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들이 대중을 대하는 모습

 

현재까지의 사회주의 운동의 모습에서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회주의 운동은 이론의 정립과 더불어 실천의 중요한 역할을 자임해 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건설하는 모습에서. 그런데 자본주의의 그 수많은 위기 속에서, 오히려 자본주의는 기사 희생하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은 쇠퇴의 길을 걸어 왔다. 한때는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축이지만 오히려 자본주의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많은 좌익들은 말과 행동은 엇박자로 대중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대중들은 그들을 부르주아의 사상과의 차별 점을 굳이 두지 못하는 실정이다.

 

왜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자본주의를 떠받히는 하나의 기둥으로 변하였는가? 그것은 그들의 사상이 대중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대중민주주의 핵심을 무시하고 형식에 매달려 대중을 기만하고 지배받아야 하는 존재적인 의식을 스스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 어느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인 것이다. 아직도 18c의 계몽주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 선진의식으로 대중을 지도?

 

어떠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누구든 핵심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지도를 해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상대편보다 높은 경지의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식을 가르치고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너는 나의 지식을 받아야 하는 피동적인 모습을 가지며, 그것을 나에게서 배우고 따라야 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는 존재로서의 우월적인 지위는 하나의 특권을 가지며, 동등한 입장이 아닌 상하의 관계를 정립하게 만든다. 계몽주의의 잔재가 시작되는 사고의 지점이다.

 

당과 대중의 관계의 정립은 스탈린주의의 모습에서 가장 최고점을 찍었지만, 좌익의 모습에서의 조직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상부의 권위에 도전해서도 안 되고, 도전을 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죄악이다. 그것이 싫으면 조직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대중관의 핵심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이 되어있다. 어느 조직이던지 사분오열이 되던지 단단한 결속으로 외부에서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을 지라도 그 핵심은 사상적인 권위 의식으로 무장되거나 무장을 시켜 조직의 상하 관계를 완성시킨 모습에 서클주의 그 이상의 발전적인 모색은 힘들어 졌다.

 

대중들에게 사상적인 권위를 조장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주의사상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는 것과 지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지도사상은 계몽주의시대의 자세를 그대로 받아들인 내용이다. 선각자로서 우매한 대중을 문명인으로 개화시킨다는 내용을 그대로 담아가지고 온 것이다. 즉 지도는 자신의 견해와는 다른 것을 용납이 안 된다. 선각자로서의 지도자는 대중들보다 우월한 위치와 지식을 그리고 먼저 갈수 있는 알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피동적인 자세가 되어야 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교사의 자격은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먼저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이미 먼 과거의 회상이다. 학교교육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하나의 축으로써 교육의 의미를 내세웠다. 현재의 자본주의 교육에서 조차도 상명하복의 형태의 모습이 아닌 교사와 학생이 동등한 하나의 인격을 가진 입장에서 만나야 함을 가르친다. 한국의 현실모습은 아직 그러하지 못하지만. 학교교육은 그러한 추세로 가고 있다. 즉 이전의 지도의 모습에서 함께 협의하고 모의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나가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는 더 이상의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나 학생의 이원화된 모습이 아니라 둘이 하나가 되는 변증법적인 관계다. 三人之行 必有我師 (삼인지행 필유아사).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에서 지도는 이젠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 조직의 수장들은 왜 자신들만이 결정을 강제하는가?

 

좌익의 지도자 또는 리더들은 책임감이 강하다. 지도자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며 모든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자신이 리더였다면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행동과 사상이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되어야 한다고 채찍질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그 실수에서 배우기도 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가거나, 리더로서 자리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개인주의 또 하나의 모습이다. 소영웅주의로의 발전의 모습이라고 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영웅적인 모습에 반대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퇴출이거나 폭행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모습에 자유로운 조직은 없다.

