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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대외관계와 경제 계획들, 1920-32년


β. 대외관계와 경제 계획들, 1920-32년


 

소비에트 산업에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다 준 최초의 계획은 1920년 12월 제8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혁명 이후 내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외세의 침략이 끝날 무렵에 채택됐다. 해당 계획은 간소한 것15개 산업부문에 영향을 미칠 일련의 조율된 목표들에 불과한 것이었고1, 그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다양한 경제 구역들에 분포된 전력발전소 30개의 건설을 위한 사업에 달려있었다. 그 목표는 대회에 해당 문제에 대해 보고한 크르쥐자노프스키(Krzhizhanovski) 국가전기화위원회(GOELRO) 의장의 말을 빌리자면 “전쟁의 상처들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약 10년 안에 우리나라의 생산력을 전전(戰前) 수준보다 80‒100% 올리는 것”이었다.2

그 당시 러시아 경제는 6년 이상의 지속적인 전쟁 이후 거의 전면적인 붕괴상태에 놓여 있었다. 1920년의 공업총생산량은 1913년의 7분의 1보다도 적었다. 선철의 생산량은 전전 수준의 2%를 겨우 넘겼을 뿐이고, 시멘트의 경우 3%를, 목화의 경우 5%를 가까스로 상회했으며, 설탕의 생산량은 7% 이하에 그쳤고, 쟁기의 생산량은 13%에, 기관차의 경우 15% 이하에 그쳤다. 기존에 존재했던 기관차들의 절반 이상과 화물운반차들의 거의 4분의 1은 가동되지 않았다. 그 결과, 비록 석탄의 생산량이 여전히 1916년도 생산량의 약 16%에, 석유의 생산량이 약 40%에 달했다고 해도, 필수적인 연료의 대부분은 가동될 수 없었다. 경작지는 1913년 수준의 76%로 줄어들었다.3

크르쥐쟈노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교통과 식량수송, 연료, 생산설비, 인력의 위기와 함께, 전후 경제의 붕괴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중단시키기 위해 우리가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명백하다. 이 모든 위기들은 서로 맞물려 있으며,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러한 순환에서 벗어날 출구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우리는 철도에 연료가 공급되지 않는 한 운송이 복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반대로 운송이 없이는 연료 위기도, 그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4

이에 더하여, 그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 긴급한 경제적 문제들이 이 광대한 나라에서, 그 어떤 국가에게도, 설령 가장 풍족한 조건에 놓여 있을지라도 제일 어려울 시기"사유경제제도, 즉 자본주의 체계에서 공적 소유 경제, 즉 사회주의 체계로의 이행기"에 해결되어야 했다는 점이 추가되었다.5

계획의 달성에서의 이러한 불균등성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지난 몇 년(1929년 이후)이 제1차 5개년 계획의 첫 번째 기간에 속해 있었고, 그 발전의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는 것을 상기할 때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비록 크르쥐쟈노프스키는 약 10년을 말했지만, 레닌은 같은 대회에서 한 연설에서 보다 조심스럽게 “10년에서 15년”을 언급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번째 경제계획의 완수는 그러한 신중함의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해당 계획은 1921년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수어 개 부문에서 나타난 성과들은 다음과 같다:6

 

생산부문 목표치 연도 실제 달성량
석탄 6,230만 톤 1932년 6,440만 톤
철광석 1,960만 톤 1934년 2,170만 톤
선철 820만 톤 1934년 1,040만 톤
강철 650만 톤 1933년 690만 톤
석유 1,080만 톤 1927/8년 1,160만 톤
망간 160만 톤 1934년 180만 톤
토탄 1,640만 톤 1934년 1,720만 톤
구리 8,190만 톤 1937년 9,980만 톤
전력 (지방 발전소 기준) 17.5억 kW.h. 1931년 24억 kW.h.
철도 8-9만 km 1930년 80,200 km
전체 산업 부문 전전(戰前) 시기의 80-100% 증가 1929년 1913년 대비 94.3% 증가

