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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레바논 대사관에 보낸 토마토 2상자

 

 

 

레바논 대사관
서울시 용산구 동빙고동 310-49
tel: 02) 794-6482/4
주한 레바논 대사앞

토마토 2box

힘드시지요..

평화를 입 밖으로 내 뱉으면
이미 저 멀리 멀어집니다.
떠오르는 해를 따라 삶이 날아가고,
지는 해에 삶이 잠드는
짦은 시간을 통해 평화가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이렇게 나마 마음을 나눌 수 밖에 없는 제 삶이 초라하지만
아주 작은 마음이나마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계절이 뜨겁습니다.
전쟁의 포화속에서 울부짓는 그 소리처럼
뜨거운 햇살아래 오늘을 견디어 내는 것이 힘들기만 합니다.

그래도 힘냅시다.
이렇게 밖에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부족한 마음으로
토마토 농사를 짓는 무지랭이 농사꾼도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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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티의 추억


 

산책을 떠나기 앞서... 다리에서 찰칵

어째 엠티가 심상치 않다. 나머지 사진이 궁금하다면....아...따라와~~~




 

엠티 기간 내내 붙어다녔던...겸과 효웅..겸이 효웅 스타일인가??

 

 

 


 

조은, 나동 커플의 엽기호러판타스틱!! 왠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때만 되면 발동하는 오대표의 장난기도 주목하시라

 

 

 

 

 

 


 

그건 사랑이었지...그건 사랑이었지...

 

 

 

 


 

산책 도중 다리 위에서 왼쪽부터 타랑, 겸, 오대표(ㅋㅋ), 오리(꽥꽥), 효웅, 여옥, 고동, 나동, 조은...그럼 사진은 누구 찍었을까??

 

 

 


 

나와 조은은 이 날 작정했다. 기대하시라...두둥두둥 리얼 러브스토리

 

 

 


 

해맑은 조은...아 ...눈부셔

 

 

 


 

또 다른 애정을 과시하는 오대표와 오리..

 

 

 


 

정말 인상좋고 착하게 생긴 철(어찌보면 고시생이나 살집 아저씨 같기도-.-;;)...은하철도 999의 철이를 연상시킨다.

 

 

 


 

또또또...오대표 발동걸렸다...'아니 이거 뭐하는거야?'...오대표 이대근 버전

 

 

 


 

잠시 휴식을 취하며...이 번엔 누가 찍은걸까요??

 

 

 


 

ㅋㅋㅋ...사진 잘 나왔당...다들 포즈가 제각각인데 전체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역시...

 

 

 


 

자 이 번에 누가 바뀐걸까요??

 

 

 


 

좋은 장면을 남기려고 절벽 앞에 선 그들...임재성...쫄고 있다. 으이그...덩치가 아깝지.

 

 

 

 


 

오대표...좋덴다...임재성을 절벽으로 떠밀고 기뻐하고 있다...무섭다.

 

 

 


 

그녀의 잔인함...멈출 줄 모른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며...숙소가 보인다. 한화 콘도.

 

 

 

 


 

고동마저... 이 날 다들 상태가 안 좋은 편...

 

 

 

 


 

맛있는 저녁식사...그런데 사람이 늘었다..누구게??

 

 

 

 


 

술로 시작해 술로 끝장을 보는 재성...그래도 소백산맥은 맛있었다...

 

 

 

 


 

새롭게 병역거부한 인욱씨...인욱씨의 유일한 사진...진지한 프로그램 진행 중..

 

 

 

 

 

 


 

늦게 도착한 날나리 맹구...프로그램 사회자이시다.

 

 

 


 

다리밑 자매들...선녀가 되려는가??

 

 

 


 

여옥의 접사사진...수준급...

 

 

 


 

계속 수준급 -.-;;

 

 

 

 


 

정말 수준급-------------.---------------;;

 

 

 


 

사장님...나이스샷

 

 

 

엠티 너무 즐거웠고 모두 모두 수고했어요~~앞으로 이런 기회가 또 있겠죠?? 사진 찍느라 수고한 여옥에게도 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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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1.

요즘 상당히 뜨고 있는 소설이다. 연애와 결혼이라는 복잡한 방정식에 축구의 공식을 대입했다. 인생은 축구다. 뭐 이런 말도 충분히 가능할테니 그냥 저냥 비유가 들어맞기는 하지만...인생은 마라톤이다. 인생은 야구다. 인생은 수영이다. 이래도 그냥 저냥 말이 될 것이고. 인생은 책이다. 인생은 똥이다. 인생은 방구다. 이러면?? (음 왜 자꾸 이런 단어만 생각나지...)암튼 결국 이런 소설의 완성도는 작가의 말발에 달린 것. 잘못 쓰면(혹은 잘 못쓰면) 주간지에 실린 삼류소설 취급 받는다. 결론은?

