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코비드-19 발발 이래로, 중국은 수천만명이 수주일 동안 계속적으로 봉쇄를 당하고 가장 기초적인 필수품들이 부족한 가운데 경찰의 항상적 압제하에 있던,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최악의 봉쇄들의 일부 광경이었다. 중국은 또한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한 자원의 가장 인상적인 동원의 광경이기도 했다: 의료서비스 장비들의 생산이 극적으로 늘어났고, 굉장히 짧은 기간만에 병원들의 건설되며 수천명의 의료진들이 위기 지역들로 이동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국가가 아닌 기형화된 노동자국가 중국의 깊이 모순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국가는 여전히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해방시켰으며 계획경제를 수립했던 1949년 혁명의 성취들에 의존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을 억압하고 이들 성취들을 약화시키는 중국공산당(CCP)이 이끄는 관료계층에 의하여 나라가 지배된다. 미국과 미국의 동맹들이 중국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위협들을 항상적으로 증가시키고, 나라 내부의 사회적 모순들이 뜨거워져 끓는 점에 다다른 가운데, 중국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과 팬데믹에서 중국노동자의 대의는 물론 세계노동자 전체의 대의를 진전시킬 강령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다른 어느 때보다 맑스주의자들에 중요하다.

지금까지, 맑스주의 좌익은 이 임무에 완전히 실패해왔다. 팬데믹의 처음 국면 동안, 엄격한 봉쇄들, 여행금지들, 그리고 대규모 검사라는 중국공산당의 “제로-코비드” 정책은 스탈린주의들로부터 사회민주주의자들, 소위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전체 좌익의 모델이었다. 전세계의 쇠퇴하는 자본가계급들이 어떠한 것도 모조리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가운데, 중국 관료집단은 그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서 국제적으로 환영을 받았다. 국제공산주의동맹도 예외는 아니었고, 우리가 “중국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억제하기 위하여 힘을 동원하다” (노동자전위 1171호, 2020년 3월 6일)에서 썼던 것을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초기의 관료적 관성과 명백한 은폐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은 격리들, 6천만명의 인민들에 대한 지역봉쇄, 광범위한 여행축소, 나라의 많은 곳들에서의 공장들과 학교들의 폐쇄를 통한 억제에 엄청난 노력을 경주해왔다.

“중국정부는 또한 질병과 싸우기 위하여 상당한 정도의 의료 및 기타 자원들을 재배치해왔다. 이들 방책들이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서 새로운 사례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무한(武漢)과 중국의 다른 도시들로 갔던 세계보건기구(WHO) 대표단의 단장은 역사상 ‘아마도 가장 야심차고 기민한’ 것으로 중국의 ‘정부 전체와 사회 전체의 접근’을 칭송했다....

