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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계급 이론들의 파산/ 토니 클리프와 막스 샤흐트만: 반혁명의 친-제국주의 공범들 - 국제공산주의동맹

국제공산주의동맹[www.icl-fi.org]로부터

[아래 기사는 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제55호 1999년 가을 판에 출판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붕괴

"신 계급"이론들의 파산

토니 클리프와 막스 샤흐트만: 반혁명의 친-제국주의 공범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은 20세기를 모양 짓는 사건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제국주의간 학살에 대하여 확산된 혐오에 의해 격해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투쟁의 물결이 전세계적으로 일었다. 혁명적 노동계급의 봉기들이 러시아, 핀란드, 이탈리아, 헝가리, 독일을 강타했다; 다른 곳들에서는 군대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대규모 전투적 파업들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규모로 산업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구 짜르 제국에서만 유일하게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성공적으로 국가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노동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몰수하고 집산화된 계획경제의 건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레닌의 볼셰비키 당의 지도력이 이 승리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볼셰비키에 의해 조직된 전위적 부위는 그들 자신과 짜르 제국의 노동자 운동 내부의 다양한 청산주의, 사회애국주의, 수정주의 그리고 개량주의 경향들과의 철저한 정치적 분리를 성취했었다. 이것이 기회가 왔을 때 레닌의 혁명적 맑스주의 노동자 당으로 하여금 장애물들을 걷어치우고, 부르주아지 국가를 분쇄하고 노동자 위원회 혹은 소비에트에 기초한 국가를 창출하는에 있어서 노동계급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개별 정당들이 자기 자신의 제국주의 정부들을 지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도살장으로 이끌면서 제2 인터내셔널이 붕괴되자,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은 혁명 세력으로서 사망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볼셰비키들은 1919년 모스크바에서 마침내 설립되었던 제3 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에서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을 재조직하기 위하여 시도했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계급의 전위가 개량주의자들과 사회-평화주의자들로부터 너무 늦게 분리했다; 헝가리와 핀란드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들이 전개되자, 열의에 찬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당들과 통합했다. 유망했던 혁명적 상황은 혁명적 지도력의 미성숙으로 인해 실패했다. 한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적" 외관 - 그 밑에서 명백한 반혁명적 민족주의적 테러주의자들이 행동으로 나서 그들의 피비린내나는 더러운 작업을 수행했다 - 을 제공하면서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질서에 속박시키는데 있어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보조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1848년 역사의 첫 번째 위대한 혁명적 물결 이후의 저작에서 칼 맑스는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건 혁명은 영국에서의 승리 없이는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을 제외한 전체 유럽 대륙에서, 유럽 대륙의 어떤 나라에서의 어떠한 경제적 관계들에서의 격변이건 그것은 찻잔 속의 폭풍이다. 개별 국가 내부의 산업과 상업적 관계들은 다른 나라와의 교통에 의해 지배되고, 세계시장과의 관계에 달려있다. 그러나 세계시장은 영국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영국은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 "혁명적 운동", 신라인 신문, 1849년 1월 1일

자본주의가 창출한 노동의 세계 분할에 기초하여 건설되어지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필요한 물질적 풍요를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맑스가 더 전에 썼듯이, "단지 궁핍이 일반화될 뿐이고, 빈곤, 생필품들을 위한 투쟁, 그리고 모든 과거의 추잡한 쓰레기들이 필연적으로 재생산될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1845-46년 쓰여짐]). 더욱이 경제적으로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한, 반동이 반격을 조직하기 위한 기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스탈린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의 교조를 공표하기 거의 80년 전에 쓰여진 맑스의 글들은 이런 어리석음에 대한 잔인한 폭로이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의 러시아 혁명의 부침들은 고립된 하나의 혁명적 노동자 국가를 향하여 세계 제국주의가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들을 풍부하고도 잔혹하게 보여준다. 14개의 서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의 군대들에 의한 침략에서부터, 여행, 무역 그리고 투자의 금지와 토착 반혁명 세력의 무장화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열강들은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피폐화된 소비에트 러시아를 교살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의 모든 노력을 다했다. 세계 부르주아지 계급들은 투자와 착취를 위한 광대한 영역을 세계 시장으로부터 떼어냈던 국가와의 공존을 거부했다. 노동자 국가가 고립 속에서 5년 동안 세계 혁명의 기지로서 견디어 냈다는 것은 거대한 역사적 성취였다; 1924년 초 노동계급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스탈린주의 관료 계층의 잘못된 운영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국가가 퇴행화된 형태로 거의 70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은 계획화되고 집산화된 경제의 엄청난 경제적 위력에 대한 증거이다. 동유럽, 중국, 북한, 베트남 그리고 쿠바에서 자본주의의 타도와 스탈린주의 모델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의 건설은 계속되는 볼셰비키 혁명의 역사적 반향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군대가 전쟁 보상금을 지급 받으려고 루르 산업 지대를 침략했던 1923년 1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을 뒤흔들었던 혁명적인 경제 정치적 위기의 결과가 러시아 혁명의 퇴행의 결정적인 요소였다. 1918년 말 전개되고 있던 혁명의 와중에서 독일 공산당(KPD)의 중핵들이 -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에 의해 지도되었던 스파르타시스트 그룹 - 칼 카우츠키의 중앙주의 USPD로부터 분리했다. 칼 카우츠키의 당은 노골적인 개량주의 사회민주당(SPD)을 위한 핵심적인 덮개를 제공하는 자신의 사회-평화주의와 기회주의적 실천을 위장하기 위하여 사이비 맑스주의적 수사를 사용했다. 1918-1919년 혁명은 KPD의 카우츠키와 더 일찍 분리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파괴되었지만, 계속된 사태들 속에서 그 이후에도 당의 카우츠키의 중앙주의와의 강령적, 사상적 결별이 결코 완전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19년 초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에 대한 살해로 인해 문제가 악화되었을 뿐이다. 카우츠키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잔혹한 공격들에 답했던 것은 이제 막 태어난 독일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교자 카우츠키(1918)의 레닌과 적과 백 사이(1922)의 트로츠키였다. 이들 저작들은 저자들이 소비에트 국가를 운영하고, 백군에 대항하는 내전을 치고, 제3 인터내셔널에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그것을 지도하던 동안에 작성되었다. 혁명적 해였던 1923년에 독일 당이 프롤레타리아트 봉기를 시도하는 것조차 못했던 것이 소비에트 노동계급의 사기저하를 확산시켰으며, 다음 해 초 스탈린의 승리를 위한 길을 예비했다. 트로츠키가 그의 저작 10월의 교훈들(1924)에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설명하였듯이, 1923년 KPD의 무능력은 혁명적 지도력의 문제가 제국주의 시대의 결정적인 문제임을 부정적 방식으로 증명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가를 파괴하기 위한 강제의 과정에서, 세계 제국주의는 자신의 사회민주주의 똘마니들과 다른 많은 보다 왼쪽에 있던 좌익들로부터의 도움들을 향유했다. 칼 카우츠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적대적인 무정부주의자들, 1939-40년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으로부터 분리했던 막스 샤흐트만, 지금은 소멸한 모택동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세력들이 소련이 모종의 "자본주의" 국가 이거나 혹은 "새로운 계급"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그 동안 갖가지 설명들을 늘어놓았다. 모든 곳의 계급 의식적 노동자들의 대오들에서 혐오와 혼란을 유포하던 잔혹하고 보수적인 스탈린 관료집단의 성장은 반 사회주의 선전가들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제국주의와의 공통의 대의를 만드는 것에 대한 핑계거리를 찾던 그들의 "좌익" 꽁무니 무리들에게 커다한 선물이었다.

오늘날 이런 경향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변종은 토니 클리프와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의해 지도되는 자신의 자매조직에 미국의 국제 사회주의 조직(ISO)을 포함하는 국제적 경향이다. 클리프주의자들 (그리고 노동자 권력과 같은 수많은 그들로부터 분리한 조직들)은 외부의 제국주의의 공격이나 내부의 자본주의 복구 시도들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군사적 방어의 강령에 관하여 트로츠키즘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한 막스 샤흐트만[Max Shachtman]의 직접적인 전통에 서 있다. 이것이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소위 "사회주의자들"을 자기 자신의 지배계급과 화해시키기 위한 가교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샤흐트만과 클리프와 같은 트로츠키주의로부터의 이들 배신자들의 "신 계급" 이론들은 소련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와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유럽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의 노동계급적 성격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이해에 대한 배신과 그들 자신의 자본주의와의 화해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현실에서 이들 "이론들"은 反공산주의 부르주아 여론에 대한 굴종이라는 강령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 관점의 폐기를 덮어 가리기 위한 - 사이비 맑스주의 용어학으로 치장한 - 시도들에 불과했다.

그래서 1939년 독소조약에 뒤이은 인민전선주의적 소부르주아지 여론에 대한 샤흐트만의 굴종이 그의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의 포기를 위한 촉매로 작용했다. 1950년에, 토니 클리프는 방어주의라는 똑같은 문제에 대하여 트로츠키주의 제4 인터내셔널로부터 분리했다. 이번에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수반되었던 反공산주의 냉전 히스테리가 촉매가 되었다. 클리프는 유엔이라는 이름의 다국적 "경찰 행위"를 만들어냈던 제국주의의 공격에 대항하여 중국과 북한의 기형적 노동자 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 군사적 방어라는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으로부터 분리했다. 이것은 영국 부르주아지 계급과 사회민주주의 똘마니들에 대한 비굴한 굴종이었다: 영국 군대를 한국에 파견했던 정부가 노동당 정권이었다.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이 내부적으로 막스 샤흐트만의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과 다르며 10년 후에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의 퇴행화되었거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군사적 방어라는 트르츠키주의 강령을 갖다 버리기 위한 기제로서의 그들의 기여이다. 이들 각자는 서로 다른 국내적, 정치적 환경 하에서 생겨났다. 2차 세계대전 전야의 루즈벨트의 "뉴딜" 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던 샤흐트만은 히틀러와 스탈린에 의해 대표되던 "전체주의의 공포"라는 샤흐트만이 순응하고 있던 소부르주아지 환경을 사로잡았던 오웰주의적 관점을 반영했다. 클리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레닌이 "부르주아지 노동자 당"이라고 서술했던 부패한 영국 노동당에 순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각각은 각자 자신의 시기에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反소비에트주의에 대한 순응을 의미했다.

샤흐트만주의자들이 스스로가 미국 사회민주주의의 극우익 속의 냉전주의자들이 된 이후, "관료적 집산주의"의 "이론"의 지지자들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숀 마트감나에 의해 영국에서 출판된 새로운 책이 러시아 혁명의 운명비판적 맑스주의의 잃어버린 글들 제 1(1999)으로 이름 붙여진 모음집 안에 샤흐트만과 샤흐트만주의자들의 글들을 출판하면서 "관료적 집산주의"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나중에 많은 것들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샤흐트만 찬미자에 의해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트감나의 책은 우리가 뒤에 보게 될 것처럼 스탈린화된 소련에 대한 그의 스승의 반 맑스주의적 분석의 깊은 공허함을 증명하는 많은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

"일국사회주의"

비록 볼셰키키들이 제국주의 침략들을 격퇴하고 내전에서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은 기술적으로 사회적으로 후진적인 농경적 기초에 속박되어 있었고,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에 의해 피폐화된 기반시설과 산업들을 신속하게 재건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이 부족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의식적 인자들은 내전에서 죽었거나 국가와 당 기구로 흡수되었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가는 1924년 1월 제13차 당대회에서 좌익반대파에 대한 사실상의 배제과 함께 정치적 반혁명을 겪었다. 그때 나타난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에서, 스탈린을 우두머리로 하는 관료기구는 사회화된 소유관계들은 파괴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정치권력을 찬탈했다. 트로츠키는 관료에 대한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분석에서, 프랑스 혁명 동안 제9 테르미도르에서 급진 자코뱅의 축출에 대한 유추를 사용했다.