 

조직의 리더로서 왜 책임감을 스스로 지어야 할까? 그것은 조직의 의견의 결정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직이던지 조직이 유지발전하기 위해선 조직원들의 결사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리더의 의지가 강하다고 해서 그 조직이 발전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조직은 조직원의 상호의사소통과 의견의 결집 그리고 그들의 견해로 조직의 발전이 이루어 져야 한다. 조직원의 뜻과는 무관하게 중앙위, 리더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자신들의 견해만을 올바르다고, 일반 조직원의 뜻을 무시하거나 비판을 위한 칼날의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린 역사적인 모든 사건들은 조직이 조직원의 의사와는 무관한 몇몇 리더 및 중진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형태로 발전 해왔음을 보여준다. 재능노조에서 환구단의 활동의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환구단의 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사회주의조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노조에서 조차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한국의 조직운동이 대중과의 괴리감이 계속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한노총 민주노총 등등의 노동조합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비일비재하다. 위원장의 의무감 책임감 그리고 조직을 보존 유지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직의 중앙에서의 결정을 하부에서는 토론의 주제가 일방적으로 하달되며, 그러한 내용을 받아들여야 하는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하나의 현상이다.

 

모든 조직에서 자신들의 결정은 총회에서 이루어지진다는 모습으로의 발전은 민주주의 형식에서 찾아낸 하나의 초석이다. 하지만 총회의 모습은 내용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통과의례를 보여주기 위한 모습 그 이상이하도 아니다.

 

왜 중앙에서 결정을 하나? 이유는 빠른 공격, 신속한 결정 그러한 모습은 효율성을 위주로 판단되어지고, 선택을 강요당함으로써 제 3의 길은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판단의 강요만 이루어지는 것은 민주주의 대의와는 무관한 집권세력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자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는 대중을 피동적인 자세로 강제하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의 현장이 요즘은 많은 변화가 이루어 졌지만 기존의 교육의 형태가 강력한 주입식 암기위주의 교육의 방식과 경제성과 효율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교육 현장의 모습에선 토론과 협동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로지 경쟁을 위한 순위 다툼으로 변화되어 승리자에 대한 예우, 패배자의 굴욕과 상명하복의 명령체계에 순응하기 위한 군사부일체의 도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한 교육은 문화의 일부이며, 강력하게 사회를 지지하는 기둥이 되었으며, 이러한 내용에 숙달된 대중들과 속칭 지도자급들은 자신의 견해를 따라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지도자들은 책임의 주체가 되었고, 결정해야하고, 대중은 따라야 한다.

 

빠른 의사결정, 올바른 판단, 합리적인 사고는 책임의 주체가 된 지도자들의 행동과 이론의 원칙이며 리더들은 어떠한 무결점도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로 부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 현실에서 조각된 모습인 것이다. 리더, 지도자와 대중은 분리가 되고 이원화된 사회에선 주체는 대중이 되어선 안 되며 무결점의 지도자가 효율성을 위해서 결정을 하고, 결정된 내용에서 가부나 선택만 대중이 할 뿐이다. 주체가 아닌 대중은 형식적인 표찍는 기계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형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인 자본주의 내용을 모든 사회 정치단체들이 답습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도자 또는 리더 대표들은 자신의 권한의 일을 계속적으로 확대하며, 자신의 힘을 늘려나가고 있고 대중들은 바깥에서조차도 구경을 하지 못하여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한국노총의 노사정의 야합은 그러한 내용의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몇몇만이 그러한 책임을 지도 결정을 함으로써 조직은 관료주의적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관료주의적인 형태로 변해 가는 것은 활동성이 쇠퇴해 가는 모든 조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노동운동, 정치적 세력들의 모습은 그렇게 변절되어 갔을 뿐이다. 직권조인하면 결정된 것이며, 그것을 시작으로 반대와 찬성에 대한 견해만이 존재할 뿐이었던 것이다. 필요한 것은 대중들의 자기 의사 결정이지만 그것은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만이 자신들의 구세주요, 구원자로 등장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것은 계급사회가 5천년 넘게 유지발전 해왔던 사회 문화적인 요소의 기본 동력이다.

 

-. 대중운동의 책임은 대중이 져야 한다.

 

운동의 흐름을 저해하는 것은 지도자 또는 조직의 수뇌들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모든 대중들의 잘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중을 능동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존재한다. 대중은 조직을 함께 건설하고 나서 조직을 유지발전 시킬 수 있는 대리인을 선출하여 그들에게 맡긴다. 대중들의 모습은 거기까지만 존재할 뿐이다.

 

혁명의 역사 속에서 파리꼼뮨 소비에트 등등의 평의회의 모습에선 대중들은 그렇게 나약하게 나오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대리인들을 소환 파면하기도 했으며, 대중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한 시기 속에서의 대중들은 기존에 해왔던 방식을 거부하고 새롭게 자신들의 방식을 강제했다. 혁명적인 시기의 대중과는 다른 일상적인 시기에선 계급사회의 문화적인 요인으로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위임을 해왔으나 위임은 책임의 전가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발전 해왔던 것이다. 문제는 일상적인 시기에서의 대중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의 모습을 가지는 것이다.