“그래서, 비록 늦기는 했지만, 코비드-19와 전투를 치르기 위하여 중국이 취한 이들 방책들은 사실상 결정적으로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이들 인용들은 중국공산당 정책들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에 다름 아니었다. 관료집단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비판들이 그들의 방책들이 “늦었”고 은폐시도가 뒤를 이었다는 것이었고, 마침내 “베이징”(즉, 중앙정부)가 움직이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차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무비판적이었다. 기괴하게도, 그 기사는 중국공산당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제국주의 유엔의 한 기구인 세계보건기구에 의존한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 원칙에 대한 배신인 이 기사를 철회한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봉쇄들로부터 멀어져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삶”이라는 전략을 향하여 움직였던 반면,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반동적인 “제로-코비드” 전략을 굳게 고수하고 있다. 이 정책은 지금 자신들의 경제적 성장에 대한 그것의 충격을 느끼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분노를 촉발한다. 정확히 발을 맞추어,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좌익의 절대다수는 지금 중국의 정책들을 규탄하기 위하여 180도로 방향을 확 바꾸거나 이 주제에 대하여 간단히 침묵한 채로 있다. 그러나 세계의 대다수 가짜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이 상황이 매우 곤란한데,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이 지난 2년 반 동안 그들이 주창해왔던 것, 즉 사례가 하나도 없을 때까지의 가혹하고 오랜 봉쇄들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4월 이래로, 국제공산주의동맹은 자본주의 나라들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왜록다운들에 반대해야만 하는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가 부르주아지의 계급지배와 모든 단계에서 충돌하는지, 그리고 팬데믹에 대한 자본주의적 대응이 왜 자신의 상태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계급에 의한 어떠한 진보적 투쟁에라도 대치가 되는지에 대하여 분명히 해왔다(“록다운을 타도하라!”를 보시오). 이제 우리는 이 기본적인 접근을 중국에 적용한다. 우리 조직 내부에서를 포함하여 중국의 록다운들에 대한 지지를 위하여 만들어져왔던 주된 논거는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므로 중국의록다운들은 자본주의국가들의 봉쇄들보다 더 진보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핵심부문이 집산화되어 있는 경제가 중국으로 하여금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불가능한 규모로 자원들을 동원함으로써 코비드-19의 위협에 대처하도록 해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자원들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에 조응하는 가운데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PRC)의 수립 이래로 중국을 지배해온 특권화된 관료계층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동원된다. 이 관료집단은 1924년 이래로 소련을 지배했던 그 관료세력과 근본적으로 같은 성격이며, 이것은 레온 트로츠키가 가장 잘 분석했다. 그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관료집단은 지배계급이 아니다. 그러나 관료적 정권의 더한 발전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시작으로 귀결될 수 있다: 유기적으로 퇴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혁명을 통해서. 우리는 스탈린주의 기구를 중도주의라고 부르는데, 정확히 그 기구가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맑스주의 지도부가 없는, 그리고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고 있는 오늘, 관료기구는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방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책들은 내일 적의 승리를 용이하게 해주는 그런 것이다. 소련에서 스탈린주의의 이 이중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누구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이다.”

-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1933년 10월)

관료집단의 사회적 뿌리는 고립된 노동자국가의 후진성과 물질적 빈곤에 있다.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에는 너무 낮은 생산력발전과 함께, 관료집단은 누가 받고 누가 받지 못하는지를 결정하는 결핍의 조정자로서의 자신의 역할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도출한다. 그들의 권력이 그들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에 기초하고 있는 지배 자본가계급과는 반대로, 관료집단은 집산화된 소유형식들에 대한 기생충으로 존재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지배를 불안정하고 깨지기 쉽게 만든다. 관료집단은 두 개의 강력한 세력들 사이에 끼어 있다: 지배도당들의 특권들에 필연적으로 적대적인 거대한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와 중국을 약탈하려는 목적을 위하여 1949년 혁명 (그리고 중국공산당 그 자신)의 성취들에 대한 최종적 타도가 목적인 세계 제국주의.

관료집단의 특권화된 지위의 유지는 관료세력으로 하여금 유지할 수 없는 모순들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강제한다. 한편으로 관료집단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두려워하는 만큼만 오직” (트로츠키) 국가소유를 방어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관료집단은 환상에 불과한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가운데 양보들을 통해서 세계 제국주의를 달래려고 애쓴다. 관료집단의 주요한 목표는 항상 자신의 특권화된 지위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들 모순들을 처리하는 것인데, 이것은 팬데믹과 같은 첨예한 사회적 위기의 시기에 특히 힘든 임무이다.

중국에서의 팬데믹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접근은 내부와 외부의 반혁명적 위협들에 맞서 집산화된 소유형태들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접근은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억누르고 불평등들을 조장하며 국제혁명을 거부함으로써 노동자국가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위협들을 부채질하는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의 역할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관료집단이 쟁기질한 비옥한 토양으로부터 위기가 자라나면, 중국공산당은 그들의 근시안적이고 잔혹한 방식들로 대응하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다음 위기의 씨앗을 뿌린다. 그러므로, 팬데믹이나 전쟁이나 혹은 다른 어떤 위기이건 간에, 노동자국가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적 방어는 관료집단의 정책들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통하여 반사회주의적이고 관료적인 중국공산당 도당을 타도하고, 그들의 지배를 혁명적이고 진정한 레닌주의 정당이 지도하는 노동자위원회들로 대체하기 위한 투쟁에 기초한다. 그러한 전망은 중국공산당의 무모하고 반프롤레타리아트적인 “역동적 제로-코비드”정책들에 대한 지지와는 명백하게 화해 불가능하다.