일찍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도 충분히 구미가 당길 것이다. [삼미..]를 지하철에서 읽으면?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참으며 혼자 키득키득거리다 미친놈 취급 당하기 딱 좋다.

이 소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재밌다. [삼미..]처럼 삶에 지친 어깨를 감싸주지는 않지만, 연애라는 주제로 고민 많은 이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다. 그냥 쉽게 쉽게 잘 넘어간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더 좋을테고. 기본 통계자료만 들춰봐도 재밌을거다. 축구역사 100년을 넘는다. 그 뒤에 감춰진 이런 저런 이야기들만 모아 읽어도 재밌을 것. 그러니 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런데 이것이 또 단점이기도 하다. 축구 재미없는 사람, 축구 잘 모르는 사람, 가끔 억지비유라고 빈정거리고 싶을 지도 모른다.

 

2.

결혼(연애)에 관한 남성적 판타지

소설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축이다. 주인공은 아주 평범한 남자. 독점욕의 노예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남자들, 대체로 이렇다. 예전에도 연애와 축구를 빗댄 말들은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축구의 로망은 멋진 골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골에 빗댄 말들이 많았다. 살짝 섹스와 연결시킨 은유적 표현들. 그 중 가장 흔한 말들.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냐?' 뒷통수를 때리던 그 다음 반응. '골 들어간다고 골키퍼 바꾸냐?'암튼 시종일관 남자는 생각하고, 전략을 짜고, 독점을 꿈꾸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리고 끌려간다.

 

아내의 이중결혼

그녀는 프리섹스와 자유연애 선호가. 그런데 남자의 끈질긴 요구에 못이겨 결혼을 하고. 또 다른 남자와 이중결혼을 한다. 남편의 반응? 당연히 죽을라고 그런다. 그런데 이 남자. 이혼서류까지 써놓고도 결국 헤어지지 못한다. 충분히 공감가는 찌질이. 여자는? 결혼의 맛(이게 뭐지? 암튼 함께사는 생활이 주는 안정감. 편안함 같은 것들)을 알게 된 뒤로는 동거도 싫다하고 굳이 두 남자와 결혼을 한다. 

 

현실

당연히 힘겹다. 법적으로 남편은 한 명인데 몰래한 결혼까지 두 집 살림을 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러다 뽀록이라도 나면 죽도로 맞는다. 게다가 한국이라는 나라는 저렇게 살다가는 탈모증 걸릴 정도로 스트레스 주는 나라다. 그래서 현명한 그녀는 외국으로 가서 살자고 그런다. 그것도 넷이서 한 집에. 남편 둘에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까지.

 

3.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두 집 살림의 경우(남편 둘, 아내는 한 명) 예상되는 문제가 어디 한 두 가지인가. 설사 셋이서 이 상황을 동의했다해도 아내의 사랑이 단 1%라도 한 쪽으로 기우는 순간이 온다면? 게다가 애도 낳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심지어는 셋이서 같이 살자고 한다. 주인공은 혼자서 상처받으며 계속 달린다. 아내의 요구대로 따라간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요즘이다. 미래 사회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이렇게 구체적인 지침서를 자주 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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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난장에 함께해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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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얼마 전 자전거로 강화도에 다녀왔다. 초보운전이라 내심 뭔일이 일어날 거 같았는데..역시나. 한강다리 건너다가 가드레일 들이 받고 차도로 굴러 떨어졌다.

 

어제 과외를 하는데 애한테 그 때 생긴 상처를 보여줬다. 이렇게 통과의례를 거쳐 난 이제 제법 자전거를 잘 탄단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지. 시각적 효과도 괜찮다. 무릎 한가운데 자리한 진갈색 피딱지. 그런데 그걸 보더니 애가 '와, 이거 진짜 상처에요. 신기하다' 그러는거다. 허거걱...

그리고,

대화는 계속된다.

 

(학생) 선생님, 그럼 만화처럼 자빠진거예요? 하하하...상상만 해도 되게 웃긴다. 선생님 넘어지는 모습 생각하니까 너무 웃겨요.

선생님 눈알 빠진 사람 본 적 있어요? 난 전에 눈알 빠진 사람 봤는데, 사람 눈알이 만화처럼 스프링 달려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핏줄이 나와 있더라구요. 되게 신기했어요.

 

(나) 그런 끔찍한 거 보고도 안무서웠어?

 

(학생) 남이 다친건데 왜 무서워요?