"사회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계급 보다 더 균일하지만, 권력 장악에 뒤이어 관료집단과 그들과 연결된 노동 귀족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시기 동안에, 프롤레티라아트가 그 자신의 내부에 모든 일련의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예외적인 명료성을 가지고 분명해진다.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미에서, 좌익반대파의 분쇄는 혁명적 전위의 수중으로부터 관료 집단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인자들과 노동계급 상층부의 수중으로의 권력의 이전을 의미했다. 1924년 – 이 때가 소비에트 테르미도르의 시작이었다."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1935)

레닌의 죽음 이후, 1924년 1월에 또한, 스탈린 파벌은 "레닌 부대"[Lenin Levy]를 통하여 이제 막 생겨나던 관료 분자들로 볼셰비키 당을 넘치게 했으며, 1924년 12월 "일국 사회주의"라는 잘못된 교조를 내놓았다. "일국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가능하지도 않던 경제자립과 고립주의라는 막다른 골목을 의미했다. 그 다음 시기 동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책들은 1925-27년 제2차 중국 혁명 동안에 "민족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자살적 종속을 명령했던 관료적 중도주의로부터 1933년 히틀러가 전투 한번 없이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던 "제3기" 종파주의, 1936-37년 스페인 혁명을 교살시켰던 인민전선의 명백한 개량주의적 계급협조주의에 이르기까지 지그재그 행보를 걸었다. 스탈린 분파는 우선 자기 분파의 정적들을 당내에서 제거했고, 다음 스탈린 도당은 자기 분파 내에서 그들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숙청했다. 스탈린에 의해 대표되던 관료 계층이 일정 정도의 역사의식에 도달하게 되면서 "일국 사회주의"는 외국의 공산당들을 제국주의와의 "평화적 공존"을 착각 속에서 추구하는 과정에서 활용되는 협상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가 되었다.

스탈린은 제 13차 당대회에서 선거를 조작했고, 뒤이은 몇 해 동안 반복적으로 억압과 숙청작업을 했다("스탈린 테르미도르좌익반대파 그리고 적군" 1999년 가을스파르타시스트 55호 영어판). 좌익 반대파,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부하린과 같은 과거 분파 동맹자들, 쿨락, 예술인들 그리고 지식인들에 대한 스탈린의 억압의 흉포함은 스탈린이 자기 정권이 항상적으로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서 기인했다.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권력을 찬탈하면서 그리고 볼셰비키의 국제주의 프롤레타리아트 강령을 뒤집어 엎으면서 볼셰비키의 유산을 계속해서 주장하기 위하여 스탈린은 경찰-국가 테러에 의해 지탱되는 "대규모 거짓말"이 필요했다.

제국주의적 쇠퇵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계속해서 새로운 혁명적 기회들을 제공했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주기적 경제위기들은, 그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의 급진화를 낳았던 1930년대 대공황, 빈곤한 국가에서 파시즘 정권으로 귀결되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모순들 그리고 세계 재분할을 위한 대량파괴라는 새로운 제국주의간 전쟁과 같은 것들이 다시 한번 혁명의 원천이 되었어야 했다.

서구 유럽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다른 곳의 전투적 노동자들의 대중 조직의 지도부로서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등장했다. 그러나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의 계급 협조 덕분에,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서 유럽과 일본에서 자본주의를 다시 안정화 할 수 있었다. 25년 후, 통일된 베트남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던 베트남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군사적 패배는 제국주의자들을 심대하게 약화시켰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유럽에서는 일련의 준혁명적 그리고 혁명적 상황들이 있었다 - 1968년 프랑스, 1969년 이탈리아, 1975년 포르투갈. 이것들은 2차 대전 직후의 시기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들을 의미했다. 친 모스크바 공산당들이 또 다시 이 지역에서 흔들렸던 부르주아지 질서를 보존하는데 복무했다. 이 점에서 서구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반혁명적 역할이 소련의 뒤이은 붕괴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여를 했다.

1991-92년 자본주의 반혁명에 의한 10월의 성과들의 최종적 폐기는 "일국 사회주의"가 불가능함에 대한 최종적 확증이었다. 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심대하게 바꾸었다. 엄청난 궁핍과 인종 분쟁들이 과거 소련과 동유럽의 인민들을 피폐화시켰다. 명목상으로 독립국가들인 "제3 세계" 국가들은 제국주의의 무제한적 경제적 강탈들과 잔인한 군사력에 직면하여 더 이상 "두 초 열강들" 사이에서 운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제국주의 경쟁국가들이 더 이상 反소비에트주의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의해 제한 받지 않게 되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은 노동 착취율을 올림으로써 더 높은 경쟁력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강화된 공격에 직면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성은 뒤로 던져졌다; 부르주아지 계급들이 스탈린주의의 붕괴를 "공산주의 사망"의 "증거"로 지적하면서,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하는 계급 이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정체성은 바닥상태에 있다.

자본주의 반혁명: "한 걸음 옆으로?"

오늘늘 토니 클리프의 미국 추종자들은 뻔뻔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동 유럽에서의 혁명들은 한 걸음 옆으로 가기였다 - 한 형태의 자본주의로부터 다른 것으로"(사회주의 노동자, 23호, 1999년 4월). 오늘날 어떤 러시아 노동자에 대해서도 이 노선을 시험하지 말라. 구 소련 영토 내에서 지금 발생하고 있는 전례가 없는 경제적 사회적 파괴가 계획화되고 집산화된 경제가 진정으로 실제 얼마나 역사적으로 진보적이었는가에 대한 실제 잣대이다. 붕괴 후 소련의 혼란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법칙들은 완전한 경제적 붕괴로 귀결되었다: 생산은 1991년 이후 적어도 50% 떨어졌고, 자본투자는 90%나 떨어졌다. 현재 러시아에서 도시 노동력의 3분의 1이 실제로 실업상태이다; 인구의 75%가 최저생계비 이하이거나 겨우 조금 넘긴 상태로 살고 있고 1500만 명이 실질적인 기아상태에 있다. 수명은 극적으로 낮아져 현재는 남자의 경우 100년 전보다 더 낮은 겨우 57이며, 한편 총 인구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350만 명이 줄었다.

통계만으로는 비참함의 규모와 강도를 옮길 수 없다. 생산을 위한 기반시설, 기술, 과학, 운송, 난방과 하수시설들이 붕괴되었다. 영양실조가 학교 학생들에게는 일상이 되었다. 200여만 명의 어린이들이 그들을 더 이상 보살필 수 없는 가족들에 의해 버려졌다. 전기와 물과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가 나라의 광대한 영역에서 산발적으로 공급되고 있다. 과거 국가에 의하여 운영되었던 전국민 의료보장 시스템의 붕괴와 함께, 결핵과 같은 질병들이 번성하고 있다. 트로츠키가 예측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복귀는 소련을 거렁뱅이화된 황무지로, 그리고 제국주의의 약탈행위의 모든 파괴에 대한 먹이감으로 전락시켰다.

자신들의 진부한 이론에 집착하는 한편으로, 클리프주의자들과 그와 비슷한 무리들은 묘하게도 자신들의 실제 기여에 관하여는 겸손하다.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복귀는 그들의 강령의 수행이었다. 워싱턴의 쿠바 피그만 침공을 지지했던 샤흐트만 처럼, 클리프 도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 군대들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면서, 솔리다르노스크 - 폴란드에서 자본주의 반혁명를 위한 바티칸, 월스트리트, 그리고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기구 – 에 대한 "노동조합"으로서의 신임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1991년 옐친의 바리케이드에 있던 암시장꾼들, 군주제주의자들 그리고 여피들을 보면서 기뻐서 춤을 추면서, 냉전에서 미 제국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다. 사회주의 노동자(1991년 8월 31일)는 옐친의 승리를 축하했다: "공산주의는 붕괴되었다.... 이것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축하해야 할 일이다." 이제 클리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 자본주의"와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들의 터무니없음은 소련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와 동유럽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붕괴에 의해 간단하게 항복했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역사 속에서 어떤 소유 지배계급도 결코 자신의 권력을 자진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츠키의 "국가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것이 "맑스주의자"로서 자신의 명성에 대한 주요 근거인 클리프는 이제 구 소련에서의 반혁명이 자신의 분석을 확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주의 논평(1998년 7-8월)의 "세월의 시험"이라는 기사에서 클리프는 내친김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국가 자본가"적 성격이 일부 과거 관료의 자본가로서의 오늘날의 등장에 의해 보여졌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트로츠키는 그의 1936년 저작 배반당한 혁명과 같은 영향력을 가진 연구들에서 지배 계층은 모든 부르주아지의 욕구와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사회화된 소유양식에 의해 제한받는다고 지적했다.

클리프는 더 나아가 "비록 퇴행화되었거나 기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만약 러시아가 사회주의 국가이었거나 스탈린주의 정권이 노동자 국가였다면, 스탈린주의의 붕괴는 반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노동자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우익적이며 관료적일 지라도, 노동조합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자들의 시도에 맞서 언제나 자신들의 노동조합들을 방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ICL은 1993년 우리의 팜플렛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어떻게 교살되었는가?, 그리고 스파르타시스트45-46호(1990-91 겨울)에서 출판된 조세프 세이모어와 알버트 세인트 존의 문서들에서 러시아의 스탈린 보나파르티즘의 붕괴를 폭넓게 분석했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정권의 교체들은 자동적으로 기능하는 경향이 있는 무정부적 부르주아지 경제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한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생산력을 자신이 만들어낸 국가로 직접 이전시킨다. 계획화된 사회주의 경제는 의식적으로 건설되며 그것의 계속적인 존재는 그것이 방어하는 국가 권력의 정치적 성격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가 반혁명에 맞서 투쟁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관료집단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 의식성의 체계적인 파괴의 증언이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레닌 이후 제3인터내셔널(1928)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만약 군대가 전투없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적에게 굴종한다면, 이 굴종이 '결정적인 전투'의 자리를 완벽하게 대신한다,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그렇다."

샤흐트만주의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클리프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경제보다는 현실에서 유리된 "권력"을 결정적인 것으로서 바라본다. 그들에게는 스탈린 지배의 강력함과 그들에 의하여 추정된 영속성은 스탈린의 억압의 부정할 수 없는 잔혹함으로부터 온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능력에 대한 뿌리깊은 비관론에 사로잡혀, 이들 트로츠키주의의 배교자들은 러시아의 전체주의가 러시아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서구와는 달리, 결코 자기 자신의 이해를 위한 어떠한 투쟁도 다시 감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한다고 주장했던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공공연한 부르주아지 옹호자들과 똑 같은 선전을 한다.

그것의 계급적 내용과는 무관하게 "민주주의"를 최고의 진보적인 역사적 목표로 끌어올리는 것은 부르주아 질서의 방어자들을 위한 책에 있는 가장 오래된 속임수이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배교자 카우츠키에서 레닌은 "부르주아지 계급 앞에서 굽실거리고, 부르주아지 의회 체계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현대 민주주의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에 대하여 입 다물고 있다고" 카우츠키주의 중도주의자들을 - 결국 1922년에 에버트, 노스케, 그리고 샤이데만의 사회민주당에 복귀했었던 - 경멸했다. 레닌은 맑스주의자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의 형식은 주어진 상황에서의 계급적 내용과 다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부패한 지배계층- 소유계급이 아닌 10월로부터 시작된 국가와 기구들에 붙은 혹 - 으로서의 관료에 대한 트로츠키의 이해는 결국 스탈린주의의 어두운 운명을 결정지었던 명백한 모순들을 정의했다. 집산화된 소유양식들에 기초한 국가와 제국주의 세계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국제적 중간상인의 일종으로서, 관료의 지배는 깨지기 쉽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1933)에서 ,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계급은 맑스주의자에게 예외적으로 중요하며 더욱이 과학적으로 제한적인 의미를 가진다. 계급은 국민소득의 분배에 대한 참여만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일반적 구조에서 그것의 독립적인 역할과 사회의 경제적 기초에 있는 독립적인 뿌리들에 의해 정의된다. 각각의 계급(봉건 귀족, 농민, 소부르주아지, 자본주의 부르주아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은 자기 자신에게 특수한 소유양식을 만들어낸다. 관료집단에게는 이런 모든 사회적 특성들이 없다. 관료집단은 생산과 분배의 과정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관료집단은 독립적인 소유의 뿌리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의 기능들은 기본적으로 계급 지배의 정치적 기술과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집단의 특권들이 그것 스스로 소비에트 사회의 기초들을 바꾸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관료집단은 자신의 특권들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에게 고유한 특별한 소유 관계들로부터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10월 혁명에 의해 창출되었고, 근본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적합한 소유관계들로부터 획득한다.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관료집단이 민중을 강탈하는 한(그리고 이것은 모든 관료에 의해서 다양한 방식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서의 계급착취가 아니라, 비록 굉장히 큰 규모이기는 하나 사회적 기생주의에 관하여 다루어야만 한다."