팬데믹의 사회적 원인들

코비드-19가 촉발한 중국에서의 사회적 위기는 쇠퇴하는 세계 제국주의가 야기한 총체적 결핍, 억압, 그리고 야만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모든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국내의 사회적, 경제적 상태들에서 나오는 중국의 특정한 민족적 인상을 취한다. 코비드-19 발생에 대응하는 베이징의 “엄청난 노력”을 환영하기 전에,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현재의 위기의 근원에 있는 사회적 상태들에 대하여 숙고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에서의 사회적 여건과 생활 여건들이 지난 수십년동안 엄청나게 개선되어 왔는데, 그것은 1949년 혁명의 성취들에 의하여 가능했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지배는 생산성과 부의 성장이 불균형적으로 관료집단 자신의 손아귀와 성장하는 국내 자본가계급으로 들어가왔음을 의미해 왔다. 이것이 사회적 진보를 제한하고 약화시키며, 현재 위기의 토양을 닦아왔다.

관료집단은 봉쇄들이 열악한 상태의 보건시스템이라는 조건에서 유일한 선택이라고 처음부터 분명하게 주장해왔다. 수십년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화된 비참함”이라는 상태에서 전면적인 무상보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연이은 중국공산당 지도부들이 추구한 시장개혁들이 보건을 사유화하고 기아상태에 있게 해왔다. 관료집단이 중국인민들의 95퍼센트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속임수이다: 수억명의 중국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는 의사를 만나거나 기초적인 의료처치를 받는 것이 엄청나게 비싸거나 아니면 단순히 불가능하다. 다양한 보험제도들이 일반적으로 비용의 작은 일부에 대해서만 혜택을 주며, 가족들이 처치를 위하여 평행 모든 저축을 써야만하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다.

시골에서는, 많은 지역들이 기본적인 의료적 기반시설 조차 없으며, 증오의 대상인 호구 등기제도는 도시에 있는 광대한 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하는 곳에서 처치를 거의 받지 못하거나 아예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는 의사의 수가 매우 작다(2017년 미국의 2.6명과 유럽연합[EU]의 4.9명과 비교하여1000명당 2명); 작은 수의 간호사들(15.7명의 미국, 9.1명의 유럽연합과 비교하여1000명당 2.7명); 그리고 작은 수의 중증환자용 침상들(10만명당 미국의 25.8개와 유럽연합의 11.5개와 비교하여 3.6개). 2019년, 일인당 보건비용은 미국의 일인당 1만2천달러와 유럽연합의 3천5백달러와 비교하여 중국은 일인당 535달러를 보건에 썼다.

의료자원의 부족은 보건시스템이 부패와 부당이득 취하기로 가득함을 의미한다. 진정한 의료서비스들의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특히 시골지역들에서, 관료집단은 공공연하게 전통 의약품을 홍보한다. “중국식 사회주의”의 땅에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자본가들과 특권을 가진 관료들에게는 충분한 의료처치가 예약되어 있는 반면, 가난한 인민들은 종종 처치를 받을 수 있는 질병들로 인해 그냥 죽는다.

처참한 보건시스템을 지닌 채, 시장개혁들은 도시들의 부동산 또한 사유화해왔는데, 헝다그룹의 최근 몰락이 예증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유일한 목적이 투기인 기생적인 사업체들의 통제하에 있다. 도시들의 많은 노동인민들에게는, 주택이 엄청나게 비싼데, 이것이 필연적으로 코비드-19와 기타 질병들의 확산에 기름을 뿌리는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생활여건들로 귀결된다.