 

혁명의 진로는 탄탄대로가 아니다 지그재그로 때로는 후퇴하기도 하며 급격한 전진을 하기도 한다. 무결점이 아니며, 실수와 반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교훈으로 더 강력하게 무장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면역기능을 상실한 동물들은 병원균의 공격에 취약하다. 대중들의 결정은 하나하나 소중한 것이다. 그러한 결정을 가지려면 그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선거 및 투표의 기계로 만들어 버린 사회의 모습에선 대중은 어떠한 책임을 가질 수도 없다. 자신들의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닌 대리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자신의 판단을 믿어 달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권력을 더 많이 달라고 호소하고 그것에 대한 판단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권력을 많이 주고 적게 주고, 그들이 내건 공약이 나에게 맞는지 내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대중이 자신이 결정한 것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대리인에 대해서 자신들의 결정을 강제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 대중은 자기결정권이 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하는 말이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식주의를 타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대중이 나서야 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각인해야 한다고. 그리고 전위의 견해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전위는 누군가? 선두, 선봉에 선 사람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레닌주의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한국적인 이미지로 각색되어 나온 것으로서, 과학적인 사회주의로 무장되어 사회의 흐름을 과학적으로 진단하여 대중의 앞길을 제시하는 자. 대중을 지도하는 또는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맑스주의 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등등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무장하고 100년도 더 된 이론에서 현실의 살아 숨 쉬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당시의 이론을 가지고 교조적으로 해석하여 과학의 이름으로 덧칠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 자칭 전위들은 자신들이 대중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무시하면서 객관적인 상항만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왔다. 객관적인 상황만을 제대로 파악하고 주관적인 내용을 무시한 결과는 러시아 혁명의 왜곡으로 나타났고, 주관적인 내용만 파악해서 실패를 한 이탈리아 독일의 사례도 있다.

 

계급사회의 5천년의 역사에서 길게는 1만년의 역사에서 역사는 승리한자만이 역사의 기록물을 제대로 남길 수 있다. 역사는 승리자의 왜곡으로 점철된 기록물이 존재 되는 것이다. 계급사회는 대다수 대중의 이해와 요구와는 무관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 해왔다. 대다수는 채찍으로 때로는 당근으로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척 해왔고 자신들의 권력이 안정화되는 순간 지배계급을 대변하는 국가기관은 대중을 억압하는 역할을 자임해 왔다. 피지배계급의 역동성은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거나 대변하는 모양새를 내는 또는 이해와 요구를 왜곡시켜 마치 그것이 대중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믿게 한 자들에게 권력의 자리를 넘겨 주어왔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성공은 대중의 선택이었다. 현재의 지배 권력의 핵심이데올로기 중의 하나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다. 수많은 언론과 교육의 현장에서 애국 애족의 모습은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최고의 선택이다. 사회문화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중은 언제나 보수적인 내용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에 둘러싸인 대중은 자신의 책임에 대한 면제부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몇 천년동안의 세월 속에서 습관화된 피동적인 모습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적극적인 대변자를 만나면 자신들의 모진 세월을 감내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받아 들어주는 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어느 누가 대중의 이익을 제대로 받아들여준 단체나 개인이 존재하던가? 만약에 대중의 이익을 받아 들였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부합하기 때문인 것이다.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에서 대중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자신의 견해와 맞지 않기 때문에 결정은 대변자의 모습에서 결정권자의 모습으로 단체나 개인이 변화가 된 것은 몇 십년간의 세월이다.

 

가까운 곳에서의 대표적인 것이 민주노총이며, 재능사태의 환구단 그리고 소규모 동아리로 전락한 자칭사회주의 정치단체들이다. 이들에겐 대중의 자기결정권은 자신들의 글과 입에서는 존재하고 행동 속에선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치부다.