트로츠키의 맑스주의적 관점에 대한 반대로서, 온갖 종류의 反혁명적 세력들은 스탈린주의 지배 엘리트가 뭔가 실제로 견고한 것이라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물론 이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이 소위 불가항력성, 참으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마침내 발견했을 때까지) 자기 자신의 국경 안에서 확실하게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들 자신이다. 만약 10월 혁명의 최종적 폐기가 트로츠키의 분석과 강령을 오로지 부정적으로 확증한다면그것은 최소한 스탈린주의가 안정적인 시스템이라는 모든 관념들이 진부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샤흐트만은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이 없다면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자 국가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경고를 비웃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 노동자 국가의 경제적 기초들을 손상시키는 역할을 부여했다. 점차적으로 생산수단과 교환을 탈국유화하면서, 외국무역 독점을 느슨하게 함으로써, 스탈린주의는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 복구를 위한 길을 닦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 중 어느 것도 벌어지지는 않았다.과"

- 막스 샤흐트만, "반 혁명적 혁명", 신 인터내셔널. 1943년 7월, 마트감나의 러시아 혁명의 운명에서 재 출판.

그러나 정확하게 소련과 동유럽에서 벌어졌던 일이 이것이며, 진정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런 역사적 패배를 막아내기 위해서 투쟁했다.

"러시아 문제"와 트로츠키주의 강령

트로츠키는 1923-24년 소비에트 노동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찬탈했던 스탈린주의 계층에 반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10월 혁명으로부터 생겨난 노동자국가를 방어하기 위하여 무조건적으로 투쟁했다. 관료집단은 테러와 거짓말들의 조합과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를 원자화하고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 계획화되고 집산화된 경제에 대한 침해, 10월의 성과들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들을 통해서 국제적으로 확장할 가능성들을 "일국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봉쇄하는 것을 통해서만 권력을 유지했다. 트로츠키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듯이:

"소비에트 정권의 깊은 곳으로부터 두 가지 반대되는 경향들이 성장하고 있다.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와는 반대로, 그것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한 그것은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상부 계층의 이익을 위하여 그것이 점점 더 극단적인 표현으로 분배의 부르주아적 규범을 실행하는 한, 그것은 자본주의 복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유의 양식과 분배의 규범들 사이의 모순은 무한히 성장할 수는 없다. 이런 저런 형태로 부르주아지의 규범이 생산수단으로 확산되어야만 하거나, 분배의 규범들이 사회주의적 소유 체계에 조응하게 되어야만 하는가 둘 중의 하나이다."

-배반당한 혁명(1936)

트로츠키는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이해했다: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 혁명이 정치 권력을 찬탈했던 관료계층을 타도하거나 혹은 관료가 스스로를 새로운 소유계급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자신의 특권들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면서 결국 자본주의 복구를 위한 길을 준비하던가. 그러나 한편으로 노동자 국가와 소비에트 노동자들을 제국주의의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공격들이나 내부적 자본주의 복구 시도들로부터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계급 의식적 노동자들의 긴급한 임무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와 기생적 관료집단을 잘못 동일시하는 가운데, 최초의 노동자 국가를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스탈린주의에 대한 승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부르주아지 반(反)소비에트주의의 압력들에 굴종하고, 그것의 관료적 퇴행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노동자 국가를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는 자신들의 혁명적 의무를 포기했던 자들이 있었다. 1934년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파리의 우리 동지들 중에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적 성격을 부정하고 멘셰비키의 합법화 등... 을 포함하는 소련에 완전한 민주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경로들을 통해서 알고 있다

"멘셰비키들은 부르주아지 복구의 대변자들이고, 우리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통해서 노동자 국가를 방어한다. 파업들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불한당들이라는 근거에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1926년 영국 광산 파업이나 최근 미국에서의 대규모 파업들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영국과 미국 노동자들에 대한 배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정확하게 똑같은 것이 소련에 적용된다!"

-트로츠키, "러시아 문제에 관하여 양보하지 말라!" 1934년 11월 11일

그리고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소련의 '非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핑계로 소련에 대하여 절망적으로 손사레를 치는 정치적 경향은 누구이건 제국주의의 수동적 도구가 될 위험이 있다."("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1933년 10월) 샤흐트만/클리프/마트감나 형의 겉치레 "사회주의자들"은 단지 수동적 도구가 되는 것을 넘어 훨씬 더 나아간다.

샤흐트만/클리프의 횡설수설과는 확실히 다르게, 트로츠키는 스탈린 치하 소련에 대하여 정확한 맑스주의적 분석으로 나아간다. 그는 "현재의 소비에트 정권으로부터는 오직 사회주의로의 이행만이 가능하다"는 관념을 공격했다. "실제로 자본주의로의 퇴보가 완전히 가능하다"고 그는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 있는 모순적 사회이다. 소련에는: ⒜ 생산력이 국가 소유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 필수품의 부족에 의해 창출되는 시초 축적을 향한 경향이 계획경제의 무수히 많은 구멍들을 통해서 발생하고 있다; ⒞ 부르주아적 성격을 보존하고 있는 분배의 규범들이 사회의 새로운 차별화의 기초에 자리하고 있다; ⒟ 경제성장이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상황을 천천히 개선시키면서, 급속하게 특권계층의 형성을 촉진하고 있다; ⒠ 사회적 적대주의들을 활용하면서, 관료집단이 자신을 사회주의와는 다른 통제 받지 않는 계층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 지배정당에 의해 배반당한 사회 혁명은 여전히 소유관계들과 노동 대중들의 의식성 속에 존재하고 있다; ⒢ 축적되는 모순들의 더한 성장은 사회주의로 귀결되는 것만큼이나 자본주의로도 귀결 될 수 있다; ⒣ 자본주의로의 길에서 반혁명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해야만 할 것이다; ⒤ 사회주의로의 길에서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을 타도해야만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문제는 일국적 규모와 세계적 규모 모두에서 살아 있는 사회 세력들의 투쟁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배반당한 혁명

스탈린주의 관료는 때때로 방어해야만 하는 노동자 국가의 사회화된 기초들에 기생적으로 의존하는 불안정한 계층이다. 이 모순적 성격은 브레지네프 정권의 마지막 시기에서조차 CIA로부터 지원을 받던 여성을 혐오하던 이슬람 반동분자들에 의한 봉기에 대항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무력 개입에서 분명했었다. 이런 모순적 성격은 또한 외교부 장관 안드레이 그레미코와 같은 구시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서는 지자를 받았고, 당시 크레믈린 정권에서 2인자였던 고르바쵸프 주변의 젊은 인자들로부터는 반대되었던, 1984-85년 영국 광산 파업에 대한 소련의 지지 문제에도 반영되었다. 반대로, 바로 소련의 국경에서 제국주의에 양보하면서 소련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철수했던 것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소련 자신을 방어하려는 의지마저 곧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표시였다.

관료 쪽에서의 사회화된 소유에 대한 어떠한 주관적인 이데올로기적 노력과는 무관하게, 퇴행화되었거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서 경제 작동의 법칙들은 자본주의에서 그것들의 작동과는 다르다. 소련에서 산업운영자는, 비록 그것들이 똑같은 개인에게 발생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재의 러시아 자본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적 명령들에 복종했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이윤을, 예를 들면, 생산 단가와 시장 가격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공장 감독관의 주요 목표는, 여기에 그의 미래 경력이 달려 있는데, 종종 있는 질과 다양성에서의 손상에도 불구하고, 계획된 재화의 산출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스템은 완전고용을 창출한다. 실제, 소비에트 기업들은 전형적으로 사람이 너무 많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관료적인 오경영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계획되고 집산화된 경제는 온 국민 의료보장, 주택, 교육, 자녀보육 그리고 휴가 등을 제공했고, 이것은 오로지 자본주의가 몰수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지배계급과는 달리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자신의 특권들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숭배"의 기이하고 살인적인 절정에서 조차도, 레닌의 모든 동지들을 모조리 죽였던 스탈린은 결코 레닌의 계승자라는 주장을 멈출 수 없었다. 반대로, 소련에서 자본주의 복구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개적인 포용에 의해 수반되었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실험이었다, 시장의 마술은 번영을 의미한다, 스탈린은 히틀러보다도 못했다, 등등.

세계의 가장 선진화된 자본주의 경제들이 소비에트 경제보다 더 생산적이라고 언급하면서, 트로츠키는 값싼 상품들의 위력이 공개적인 군사적 적대행위들보다 궁극적으로 더 소련에 위험스럽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충격적으로 예언적인 이 언급은 사회주의는 세계적 시스템으로서 건설되어야만 한다는 단지 기본적인 맑스주의적 이해에 기초한 것이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 독일의 산업가들 그리고 일본의 자이바츄들이 세상 거의 대부분의 생산적 부를 소유하고 있는 한, 무계급 무국가 사회라는 공산주의적 전망은 어디에서도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트로츠키에게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들이 관료집단을 타도할 것인가? 아니면 관료집단이 노동자 국가를 집어삼킬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추상성도 없었다: 스탈린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트로츠키는 10월의 성과들의 방어를 위해 소련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집결시키는 것에, 특히 새로운 10월 혁명을 위한 투쟁을 통해, 자기 생을 바쳤다.

샤흐트만의 "관료적 집산주의"의 기원과 진화

소련에 대한 샤흐트만의 "신 계급"이론의 기원은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의 원칙이 중요한 상황에서 미국 트로츠키주의 당의 일부의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에 대한 포기에 있었다. 루즈벨트의 "뉴딜"과의 인민전선 밀월 이전 시기에 스스로를 어떤 의미에서의 소련의 "친구들"로 여겼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미국의 "민주당"에 대한 근본적인 충성을 유지하고 있던 소부르주아 "진보주의자들" 주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1939년 스탈린-히틀러 조약이 촉진제였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정당, 사회주의 노동자당(SWP)의 지도위원회 멤버이던, 막스 샤흐트만, 제임스 번햄, 마틴 에이번이 1939-40년 소비에트 방어주의라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한꺼번에 도전했다. 미국 지부에서의 투쟁은 유럽에서의 전쟁에 의해 창출된 조건들로 인해, 제4 인터내셔널 전체에서의 투쟁의 대리전이 되었다.

자기 인생의 마지막 주요한 분파 투쟁에서 레온 트로츠키는 샤흐트만주의자들에 대한 반격을 지도했다. 나중에 맑스주의를 지키기 위하여(1942)로 SWP에 의해 출판된 일련의 통렬한 논박들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틀러와의 외교 군사적 동맹은 자신이 배반당한 혁명에서 분석했었던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노동자 당 내의 미국 소수파가 어떻게 소비에트 방어주의를 포기하면서 혁명적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 자체를 포기했는가를 폭로했다. 그는 핀란드와 폴란드에서 소련에 대한 군사적 방어는 스탈린주의 관료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성립시킨다는 미국 소수파의 주장을 비웃었다.

소비에트 방어주의는 트로츠키주의 운동 내부에서 계속적으로 논쟁의 요인이었다. 1939-40년 투쟁에서, 트로츠키는 1929년에 중국 동부 철도와 관련된 논쟁에서 중국에 반대하여 소련을 방어하는 것을 거부했던 좌익반대파들에 맞서; 이 입장으로부터 일반화하여 소련 "국가 자본가"를 선언했던 휴고 우르반스에 대항하여; 1937년에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새로운 지배계급이라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이반 크라이포에 맞서; 자신들이 (스탈린-히틀러 조약 때까지) 집산화된 소유와 계획 경제의 방어자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937년 소련은 더 이상 노동자 국가로 여겨질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수정주의적 길을 걷기 시작했던 제임스 번햄과 조 카터에 맞서서 그가 수행했었던 논쟁들을 다시 언급했다.