노동현장이 코비트-19의 확산으로 귀결되고, 일반적으로 노동인민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또다른 요인이다. 시장개혁들의 중심이 외국투자에 대한 중국개방과 중국공산당의 권장을 통하여 국내 자본가계급을 의식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의 주된 후과들 중의 하나가 수억명의 농민들의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동이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는 진보적 발전이기는 하지만, 이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기업들을 위한 광대한 값싼 노동력의 웅덩이를 형성한다.

주간 72시간 노동이라는 사악한 “996” 체제에서 보듯이, 잔혹한 노동조건들이 중국에서는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전례가 없는 중국의 상승은 노동자들에 대한 초착취에 의하여 연료를 공급받는다. 국가소유 기업들은 가혹한 조건들을 면하지 못해왔다. 기업들에 있는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노동조합들과 당위원회들에 의하여 승인되고 실행되며, 말할 필요도 없이 노동자들이 건강과 안전 혹은 그들의 일반적인 노동조건들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준군사적 노동체제 하에서 많은 노동현장들이 돌아간다. 인민공화국에서 실업과 노숙은 흔한 확산되는 사회적 문제거리이다. 관료적 부실경영과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자본가들의 약탈이 야기한 공기오염은 대도시들에서 호흡기 질병이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발생하는 지경의 문제가 되어 왔는데, 이것이 인민들의 많은 부분들이 더 큰 코비드-19 합병증 위험에 놓이게 한다.

이것이 코비드-19의 발생에 의하여 불이 붙은 부싯깃 통이다. 코비드 그 자체의 기원들에 관해서는, 여전히 이 문제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관료집단은 “연구실 누출”론이 순전한 거짓말이며 음모론이라는 데 있어서 확고하다. 중국공산당을 변호하면서, 국제주의자그룹( IG) 는 관료집단의 언급들에 대하여 어떠한 의문이라도 제기하는 것은 중국을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가운데, 이 이론에 반대하는 긴 기사 하나를 썼다 (“무한에 대한 미국의 거대한 거짓말은 전쟁 선전이다,” internationalist.org, 2021년 12월). 코비드-19의 기원들에 관하여는 과학적 합의가 없다. 그러나 코비드-19가 무한의 야생동물 식품시장에서 기원했다는 IG와 중국공산당이 선호하는 버전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 그리고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것이다 – 그것은 여전히 관료집단의 유죄를 입장하는 것이 될 뿐이다! 위생과 통제의 부족과 인구밀집 도시지역에서 야생동물들을 섞어두는 것이 2002년 사스의 예와 같이 과거에 이미 질병의 발생들로 이어진 적이 있다. 코비드-19의 발생은 “신의 행위”가 아니라, 대도시 중심지들에서 살아 있는 박쥐들을 파는 야생동물시장들을 엄중단속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완전히 막을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과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이 고취한 잘못된 관점이 중국공산당의 봉쇄들과 정책들이 팬데믹에 맞서는 최선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건강위기가 사실은 많은 부분 관료집단의 정책들의 결과라는 것이다.

팬데믹의 사회적 원인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위기의 기저에 있는 사회적 원인들에 대처하기 위한 가장 즉각적인 방책은 중국 내부에서의 불평등을 대폭 줄이고, 생활여건들을 개선하기 위하여 자원들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본가계급을 청산하고 관료집단의 부를 몰수하는, 특히 시골지역들에서는, 평등주의적 기초에서 가능한 최상질의 무료보건 제공이라는 단기목적을 가지는 보건시스템에서의 엄청난 개선을 위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고위관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관료들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사회적 필요에 따른 주택공급의 즉각적인 재분배로 생활여건들이 개선될 수도 있다. 안전한 작업장들을 가지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건강과 안전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방책들은 관료집단과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이것은 단지 그것들이 수십년동안의 파산한 정책들의 공공연한 철회를 의미해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들이 그 존재 전체가 노동계급과 농민의 비용으로 스스로를 위한 물질적 이점들을 보장하는 것에 있는 관료집단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관료들 개인들이 자본가계급과 관련이 있거나 스스로가 자본가계급이다.