 

“여섯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정치토론 광장을 통해 토동자 토론문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 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가 될 것이다. 광자에서의 토론은 직접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는 노력을 해야한다. 직접행동을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확장되며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중심에 서야 한다.”(이형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내일? 공산주의 운동의 전면화를 위하여 중에서. 붉은 글씨 2호)

 

윗글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한 구성원의 글이다. 국제코뮤니스트가 재능 조합에서 한 역할은 무시하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조합원의 투표로 만들어진 새로운 지도부를 무시하고 전 지도부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전 지도부가 회계 및 물품의 인수인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을 묵인 및 동조하고 있는 와중에 작년에 나온 그 조직의 조직원의 글에서는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형태는 재능의 노노갈등에서 환구단의 내용을 지지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9개의 정치단체라는 동아리 모두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겐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부르주아사고방식의 전형을 보여준 그 사례다.

 

대중은 자기결정권이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대중의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의 운동이 타올라야 한다고 소리를 외쳐도 소화기가 되어 불씨를 꺼뜨릴 뿐이다. 대중의 자기결정권은 운동의 핵심이다. 대중이 선택을 하면 그것을 따라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택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민주주의는 효율적이지 못하다. 대다수가 이해하고 자신의 이익과 일치된다고 판단되어지면 결정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급하게 결정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토론과 합의 그리고 또 다시 토론과 합의. 민주주의는 급박하게 결정되는 투표나 선거가 핵심이 아니라 결정을 위한 토론과 합의가 그 핵심인 것이다. 효율적이지 못하며 경제적이지 못하지만 대중전체의 이익을 위한 내용을 담보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 내용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발상이다. 희생 없는 발전은 없다라고 하는 것은 계급사회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다.

 

지배계급과 정치단체들 및 동아리 수준의 친목단체인 사회주의 정치단체 그리고 경제적이해 관계를 내세우는 조합 및 수많은 단체들은 대중의 자기결정을 이해와 요구 또는 견해로 만들어 가기 위하여 일방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로 얼마나 많은 왜곡으로 표현하게 만들었으며 결정을 짓게 만드는 강제수단으로서 투표와 선거를 강요해 왔던 것인가!

 

-. 대중의 자기결정권의 핵심은 강제력이다.

 

대중의 자기결정권의 모습은 투표나 선거의 형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대중의 자기결정권의 핵심은 자신이 그 내용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강제력이다. 누구를 선택을 하던 무엇을 선택을 하던지 핵심은 대중의 이행와 요구를 대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가 아닌 대변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선 대중의 스스로가 물리력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물리력을 바탕으로 하는 강제력이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력만으로 강제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사람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인식해야 하며, 그것이 하나의 방향성으로 가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선 대중들의 의식을 공유하거나 뜻을 함께하기 위한 총회, 대중집회가 꾸준히 준비 되어야 한다. 서로간의 의견을 알아야 뜻을 모을 수 있으며, 결정을 위한 무한한 토론은 그들을 때론 힘들게 하지만 하나의 뜻이 모아졌을 때 강제력으로 변화 발전 한다. 물론 대중 안에는 비겁한분들도 있고, 말만 많은 사람들도 있다. 논리가 정연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분도 있고, 행동으로, 분노로 답을 하는 분들도 있다. 이러한 분들의 견해 조차도 하나하나 모아 나가야 하는 것, 대중민주주의 핵심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토론과 총회는 대중민주주의 꽃이다. 토론과 총회의 모습은 평의회의 모습으로 발전하며 이는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나가는 것은 필연이다. 지배계급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총회를 통한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실천을 통해서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설 것이며,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정부조직을 건설하는 길로 나설 것이다. 발전하는 대중의 모습에 통제를 하고 제동을 건 것은 지배계급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조직을 만들어 자신의 견해를 대변하고 하지만 대변이 아닌 대표의 자리로 둔갑시키는 것은 자리가 가진 이름값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옹호하는 것은 같은 이해당사자들이며, 이들의 발언권은 반대하는 이들의 발언을 묵살할 정도로 그 힘을 계속적으로 증대 시킬 것이다. 그래서 총회에서의 자리에서 선출이 존재하면 소환 파면이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 말을 줄이면서

 

맑시즘을 강변하면 대다수의 운동단체들과 민주노총관계자들 그리고 노동조합의 간부들의 모습은 대중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이유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핵심은 단 하나다.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그 안에서 누리고 싶어하는 사적욕망의 발효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조직을 사유화하고자 하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어 놓아 절대 침입금지구역을 설정한다. 위대한 이데올로기로 외피를 단단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뜻에 반대하면 축출하거나 출입금지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러시아혁명의 잔해이며, 아직도 그러한 잔재에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소수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규모 그룹으로 분리되고 분해되며 원자화 된다.