 

 

음...상처 괜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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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 두번째 소설집 '명랑'

 1. 야생의 여성성이라는 도발적 문제제기


정확히 구분 짓는 것은 위험하지만 대체로 80년대 여성소설이 민중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여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와 같은 거대담론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90년대 여성소설은 여성억압의 원인을 좀 더 미시적인 권력관계나 다양한 생활문화 영역 속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동시에 그 동안 수동적이고 나약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졌던 여성성을 긍정하고 재규정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전개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여성 고유의 내면심리, 사고방식, 생활방식 전반에 관한 논의가 넘쳐나고 있으며, 이제 여성주의 담론이 당당히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여성문학 역시 문학의 주요한 영역으로 그 자리를 굳혔다.

2000년대 들어 연애나 결혼 문제를 쿨한 감수성으로 그려내거나 센스있는 문장과 재기 넘치는 글쓰기로 신세대 독자들을 사로잡은 소설들은 많지만, 진지한 여성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 있는 소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천운영은 가장 도발적으로 새로운 문학적 스타일을 만들어 온 작가라 할 수 있다. 천운영은 한국소설과 여성소설의 계보를 일신하며 여성성의 문학적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작가다. 첫 번째 소설집 ‘바늘’에 이어 두 번째 소설집 ‘명랑’에서도 천운영은 야생의 여성성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더욱 고집스럽게 밀어부쳤다. 그 가운데서도 ‘멍게 뒷맛’이라는 작품을 통해 천운영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천운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불우한 성장과정을 겪는다.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이 결여되어 있으며, 성장과정에서 버려지거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기 일쑤다. 또 천운영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외모의 결함을 갖고 있거나 늙고 병든 노파가 많다. ‘멍게 뒷맛’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 역시 폐백용 오징어 꽃을 만들며 혼자 살아가는 여성으로 구체적인 가정환경이나 외모는 전혀 묘사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다는 사실, 혼자 산다는 사실, 구김살없이 친절하고 예쁘게 생긴 옆집 여자를 시기한다는 사실, 옆집 여자가 남편에게 매맞는 것을 엿보며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 옆집 여자가 불행해 지는 데에서 삶의 욕구를 느낀다는 사실 등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위와 같은 설정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설정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항상 현실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며 도태되어 있거나, 자폐 상태에서 현실의 경계에 가까스로 발을 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은 상태가 오히려 등장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삶의 욕망을 불어넣어주고 있는데, 세계와의 경험이 부정적일수록 그 욕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억눌린 욕망, 결여된 욕망은 삶에 대한 욕망과 상관관계에 놓여 있으며 매우 공격적이고 야성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억눌린 욕망을 표출하는가? 이것이 천운영 소설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이 고리 역할을 한다.



2. 육식, 그리고 공격성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음식에 관련된 주제들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폭식, 거식, 육식, 채식, 다이어트, 조리욕망 등 음식을 둘러싼 다양한 행동패턴이 여성성을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흔히 육식이나 생식은 인간의 공격성과 연결된다. 당연히 육식은 종종 남성성이나 섹스의 공격적 본능에 비유되기도 한다.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 같은 행위들이 동일한 권력관계를 동반한 메커니즘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한 동안 우월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던 남성성을 비판하고 반대로 그 동안 부정되어왔던 여성성을 긍정할 때, 여성의 식물성 내지는 친환경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의 여성성이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에 국한되고, 여성의 생명력을 긍정할 때도 출산과 육아와 연관 지어서만 사고했던 일련의 흐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의 식물성 생명력, 공격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고 품어 안는 생명력은 근대성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되기도 했다. 에코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발견이었다. 90년대 이후 갈 길을 찾지 못하던 비판 이론도 여성주의나 생태주의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경향에 익숙해진 독자라면(나를 포함해) 천운영이 창조해낸 야생의 여성상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다. 소설을 읽고 난 후에도 이물감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그 야생의 여성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주는 도구가 육식(생식)이다. 천운영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육식을 즐긴다. 그것도 최대한 익히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즐긴다. 즐긴다기보다는 탐닉하며 몰입한다. 육식은 억눌린 생의 욕망을 표출하는 첫 번째 도구다. 다연히 그 과정 또한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가) 멍게를 삼키는 당신의 얼굴에 작은 파랑이 일었다. 멍게 돌기를 오독 오독 씹을 때는 바위에 부딪치는 거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입 안에는 바다가 들어찼다. 멍게를 한입 넣었다. 새곰한 맛이 콧구멍부터 목젖까지 아련하게 번져왔다.


(나) 열정적인 키스를 건네오는 연인의 혓바닥을 받아들이듯 나는 어느새 보드라운 멍게 살에 빠져들고 있었다.