 

크르쥐쟈노프스키는 보고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평화로운 경제적 관계의 발전에 큰 희망이 걸려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7

“모든 나라들의 산업을 옥죄고 있는 세계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대외무역의 성장에 기대를 걸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러시아 시장의 중요성과 우리나라에서의 대규모 전기화의 필요성은 현재 해외에서 충분히 인지되고 있다.  독일인들과 미국인들은 러시아 시장의 촉망받는 중요성을 깨달아야 하며, 러시아가 현재의 경제적 파탄을 넘길 것이라는 의심할 수 없는 필연성을 깨달아야 한다.”8

7년 후, 소련 공산당 제15차 대회(1927년 12월)에서 그는 전력발전소와 공업, 운송에 대한 지출이 1920년 계획 하에서 약 170억 루블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9

“우리는 산업에서 우리 자신의 자원을 축적하는 것만으로는 산업의 경제적 붕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고, 이 모든 방대한 건설을 위해 유럽의 소비수요를 활용하고, 우리의 수출 품목을 빠르게 확대하며, 특히 혁명 이후 농민층의 부활에 특히 기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10–15년 안에 약 110억 루블 가량의 무역 흑자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는 60억 루블의 적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는 아마도 서방이 우리와 사업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광범위한 혜택들에 기대를 걸었고, 신용에 기대를 걸었으며, 신용거래와 여러 혜택들의 도움에 힘입어 적자를 일소하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담하게 출항했다.”

여기서 사회주의에 대한 호불호나 볼셰비키들이 건설사업에 있어 자본주의 나라들의 (심지어는 상호호혜적 무역을 통한) 도움에 기대를 거는 것이 타당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짐으로써 소련의 경제계획 경험을 검토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자본주의 진영과의 정상적이고 평화적인 관계를 중요한 부분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지점에서 그들은 실망했다. 우선, 크르쥐쟈노프스키가 스스로 말했듯이, “1921년 기근으로 우리가 입은 타격은 주로 우리 농업을 통해 획득한 수출흑자에 기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단번에 보여주었다.”10 이듬해 제노바 국제경제협회에서 소련 지도자들이 해외 차관의 도움으로 “원자재, 곡물, 연료 분야에서의 유럽 산업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시베리아를 전전 수준 이상으로” 사용하겠다고 제안했을 때11, 그들은 그 모든 지원의 조건이 산업의 탈(脫)국유화와 외국의 통제 소련 경제를 속박하는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23년 말까지 소련에게는 주요 유럽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1924년 말 제노바에서 제시된 원칙이 적용된 영국과의 무역 조약은오늘날에는 엄청나게 미미해 보이는 영국에 대한 재정적 위험으로 인해총선 이후 구성된 새 정부에서 비준을 거부당했다. 1925년 서구 열강은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서방에서는 전쟁의 문을 잠그고당시 식민지 담당 차관이 “유럽 문명에서 발생한 가장 사악한 세력”으로 묘사한 세력에 맞서동방에서는 전쟁의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12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평온하고 정상적인 경제 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이러한 장애물들은 GOELRO 계획 기간 내내 계속되었고, 심지어 영국 정부는 1929년에 시작된 '경제 눈보라'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까지 수출 신용 보증 제도를 러시아에 (부분적으로라도) 확대하지 않았다.

이로써, 소련의 지도자들은 건설 과업들의 전면적 발전에 있어 다른 나라들과의 정상적인 관계에 의존하였는데, 그와 같은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하여 생생한 증거를 획득했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이를 개탄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장애물들을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했다.