샤흐트만주의자들의 제4 인터내셔널 강령으로부터의 도주의 실제 기초가 되었던 것은 부르주아 여론의 압력에 대한 그들의 굴복이었다.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창시자 제임스 P. 캐넌은 후에 트로츠키의 맑스주의를 지키기 위하여의 자매판인 프롤레타리아트 당을 위한 투쟁으로 책으로 출판되었던 1939-40년 그의 저작들에서 샤흐트만주의의 정치와 자신들의 역사적 환경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았었던 당의 동요하는 소부르주아 층들 사이에서의 샤흐트만주의자들의 기반이 가지는 연관성을 폭로했다. 실제로, 1939-40년 反캐넌 블럭은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대한 어떠한 조리가 선 분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임스 번햄이 소련을 새로운 형태의 계급사회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미 공개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조소하면서, 그는 수개월 만에 그의 예전의 분파 동지들과 맑스주의 운동을 한꺼번에 포기했다. 에이번(Abern)과 그의 도당은 소련을 퇴행화한 노동자 국가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혁명적 강령이나 원칙보다 캐넌 "통치"에 대한 소규모 조직적 불만들을 항상 상위에 두어왔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샤흐트만은 어떤 경우에도 이것은 가까운 장래에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당원으로서 그의 마지막 문서들 중의 하나에서, 그는 만약 소련이 제국주의 침략의 위협에 진정으로 직면하게 된다면, 자신은 소련을 방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샤흐트만 등은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나와 노동자 당[WP]을 만들었고, 그들이 사회주의 노동자등을 나온 후 1달이 안되어서 반대파 블럭은 붕괴되었다. 번햄은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러시아를 새로운 관료적 계급 사회의 선구로 정의하는 관리자 혁명 [The Managerial Revolution](1941)을 쓰는 것으로 나아가면서, 맑스주의를 비난하고 그의 부르주아적 학문의 소굴로 도망갔다. 또한 샤흐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1947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도당적 책략을 계속했던 에이번과 함께) 소련을 새로운 형태의 계급 사회, "관료적 집산주의"로 성격 지으면서 그들이 처음 우물쭈물 했던 것을 일반화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샤흐트만의 소수파는 당의 40% 정도의 지지를 받았었고, 사회주의 노동자 당 청년조직의 다수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약 800명 정도의 조직원을 확보했었다. 1940년 가을, WP는 323명의 조직원을 주장했다. 이것은 "폭락 후의 경미한 상승"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단순히 정치의 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하여 보다 우익적인 인자들 - 번햄을 우두머리로 하는 - 이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부터의 분리의 기회를 이용하자, 초기 노동자당의 무게중심이 원래의 소부르주아 반대파의 좌익으로 이동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노동자당은 소비에트 방어주의로부터의 자신들의 탈주를 정당화하기 위한 완전히 성숙한 이론을 모색하던 좌익-중도주의주의 그룹이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스탈린을 향해 돌아서고 소련을 침략했을 때(트로츠키가 예측했던 것처럼), WP 내부에서 소련을 방어할 것인가를 두고 투쟁이 있었다; WP가 소련 침공의 경우 소련을 방어하겠다던 샤흐트만의 이전 선언을 지키지 않자 로스앤젤레스에서 소수의 WP 청년들이 SWP로 되돌아갔다. 전쟁 기간 WP의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의 계급적 중립의 입장은 WP의 수정주의 경로의 강화를 향한 거대한 또 다른 걸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1941년 6월 이후 미소 동맹이 국내의 反소비에트주의를 일시 정지시키고 "제3 진영"에게 상대적으로 좌익적인 표상을 허용했다. 전쟁 산업들의 개방과 함께 과거에는 만성적으로 실업상태였던 소부르주아지 WP 청년들이 산업에서 직업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루즈벨트주의 노동조합 관료와 스탈린주의 공산당에 있는 사회 애국주의자들에 대한 계급투쟁적 반대파로서 SWP와 경쟁하는 노동조합들에서의 실질적인 요소가 되었다. WP는 자신을 제4 인터내셔널의 한 지부로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 후 WP와 SWP 사이에 실패한 "통합" 협상들이 있었다.

1948년, 냉전의 개시와 함께 새로와진 부르주아지 반[反]소비에트주의에 직면하여 급격한 우익으로의 움직임을 반영하면서 샤흐트만은 제4 인터내셔널로부터 분명하게 등을 돌렸다. 1949년, 이제 더 이상 미국 노동계급의 지도력에 대한 열망이 없는 노동자 당은 독립 사회주의 동맹(ISL)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때 이후 오랫동안 대부분의 WP 청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소부르주아적 경력들을 위해서 노동조합을 떠났다. 샤흐트만주의 신문 노동자 실천[Labor Action]의 발행 부수는 2차 세계 대전 중반에 2만-2만5천 부에서 1953년 고작 3천부 남짓으로 급전직하했다. ISL은 애틀리의 전후 영국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길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자동차 노동자[Autoworkers]의 관료 월터 로이터[Walter Reuther]에게 노동당을 만들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행위를 보면서 그저 만족했다. 그러나 AFL과 CIO 관료집단들은 반[反]공산주의 운동의 전위대에 있었다. 1958년, 미국 사회민주주의의 찌꺼기들 속으로 청산할 때 즈음, 샤흐트만 추종자들은 "우리는 레닌주의로 알려져 있거나 그런 것으로 정의되는 어떠한 교의에도 등록하지 않는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로 알려져 있거나 그런 것으로 정의되는 어떠한 교의에도 등록하지 않는다."(신 인터내셔널, 1958년 봄-여름)고 선언하고 있었다. 샤흐트만과 그의 최 측근 이론적 동지들이 결국 민주당의 가장 反공산주의 우익에 있는 조지 미니와 함께하게 되면서, 노동자 당은 곧 해산했다. 한편 마이클 해링턴은 민주당의 보다 자유주의적 세력 쪽으로 움직였고, 핼 드래이퍼는 미국 ISO의 선구였던 독립 사회주의자들의 건설을 돕는 가운데 경솔하게도 버클리의 신 좌파 안에서 활동했다.

"이론"으로 포장한 강령

"국가 자본주의"라는 클리프주의 버전이 보다 앞의 것인 "관료적 집산주의"보다 오늘날 좌익에게 더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두 이론들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인 내용보다는 시대와 장소의 문제이다. 클리프주의는 똑같은 정치적 충동과 강령에 기초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국가의 영역에서 표현되는 미국 샤흐트만주의의 영국 버전이다.

클리프가 한국 전쟁 동안 제국주의의 냉전 공세의 압력에 굴복했을 때 영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이미 깊이 파편화되어 지배 노동당 안에 매장되었다. 그래서 클리프의 수정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미국 트로츠키주의를 위한 1940년 투쟁이 그랬던 것처럼 소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경향들 사이의 명백한 구별정립이 아니었다. 그러나 혁명적 맑스주의로부터 클리프의 분리는 어떤 것보다도 강령적으로 결정적이었다. 클리프는 이미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가에 대한 방어에 대한 자신의 포기에 대하여 "국가 자본주의"로 이론적 정당화를 하면서 소비에트 경험 전체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선언했다.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소 영국"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조정된 부르주아지 사회 질서에 대한 그의 굴복으로 클리프는 후기 샤흐트만 보다 조금 더 좌익 쪽으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이론"의 수준에서, 클리프는 소비에트 관료집단이 새로운 "관료적 집산주의" 지배계급이라는 사상을 거부했고, 소련이 단지 자본주의의 형태라는 카우츠키의 관념을 부활시켰다. 클리프의 이론가로서의 억측의 증명서들은 1955년 그의 책, 스탈린주의 러시아맑스주의적 분에 기초하고 있다. 이 책에서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국가 자본주의"적 성격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맑스주의자들에게 적확한 의미를 가지는 용어들을 - 경쟁, 축적, 상품, 가치 등 – 단순히 거칠고 부정직하게 재 정의함으로써, 일러지기를 "맑스주의적" 경제분석을 시도한다. 클리프에 따르면, "집합적" 자본가 계급 (그 자체가 어떠한 맑스주의적 방식에 의해서도 불합리한)이 가치법칙에 의해 작동되는 시장 경제를 가동시키면서 서양 자본주의와 군사적으로 "경쟁"하기 위하여 "이윤"을 축적하도록 강요되고 있다. 클리프는 소비에트 현실을 자신의 "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소비에트 현실에 대하여 극도로 왜곡해야만 했다. ("'국가자본주의'라는 反맑스주의적 이론 -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평", 청년 스파르타쿠스 51-53, 1977년 2월, 3월, 4월을 보시오. 고전 맑스주의 경제학의 검증을 통한 "국가 자본주의" 이론의 이론적 오류에 대한 토론을 위해서는, 영국의 맑스주의 연구Vol2. No. 1에 1969-70 겨울에 출판되었고, SL/U.S.의 맑스주의 연구 시리즈 No.5로서 1973년 7월에 재출판된, 켄 타르버크[Ken Tarbuck]의 "국가자본주의 이론 - 스프링도 없는 시계" 를 보시오.)

클리프의, 그의 전에 샤흐트만, 주장들은 전세계적인 反공산주의 성전으로부터 일생의 직업을 취해왔던 사회민주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공공연한 냉전주의자들에게 딱 드러맞거나 가끔은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가 본 것처럼, 비록 샤흐트만의 트로츠키주의로부터의 분리의 완전한 반(反)소비에트적 의미들이 이해되기까지 일정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1972년 그가 죽었을 때, 그는 심지어 미 제국주의가 베트남 사회 혁명을 피로 물들이려는 시도까지 지지하는 순수한 사회애국주의자로서 자신의 마지막 10년을 보냈었다. 아마도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가장 구체적인 봉사는 2차 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전투적 좌익 노동조합들을 박살냈던 反공산주의 깡패들을 지지하고 자금을 지원하고, "소비에트 블럭"에서의 반혁명을 위해 활동하던 파시즘에 "사로잡힌 국가들"의 그룹에게 "노동계급"의 덮개를 제공해주면서, 미 국무성의 한 쪽 팔로서 기능했던 "AFL-CIA" 노동조합주의의 전형이었던 미국 교사노조의 관료집단을 위한 고문단으로서 였다.

핵심적으로, "관료적 집산주의"는 공식적인 3단 논법에 근거했다: 생산수단은 국가에 속한다, 국가는 관료집단에 속한다(즉 관료집당에 의하여 통제된다); 따라서 관료집단은 재산을 "소유"하고 지배계급을 형성한다. 그러나 재산이 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이익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소유되어만 한다 - 이것은 착취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기본이다. "관료적 집산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는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두 개의 주요 계급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계급이 있다는 이해, 맑스주의의 바로 그 기본을 내 던져버린다. 샤흐트만의 이론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새로운 "관료적" 지배계급의 존재를 가정한다. 샤흐트만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와 동시에 경쟁하는 "관료적 집산주의"가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생산 모드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샤흐트만의 이론은 그의 시대의 산물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는 큰 기업들은 그들의 주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영자들에 의해 통제된다고 하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었다. 벌[A.A. Berle]과 민즈[G.C. Means]의 현대 기업과 사적 소유(1932)는 이런 관점에 대한 영향력 있는 개진이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권의 중요성을 가치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어떠한 배당금도 어떤 식으로 건 산출되지 않고 있던 대공황에 의해 크게 조장되었다.) 샤흐트만의 과거 이론가 제임스 번햄의 저작 경영 혁명[Managerial Revolution]이 새로운 경영 엘리트의 이런 감상주의적 관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관료적 집산주의는 인류 역사의 결정적인 추진력은 실체가 없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지 부의 사적인 축적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이 관점의 논리는 또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적 곤경으로부터 인류를 지도하기 위해 필요한 의식성을 획득할 어떠한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 심오한 역사적 비관주의이다. 1946년 조지 오웰의 글로 "제임스 번햄과 경영 혁명"을 바꿔 설명하면, 번햄의 관점에서는 인류 다수의 운명은 "영원히 신발에 짓밟힌 얼굴"로서 요약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관점에 대한 역사적인 비관주의가 이 시기에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을 "민주주의적" 제국주의와의 화해로 이끌었다. 트로츠키의 과거 협력자 빅터 서지와 중국 트로츠키주의 건설자 진독수[Chen Duxiu]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제국주의자들의 캠프 속으로라는 그들의 절망의 논리를 따랐다.

