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7년 소위 국정농단사태는 대중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비판하는 자들은 이제껏, 만약 그들이 합리적인 논리와 타당한 윤리를 확보한다면, 비판되는 자들이 처음에는 사리사욕 때문에 저항하지만, 결국엔 그들 스스로도 논리의 한계를 느끼고 부끄러워서, 차마 비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국정농단사태를 겪으면서, 비판되는 자들의 – 전두환보다도 더 한 - 논리 없는 무조건적 자기옹호와 어떤 윤리도 처음 듣는 듯한 태도에, 오히려 비판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논리와 윤리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나하고 당황해 의심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비판되는 자들이 이렇게 무논리와 무윤리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특히 소위 지도층 혹은 어른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사회에 더 이상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 아니었나 한다.

 

그런 점에서 “알.쓸.신.잡.”의 인기가 이해될 수 있다. 즉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서 역사적 역할을 마무리한 386이 다시 정신적 어른, 선배로서 역할을 하도록 시대적 분위기가 마련된 것이다. 386에게 그러한 어른의 역할이 새롭게 부여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의 과거의 이념을 버리고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에 귀의했으나, 그들이 과거에 공유했던 추상적인 민주주의관과 인간주의관, 그리고 그 지평 안에 있던 인문학적 사유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어른의 역할 속에서 생산되고 또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386의 인문학적 발언들은 엄밀한 사회과학적 사유를 포기한 것으로서, 마냥 넉넉하게 바라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 하나의 예가 ‘자본이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통해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소비를 진작시키고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드러난다.

 

 

 

 

첫째, 이 주장은 기존의 생산관계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자연화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즉 이 주장은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통해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동력 없이 물질적 부가 생산될 수 있는 사회에서, 왜 자본, 이윤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이와 달리, 자본, 이윤, 그것을 낳는 사회관계의 지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면, ‘그러한 사회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그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기본소득은 기존의 사회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관계의 틀을 넘어서는 생산력이 발전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통해 노동력이 필요 없는 사회가 초래된다는 기술결정론적인 가정을 서술전략상 임시로라도 받아들인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이러한 비판이 기술결정론적 가정을 받아들일 때, 가사노동을 배제하는 문제가 있다. 이와 달리, 마틴 포드는 “로봇의 부상”에서 가사노동의 자동화도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둘째, 더 나아가서, 이 주장은 ‘기본소득을 통해 인공지능과 자동화에 근거한 자본주의사회를 지속시키는 것’이 가능한가란 문제에 직면한다. 본래적 의미의 기본소득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충분한’ 수준의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충분성,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이라는 원리를 가진다. 여기서 자세히 논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수준의 기본소득은 노동력의 상품화를 저지하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다.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도입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본래적 의미의 기본소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기본소득의 원리인 충분성은 ‘노동시간’과 ‘소득크기’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분리시킨다. 이것은 ‘노동한 만큼, 혹은 노동시간만큼 소득을 받는다’라는 자본주의사회의 실행원리와 충돌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의 가치’로 경험주의적으로 신비적으로 표현된다. 임금노동자가 ‘노동의 가치’를 받았으므로 착취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자본물신의 한 표현이다. 이로부터 ‘노동한 만큼, 혹은 노동시간만큼 소득을 받는다’라는 실행원리가 초역사적으로 정당한 규범으로 보인다. 기본소득의 충분성 원리는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자라나는 실행원리 규범에 균열을 낸다. 이런 의미에서도 기본소득을 통해 인공지능과 자동화에 근거한 자본주의사회를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실행원리는 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초래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셋째, 유시민은 맑스가 말한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미래’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기존 관념으로는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인공지능과 자동화에 근거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본래적 의미의) 기본소득 도입된다면, 인공지능, 자동화, 기본소득에 근거한 미래의 자본주의사회는 맑스가 말한 공산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히 그의 기존 관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의 문제는 이미 위에서 다 설명된 것이다. 다시 요약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유시민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무시하기 때문에,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통해 생산력이 발전된 상태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생산관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효수요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만을 고려한다. 2) 그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무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에서 본래적 의미의 기본소득이 도입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3) 그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무시하기 때문에, 결국 인공지능, 자동화, 기본소득에 근거한 자본주의사회와 공산주의사회를 동일시하게 된다.

 

이처럼 유시민은 “분배왕”이란 별명을 얻지만, 사회관계, 생산관계, 그것의 변화를 전혀 고려치 않는다. 왜? 그러한 변화는 민주주의의 억압과 독재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시민과 정규재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밀한 사회과학 없는 인문학, 그 인문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시대의 어른의 역할을 부여받고 되돌아 온 386. 이것이 내가 “알.쓸.신.잡.”의 인기에서 생각한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금요일엔 무엇을 보나..

 

 

보론: 임금노동이 없는 우울한 미래사회?

 

 

마틴 포드의 “로봇의 부상”에서 보듯이, 인공지능과 자동화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이 도입되지 않으면, 영화 “엘리시움”과 같은 사회가 형성될 수 있다는 걱정이 있다. 그러나  그 사회는 더 이상 자본주의사회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때는 당연히 맑스의 이론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이론이 요구될 것이다.

 

미래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로봇으로 생산하고 노동자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별도의 구역에 격리시키고 로봇으로 자신을 보호하게 한다는 전망은 미래사회가 ‘직접적 폭력지배’가 관철되는 사회라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임금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본물신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직접적 인격적 지배가 존재한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와 다른 계급투쟁의 양상을 초래한다.

 

그런데 영화 “엘리시움”과 같이 암울한 미래를 그린 영화들의 문제는 자본주의사회와 로봇에 바탕한 암울한 미래사회를 ‘연속적인 사회’로 바라본다는 데 있다. 즉 그러한 영화는 임금관계를 (로봇이 생산하고 임금노동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물신이 사라지고 직접적-인격적 지배관계가 관철되는) 미래사회에 투영하거나, 자본주의사회에서 (미래사회에서처럼) 직접적-인격적 지배관계가 관철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는 임금관계가 존재하며, 여기에서는 직접적-인격적 지배관계가 관철되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가 그리는 미래사회와 다른 사회구성체에 속한다.

 

영화 “엘리시움”을 보면, 미래사회는 마틴 포드가 “로봇의 부상”에서 말한 것처럼 임금노동자가 소멸한 사회라기보다는, 사실 임금노동은 여전히 존재하면서 1세계와 3세계가 분리되고 이민이 통제되는 사회에 더 가깝다. 즉 영화 엘리시움은 미래사회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의 현실을 그린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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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0 21:20 2017/07/30 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