기존의 자원들을 재분배하는 것이 즉각적인 고통의 완화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중국의 물질적 후진성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인, 특히 제국주의 나라들로의 확장이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제국주의의 위협이 제거되어 있고 발전이 지금은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나라들이 독점하고 있는 최고 수준의 기술과 노동생산당에 기초하는 국제적인 계획경제를 가지고서만 보장될 수 있다. 그러한 전망은 중국에서의 그리고 국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으로의 조직화를 통해서만 오직 실현될 수 있으며, 이것은 특권화된 계층의 타도로 이끄는 힘들을 촉발할 것이기 때문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는 정반대의 전망이다. 이것이 왜 스탈린주의의 보증마크가 항상 “중국은 혁명을 수출하지 않는다”라는 교조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가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강령이어 왔는지의 이유이다.

이 반맑스주의 강령은 관료집단의 지위와 이해관계의 반영이며, 명백하게 제국주의를 달래려고 의도한다. 특정한 민족국가의 국경들의 내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제한하는 것은 노동자국가가 국제자본주의 질서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한 맹세이다. 이 강령이 중국(1927년), 독일(1933년), 프랑스(1936년과 1968년), 스페인(1937년), 그리고 인도네시아(1965년) 혁명들과 그 외 더 많은 혁명들이 교살당하는 것으로 귀결시켰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소련에 관하여 설명한 바와 같이:

“파시스트적 뿐만 아니라 민주주주의적 부르주아지계급에게는 스탈린의 고립된 반혁명적 행위들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소유관계에서의 완전한 반혁명과 러시아 시장의 개방이 필요하다. 이 경우가 아닌한, 부르주아지계급은 소비에트 국가가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르다.”

- “노동자국가도 아닌 부르주아지 국가도 아닌?” (1937년 11월)

이것은 중국에도 완벽하게 적용되며,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새로운 미국주도 제국주의 공세의 중심이다.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이 아무리 “신뢰할”만하고 “온건”하게 스스로를 보일지라도, 얼마나 심하게 그들이 중국노동계급을 억압한다고 해도, 국제 부르주아지계급의 눈에는 관료집단은 사회혁명이라는 자국이 항상 묻어 있을 것이다. 중국혁명의 성취들을 지켜내기는커녕, 중국공산당은 그것들의 방어를 진정으로 보장하는 유일한 길인 혁명의 국제적 확대를 거부한다. 트로츠키주의의 이 기초적인 초석은 1991-92년 소련을 파괴했던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결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증명되었다.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중국공산당 관료지배가 타도되어 혁명적 지도부에 의하여 대체되거나, 아니면 반혁명이 또 다른 “백년의 수모”를 가져올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대응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옹호자들은 중국의 “역동적 제로-코비드” 접근에 대한 칭송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기에 중국공산당 신문에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예들 중의 하나가 있다:

“왕문빈(汪文斌) 중국외교부 대변인은 금요일 정기 미디어 브리핑에서 중국이 역동적 제로-코비드 접근을 채택한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14억 인민들의 목숨과 건강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것이 우리의 인민과 그들의 삶을 보호하는 것에 최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는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의 통치철학에 대한 증거이다’.”

글로벌 타임즈 (2022년 6월 19일)

당의 “성공”에 관하여 회심의 미소를 짓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이 사용하는 기준들이 낮은 사망률, 중국 국경 내부에서의 바이러스 억제,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다. 만약 이들 조건들을 체크하는 것이 동지들의 접근의 전체라면, 중국공산당은 참으로 잘 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가들이 노동자국가의 성공들과 실패들을 평가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소련의 산업화와 쿨락들(부농들)의 성공적인 청산에 관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자랑에 대응하여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세상에 어떤 다른 정부도 자신의 수중에 나라전체의 운명이 그러한 정도까지 집중되어 있지는 않다. 개별 자본가의 성공들과 실패들은, 물론 완전히는 아니지만, 매우 중대하게 그리고 어느 정도 결정적인 정도로 그의 개인적 능력들에 달려 있다. 준용하자면, 한 명의 자본가가 하나의 기업과 관련하여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소비에트 정부는 전체 경제체제와 관련하여 차지하고 있다. 국민경제의 중앙화된 성격은 국가권력을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는 요인으로 바꾼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부의 정책은 요약된 결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통계적 데이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들 결과들을 성취함에 있어서 의식적 선견지명과 계획된 지도부가 수행한 특정 역할에 의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강조]