멍게를 먹으면 살고 싶어져요,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멍게 뒷맛’에서 옆집 여자는 남편에게 매를 맞고 난 다음에 언제나 ‘나’를 찾아와 함께 멍게를 먹는다. 공격받은 여성은 육식(생식)을 통해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고 강렬한 생의 욕구를 느낀다. 육식은 배를 채우거나 음식맛을 즐기는 차원을 넘어 삶의 욕구를 되찾기 위한 과정으로 묘사된다. 주인공 역시 멍게를 먹으며 비슷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멍게를 먹는 행위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핵심적인 매개체 역할을 한다. 육식은 공격성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상대의 철저하게 파괴될수록 생의 의지가 샘솟는 주인공은 옆집 여자가 매맞는 장면을 엿들을 때마다 멍게를 먹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힌다.



3. 희생제의


육식(생식)이라는 설정이 다소 생소하다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육식이 어느 정도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다 해도 누구에게나 내면에 그 정도 공격성은 갖고 있을테니 말이다. 남편에게 매를 맞은 옆집 여자가 ‘멍게를 먹으면 살고 싶어진다’는 독백을 하는 순간, 주인공은 옆집 여자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연민에 사로잡힌다. 이제 독자들은 옆집 여자와 주인공이 함께 멍게를 먹으며 생의 의지를 다지고, 여성으로서 자매애를 느끼며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상황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천운영의 난감함은 계속된다. 그녀는 부두키트에 대고 바늘을 찔러대며 상대의 불행을 비는 주술행위처럼 옆집 여자가 불행해지기만을 빈다.


이 쯤에서 소설 제목이 ‘멍게 뒷맛’인 이유를 살펴보자. 옆집 여자가 죽어버리자 모든 생의 의지가 꺾여버린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어둠에서 탈출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수산 시장이다. 멍게를 한 박스사서 썰지도 않은 멍게를 통째로 입 안에 쑤셔넣는다. 멍게를 만지는 그녀의 손은 금단 현상을 보이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나 멍게는 이전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멍게 뒷맛은 이전처럼 달지 않고 시큼하고 비릿하다. 그렇다면 과연 육식 말고도 무엇이 그녀를 살게 했던 것일까? 옆집 여자가 육식을 통해 삶의 의지를 다졌다면 주인공을 살게 하 힘은 ‘타인의 불행’이었다.

희생제의는 천운영 소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억눌린 욕구를 발산하는 가운데 공격성이 표출되는데, 이들의 공격성이 사회를 향한 무차별적 공격으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희생자를 찾아 공격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멍게 뒷맛’에서 주인공은 옆집 여자의 불행 속에서만 행복을 느낀다.


(다) 당신 얼굴 어디에도 조금 전의 소란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옷매무새나 머리는 헝클어짐 없이 단정했고, 얼굴에는 긁힌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위를 든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마음의 독기를 조절해야만 했다. 된통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속에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당신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버리고 싶었다. 내 손으로 오리고 구부려서 다른 얼굴의 꽃을 만들고 싶어졌다. 보드랍고 환한 당신의 얼굴을 어려 딱딱하고 냄새나는 오징어 꽃처럼 만들어야 했다. 가위를 주니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당신의 집으로 달려가 불행의 증거를 내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라) 당신의 길고 풍성한 머리 다발이 함부로 뒤엉키고 뽑히는데도 나는 밖으로 나가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나는 현관문 보안 구멍으로 당신의 매 맞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오히려 남자를 응원하며 남자의 발길질이 조금 더 거칠어지고 당신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길 꿈꾸었다.


(마) 나는 당신이 남자에게서 벗어나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당신은 내 곁에 남아 생의 활기를 불어넣어주어야 했다. 이제 나는 당신의 행복한 얼굴을 견딜 수 없었다. 당신의 불행 없이는 어떤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당신의 불행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심지어 옆집 여자가 난간에서 추락해서 죽고 나자, 여자는 아무런 생의 의지를 느끼지 못하고 시들어간다. 심지어 멍게조차도 생의 의지를 자극하지는 못한다. 옆집 여자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녀는 이제 옆집 여자가 항상 바라보던 그 동백나무 아래, 옆집 여자가 떨어져 죽은 그 동백나무 아래에 누워 옆집 여자의 고통을 기억해내는 일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작품이 끝난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그래 당신 이제 만족한가?’