맑스주의자에게,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권에 의해 정의되는 사람들의 층이다 - 주요하게 그들의 이데올로기, 그들의 도덕이나 그것의 부족, 그들의 권력욕, 그들의 생활 수준 등에 따라서가 아니라. 핵심은 소비에트 현실에 대한 경멸적인 서술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 법칙과 발전의 방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초기 "국가 자본주의" 이론들의 옹호자들에 맞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소비에트 관료집단을 '국가 자본주의자들'의 계급으로서 표현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분명히 비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관료집단은 주식도 채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료집단은 그들 자신의 어떠한 특별한 소유관계와도 독립적으로, 행정적 위계체제의 방식으로 충원되고 보충되며 갱신된다. 개별 관료는 국가 기구를 활용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들을 자신의 상속자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 관료집단은 자신의 특권들을 권력 남용의 형식으로 향유한다. 관료집단은 자신의 수입을 감춘다; 관료집단 심지어 자신이 특별한 사회 그룹으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는 척 한다. 관료의 국민 소득의 광대한 부분에 대한 착복은 사회적 기생주의의 성격을 가진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권력의 완벽함과 그것을 덮어 가리는 아첨의 연막에도 불구하고, 최고로 모순적이고, 어정쩡하며, 위엄도 없는 소비에트 명령 계층의 지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한다.

“사람들은 거대 관료는 소유 양식들이 그에게 필요한 수입을 제공한다면 지배적인 소유양식이 무엇인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이런 주장은 관료 자신의 권리들의 불안정성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의 문제도 무시하고 있다. 가족에 대한 숭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만약 그들이 특권들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면, 특권들은 절반의 가치만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언의 권리는 소유의 권리와 따로 떨어뜨릴 수 없다. 기업의 감독자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식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이 결정적인 영역에서 관료집단의 승리는 관료의 새로운 소유계급으로의 변신을 의미한다.”

-배반당한 혁명

짓 뭉게진 샤흐트만/클리프의 "이론들"

소련과 동유럽에 대한 그들의 예측이라는 면에서, 모든 "신 계급" 이론들은 조소의 대상으로 판명되었다. 관료 계층은 지배계급으로서 행동할 능력이 없었다; 권력은 가지고 있으나 생산수단에 대한 개별적인 사적소유에 있는 그 권력의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들은 알프레드 크룹, 헨리 포드, 록 펠러 가문 혹은 심지어 정복자 윌리암 처럼도 행동할 수 없었다. 샤흐트만주의 저작들에 관한 그의 책에서, 마트감나는 역사적 발전과 1950년대 동유럽에서의 노동자 봉기들, 그리고 1990-91년 스탈린주의의 궁극적 붕괴에 반대되는 샤흐트만의 이론화를 평가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것 자체로 이 책은 내용의 빈곤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단 하나의 예 자체가 지배계급으로서의 스탈린 관료집단이라는 관념을 결정적으로 논박한다. 증오스런 라코시 정권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도된 친 사회주의 노동자 정치 혁명에 직면하여, 관료집단은 수직으로 분열했고, 공산당의 80%가 노동자 혁명의 편으로 넘어갔다. 실제로 부다페스트 경찰국장 뿐만 아니라 군대의 전체 장교 부대도 노동계급 봉기에 대한 진압을 거부했다. 누가 이렇게 행동하는 지배계급에 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1989-90년 동독과 이후 소련에서의 준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에서 우리는 첫째로 동유럽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가장 중요하게는 동독)과 그리고 나서는 소련 자체를 자본주의자들에게 간단하게 넘겨주었던 자포자기한 스탈린의 후계자들에 맞서 투쟁하면서 포위 당해 있던 반혁명에 대항하여 동독과 소련 프롤레타리아트들을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제한된 조건에서)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 해서 투쟁했다. 우리로부터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소개받은 많은 소비에트와 독일 노동자들은 스탈린주의 치하의 삶에 대한 그 저작의 서술들이 마치 그 저작이 방금 전에 쓰여졌던 것처럼 읽힌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열망에 의해 명령된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일국 사회주의", "평화공존" 그리고 "진보적"인 사람들과 "반동적"인 사람들 사이의 투쟁으로 "반(反)제국주의”를 정의 내리는 철저한 반(反)맑스주의적 강령을 포장하기 위해 사용된 맑스주의 용어학의 절충주의적 잡탕이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억압에 의해 원자화된 노동계급들을 정치적으로 무장해제 하면서, 그리고 유일하게 가능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장기간의 기초와 자신의 역사적 이해에 입각하여 투쟁하는 계급 의식적 노동계급을 파괴하면서 맑스주의를 곡해했다.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10월의 성과들의 생존을 노동자 국가의 경제적 기초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성과도 연결시켰다: "10월 혁명은 지배계층에 의해 배반당했으나, 아직 타도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거대한 이미 수립된 소유 관계들, 살아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힘, 프롤레타리아트 최상 인자들의 의식성, 세계 제국주의의 곤경, 그리고 세계 혁명의 불가피성에 부합하는 거대한 저항의 힘을 가지고 있다."

샤흐트만/클리프: 반(反)공산주의 대 맑스주의

러시아 혁명의 운명비판적 맑스주의의 잃어버린 문서들 1에 출판된 문서들은 샤흐트만주의자들의 이론의 모래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나 많이 움직였는가를 드러낸다. 이것은 "관료적 집산주의"는 현실을 이해하고 그것의 미래 발전을 조명하기 위한 시도로서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39-40년 분파 투쟁 동안 샤흐트만은 스탈린주의자들이 핀란드와 발틱 국가들에서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들을 전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소련은 방어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948년이 되면, 그와 노동자 당의 나머지 이론가들은 동유럽에서 적군이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들을 전복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은 방어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래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샤흐트만은 혁명가들은 만약 제국주의가 진짜로 소련을 위협한다면 소련의 집산화된 소유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SWP를 떠났고, 여전히 1940년 12월의 신 인터내셔널에서 이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략하고 소련에 대한 방어가 시작되어야 할 순간이 오자, 그는 그의 장단을 바꾸어 소련이 "민주주의적" 제국주의 캠프와 군사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소비에트 방어주의는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원래의 "이론화"에 있어서의 한 시도 속에서, 샤흐트만은 1940년 12월 그의 글 "소련은 노동자 국가인가?"에서 소련은 "관료적 국가 사회주의"이고 혁명가들은 한편으로 집산화된 "소유 관계들"가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소련의 집산화된 "소유 양식"을 여전히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주의의 어떠한 기초도 부족한 소유 형식들과 소유 관계들에 대한 이 완전한 허위의 구별은 조셉 한센으로부터 파괴적인 비판을 받았다.("번햄의 변호인이 계속하고 있다", 인터내셔널, 1941년 2월). 조 카터 또한 샤흐트만에 의해 발명된 이 잘못된 2분법을 공격했다; 마트감나의 책은 카터의 글 "관료적 집산주의"(신 인터내셔널, 1941년 9월)을 재출판한다-샤흐트만에 대한 공격은 제외하고.

노동자 당이 1941년 12월에 소비에트 관료집단이 완전히 성숙한 "관료적 집산주의" 지배계급이라는 입장을 수용했을 때, 그들은 스탈린주의 지배는 첫 번째 노동자국가를 기형화시키는 고립 때문에 발생한 러시아에 고유한 현상이라는 주장을 계속하면서 트로츠키를 모방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생산 수단에 대한 필수적인 관계도 없는, 그리고 자신들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가 그 자신의 존재라는 바로 그 사실을 부정했던 지계계급을 단정했다.

전쟁 후의 유럽에 대한 적군의 점령과 함께, 노동자당이 스탈린주의 관료주의는 세계 지배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경쟁자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관료적 집산주의는 완전한 스탈린 공포증으로 만개했다:

"우리 앞에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 민중뿐만 아니라 12개의 다른 민족들과 인민들까지 가장 잔혹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완전히 성숙한 반동적 제국으로서의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발전이다....

"(전통적인 개량주의 조직들 같은) 스탈린주의 당들이 자본가 계급의 대리인이라거나 '부르주아지 계급에 굴종한다'고 하는 이론은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그들은 러시아 관료적 집산주의의 대리인들이다."

− 노동자 당 결의안, 신 인터내셔널, 1947년 4월(러시아 혁명의 운명에서 재 출판)

트로츠키는 깨지지 쉬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2차 대전에 의해 필연적으로 유발될 노동계급 봉기에서 타도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개량주의 스탈린주의 당들과 사회민주당들은 침략하고 있는 연합군들이 서유럽에서 자본주의 지배를 재 안정화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전쟁 끝나고 있었던 노동계급 투쟁을 빗나가게 했다. 동유럽에서는 적군의 점령이, 나찌와 나찌와 동맹한 지배계급들을 쫓아낸 결과, 숨쉴 여유를 제공했다. 동유럽에서의 스탈린의 기형적 노동자 국가들의 창설은 연합국의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과거 동맹에 대하여 방향을 틀어 냉전을 시작하자 군사적/안보적 염려에서 명령되었다. 유고슬라비아와 1949년 중국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세력들에 의한 토착 농민 기반의 혁명들도 또한 새로운 기형적 노동자 국가들을 건설했다.

마트감나가 그의 책에서 자랑스럽게 칭송하는 샤흐트만의 저작들은 "스탈린주의는 노예 노동 수용소들에서 '가장 순수하게' 폭로된다"(마트감나에 의해 출판되었던 로이스 제이콥스[잭 웨버]의 1947년 7월의 기사로부터) 거나 "노예 노동은 스탈린주의 정권의 우연적이거나 피상적인 혹이 아니다; 이것은 필수적이고, 본래적이며, 대체가 불가능하다"(마트감나가 재 출판하지 않은 1947년 12월의 신 인터내셔널의 한 글로부터)와 같은 주장들에서 분명하듯이 냉전 반(反)공산주의로 충만해있다. 스탈린주의 쿨락은 − 경제적 착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억압을 위해서 고안된 − 노동자들을 낮은 임금으로 자발적으로 보내는 것이 불가능한 시베리아와 다른 지역들에 강제 노동의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런 방책들은 어떠한 기술이나 훈련을 필요로 하는 노동과도 양립이 불가능했다. 소비에트 경제에서 "대체가 불가능함"을 증명하기는 커녕, 스탈린 사후의 자유화에서 이것들은 재정적 인센트브들이라는 보다 합리적인 형태들로 대체되었다. 반대로 자본주의 반혁명은 시베리아 인민을 정치경제의 외부에 있는 잉여로 버려 두었고, 기아, 질병, 추위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가 최종적으로 스탈린의 후계자들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사태는 트로츠키의 예측들을 충격적으로 확증해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1936년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썼었다:

"부르주아지 사회는 자신의 사회적 기초를 바꾸지 않으면서 많은 정치적 정권들과 관료적 계층들을 역사의 과정에서 대체해 왔다.... 국가권력은 자본주의 발전과 조응할 수 있었거나 자본주의 발전에 제동을 걸거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적 소유와 경쟁에 기초하여, 생산력들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해결해 왔다. 이것과는 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소유 관계들은 그것들의 저장소로서의 새로운 국가와 떼어놓을 수 없도록 묶여 있다....

"소비에트 정권의 붕괴는 불가피하게 계획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며, 그래서 국가 소유의 폐지로 이어질 것이다. 그들 내부에 있는 연합기업들과 공장들 사이의 강제의 결합력이 없어질 것이다. 보다 성공적인 기업들은 독립의 길로로 나아가는 것에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주식회사들로 바꾸거나, 소유의 다른 이행적 형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 한 가지 예를 들면, 노동자들이 이윤들에 참여해야 하는 형태. 집산 농장들은 동시에 그리고 훨씬 쉽게 해체될 것이다. 현재의 관료 독재의 붕괴는 그래서 산업과 문화의 재앙적 쇠퇴를 동반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들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 배반당한 혁명

스탈린주의: 혁명의 매장자, 노동자 국가들의 매장자

스탈린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트 의식성에 대한 파괴가 그랬듯이, 수십 년 동안 진행되었던 스탈린주의의 붕괴는 중요한 세대적인 구성부분을 가졌다. 테러와 거짓말들의 정권은 노동대중들 사이의 사회주의적 이상주의를 근절했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서 시작하여, 스탈린은 국가에 대한 충성의 기초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밀어 부쳤다. 러시아 민족주의는 히틀러에 대항한 2차 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하는데 중요한 기재가 되었다(나찌가 소비에트 영토의 광활한 영역을 침략할 수 있도록 했던, 스탈린의 피의 숙청들에 의하여 의기소침해진 군대의 초기의 붕괴 이후).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만연한 테러를 정치적 반대파들과 경제 범죄들에 대한 무기로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회복되던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경제상황과, 뒤이어 발생했던 스탈린주의 정권들을 위협했던 동독, 헝가리, 폴란드에서의 일련의 노동자들의 친 사회주의 봉기들과 시위들과 함께, 후르시초프 시절은 소비재 생산의 증가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에서의 전반적 향상의 정책으로 특징지어진다. 브레지네프 시절의 엄청난 규모의 부패가 사람들 속에 남아 있던 평등주의적 가치를 크게 침식했다. 고르바초프의 예처럼 다음 세대의 관료집단은 자신들에 상당하는 수입 수준에 있는 서구국가의 수도들의 하바드 비즈니스 스쿨 출신의 상대방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친하게 지내고자 열망하던 관료의 자식들, 기술자들, 그리고 다른 여피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특권화된 층의 소비에트 사회 내에서의 증가된 비중을 반영했다. 소비에트 경제의 재활을 위한 유일한 길로서 정당화되었던 "시장 사회주의" 실험(물론 노동자 민주주의는 옵션에 없었다)들로 시작하여, 이 계층은 공공연하게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를 없애버리는데 내부적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영원하라 자본주의. 고르바쵸프의 "500일 동안의 자본주의"라는 충격요법을 밀어 부칠 수 없다고 판명 나자, 그는 미국 제국주의에 나라를 팔아 넘기려고 혈안이 되어 시도하던 더 무자비한 과거 스탈린주의 관료인 옐친에 의해 대체되었다.