 

몇몇 유명한 사람들의 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논리정연하게 대중에게 선전선동을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진정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그동안 받지 못했던 선택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것일까? 조직들의 실질적인 수장들은 언제나 조용히 관망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선택받기 위한 노력은 엄청나게 하고 있음을 안다. 자신들의 선택이 옳다라고 말을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왜 올바른것인가에 대한 대중적인 검증은 없다. 오로지 자신의 지식에서 이론으로만 나타난 형태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속해있는 조직의 이름으로 자신의 입장을 따라야 한다고 강제를 할뿐이다. 하지만 대안은 없다.

 

혁명의 이름으로 무장을 한 사이비종교단체들은 이젠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사회주의사상을 가지고서 괴상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는 사이비 잡것들은 이젠 그만 조용하게 살기를 부탁할 뿐이다. 대중민주주의라는 명분만을 이론적으로 내세우는 제 정파들은 조직을 해체하는 것이 좋다. 말로는 평의회를 이야기 하지만 대중민주주의를 무자비하게 파괴시키는 그들의 모습에서 혁명의 그림자는 랜턴의 빛에 의해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힘을 몰아세우지만 아직도 미약하다. 그들과 다른 이들이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혁명의 불씨는 대중들이 집히고 있지만 타오를 때가 아직은 아닌 것인지. 넓은 들판에 메마른 풀이 무성하지만 한줄기 바람만이 불씨를 들불로 타오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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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7:48 2015/09/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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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홀씨  | 2015/09/21 22:50
동지 반갑습니다! 대중운동에서 고생하는 동지의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쉽게도 대부분 대중운동가들은 대중을 타자화시킵니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대중의 진보에 관한 상대적 진리인 듯 합니다. 그래서 더욱 투쟁이 필요합니다. 동지가 한가지 놓친 점은 대중들도 민주주의로 훈련되어야만, 그리고 그것을 훈련할 조직을 가져야만 혁명의 주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직이 없다면 조직을 만드시오! 다만 바라고 싶은 것은 주관적인 열정도 그 자체만으로는 혁명을 끝까지 추진할 힘이 될 수 없고, 사회적인 관계, 생산적인 관계에 대해서 과학적인 세계관을 세울 때만이 혁명적 열정이 이데올로기로 전화될 수 있습니다. 제가 색동지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사회주의에 대해서 사회학적인 접근 대신에 경제학적으로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마르크스를 손에 쥐고 레닌의 분필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현실 계급문제에 대한 사회학적인 접근은 계급투쟁을 관조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사상해버리고 시장경제에 타협적 관점으로 흐르게 하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을 담지 못한 부르주아적 방식의 사회학적 비판은 자신을 운동으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타자화시킵니다. 그래서 보다 과감하게 비판의 날을 갈아야 합니다. 또하나 바랄 점은, 대중운동가가 흔히 범하는 실천상의 오류는 유물변증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라면 자신의 투쟁을 과학에 결합시킴으로써 대중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또는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 제국주의가 분명 우리 사회를 잘못된 길로 몰고가고 있다면 확신하다면, 그 직감을 구체화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통렬하게 비판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사람을 그 본성인 류적 본질로부터 타자화시키고 타락시키는 도덕과 법체계에 날카롭게 비판을 가함으로써, 그리고 부조리 실상을 폭로함으로써만 꽁무니주의자들이 과학적 대안에 접근하게 됩니다! 그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입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세계관으로 바라보아야 사회주의가 보입니다. 동지가 바라는 바대로 관념적 정치주의와 싸우려면, 보다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 대해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그 비판을 구체적으로 다룸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명확히 하여야 합니다. 역사적 비판을 통하여 변증법적인 방법에 따름으로써 과학적인 세계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끌 열정을 가슴 한켠에 가지고 있다면 정세를 돌파할 수단으로서 적절한 정치 폭로나 과거로부터 진전해온 사안에 대해 역사적 고찰아래 역사적인 비판을 통하여 유물론적 관점을 회득해야 합니다. 대중이든지 사회주의자이든지 장차 우리 운동이 가야할 길을 물적인 수단을 가지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함으로써만 지지자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역사적 투쟁만이 역사성, 즉 역사적인 유물변증법 관점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혁명을 위해 자신이 노력하고 그 노력을 이어 나름대로 투쟁해 나갈때에만 혁명전야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