. 모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는 “파워레인저 매직포스”라는 어린이용 드라마가 있다. 평범한 아이들이 마법의 힘으로 변신하여 정의의 힘으로 악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내 아이는 이 방송물의 매니아(?)이다. 아이는 이를 통해 세상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 어떤 ‘폭력’도 정당하다는 것을 내면화하고 있다. 즉 폭력이 ‘선’이라는 것을 뒤집어쓰고 내면화되어 가고 있으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영웅주의’ 그리고 전체를 위해 나 자신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전체주의’가 내면화되어 가고 있다. 아이는 자기 혼자 파워레인저의 흉내를 내며 자신만의 가상의 적을 물리치고는 한다. 그것도 아이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객관과 합리, 중립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채 이루어지는 교육의 위험성은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내면화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내면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일상적으로 유지, 강화되고 있다. 결국 그것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되며 사회 구성원들은 그것을 다시 객관과 합리,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재무장하게 된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는 바로 이러한 교육의 결과이다. 누군가에 의해 내면화된 목적의식적 교육의 산물일 뿐이다. 나는 그동안 이것이 맞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하지 않는다.

   이유 중의 하나는 왜 내게 그것을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에 따르면, 내게는 국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어떤 국가를 선택하든, 아니 국가를 선택하든 말든 그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이다.

   내가 경례를 하고 맹세를 해야 할 지금의 국가는 오로지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이기에 그런 국가에 대해서 나는 그 어떤 동의도 할 수 없다.

   미국의 군사재편전략으로서의 평택미군기지 이전은 민중과 노동자의 삶을 파괴할 전쟁을 전제로 한 전지구적인 자본의 전략일 뿐이다. 수 십 년 동안 삶을 가꾸어 왔던 주민들을 군대를 동원해서 그 터전에서 강제로 몰아내는 야만의 행위를 서슴지 않는 국가에 난 동의할 수 없다. 철저히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하여 ‘노사관계 로드맵’, ‘비정규법안’, ‘한미FTA'를 강행하는 국가에 난 동의할 수 없다. 세계 자본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라크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전쟁에 민중의 자식들을 내모는 국가에 난 동의할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전체주의가 이 땅에서는 일제 때부터의 군국주의와 맞물려 여전히 군사문화로 남아 있으면서 우리에게 무조건적 충성과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이다.

   일제 시대 때 군국주의 일본은 이 땅에 학교를 지었다. 이유는 황국신민화를 통해서 일본 왕에 대한 자발적 충성을 내면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목적에 가장 부합한 학교의 형태는 군사학교이다. 지금 학교의 모습은 일제 시대의 학교 구조와 내용을 해방 후 군사정권을 거쳐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학교의 모습을 보자. 아침 운동장 조회 때의 모습은 연병장에서 사열 받고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교실 칠판 위 한가운데에는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가 여전히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며, 교직원 회의 시간이든 운동장 조회 때든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무의식적으로 그대로 따르고 있다. 교실에서는 군사용어인 ‘차렷’, ‘경례’가 아직도 자리잡고 있으며, 오와 열을 맞추어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연병장에 도열한 군사열을 연상시킨다.

   해방 후 일제의 황국신민화는 반공과 안보 의식화로 탈바꿈했지만 여전히 통제에 따른 질서와 국익만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국익을 위해서 노동자, 농민, 민중이 희생해야 한다는 그래야 다 잘 살 수 있다는 집단 최면만이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80년대까지 교련으로 계속되었던 무조건적 복종과 질서의 교육은 지금도 교문지도, 두발규제 등에 군사문화로 남아 있다. 일찍이 박정희는 사회교화라는 명목으로 국민(남성)들의 두발규제를 위해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가위질을 해대지 않았던가. 지금은 교육이라는 미명으로 대상만 학생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박정희식 군사문화의 잔재와 이데올로기는 일상의 여러 곳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태어났다”로 대변되는 이 무서운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삼성 자본은 국민을 위해서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다. 철저히 자본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 삼성이 잘 되면 노동자, 농민, 민중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은 철저히 위선이고 기만이다. 그 위선과 기만으로 민중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이 지금의 국가이다. 왜 내가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로 이런 국가에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것인가?


   지금 국기법 논쟁이 한창이다. 국기‘법’이 왜 필요한가? 결국 ‘강요된 충성’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자는 수작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말이 있다. “권위는 자신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국가가 국가다우면 국기‘법’까지 필요없다. 아무 것도 필요없다. 국가가 노동자, 농민, 민중들의 이익과 권리에 충실하다면, 그 국가는 국가구성원들에게서 충분히 그 권위를 인정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기법을 제정하는 이 움직임은 국가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여 자본의 이윤을 더욱 보장하기 위한 얄팍한 술책에 불과하다.

   당장! 국기법을 폐지하라!!!

   그리고 내게 ‘충성’을 강요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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