러시아 반혁명의 중심적 사건은 시대에 뒤진 스탈린주의자였던 자들의 무능력한 "페르스트로이카 쿠테타"에 대항한 1991년 8월 옐친의 "반(反)-쿠테타"였다. 실제로 모든 반(反)소비에트 가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옐친을 환영하고, 혹은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는 즉각적으로 죽었다고 선언할 기회를 잡았다. 오직 ICL만이 자본주의 복구를 패배시키기 위하여 정치혁명으로 소련 노동 인민들을 분기시키기 위하여 노력했다. ICL은 소련 전역에 우리의 기사 "소비에트 노동자들: 옐친-부시 반혁명을 분쇄하라!"를 대량으로 배포했다. 제국주의로부터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옐친의 "민주주의"를 위한 권력장악의 공고화는 - 침투해오는 자본주의 반혁명에 대한 노동 계급의 대중적 저항없이 -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최종적 파괴를 가져왔다.

옐친의 반혁명은 동유럽에서 "시장 사회주의", 그리고 러시아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으로 알려진 경제 방책들의 소개로 준비되었다.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시장에 기원을 둔 "개혁들"의 활용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예고했다. 개혁들은 기업관계들이 상당부분 시장의 힘에 의해 통제되도록 허용하는 중앙계획의 점진적 축소를 특징으로 했다. 부유한 공화국들이 시장의 힘에 의해 확립된 무역으로 이득을 보게 되면서, 유고슬라비이와 소련 같은 나라의 다민족적 성격을 깨뜨리는데 강력한 압력들을 만들어내는 지역 차원에서의 탈중심화가 외국무역에 대한 국가 독점의 폐지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특히 많은 자본의 부재라는 조건에서, 발칸과 다른 지역에서 무시무시하고 모든 방면에 걸친 "인종청소"로 직결되던 민족주의가 구 소비에트의 구 블럭들에서 자본주의 복구를 위한 주요한 공격무기로 활용되었던 것처럼, 이들 경제적 요소들은 반동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거대한 부흥을 제공했다.

이 시기 내내 우리의 선전에서 스파르타시스트들은 "시장 사회주의" 정책들의 반(反)평등주의적 충격과 기형적 노동자 국가들의 경제들로의 국제 금융자본의 침투를 허용하는 것의 치명적 위험, 그리고 이들 국가들 내부에서의 민족주의적 경쟁들의 증가에 관하여 경고했다. 우리의 1981년 팜플렛, 솔리다르노스크: CIA와 은행업자들을 위한 폴란드 어용노조에서 우리는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사회주의적 의식성의 파괴에 대한 책임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있음을 밝혔다. 우리의 분석들과 예측들은 벌어진 사건들에 의해 충격적으로 확증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단지 분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의식성을 위한 투쟁에 우리의 혁명적 강령을 가지고 개입하고 외국과 국내의 치명적인 적들에 대항하여 남아 있는 10월의 성과들을 방어하도록 소련과 동유럽의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1988년 7월에 출판된 우리의 팜플렛 동유럽에서의 "시장 사회주의"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시장 사회주의'의 강령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스탈린주의의 산물이다. 기업의 자기 경영과 자기 재정조달은 경제적 혼돈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실업과 물가 인상을 발생시키고, 노동계급 내부와 사회전반에 걸쳐 불평등들을 확대시키며, 국제 은행 업자들에 대한 의존성을 창출하고, 민족 분열들과 분쟁들을 강화시키며 내부적 자본주의 복구 세력을 엄청나게 강화시킨다....

"민족성들의 문제는 '자기 경영' 정책들의 핵심이었다. 지방분권에 대한 어느 때 보다 큰 사회적 압력은 아래로부터 - 공장에 있는 노동자들로부터 - 나오는 것이 아니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등 보다 부유한 공화국들의 관료집단들로부터 나왔다.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의 권한 이양의 경제적 결과들은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서, 특히 유고슬라비아에서 알바니아 민족이 집중되어 있는 코소보에서, 악의에 찬 민족적 분노의 근원이 되었다....

"60년대의 지방분권 정책들 또한 유고슬라비아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시장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1967년에 기업들은 그들이 획득한 외국환의 일정부분을 보유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 이후 외환을 둘러싼 쟁탈이 가끔 공공연한 경제 전쟁으로 귀결되는 지역적/민족적 그리고 기업 분쟁의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정권들은 뒤에 열거되는 주요 요인들을 가지는 경제의 설정을 위하여 중앙 계획을 포기하는 고유한 경향이 있다: 기업들 사이의 원자화된 경쟁을 통해 결정되는 생산량과 가격들; 기업의 이윤에 맞게 조정되는 투자, 경영자 봉급들과 노동자 임금들;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기업들의 폐쇄와 이로 인한 실업; 고율의 물가인상으로 귀결되는 가격 보조의 폐지; 소자본주의 기업인들의 역할의 증대, 특히 서비스 분야에서; 합동 투자들을 포함하는 서방과 일본 자본주의와의 증가된 상업적, 재정적 연결의 확대에 대한 장려. 이들 방책들은 많은 서구 부르주아 해설가들과 적지 않은 혼란에 빠진 좌익들이 강력히 주장하는 것처럼, 점진적 자본주의화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 반혁명을 위한 내부 세력들을 강화한다....

"그래서 스탈린주의의 틀 내에는 중앙 계획과 경영을 시장 메카니즘들로 대체하려고 하는 고유한 경향이 있다.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노동자 위원회들)의 규율을 따를 수 없기 때문에, 관료집단은 경제적 비효율성에 대한 유일한 해답으로서, 경제주체들을 시장 경쟁의 규율에 종속시키는 것을 점 점 더 많이 바라본다. 소련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의 회복은 단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기초 위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재생을 위한 지극히 중요한 조건이다."

소련에서 복구된 혁명적 노동자 정권은 사회주의 창설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세계 제국주의의 요새들로의 혁명의 확대를 위해 투쟁할 것이다.

좌익반대파의 경제 강령

신경제정책(NEP)은 산업이 붕괴되고 극도로 혼란했던 후진적이고 농민이 압도적인 경제에서 내전의 참화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취해졌던 일시적 후퇴였다. 레닌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구상되었던 초기 NEP 입법은 농경 생산물의 자유로운 교환을 허용하는 한편으로 노동의 고용과 토지의 획득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러나, 일시적 후퇴로 시작했던 것이 나중에 부하린과 스탈린에 의해서 농민의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는 계속적인 정책으로 변했다. 1925년 제한조치들이 농경 자본주의의 성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대거 자유화되었다. 쿨락과 "NEP 맨"들은 환영을 받으면서 당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당시 상승하던 관료집단이 된 자들의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러시아에 있는 "시장 사회주의" 주창자들은 애정을 가지고 1920년대 중 후반의 NEP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이론적 대표 인물은 니콜라이 부하린이었고, 최고 정책 수행자는 당시 그의 블럭 파트너였던 조세프 스탈린이었다. 부하린은 농민들에게 "스스로 부자가 되라!"고 주장했으며, 사회주의는 "달팽이의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소련에서 산업 생산의 확대는 공업생산품에 대한 소소유 농민들의 시장 요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1922년 그의 저작 N.E.P.로부터 사회주의로에서 소비에트의 산업적 기초의 확대를 위한 자원을 늘이기 위한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의 필요성을 주창했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신봉했던 트르츠키의 좌익반대파는 급속한 산업화와 중앙계획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찌기 1923년 4월, 12차 당대회에 제출되었던 "산업에 관한 테제"에서 트로츠키는 "가위 위기"(농민들의 도시에 맞선 식량 점유를 야기했던 농산물로 교환하기 위한 충분한 공산품의 부족) 현장에 관하여 지적했었다. 1925년에, 트로츠키는 "만약 국가 산업이 농경보다 더디게 발전한다면... 당연히 이 과정은 자본주의 복구로 귀결될 것이다"(러시아는 어디로?)라고 경고했다.

역사가 알렉산더 얼리히는 그의 고전적 저작 1924-1928년 소비에트 산업화 논쟁(1960)에서 당 논쟁들을 다루고 있다. 부하린/스탈린의 정책에 대항하여, 좌익반대파는 산업화에 재정을 조달하기 위한 쿨락들에 대한 부가된 세금부과와 "이들 최대 다수의 농민 그룹[중간 농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기계화되고 집산화된 농경의 혜택들에 대한 구조적이고 점진적인 소개"를 요구했다(반대파의 정강[1927]). 좌익반대파는 "가위 위기"를 완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비중을 늘리기 위하여 산업화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할 것을 주장했다.

부하린의 정책은 소련에서 사회적 반혁명 세력에게 연료를 공급했다. 쿨락들을 "부유하게 하는" 정책은 예상대로 시골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실제로 혁명 이전 소작농의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처럼 계급 차이의 악화로 귀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쿨락들의 도시에 대한 공갈로 귀결되었다. 한편, NEP 맨들은 지속적으로 힘을 강화했다: 1926년 말에 전체 산업 노동력의 거의 60%가 공급과 분배를 통제하고 있던 소자본가들의 손아귀에 있던 사적으로 소유된 소규모 산업에서 일했다. 1928년이 되면, 쿨락들은 도시를 굶주리도록 위협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 국가 그 자체의 경제적 기초들을 잠식하려고 위협하면서 곡물 파업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1924년 권력을 찬탈했던 보수적 관료 계층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노동자 국가의 소유 양식 위에서 자라났던 그의 정권의 미래에 관하여 두려워했다. 자본주의 복구는 관료집단들의 권력과 특권의 기반을 위협했고, 선택지가 아니었다. 스탈린에게 쿨락의 착복들을 분쇄하기 위하여 무계획적이고 경솔하며 잔혹한 강제 집산화 정책과 강제로 추진되는 산업화로 공격하는 것 외의 다른 길은 없었다. 소비에트 국가의 노동계급적 기초들을 유지하기 위한 그 자신의 방책들과 이유를 찾는데 있어서 스탈린은 그 자신이 전에 격렬하게 반대했었던 급속한 산업 발전을 주창하던 좌익 반대파의 강령의 핵심 측면들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은 직접적으로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완전한 사회적 전복으로 귀결되는 경제정책을 가진 부하린과의 블럭을 깼다.(부하린과 그의 축출된 지지자들은 국제적으로 우익 반대파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사건들에 비추어, 클리프와 마트감나는 그들 각자의 "신 지배 계급들"의 지배(혹은 자본주의 복구)를 이 시기로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의 쿨락들에 대한 분쇄가 1928년 자본주의의 복구를 웅변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그들의 실제 초점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하여 우로부터 반대했던 부하린과 그의 지지자들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소급적으로 처음부터 그들 자신을 트로츠키의 국제 좌익반대파와 그들의 무조건적 방어주의 강령의 바깥에 그리고 반대쪽에 위치시킨다.