4. 죽음, 가장 강렬한 생의 욕망


결국 공격적으로 표출되는 생의 욕망은 언제나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 자살이건 타살이건, 자신이 죽건 남이 죽건 천운영의 소설에서는 항상 누군가가 죽는다. 희생제의를 통한 공격적 본능 표출 속에서 삶의 의지를 찾는 절망적 인물들이 죽음으로 치닫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말일지 모른다. 생은 언제나 고통으로 가득차 있고, 동전의 양면처럼 삶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함께하는 죽음의 존재. 삶 위에 덧칠되어 있는 죽음의 그림자. 이것이 천운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근원적 표정이다. 살면서 죽음을 연기하고, 죽는 순간 가장 강렬한 생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소설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결론 외에 아무 것도 말해주고 있지 않은 것일까?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얼핏 얼핏 생을 긍정하려는 의지가 엿보이지만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여성으로서 삶을 긍정할 만한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끊임없이 강조되는 야생의 여성성은 강인한 생명력과 강력한 생의 의지를 동반한다. 생명이 생명으로 살지 못할 때,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서려는 몸부림은 더욱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결국 야생의 여성성은 긍정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공격적 본능의 표출구로만 기능하고 있으며, 생명에 대한 긍정은 보듬고 공생하고 어루만지는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죽음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를 동반하고 있다. 여성에게서 찾아낸 새로운 발견이란 남성과 다를 바 없는, 근본적으로 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적인 공격성 밖에 없는 것인가? 과연 이 세상을 긍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이란 말인가? 본능적 생의 의지는 결국 누군가를 공격하고 증오하며 희생시키며 자신도 함께 파멸해가는 고통일 수 밖에 없단 말인가? 아니면 아직도 그녀가 새롭게 쓰고 있는 여성성의 의미파악이 끝나지 않은 것인지 벌써부터 그녀의 행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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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마지막회 방금 끝났다.

푸하하...완전 코메디가 따로 없다.

월간조선 볼 때만큼이나 많이 웃었다.

이것 참 고작 이 결론을 보자고 한 편도 안 빼놓고 다 봤단 말인가?

배신감 드는 거 나뿐인가?

 

 

왜 이러는거야... 왜 삶을 농락하는 거야... 드라마가 장난이냐...

15편까지는 뭐하러 찍었어...그냥 마지막회 하나만 찍어서 베스트 극장 같은 거 내보내지.

뭐하러 두달을 기다리게 만드냐고...

정말이지 두 달동안 이 드라마 갖고 온갖 추측 해가면서 수단 떤 게 우습게 느껴진다.

특히 마지막회 손예진 멘트는 정말이지, 그 동안 좋았던 멘트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가볍고, 유치했다. 그 모든 멘트의 진실성을 완전히 코메디로 격하시켰다.

아후~~ 5년후란 멘트 뜨고 손예진, 감우성이 어린 딸과 공원에

앉아있는 장면은 뭐냐고...

아무리 해피엔딩을 좋아해도 정도가 있지... 해피엔딩으로 끝내놓고 끝까지

심각한 척 똥폼잡는 그 멘트는 또 뭐냐고... 해피엔딩도 예의가 있어야지...

상식이 역전되는 기분이야. 한국 드라마 좀 나아지나 했더니 이게 뭐야...

차라리 손예진 불치병 걸리게 하지. 아님 감우성이랑 손예진이 알고 보니 배다른 남매였다는

설정도 괜찮네..

 

재결합을 희망했던 동생도, 아름답고 성숙한 상처를 바랬던 나도, 가장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감우성의 재혼을 받아들이던 누나도 ... 오늘 엄청 웃/었/다.

근데 마음이 아팠다. 비틀린 썩소를 지었다.

 

 

 

그래서,

 

 

드라마에 열광하고 배신감 느끼는 내가 븅신이지...ㅋㅋㅋ

마지막회만 아니었으면 연애시대 정말 길이 남을 명작이 될 뻔 했는데...

옛끼...못된 피디...욕이나 실컷 먹고 철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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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여우비님의 [연애시대와 소울메이트] 에 관련된 글.

 

1.

 

언제부턴가 드라마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대리만족같은 것도 있고, 누나 동생이랑 수다 떠는 것도 좋고, 내 문제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해본다. 처음 [네 멋대로 해라] 때문에 살짝 흥미를 갖게 된 이후로 최근에는 떨리는 가슴, 내 이름은 김삼순, 두번째 프로포즈 정도를 재밌게 본 거 같다.

 

요즘은 연애시대를 보고 있는데 비슷한 고민이 많아서인지 쉽게 몰입이 된다. 연애시대가 재미있는 이유는 매사 무사태평하고 상큼한 사랑이야기 보다는 고통스럽게 상처를 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그럴 듯 해보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만남, 불타는 사랑, 갈등 극복, 결혼으로 이어지는 사랑이야기는 극적 요소를 제외하면 인생의 진실성이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너무 럭셔리한 애들 얘기가 많다.

 

연애시대도 그런 면이 없는 건 아니다. 서른살 이혼남이 분당에 빌라를 소유하고 살고 있다는 설정, 게다가 안정적인 직장에 이미 직급도 꽤 높다. 손예진 역시 경제적인 고민거리는 전혀 없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현모양처가 꿈이었다. 둘은 모두 가정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종종 현실과 타협을 하는데 그게 좀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사실 그런 타협들이 더 현실적인 면도 있다. 내가 그런 현실적인 타협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 나서는 더 그렇다.

