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회> 이번 가을호(107호)에 게리 베커와 프랑수아 에왈드, 버나드 하코트가 2012년 시카고 대학에서 가졌던 짧은 대담이 번역돼 실렸다. 게리 베커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인적자본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이고, 프랑수아 에왈드는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시절 조교이자 그의 사후 강의록 출판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 둘 간의 흥미로운 대담을 성사시킨 버나드 하코트는 최근 범죄학과 법철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푸코 연구자 중 한 명이다. (최근까지 시카고 법대에 있다 올해 7월에 컬럼비아로 자릴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 돌아가면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닿기를.)

 

푸코가 1979년 강의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논하면서 게리 베커의 인적자본론을 다룬 사실은 유명하다. 이 대담은 푸코의 코멘트에 대한 게리 베커 본인의 생각과 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에 대한 에왈드, 하코트의 (다소 엇갈리는) 의견을 담고 있다. 대담의 성사 자체가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던 데 비해 실제 대담은 다소 심심한 편이지만, 쉽게 읽히는데다 덧붙여진 강동호씨의 해설도 훌륭하니 기회가 되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길.

 

원문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Becker on Ewald on Foucault on Becker: American Neoliberalism and Michel Foucault's 1979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애초에는 이 대담에 대한 짤막한 논평을 트위터에 올릴 생각이었으나,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아 오랜만에 블로그에 이 대담과 관련해 짤막하게 (정리되지 않은) 노트를 남겨놓는다.
 

 

1. 강동호씨의 해설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이 대담에서 주목할 대목 중 하나는 인적자본론이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오히려 인적자본은 "모든 사고에 인간을 중심에 놓는" 지극히 인간주의적이고 도덕적인 담론이라는 게리 베커의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적자본론에 대한 (아마도) 가장 표준적이면서 흔한 비판은, 이 담론이 인간의 모든 삶에 경제적 계산의 원리를 적용시키려는 "비인간적" 이론으로, 인간은 하나의 자원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은 경제적 계산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들(사랑, 희생, 도덕 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일 것이다.

 

 

2. 그러나 이러한 인간주의적 비판은 사실 느슨할 뿐 아니라 무력한데,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인적자본론과 인간주의 담론의 중첩,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베커의 지적처럼) 인간주의적 가치 자체가 인적자본의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아마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이나 "역량 개발"이라는 개념 속에서 이러한 인적자본론의 인간주의적 판본을 발견할 수 있다. 혹은 내가 다른 글에서 이미 들었던 예이지만, 한국의 모 대기업에서 내세우고 있는 "사람이 미래다"같은 캐치프레이즈나 "사람에 투자하고 사람이 주인되는 휴먼시티 00"같은 지자체의 구호는 우리에게 인적자본론과 인간주의 담론을 구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3. 따라서 우리는 인적자본론에 대한 안이한 인간주의적 비판에 기대기보다는, 인적자본론이 각종 통치 담론의 중심이 되면서(푸코가 이야기했듯이 이 과정 자체가 바로 신자유주의화이다), 인간과 사회의 상상에 있어서 등장한 근본적인 변화들에 좀 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신자유주의 연구 분야에서는 이러한 부분에 주목한 연구들이 상당수 제출되고 있는 상황인데, 아마도 나에게 <문학과 사회>의 해당 섹션을 구성할 권한이 주어졌다면, 게리 베커의 사상에 대한 홍기빈씨의 평이한 해설보다는 미셸 페허의 이 글을 번역해서 덧붙였을 것 같다. 

 

Michel Feher, "Self-Appreciation; or, the Aspirations of Human Capital", Public Culture 21(1), 2009

 

 

4. 이 도발적인 글에서 페허는 인적자본론의 도입이 어떻게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인간상(이해관계와 탈이해관계적 호혜성의 구분에 기반한 인간)과 사회상(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교환의 영역과 호혜경제에 의해 지탱되는 재생산 영역의 구분에 기반한 사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지 보여준다. 페허는 논의 전반에 걸쳐, 고전적인 자유주의 인간상을 자유로운 노동자free laborer로 형상화하면서 인적 자본human capital과 대비시키고 있는데, 그 중 한 구절만 인용해 보자.