이는 50여 개 산업부문들을 포괄하게 되었고, 경제계획의 방법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었던 제1차 5개년 계획(1929~1932) 기간에 입증됐다. 전전의 생산수준에 도달하고, 수많은 부문들에서 초과달성을 이룩한 상황에서, 경제계획의 목표는 이제 자본주의적 부문에 대한 사회주의 부문의 제도적 우월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노동생산성을 증진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경제형태를 극복하고, 일소하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13 이는 엄청난 노력과 난관을 수반했던 대담한 시도였다; 해외에서는 시작되기도 전에 이를 도박으로, 공상으로 치부하며 조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계획은 대체로 성공했다. 스탈린은 이 주제에 대해 1933년 1월 당 지도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에게는 철강산업이, 나라의 산업화를 위한 기반이 없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산업이 있다. 우리에게는 트랙터 산업이 없었다. 이제는 있다. 우리에게는 자동차 산업이 없었다. 이제는 있다. 우리에게는 기계설비 산업이 없었다. 이제는 있다. 우리에게는 대규모 최신 화학공업이 없었다. 이제는 있다. 우리에게는 현대적 농기계의 생산을 위한 실질적인, 대규모 공업이 없었다. 이제는 있다. 우리에게는 항공산업이 없었다. 이제는 있다. 전력생산량에서 우리는 가장 마지막 순위에 있었다. 현재 우리는 상위권에 들어섰다. 석유생산량과 석탄생산량에 있어서 우리는 가장 마지막 순위에 있었다. 현재 우리는 상위권에 들어섰다. 우리는우크라이나에석탄기지와 철강기지를 단 하나만 가지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잘 관리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러한 기지를 개건하는 데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랑인 새로운 석탄기지와 철강기지를동방에건설했다. 우리는우리나라 북부에섬유공업단지를 단 하나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우리는 매우 가까운 미래에,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서부에 새로운 섬유공업단지들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공업단지들을 단지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공업의 규모와 크기를 능가하는 수준의 규모와 크기로 건설했다. 이 모든 결과로, 공업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요소들은 완벽하게,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제거되었으며, 사회주의 공업은 소련에서 공업의 유일한 형태로 자리매김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하여, 농업생산량 대비 공업생산량의 비율은 제1차 5개년 계획 초기의 48%(1928)에서 5개년 계획의 4년차 말(1932년)에는 70%로 상승했다. 그 결과, 5개년 계획 기간 중 4년차가 끝날 무렵, 우리는 5년치 공업총생산량 목표치를 93.7%까지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전전의 생산량보다 3배 이상의 수준으로, 1928년의 그것보다 2배 이상의 수준으로 공업생산량의 규모를 늘릴 수 있었다.”14

소련 인민들이 보기에 이러한 성과들이 특히 놀라웠던 것은, 공장 노동자들과 농민, 사무원들과 지식인들의 회의들에서 채택된 무수한 결정서들이 보여주듯이, 그 성과들이 매우 불리한 외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앞서 언급한 회의에서, 이에 대한 하나의 중대한 원인에 대해 평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게다가, 1929년 말에 터진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5개년 계획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지속됐다. 그로 인해 소련이 성장하는 공업에 필요한 장비들과 농업용 트랙터들을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외화를 축적하기 위해 의존했던 바로 그 원자재 수출 품목들의 가격이 폭락했다. 몰로토프가 1933년 1월에 열린 같은 회의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이는 소련으로 하여금 “수천만, 수억 루블 상당의 금화를 추가로”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를 여전히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은 스탈린이 지적하였듯이, “이 기간 동안 전쟁의 위협이 한 번 이상 우리에게 다가왔다면, 해외시장의 다양한 부문들에서 소련을 향한 경제전쟁은 숨 쉴 틈도 없이 계속되어 왔고,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15

이러한 경제전쟁의 세부적인 양상들은 잊혀지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영국 및 다른 나라에서 소련의 종교 박해 혐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그해 말에는 소련산 밀과 목재의 '덤핑' 혐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는데, 이 두 가지 모두 기업 이익이 소련 정부와 거래하지 않는데 있게끔 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30년 10월 프랑스는 소련제 물품들에 대한 경제봉쇄를 실시했고, 1931년 초에 캐나다가 그 뒤를 따랐다. 1930년 4월에 소련과 무역협정을 체결했던 영국 노동당 정부의 존재는 한동안 영국에서의 경제전쟁 캠페인을 방해했지만, 1931년 2월에 주요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 소련과의 무역을 반대할 목적으로 “무역보호조합”을 결성했고, 같은 해 11월 영국 정부는 이미 소련제 수입품들에 대한 수출 신용 기한을 2년에서 1년으로 단축했다.