오늘날 중국에서 기형적 노동자 국가 체제 틀 내부에서의 강력한 자본주의-복구주의자들의 경제 세력들의 성장에 대한 고무는 이미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나 고르바초프의 러시아에서 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국가 소유 공장들이 폐쇄되고 사유화되는 가운데 실업이 엄청난 정도에 이르게 되었고 외국 무역에 대한 독점이 잠식당하면서 많은 중국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이 말살되고 있다. 중국 관료집단 자신이 "경제 특구"에서 외국 자본가들과의 합작 투자의 주요 참가자이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을 분쇄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퇴화의 열망을 실현시킬 수 없다. 다시 한번 대안들이 제시된다: 국가의 사회화된 경제적 기초를 방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인가 아니면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자본주의 반혁명인가.

후기: 션 마트감나, 샤흐트만의 아류

션 마트감나는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일원으로서 정치적 생에 진입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1959년에 그는 고(故) 게리 힐리가 신봉하던 겉치레만의 트로츠키주의로 획득되었다. 힐리의 조직은 퇴행화된, 그리고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 속의 반(反)자본주의적 성취들을 방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이라는 트로츠키주의 강령을 옹호함으로써 1956년 헝가리 노동자들의 봉기 이후 공산당 중핵 층을 통째로 신규 조직원으로 조직했었다. 노동당으로의 깊은 입당으로부터 빠져나오면서, 힐리 추종세력들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에 Labour Review와 같은 잡지들에서 맑스주의 문학과 역사에서 인상 깊은 문필적 정통과 유창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부적인 관료주의적 행태들에서 가장 먼저 스스로를 명백히 했던 근본적인 정치적 깡패집단이었다는 것이 근저에 있었다. 마트감나는 1963년에 힐리에 의하여 축출되었지만, 1년 후에야 힐리 조직이 노동당으로의 어떠한 입당도 비난했던 때에 그와 정치적으로 결별했다. 그 후 20여 년 동안 마트감나는 테드 그란트의 전투적 경향으로부터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자들, 파블로 추종자들, 노동자 권력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트로츠키주의라는 망투를 걸치는 거의 모든 다른 경향들에 들어갔거나, 그들과 융합하거나 농탕을 쳤다.

1979년 적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대한 제국주의자의 고함소리가 한창인 때에, 국제공산주의동맹으로 조직되었던 마트감나의 경향은 제한적인 토지개혁과 여성들이 읽고 쓰게 하기 위한 교육을 추진했던 좌익 민족주의 정부에 대한 소련의 방어의 결과들이 “무조건적으로 반동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소련에 대한 군사적 방어를 위한 자신들의 가공(架空)의 입장을 포기했다. 그 후의 2차 냉전이라는 반공산주의 병적흥분상태 동안에, 노동당 속에 깊숙이 빠진 채로 있던 마트감나 그룹은 제국주의자들과 함께 반사회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폴란드 솔리다르노스크를 위하여 짖어대었고, 독일에서의 자본주의적 재통일을 지지했으며, 1990-91년 소련과 동유럽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을 파괴했던 반혁명들을 환영했다.

오늘날 현재 노동자 자유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Workers Liberty -AWL)으로 불리는 마트감나 경향은 토니 블레어가 노동조합들과의 역사적인 연계를 끊음으로써 자본가 정당으로 개조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노동당, 사실은 신노동당 속에 여전히 빠져 있다. 훌륭한 노동당원들로서, AWL은 “노동계급”의 얼굴을 자기 “자신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소심한 충성으로 화장하려고 애쓰는 자들과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트감나 추종자들이(타페의 Militant Labour와 함께) 진보조합당(Progressive Unionist Party(PUP)) 지도자인 빌리 허친슨과 같은 영국 제국주의의 파쇼적 충성파 총잡이에 대한 그들의 구역질나는 친근성으로 악명이 높은 북아일랜드에서 보다 이것이 더 분명한 곳은 없다. 흉악한 얼슬러 의용군(Ulster Volunteer Force(UVF))의 프런트인 PUP를 프로테스탄트 노동계급의 합법적인 대표로서 역겹게 묘사하면서, AWL은 자신들의 행사들에서 허친슨을 중요한 연사로 내세워왔으며, 그가 자신의 정강을 개진하도록 자신들의 저널의 지면을 그에게 제공해왔다. 1995년에는 한 AWL 여름학교가 얼슬러 조합당의 “안보” 대변인이면서 로얄 얼슬러 경찰대로부터 보수를 받는 고문인 켄 매기니스와의 “논쟁”을 크게 다루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AWL은 군대들은 오렌지 패권의 무장된 주먹의 필수적인 부분이기는 커녕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들 사이의 일종의 중립적인 조정자들이라는 제국주의자의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되뇌면서 영국 군대의 북아일랜드로부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것을 거부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첫 번째 대규모 전쟁인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전쟁의 발발과 함께, AWL은 블레어의 신노동당 자본가 정부와,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폭격 테러와 나토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인 코소보 해방군(UCK)을 지지함에 있어서 신노동당의 거칠고도 건방진 태도를 노예적으로 지지했던 영국의 전체 사이비 좌익의 물결 흐름 속에서 편안하게 헤엄쳤다. AWL은 영국/미국이 주도했던 나토의 전쟁에 너무나도 헌신적이어서 “전쟁 중단” 시위들이라는 무화과 잎사귀조차 피했다. 그러나 AWL은 나토 폭격을 완전하게 지지했던 런던에서의 1999년 4월 10일 코소보 시위를 위하여 역량을 동원했다. 토니 블레어 조차 망설이고 있던 때인 시작 때부터 마트감나는 지상군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 나토 군대들의 진주들이 코소보 인민들에 대한 세르브들의 대량학살 공세를 멈추게 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에 기뻐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세르브 유고슬라비아의 대량학살적인 제국주의를 승인하거나 혹은 그것에 무관심하지 않고서는 일방적으로 나토와 미국을 비난할 수 없다”(“사회주의자들의 이슈들”, 연대를 위한 실천, 1999년 4월 2일). 전쟁 동안 ‘코소보 독립’에 찬성하던 모든 수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AWL은 코소보가 나토의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하여 군사적으로 점령당하는 것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어떠한 반대들도 없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토의 의도였다.

이름뿐인 소비에트 방어주의자였던 션 마트감나는 그가 게리 힐리와 테드 그란트 밑에서 배웠던 것처럼, 1970년대 그의 대부분의 정치적 윤회 전반에 걸쳐, 러시아 문제는 “노동당 좌파들을 투쟁하게” 만들어야 하는 영국 “트로츠키주의”의 진짜 내용에 비하면 하찮은 “10번째 등급의 이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환상은 베트남 노동자들과 농민들에 의한 자신의 패배로 약화된 미국 제국주의가 공세로 되돌아가기 전에 약간의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던 때인 “데탕트”라는 짧은 시간대 동안에만 오직 가능했다. 1979년 미국 제국주의의 카터 행정부가 2차 냉전의 개시를 알렸던 반(反)소비에트 “인권 성전(聖戰)”을 시작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의 근대화되고 있던 좌익민족주의 정권을 방어하기 위한 소련의 군사개입을 이용했을 때, 마트감나는 사실상 사이비 좌파 경향들의 모든 조류가 피에 굶주린 이슬람 민병대들과 그들을 지원했던 CIA와 같은 편의 반(反)소비에트 악대차에 올라탔던 그 행진에 서둘러 합류했다. 갑자기 소비에트 방어주의라는 “10번째 등급”의 문제가 영국과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서약이라는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모든 점에서 부르주아지적인 반(反)소비에트주의에 굴복하면서, 1988년 마트감나의 조직은 스탈린주의는 “관료적 국가-독점 지배계급”을 구성하는 관료집단을 가지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사회를 의미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계급사회라는 단정은 본질적으로 샤흐트만의 “관료적 집산주의”의 재탕이었다. “소영국” 노동당원의 반공산주의라고 하면, 마트감나는 심지어 클리프보다 광적이다. 마트감나는 이론적 수준에서 스스로를 마트감나가 열망하는 껍데기뿐인 트로츠키주의 개량주의 영역을 영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클리프의 SWP와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샤흐트만을 부활시킨다. 마트감나는 또한 어리석은 사회 애국주의에 너무나도 빠져서 샤흐트만의 불미스러운 최후도 더 이상 그를 단념하게 하지 못한다.

물론, “러시아 혁명의 운명비판적 맑스주의의 잃어버린 텍스트들”의 페이지들에 나타나는 샤흐트만은 오늘날의 “공산주의 사망” 좌익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그려진다. 현실의 샤흐트만은 애매한 인물이었다. 초기 공산주의자였고 SWP의 창립 지도자들 중 하나였으며, 그의 트로츠키주의로부터의 분리는 우리의 계급 적들에 대한 복무로 그를 이끌었다.

우리가 이미 보았던 바와 같이, 샤흐트만은 캐넌의 SWP로부터의 그의 분리 직후의 시기에는 트로츠키주의 운동 내부에서의 이론적 문제들과 주춤거림들에 대한 좌로부터의 올바른 비평들을 가끔씩 수행하던 좀 더 중도주의자인 것처럼 보였다. 우리 경향은 항상 우리 운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봐 왔으며,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 당이 SWP에 반하여 옳았던 경우들을 인정해왔으며 그것들로부터 배워왔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이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통제권을 직접적으로 잡았을 때, 이전에는 지지를 받을만 했던 장개석의 민족주의 군대들의 반(反)식민지 투쟁이 연합국 제국주의의 전쟁수행 노력들에 종속되게 되었음을 SWP가 보지 못했다는 것이 한 예이다.

“프롤레타리아트 군사 정책”에 대한 샤흐트만 추종자들의 강력한 비판이 진정한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트로츠키 그 자신이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PMP[프롤레타리아트 군사 정책]은 자본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맑스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수정을 의미했다. PMP가 맑스주의로부터의 결정적인 이탈이라는 샤흐트만 자신의 영역과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1940년-41년 그는 캐넌과 SWP에 반하여 몇 가지 올바른 지점들을 획득할 수 있었다(특히 1941년 1월 신 인터내셔널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ICL의 미국 지부의 중앙위원회 문서고에 의하여 출판되었던 우리의 프로메테우스 리서치 시리즈2호, “‘프롤레타리아트 군사 정책’[1989년 2월]에 관한 문서들”에서 재출판되었던 샤흐트만의 논박, “전쟁과 평화에서 노동-계급 정책”을 보시오).

PMP는 그의 생의 마지막 몇 달들이었던 1940년에 트로츠키에 의하여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이미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잔혹한 공습전쟁이 영국을 뒤덮었지만, 비록 미국이 참전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았었다. PMP는 노동계급의 깊은 반(反)파시스트 정서들과 자본주의 타도라는 혁명적 강령 사이의 가교를 찾으려는 조급하고도 그릇된 시도였다. 그것은 부르주아지 군대의 군사훈련에 대한 노동조합의 통제를 위한 일련의 요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요구들은 전쟁 초기 몇 해 동안 미국의 SWP와 특히 영국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동맹(WIL)의 선전의 현저한 부분이었다. PMP에 요점은 그것이 개량주의적이라는 것, 즉 그것이 노동계급이 자본가 국가의 중핵인 군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제국주의 참전국들을 향한 혁명적 패배주의, 특히 “주요한 적”은 국내에 있다라는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반하는 것이었다. 샤흐트만이 지적하였듯이, “반(反)파시즘”이 앵글로-아메리카 편을 위한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덮개였던 제국주의간 전쟁이라는 상황속에서, PMP는 쉽게 사회애국주의로 변질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18명의 SWP와 미니에폴리스 팀스터스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이유로 정부에 의하여 기소되어 감옥에 갔다. 그러나 그들의 PMP에 대한 옹호는 일정정도 그들의 혁명적 패배주의적 선전의 성질을 변형시켰다. 독일 침공의 위협이 현실의 가능성으로 섬뜩하게 다가오던 영국에서는, 처음에는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라는 슬로건을 제기하고, 국토방위군의 방어 군대들에 대한 관용을 보이면서, WIL은 완전한 사회 애국주의를 향하여 훨씬 더 나아갔다. WIL의 선전은 전쟁 생산에서의 ”혼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노동자 생산통제“를 주장했고, 1942년에 테드 그란트는 영국 제8군단을 ”우리의“ 군대로 환영하면서 그들의 북아프리카에서의 승리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1943년 연합국 진영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PMP는 미국와 영국에서 죽은 글자가 되었다.