 

2.

 

현실적으로 감우성과 손예진이 재결합하는 게 맞는걸까? 아니 좋은걸까 생각을 많이 해본다.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 다시 결합해도 힘들고 떨어져 있어도 힘든 사람들. 대개 그렇듯 나도 감우성의 '애매모호한' 플레이와 우유부단한 행동이 짜증스럽다. 그런데 또 대개 그런 행동을 이해하는 사람도 다수. 아무튼 감우성이 결국 손예진에게 돌아가는 결말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을텐데, 감우성이 재결합을 선택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죽은 아이' 때문이니 가정적인 여자(궁중 요리사로 표현되는 지적이고 점잖은 스타일)와 재결합한다는 설정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사실 둘이 다시 결합하는 결말이 나오면 좀 짜증날 거 같았다.)

과연 그 날, 감우성은 어디에 갔을까? 이것이 마지막 이야기를 풀어가는 열쇠일텐데 누나는 '사건 당일'날 감우성이 출생신고를 하러 갔을거란 추측을 내놓았다.

 

'아~~~뜨시'

 

누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절로 탄성이 나온다. 와, 우리 누나 머리 디게 좋다. 작가적 상상력!! 그래서 내가 생각해본 최악의 결말은 손예진이 그 사실을 알고 감우성을 이해하는거다. 그리고 1년후란 자막이 뜨면서 손예진이 새사람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는데 감우성이 와서 축하해주는 장면이다. 생각해보면 이게 최상의 결말이다. 가장 현실적인 결말이기도 하지 않을까? 손예진 역시 가정적인 여자니까.(헤어진 사람과 다시 사랑하는데 어머니 같은 마음이면 충분하다는 충고도 깨름직하다)

 

아무튼 아이가 헤어짐의 매개가 된다는 설정, 또 상처를 극복하는 매개도 된다는 설정. 각자 새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는 설정... 모두 찝찝하다. 낭만은 짧고 생활은 길~~~다는 것인가? 한겨레21에서 연애시대를 분석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요점은 '결혼 없이 연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는데 아쉽게도 결론은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시들해지기 마련'이라는 식이었다. 근데 또 맞는 이야기같다.

 

끝내는 감우성이 아이에 대한 집착이 적었다면, 부부-아이로 구성되는 가정생활에 대한 집착이 덜했다면 아이를 잃고 상처입은 손예진을 감싸줄 수도 있었을텐데...하는 생각이 남아서 계속 찝찝하다.(아이는 또 가지면 되잖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아닌가?) 그러니까 결혼과 가족으로 이어지는 감우성의 욕망도 별로 긍정 못하겠다.

 

사람들은 왜 연애를 할까? 드라마는 끝내 결혼 말고 별 답을 주지 않은 듯 하지만, 또 그래서 현실적인 타협이 썩 맘에 들지 않지만, 둘이 고뇌하는 과정에서 이미 가능한 답은 다 나온 거 같다. 그래서 내가 뽑은 최고의 대사는 이거다.

 

일정한 슬픔 없이 어린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까?

지금은 잃어버린 꿈, 호기심,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제부터 장래희망을 이야기 하지 않게 된 걸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진정한 사랑은 그런 조건들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영원한 사랑같은 건 믿지 않지만, 성숙한 사랑은 있을 거 같다.

환상인 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같다.

아무튼 사랑은 좋다. 연애도 좋다. 재밌게 살고 싶다. 계속 꿈도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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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 업무가 돌아가는 방식

정말 오랜만에 수감기록을 쓴다. 수감생활이 끝난 지 한참 됐는데 꾸역꾸역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글의 의미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너무 흐르다 보니 신세타령으로 흐를 거 같아서 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생각한건데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의 편지를 꾸준히 소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거니 싶다. 아무래도 그들이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더 잘 해줄 거 같다. 아무튼 최근 들어 병역거부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데 소홀했다. 소식지도 잘 안 나오고 나 혼자 지친 것도 있고, 나는 맨날 듣는 소리라 별로 절실한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고. 정작 이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일단 시작은 지문날인으로 해보자. 이승규씨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지문날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으니. 그리고 구치소에서는 지문날인을 둘러싼 헤프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아차, 이승규씨 소개를 먼저 해야겠다. 이승규씨는 다산인권센터와 민주노동당 수원시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수감된 병역거부자다(궁금하신 분은 www.withoutwar.org에 들어가서 [병역거부자 만나기]를 클릭해보세요). 애초부터 지문날인을 거부해왔던 이승규씨는 수감시설 안에서도 계속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있어 고생이 이만 저만 심한 게 아니다. 영치금도 못쓰고 영치품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사실 난 지금도 지문날인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미 주민등록증은 만들었고 어지간해서 지문날인할 일이 없고 무엇보다 그 부분에 있어 절박감이 크지 않다. 될 수 있으면 더 이상 지문찍을 일이 없기만 바랄 뿐이다. 주민등록증도 아주 늦게 만들었는데 그것도 의식적인 도전이라기 보다는 기나긴 수배생활로 인한 자연스러운 지연에 불과했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도 인권문제에 초점이 맞춰진 건 아니다. 구치소가 굴러가는 시스템을 살짝 보여주려는 게 이 글을 목적이다.