1931년과 32년에 걸쳐, 버밍엄 대학교 러시아경제정세연구소는 소련의 경제정책의 실패와 붕괴를 보여주는 중요한 보고서를 출판했다. 1932년 영국에서는 소련제 물품들이 “강제노동”을 통해 제작됐다는 구실로 소련제 상품에 대한 새로운 캠페인이 개시됐다. 캠페인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됐을 때, 1930년의 영국 정부는 영국-소련 무역협정을 파기했다.16

이로써 소련은 비(非)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정상적 관계의 상대적인 장단점들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다시 한번 획득하게 되었다.

번역: 김의진 | 회원

 

2024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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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후에도 살펴보겠지만, 1920년 2월에 레닌은 이미 국가경제계획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2월의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그와 같은 계획의 초안을 작성할 것을 지시했고, 이를 전기화 계획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1920년 3월과 4월에 러시아 공산당 제9차 대회는 수년의 시간 동안 적용될 단일한 경제계획이 “나라의 경제적 재건을 위한 근본적인 조건”으로 된다는 것을 선언했으며, 그것의 “성공을 위해 도시와 농촌의 광범위한 대중에게 경제계획의 실질적인 의미에 대한 일관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했다. 1920년 4월에 시작된 폴란드와의 전쟁과 브랑겔 장군과의 전투는 7달에 걸쳐 이어졌다. 그러나 초안을 작성하는 작업은 계속됐다. 바로 같은 대회에서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경쟁(emulation)에 있다고 적시한 것은 특기할 만 하다. 대회에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경쟁을 낳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로 이어졌다.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사회에서의 경쟁은 연대를 균열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노동생산물의 총량을 증대시키는 방식이어야 한다. 작업장과 지역, 공장, 개별 노동자 간의 경쟁은 노동조합과 경제부서들에 의한 주도면밀한 조직화와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G. M. Krzhizhanovski, Ob Elektrifikatzii, 1921, 29.텍스트로 돌아가기
  3. Razvitie Sovetskoi Ekonomiki, A. A. Arutinyan & B. L. Markus (eds.), 1940: 134-7, 157.텍스트로 돌아가기
  4. G. M. Krzhizhanovski, Op. cit., 7.텍스트로 돌아가기
  5. Ibid., 3.텍스트로 돌아가기
  6. 국가전기화계획의 목표치 통계는 제8차 소비에트 대회에 제출됐던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전기화 계획에 대한 보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I. 스테파노프는 1922년 3월에 자신의 저서인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전기화(Elektrifikatzia RSFSR)』─레닌이 책 서문에서 강력하게 추천했던─에서 “성공적인 사회주의의 건설은 서유럽 공업의 방대한 자원을 사용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썼다. (161쪽)텍스트로 돌아가기
  8. G. M. Krzhizhanovski, Op. cit., 39.텍스트로 돌아가기
  9. XV Syezd VKP, Bulletin No. 21, Moscow: 1927, 6-7.텍스트로 돌아가기
  10. Ibid., 7.텍스트로 돌아가기
  11. Speech by Chicherin, 10th April, 1922.; The Soviet Union and Peace, 1929, 84.텍스트로 돌아가기
  12. Speech by Rt. Hon. W. G. A. Ormsby-Gore, 24th October, 1925.텍스트로 돌아가기
  13. Leninism, 1944, 283.텍스트로 돌아가기
  14. Ibid., 414.텍스트로 돌아가기
  15. V. M. Molotov, Zadachi Pervogo Goda Vtoroi Pyatiletki, 1933, 45-6.텍스트로 돌아가기
  16. 세부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W.P.와 Z. 코아테스의 <영국-러시아 관계사> 제15장~제18장을 살펴보라.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