배반당한 혁명 (1936)

“의식적 선견지명과 계획된 지도부”라는 저울에 무게를 달았을 때, 팬데믹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대응은 모든 단계에서 실패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계속된 중국공산당 정권들의 정책들은 새로운 위험한 바이러스의 출현, 유행병 단계로의 바이러스의 급속한 확산, 그리고 보건 시스템 붕괴의 위험을 굉장히 증가시켜왔다. 바이러스의 발생 이래 중국공산당의 대응에 관하여 말하자면, 중국공산당의 행위들은 위기를 매 단계 악화시켜왔다.

널리 (심지어 친 중국공산당 노동자전위 기사에 의해서도) 인정하듯이, 무한에서의 코비드-19 발발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즉각적인 반응은 덮어가리기, 부인들, 그리고 경고를 제기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탄압 중 하나였다.1 무한에 있는 병원들이 인원초과가 되고 인민들의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바이러스가 주요한 사회적 위기를 촉발하고 있음이 명백해지면서, 중국공산당은 가혹한 방책들을 도입하고 발생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규모 자원들을 동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갑자기 바꾸었다.

관료집단의 방책들은 (한동안) 참으로 바이러스의 확산을 억누르고 있다. 이것들은 “인민들을 구하”기 위한 일정정도 도덕적 책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보다 분명히 보여주고 악화시킨 사회적 모순들을 짓눌러야 할 필요성에서 기인한다. 코비드-19는 첨예한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필요성을 제기했다: 보다 나은 보건, 주택, 그리고 노동조건들. 그러나 이들 필요성들은 유무형 자원의 부족, 관료주의, 불평등, 그리고 기생적 정치정권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고립된 한 노동자국가인 중국의 현실과 충돌한다.

노동계급에게 제기되었던 것은 코비드-19가 제기했던 위협에 맞서는 즉각적인 투쟁을 위기의 뿌리에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과 연계시키는 것이었다. 관료집단에게는, 제기되었던 것이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고, 코비드-19에 대한 대응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통제를 확실히 하며, 중심적으로는 그들의 지배에 의문을 제기하는 노동계급의 어떠한 사회적 열망이라도 분쇄하기 위하여 질병의 발발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코비드-19의 발발에 대한 관료집단의 대응을 낳은 정치적 고려들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하나 새로운 요소는, 현재 관료집단은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의 “우월함”과 “초인적 박식함”을 증명하는 “역동적 제로-코비드” 정책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정권에 대한 중대한 불신 없이는 이 정책의 포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중국공산당 정책의 재앙적 결과들이 쌓이면서, 관료집단은, 스탈린주의적 지그재그라는 성격처럼, 부득불 태도를 완전히 바꿀수도 있다.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정책들은 인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행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인민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드론들, 로보트들, 그리고 주민위원회들의 감시하에 강제로 그들의 집에 갇혀야 하는가? 왜 인민들이 비판, 불만, 그리고 제안들을 내놓을 때, 전면적인 검열과 종종 투옥을 당해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장들에 갇혀 있으면서 집으로 가는 것이 금지되는 것이 인민들을 위한 것인가? 만약 “역동적 제로-코비드”가 소위 “인민들을 위한” 것이라면, 왜 그 정책은 인민들에 반하여 실행되고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의 존재 전체가 인민들을 억압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의 특권들의 축적은 명백한 도적질, 모든 사회주의적 원칙들과 완전히 모순되는 권력의 남용이다.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의 지배는 기구를 통치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정치적 통제에 기초하기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대한 어떠한 독립적인 표현도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정통성에 대하여 도전하게 된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마음을 말하게 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첫번째 단어들이 불평등, 관료적 부실경영, 그리고 정치적 억압에 대한 규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의 유지를 위하여, 관료집단은 노동자 대중들로부터의 어떠한 의미의 주도권, 비판적 사고, 혹은 건설적 조언도 진압한다.