 

 구치소 안에서는 지문날인에 얽힌 사건들이 참 많았다. 수감시설마다 대응방법이 달라서, 가령 이승규씨가 수감되어 있는 김천교도소는 원칙적으로 지문날인을 고집하고 있지만 서울구치소는 사정이 달라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온갖 헤프닝이 벌어진다. 지문날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이승규씨 같은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다. 대부분은 정확한 의미로 지문날인을 '기피한다'. 매일 인주밥을 먹은 엄지손가락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을 때가 많았고, 재수없게 보라색 스템프라도 찍으면 그 자국이 며칠씩 간다. 매번 지문을 찍을 때마다 기분이 아주 찝찝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손에 자국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남에게 대신 찍으라 시키고(여기서도 위계질서는 꾸준히 작동한다), 새끼 손가락으로 찍고, 휴지대고 문지르고, 경우에 따라 눈치껏 싸인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열 사람의 정체성을 대신하기도 하고 발가락이 손가락을 대신하기도 한다. 심지어 교무과 감사 나온다고 하면 몇 달치 '자변도서 구입원장(수감자들이 자신의 영치금으로 직접 책을 주문할 수 있다. 영치금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는 지문날인을 요구한다)'을 죄다 꺼내서  비어있는 지문날인란에 일일이 지문을 찍어댄다. 교무과 출력수 몇 사람이 수십, 수백명의 지문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밥먹듯이 이루어지는 '문서조작'이고 '불필요한 문서 남발'이지만 이런 관행은 매번 반복된다. 어차피 그 수많은 지문을 판독할 시간도 없겠지만 그나마 판독이 가능할만큼 온전히 찍혀있는 지문이 거의 없다. 그만큼 지문날인은 이미 '규정만 남은' 불필요한 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교도관들은 업무상 마찰이나 수용자들의 문제제기가 발생하면 유일하게 사실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지문날인 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 예산 부족으로 시스템이 낙후한 것도 문제지만, 교도관들의 무사안일도 큰 문제다. 나에게 문제만 터지지 않는다면 무조건 변화를 거부하는 공무원 사회의 정서 때문에 구치소 운영시스템은 여전히 80년대 수준이다.  정치사범, 대형 경제사범같은 소위 '범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문을 찍을 일이 없다. 사동청소부(사동 수감자들에게 식사나눠주고 청소하고 교도관 잡일 거드는 출력수들)가 대신 다 찍어주고, 사동청소부도 안 보이면 교도관들이 대신 싸인해주고 도장찍어주고 다 한다. 이미 다 보여주고 있는 거 아닌가? 교도관들이 신원확인을 하는 게 제일 확실한 본인확인 수단이다. 갇혀 있는 사람들은 항상 똑같고, 가슴에 수번까지 달고 있는데 그보다 더 확실한 본인확인 수단이 어딨나? 지문 대신 사인이나 도장써도 똑같은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싸인하라 그러면 돼지꼬리 그려넣는 사람에서 다른 사람 이름 써넣는 사람까지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다. 교도관들이 좀만 부지런하면 문제는 다 해결된다. 그런데 안한다. 바쁘다고 하면서 하루 종일 잠자거나 범털들 불러서 노가리까고 신문 뒤적거리다 집에 가는 교도관들 많다. 하기사 교도관들의 노고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야근도 많고 사람들 인식도 좋지 않은데다, 공무원 중에서도 봉급이 가장 낮다는 예의 뼈에 사무치는 피해의식. 게다가 온갖 억지와 히스테리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비위 상하는 일도 많이 한다. 그래도 달라져야하는 건 달려져야지.