마트감나가 맥스 샤스트만에 동의하지 않는 유일한 영역이 2차 세계대전 동안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샤스트만의 좌익적 비판들이다. 마트감나는 PMP를 지지하며, 장개석의 군대들이 연합국의 전쟁 노력에 종속되고 난 이후에 조차 장개석에 대한 군사적 지지를 주장한다. 일관된 수정주의자이던 마트감나는 “적어도 영국과 프랑스”를 위한 사회-애국주의를 공공연하게 옹호하면서 훨씬 더 나아갔다:

“SWP/USA와 영국의 WIL/RCP에 의하여 상술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쟁정책은 이성적으로 혁명적 방어주의 정책으로 되는 혼란스러운 신비화였다. 혁명적 방어주의는 혁명가들이 전쟁을 수행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 위하여 지배계급이 되고자하는 그들의 투쟁을 낮추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트로츠키주의자들 혹은 그들의 대부분이 말했던 것이다. 영국과 독일 모두가 제국주의이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이다.”

-노동자들의 자유, 1999년 6/7월

여기서 마트감나는 실제로는 2차 세계대전이 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경쟁하는 제국주의 동맹들 사이의 전쟁이었을 때에, 이것은 “파시즘”에 맞서는 “민주주의”의 전쟁이라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선전을 뻔뻔스럽게 되풀이한다. 그는 PMP가 정확하게 연합국 편 부르주아지에 대한 방어였기 때문에 자신이 PMP를 지지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충분하게 분명히 한다. 그래서 마트감나에게는, 나찌 독일에 맞서 소련을 방어해야 할 어떠한 근거도 없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를 방어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마트감나를 윈스턴 처칠의 오른쪽 어딘가에 위치시켜주는, 반(反)소비에트 사회적-배외주의에 대한 얼마나 완벽한 요약인가. 2차 세계대전에서 사회애국주의와의 공통의 대의를 소급적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1945년 이후 유럽에서의 첫 번째 전쟁에서 영국이 나토를 주도하자 마트감나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자신의 현재의 비겁한 굴복에 대한 역사적인 지지대를 발견한다.

샤흐트만의 스탈린 공포증이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주도했던 냉전으로 가는 가교였던 것처럼, 영국에서는 PMP가 노동당 좌익의 개량주의와 의회적 크레틴 병과의 화해를 향한 문호의 개방이었다. 그들의 혁명적 기질은 본질적으로 쇠퇴하였고, 영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전쟁 이후 노동계급의 거대한 불안정성을 억제하기 위하여 취임한 메이저 아틀리 노동당 자본가 정부에 대한 환상들에 맞설 수 없었다. 1949년이 되자, 껍데기뿐인 영국 트로츠키주의의 모든 세력들이 스스로를 노동당 속으로 청산하였다.

영국의 껍데기뿐인 트로츠키주의의 근저에 있는 노동당원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적 기초는 폴란드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을 위한 바티칸과 월스트리트의 어용노조인 솔리다르노스크에 대한 그들의 열광에서 완전하게 보인다. 1983년 9월 TUC 연례 총회 동안에, 게리 힐리는 솔리다르노스크를 반(反)사회주의적인 것으로 올바르게 비난했던 스카길이 썼던 한 편지에 기초하여 아서 스카길에 대한 번지르르한 “폭로”를 자신의 뉴스 라인에 출판했다. 이것이 스카길로 하여금 1984-85년의 영웅적인 광산노동자 파업의 전야에 광산노동자 노동조합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TUC 최고위층과 부르주아지 언론에 의한 광란의 빨갱이 공세에 걸려들게 했다. 이렇게 해서 힐리 추종세력은 광산 노동자들을 분쇄하고 영국 노동운동의 척추를 부러뜨리기 위한 마가렛 대처의 공세에서 그녀에게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였다. 힐리로부터 클리프, 마트감나, 파블로를 추종하는 통합서기국 그룹들에 이르기까지 영국에 있는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협잡꾼들 모두가 폴란드 노동계급의 진정한 목소리로 솔리다르노스크를 응원하기 위하여 결합했다. 그들의 솔리다르노스크에 대한 옹호는 반(反)공산주의적, “소영국” 민족주의적 노동당 정책들이라는 개량주의적 뼈대에 대한 그들의 공통적인 수용의 구체적인 증거였다. 그 파업 동안에, 마트감나 그룹은 파업파괴자들을 추동하던 노선 때문에 파업 광산 노동자들로부터 광범위하게 경멸당하던 닐 키노크가 이끌던 노동당을 권력에 앉히기 위하여 총선을 주장했다. 한 추잡스러운 후기에서, 1990년 마트감나의 사회주의 조직가 그룹은 노동자 권력과 나란히 소비에트 광산 노동자들에 의한 파업 동안에 기부되었던 돈을 횡령했다는 거짓 혐의들로 스카길을 중상하기 위하여 시도하면서 CIA와 MI6과 한 패가 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러시아 파시시트 유리 부트첸코에 의한 여행을 후원했다.

반(反)미국주의가 하나의 비열한 행위인 영국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마트감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샤흐트만 정치인생의 이러한 종결은 그에 대한 기억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면서 베트남과 쿠바에서의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샤흐트만의 지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래의 것과 같이 그의 책에 대한 서문으로부터 인용된 구절들에서 마트감나 자신의 사회-애국주의의 명백한 악취가 풍긴다.

“소련이 제2의 글로벌 열강이었던 전후 세계에서, 경쟁하는 진영들 중에서 미국과 서유럽 - 선진 자본주의 - 이 더 진보적인 것, 더욱 풍부한 가능성들과 더욱 큰 자유, 사회주의자들이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을 주었던 것이라는 점에 대한 인정은 사회주의 정치들에 대한 맑스주의적 균형 회복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팔레스타인, 아일랜드, 그리스, 사이프러스, 인도, 홍콩에서의 영국 제국주의의 범죄들과 알제리 독립 투쟁와 베트남 혁명에 맞서는 잔혹한 제국주의 전쟁들에 대한 비열한 변명이 여기 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하여 교살당한 국가들의 피억압 대중들의 투쟁들을 철저하게 경멸하는 독선적인 사회민주주의자만이 오직 그러한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탈린에 맞선 트로츠키의 투쟁을 광범위하게 다룬다는 취지의 마트감나의 156쪽짜리 서문은 스탈린의 1925-27년 2차 중국혁명에 대한 교살에 맞선 좌익반대파의 투쟁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는다. 영구혁명은 결코 마트감나의 이름뿐인 “트로츠키주의”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는 계급협조라는 스탈린주의 강령을 결코 증오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완전하게 공유한다.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그리고 스탈린주의자들 또한)과 공통적으로, 마트감나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당을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자신의 잘못된 교조에 대한 자기의식을 향한 첫 번째 조처들을 취하면서 1924년 권력을 찬탈했던 스탈린주의 관료 계층과 동일시한다. 그는 자본주의 복구에 유화적이었던 부하린/톰스키 분파와 스탈린 주변의 중도주의 인자들의 블록을 대변했던 1925-28년의 관료집단과 1928년 이후에 지배적이었던 관료적 중도주의 스탈린 도당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는 위의 모두와 트로츠키가 썼듯이, “현재의 CPSU는 하나의 정당이 아니라 통제받지 않는 관료세력의 수중에 장악된 기구이다”(“다시 한 번 공산당들과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1933년 7월 15일)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1933년 총 한방 쏘지 않고 히틀러에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넘겨주었던 반(反)혁명적 스탈린주의 기구를 동일시한다. 간단하게, 마트감나는 정치적 반혁명 이후 스탈린 분파가 지배적이게 되었으며 소련이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가 되었던 질적 전환점이었던 정치적 반혁명이 1924년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흐리려고 의도적으로 애쓴다. 이 질적 전환은 볼셰비즘에는 생소한 다른 방책들을 가진 다른 지도부에 의해 수행되었던 다른 강령으로 입증 가능한 것이었다. 마트감나의 (그리고 카우츠키의) 관점에서는,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로부터 유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성장했고, 트로츠키주의 좌익반대파는 부적절한 것이었다.

마트감나에게는 참으로 10월 혁명 그 자체가 “원죄”였다. 자신의 전집에 대한 서문을 쓰면서 마트감나는 “1917년 권력의 장악은 자신의 육체적 존재의 측면에서의 볼셰비키 당에게뿐만 아니라 전체 정치적 교의에 대해서도 가미가제 연습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라고 주장한다. 마트감나는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충분히 “경제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라고 당시에 주장했던 카우츠키와 멘셰비키들에 의해 행해졌던 노동자 혁명에 대한 그들의 본증적인 증오와 두려움에 대한 근본적 이유와 똑같은 주장들을 되풀이한다.

마트감나는 공공연하게 모든 수정주의 영국 옛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실제 강령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선언한다: 새로운 10월 혁명들에 대한 반대와 영국 노동당의 발에 엎드리기. 그들이 노동당의 공식적인 당원들이건 아니건, 이들 수정주의자들의 정치적 노선은 기껏해야 “노동당 좌익들이 싸움을 하도록 만들기”라는 자세로 요약되어 왔다. 그러나 마트감나와 그의 식구에게는, (과거와 현재의) “민주적”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지지가 지시하는 것처럼, 이것조차도 다소간 하나의 허구가 되어 왔다.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 폭격에 대한 그의 배외주의적 지지가 그를 토니 벤과 같은 노동당 “좌익” 당원들의 오른쪽에 그를 위치하게 했다. 모든 가짜 좌익들에 대비되게, 우리는 영국 제도에 있는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적 전략의 일환으로서, 노동당의 부르주아지 지도부로부터 노동-계급 기반을 분리하기 위하여 혁명적 강령을 가진 당을 창설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샤흐트만이 미국 사회당 속으로 자신의 조직을 청산하고 있었을 때, 그는 공산당들의 사회민주당과의 분리를 한탄하는 “미국 공산주의: 과거에 대한 재검토”(신 인터내셔널, 1957년 가을)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과거의 미국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향수가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것들과 함께 샤흐트만은 구 사회당과 초기 공산당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었던 문제인 미국의 흑인이라는 시금석이 되는 문제를 무시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샤흐트만은 1957년으로 소급하여 미국 사회민주주의의 암묵적인 인종주의를 받아들였다.

샤흐트만은 레닌이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의 그의 진화를 완결하기 전의 보다 초기의 레닌에 우호적이었다. 공산주의자 레닌에 대하여 샤흐트민이 진정으로 증오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선행조건으로서 노동계급 안에서의 정치적 분리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인정이었다. 1920년, 2차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카우츠키의 “전체 계급의 당”에 대한 이러한 거부를 명문화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위한 21가지 조건들”은 한편에서의 공산주의와 다른 한편에서의 혁명에 대한 개량주의적 (그리고 특히 중도주의적) 반대자들 사이에 첨예한 강령적 선을 그었다.

카우츠키에서 샤흐트만에 이르기까지, 클리프와 마트감나에 이르기까지, 소련에 관한 모든 “국가자본주의”와 “신계급” 이론들은 언제나 그들 “자신의” 지배계급과 같은 편에 굳건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로 곧) 증명했던,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의 가공의 “제3 진영”을 찾는 것에 기초했다. 우리는 제국주의와 반혁명에 맞서 남아 있는 10월의 성취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우리의 능력이 닫는데까지 투쟁해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 오늘 우리는 남아 있는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인 중국, 쿠바, 베트남, 그리고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를 위하여 투쟁한다. 우리는 이들 노동자 국가들을 자본주의 반혁명의 벼랑으로 몰아온 스탈린주의 관료세력들을 쓸어 없애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지지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하여 열렸던 세계 사회주의를 향한 가능성들로부터의 후퇴인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파탄남이 증명될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예언들은 부정적으로 확증되었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를 박살내고, 세계적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10월 혁명들을 통하여 트로츠키의 강령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임무는 스탈린주의자들 자신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나라들에서 사회민주주의 노동 관료세력들을 옹호했던 것 처럼 외국의 반혁명을 환영했던 클리프와 마트감나 같은 자들 덕분에 이루어졌던 볼셰비키 혁명의 최종적인 파괴 이후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더 힘들어 졌다.

오늘날 이들 가짜 좌익 조직들은 10개 이상의 유럽 국가들에 있는 긴축, 인종주의,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을 지지함에 있어서 그들의 계급 배신의 전략을 내세운다. 그들은 죽음의 단말마 속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기 위하여 필요한 혁명적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폭로되어야만 하고, 일소되어야만 할, 프롤레타리아트 의식성의 장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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