 

"[기존의 자유주의 하] 자유로운 노동자는 분리된 존재이다. 그는 양도불가능한 주체성과 양도되는 노동력 사이에서, 노동자의 재생산(즉, 생물학적․사회적․문화적․도덕적 재생산)과 상품의 생산.순환.소비 사이에서 분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정신적인 열망과 물질적인 이해관계의 추구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이 분리들의 결과로, 시장의 원리 및 가치와 시장 외부에서 발견되는 원리 및 가치 간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반대로 인적자본은 생산 영역과 재생산 영역 간의 이러한 분리를 가정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다양한 것들은 그것이 어떤 영역에 속하건 간에 모두 나 자신인 인적 자본을 증감시키거나 가감시킨다. 그 자신의 인적 자본의 투자자로서, 주체들은 그들 삶의 모든 국면에 적절한 행위들의 포트폴리오를 관리한다. 그들의 포트폴리오에 담긴 주식의 수익률은 생산 활동과 재생산 활동,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직업 영역과 가정 영역 등의 구분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시장 원리의 삶의 전영역으로의 침투"(깁슨-그래험이라면 또 다른 강간 스크립트라고 비판할 관점)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없으며,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주체적 형성으로서 인적 자본이 생산과 재생산의 구분을 없앤다는 지적은, 신자유주의가 인간존재와 지구 전체를 시장의 법칙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는 가장 흔한 형태의 신자유주의 비판과는 다르다. 이러한 흔한 비판은 신자유주의적 조건을, 점차 확장해가는 시장에 포위된 자유노동자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 때 신자유주의 비판은 시장의 확대를 거부하고 소비자로 환원될 수 없는 "진정한" 주체를 주장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개인을 "자신에 대한 투자자"로 이해하는 인적자본론의 확대는, 바로 내밀한 자아와 기업가 간의 이러한 구분을 극복하려는 욕망의 결과이다."

 

 

5. 이후 전개되는 페허의 논의를 여기서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관심있는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사실 구체적인 주장들로 들어가면, 페허의 글은 도식적일 뿐 아니라 많은 비판지점을 안고 있다 (특히 그는 자유주의적 그리고 신자유주의 통치 자체를 이질적인 전략 및 장치들로 구성된 하나의 형성물이 아니라 어떤 동질적인 대상인 양 취급하고 있다). 동시에 글의 결론 부분에서 그가 "신자유주의적 조건을 수용한 상태에서" 도출해 제시하는 좌파의 대안들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주장 중에 귀담아 들을 요소도 분명 존재하는데,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인적자본론이 인간과 사회의 상상 방식 자체에 개입하고 이를 통치하며 변화시키기에, 기존의 자유주의적 인간론과 사회론에 기반한 인적자본론 비판은 계속해서 문제의 핵심을 겉돌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페허에 따르면 시장 대 사회, 이해관계 대 호혜성, 경제적 주체 대 도덕적 주체의 대립구도에 기반한 낡은 자유주의적 프레임은,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근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적자본론의 확산을 가져오는 바로 그 토양을 형성한다. 곧 (드디어!) 출판될 <푸코 효과>의 역자후기에도 적었지만, "자유주의적 신자유주의 비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이러한 스탠스는, 우리의 정치적 전망을 시장근본주의 대 그에 대한 인간주의적.자유주의적.도덕주의적 비판이라는 앙상한 대립틀 속에 가둬놓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6.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 및 인적자본론 비판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대 자유주의 혹은 인적자본론 대 휴머니즘의 구도를 넘어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가져온 근본적 변화들을 밝혀내는 작업이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은 정체도 불분명한 사회나 도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작동과 헤게모니 자체를 설명의 대상으로 삼고 이들이 새롭게 생산하고 있는 "사회성"과 "도덕성"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천착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이다. 기존의 휴머니즘이나 사회연대적 가치가 인적자본이나 신자유주의적 프레임과 어떻게 뒤엉켜 들어가면서 혼종적 영역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페허의 표현을 빌자면 이 새로운 조건을 "embrace"한 후에야), 인적자본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통치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유의미한 비판과 개입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주장도 놀라운 주장도 아니지만, 이러한 작업의 필요성이 좌파 진영에서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 듯 하다. 조금은 갑작스럽지만 게리 베커의 대담에 대한 소개가, 그리고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사회성이나 윤리성"같은 얼핏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영역에 주목하는 페허 같은 몇몇 이들의 작업이 반가운 이유다.

 

 

P.S. 잠이 안오는 밤에 베커와 에발드의 대담문과 미셸 페허의 흥미로운 작업을 소개하는 선에서 짧게 쓰려던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페허는 최근 골드스미스에서 인적자본에 대한 연속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조만간 책으로 출판되지 않을까 싶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링크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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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01:31 2014/09/18 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