 

교무과에서 일하면서 정말 웃지못할 일이 있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출소한 국회의원 나리께서 과거에 자기 앞으로 들어왔던 책목록을 알고 싶다고 교무과에 정보공개신청을 했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졌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여전히 모든 문서가 전산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삼년 전 자료를 다 찾아내는 일이었다. 크허~~ 한 해에만 창고에 쌓이는 문서 박스가 창고로 하나 가득이다. 별 쓸데없는 온갖 종류의 서류들이 '법적 정보보존 기간'을 지키기 위해 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다. 결국 교무과 직원들은 안절부절하며 각종 방안을 모색했으나, 전 국회의원 나리의 요구인 이상에야. 토요일 하루 종일 창고에 쳐박힌 수십 박스의 서류를 다 꺼내서 뒤졌다. 그 나리께서 삼년전 읽었던 책 제목을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크허~~ 삼년전 서류를 뒤지다가 내가 전에 수감되어 있을 때 자료를 찾아냈을 때는 정말 기분이 묘했다. '그래 그 때는 이 책을 읽었었군.' 하고 혼자 묘한 감상에 젖었다.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구색맞추기로 책 목록이 완성되었다.

 

하루는 천정배 장관이 방문한다는 이유로 토요일 대청소를 했는데 복도 전체를 물청소 하려니 이만 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청소를 하는 건 좋지만, 꼭 하필 장관이 오기 전날이냔 말이다. 괜히 짜증이 났다. 그래서 약간 항의를 했더니 교도관 왈, "야 원래 이런 날에 청소하니까 이 만큼이라도 청결이 유지되는 거잖아." 그렇다. 이거야말로 교도소가 운영되는 시스템의 단면을 제대로 보여준 거 아닌가. 자연스레 대청소 날이 정해지는거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시스템인거다. 연대장 방문하면 길을 닦는다는 군대랑, 법무부 장관이 방문한다고 대청소하고 페인트칠 새로하는 감옥은 뭐가 다른가?

 

어느 사회나 관행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관행은 변화보다 더 손쉽고 달콤하다. 사람들은 복잡한 토론이나 민주주의 따위 보다는 손쉬운 명령과 복종관계로 유지되는 관행을 사랑한다.  관행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자못 진지한데 일이 전개되는 양상은 서글프다. 차마 웃지못할 서글픈 코메디. 자신이 그 코메디에 참여하고 있을 때는 어떡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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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외출

엄마는 중풍 6년차 1급 장애인이다.  조금씩 기력이 떨어지더니 이제는 거실도 잘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잘 나오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고 해야 하겠지만 의지의 문제도 무시할 순 없다.

 

"운동을 해야 좋아지지. 이렇게 안 움직이면 좋아지겠어?"

"내가 운동을 하기 싫어서 안하니? 아파서 일어설 수가 없어"

"엄마, 그럴수록 더 운동을 해야지. 나중에는 아예 일어서지도 못해"

"니가 내 심정을 알기나 해. 건강할 때 잘해주지 그랬어?"

"매일 그렇게 과거에 얽매여 살면 뭐가 달라져?"

"됐어. 듣기 싫어. 나가"

"...."

"...."

"그러지 말고 날도 따뜻해졌는데 한 번 나가자."

"알겠어...나중에..."

"...."

"...."

 

엄마랑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난다.

그런 엄마가 오늘,올해 들어 첫 외출을 감행했다.

종교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엄마는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고 있는 성당 체육대회에 가보고 싶었던 거다. 그러나 막상 밖에 나가자고 결정을 내려도 실제로 나가기 까지는 엄청난 시간 동안 신경전이 벌어진다. 날이 춥고 꾸물꾸물하다. 엄마는 이내 맘을 바꿨다. 역시나 성질 급한 아빠는 또 화를 낸다. 나는 그런 아빠를 공격하며 엄마 편을 든다.

 

"(아빠)나가기 싫으면 말어. 누가 나가라고 그랬냐? 나는 아쉬울 거 없어"

"(엄마)....."

"(나)아빠는 나가자고 했으면 끝까지 상대 기분을 맞춰줘야지. 그 정도도 못하냐? 그리고 엄마는 상대가 자기 염려해주는 거 알면 좀 맞춰줄줄도 알아야지."

"(엄마)....알았어...나가자고..."

 

그렇게 엄마, 아빠, 나, 동생 넷은 휠체어를 들었다, 밀었다, 끌었다 해가며 운동장에 도착했다. 집이 3층이라 엄마 혼자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겨운 일이다. 어느 정도는 혼자 움직이다 안되면 휠체어를 들어야 한다. 엄마에게는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그래도 오랜만에 나오니까 기분이 좋은가보다. 노래도 부르고, 풍물 소리에 맞춰 춤도춘다. 휠체어에 앉아서 엄마가 춤을 춘다. 왼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얹혀 있고 오른손으로 휠체어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춘다.

 

그렇게 동네 운동장 구경 한 번 하는데 한나절이 흘렀다.

엄마를 가두고 있는 마음의 감옥.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장애인을 옥죄는 현실의 감옥.

1년에 한 번 외출하기가 이렇게 힘든 세상이지만, 그래도 다음에 한 번 더

엄마 마음에도 봄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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