중국공산당은 낮은 사망률을 유지하는 것에서는 진정으로 성공해왔다. 그러나 이 통계가 숨기는 것이 관료집단의 정책들이 야기한 실제 공포이다. 통계는 수억명의 인민들이 적절한 음식, 의약품, 혹은 다른 기초적인 생필품없이 여러 주 동안 그들의 집에 갇혔다는 것을 감춘다. 병원들은 수용인원 초과 상태에서 처치를 거부했고, 의료진은 극단의 한계까지 압력을 받았다. 아동의 그들의 부모로부터의 격리를 포함하여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채 악몽과도 같은 격리센터에서의 징역살이. 자신들의 기계에 묶여 공장에 갇힌 노동자들. 실업, 그리고 소규모 비즈니스들의 참상. 만연한 검열과 이것에 대하여 감히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체포. 그리고 모든 것들이 “중국식 사회주의”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단지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눈으로 보는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에 기여하고, 반혁명 진영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

트로츠키주의자의 답

중국공산당의 거짓말들과는 반대로, 관료집단이 실행하는 잔혹하고 반프롤레타리아트적 방책들 없이도 인민들의 건강을 보호하고 인민공화국을 방어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코비드-19와의 싸움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임무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민족주의의 뒤로 인민들을 동원했고, 시진핑의 무오류성을 지지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코비드-19와의 투쟁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 혁명들, 반혁명에 맞서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그리고 스탈린주의 관료들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혁명이라는 기치하에 시작된다. 여기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에서 무엇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지에 대한 것들이 있다:

록다운들을 타도하라! 즉각적 의무접종!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은 끝도 없는 테스트로 수개월동안 수억명을 기꺼이 가두려고는 하지만, 심지어 그들은 전인민에 대한 접종이라는 기본적인 방책 조차 취하지 않을 것이다. 상해가 두 달이 넘는 동안 잔혹한 봉쇄하에 있었지만, 60살 이상의 인민들 중 38퍼센트가 접종 완료가 아니었다.

안전과 생산에 대한 노동자통제! 펜이나 굴리는 일부 관료나 흡혈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무엇이 안전한 것인지 공장들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결정하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관료적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집산화된 소유에 대한 방어에 전념하는 노동조합들을 위하여!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계획경제의 전면적인 수정을 위하여!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무료보건과 교육, 또한 노동인민들을 위한 양질의 주택의 수립을 보증해야만 한다. 호구제도 폐지!

국내의 자본가계급을 몰수하라! 이들 거머리들은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이 배양하는 자본주의 반혁명의 줄기세포들이다. 홍콩의 거대 기업들을 몰수함으로써 “일국양제”정책을 끝장내라!

세상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중국 노동계급의 동맹은 국제프롤레타리아트, 특히 제국주의 심장부인 미국, 독일, 그리고 일본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화해와 굴종이라는 관료집단의 반동적 국제정책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라는 정책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베이징의 모든 외교문서를 출판하라. 비밀외교를 타도하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축출하라! 재건된 제4인터내셔널의 부분으로서의 레닌주의 평등주의 정당을 위하여! 중국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향해야 할 길은 모택동이나 스탈린의 그것이 아니라 레닌과 트로츠키의 그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1917년 10월 혁명의 모델에 입각한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혁명적 국제주의를 의미한다!


1. 우리는 국제주의자그룹의 2021년 12월 “실험실 유출” 기사에서 약속했던 기사를 열렬히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사는 분명히 “추정컨대 베이징이 초기에 실수들을 감추고 덮어가리고, 팬데믹에 대한 정보를 억누르려고 시도했다”는 “거대한 거짓말”을 폭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