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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전쟁과 그 후


δ. 전쟁과 그후 ​


 

소련이 공격을 받으면서 평화 시기의 계획은 폐기되었고, 1941년 3/4분기의 “동원경제계획”이 채택됐다. 이 계획은 1941년에 예정됐던 공장들의 건설을 기존보다 3분의 1 수준으로 줄이고, 물자, 재정, 인력의 집중하며, 전투부대를 위한 특수기계설비와 프레스, 고품질 철강, 고옥탄 석유, 제복 및 기타 장비들의 생산량을 대대적으로 늘릴 것을; 그리고 우랄 산맥과 볼가 강 유역, 시베리아 서부에서 공장들과 발전소들을 빠르게 확장하며, 겨울까지 연료 비축량을 늘릴 것을 규정하였다. 이 계획은 1941년 8월에 소련 동부 지역을 대상으로 한 “전시경제계획”으로 이어져, 이번에는 대규모 군수 산업 중심지로서 발전할 것으로 계획된 아시아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해당 계획은 1941년 4/4분기와 1942년 전체 분기를 포괄했으며, 적의 위협 아래 놓인 지역들의 군수공장과 그에 부속된 공장들의 이전을 포함했다.1

1,360개 이상의 대규모 공장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계를 실은 철도수송차량 120만 대를 통해) 소개되었으며, 주요 공장들은 1942년 초반부터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획들과 그 이후에 채택된 후속 계획의 결과로, 소비에트 동부 지역의 공업생산량은 1945년 초에 1941년 초반보다 2배나 증가했으며, 그동안 전시공업의 생산량은 5.5배 이상 증가했다. 혁명으로 인해 일어난 변화는 다음의 사실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914~7년 독일과의 전쟁 당시 차르의 군대는 소총과 탄창의 60%를, 대포의 72%를, 포탄의 75%를, 수송차량의 97%를, 무한궤도차의 100%를 외국에서 수입했다.2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 병사들은 보급품 없이 1916년 가을에 3-4명당 소총 한 정을, 하루에 한두 발밖에 가지지 못한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

1941년에서 1945년까지 독일과의 두 번째 전쟁 동안 소련은 3년 동안 연합국—영국, 미국, 캐나다—으로부터 총 9,214대의 전차를 받았고, 자체적으로 9만 대의 탱크를 생산했다; 12,258대의 비행기를 받았고, 스스로 12만 대를 생산했다; 31,263대의 방공포와 대전차포를 받았고, 36만 대가 넘는 모든 유형의 대포를 자체적으로 생산했다. 전체적으로 소련은 3년 동안 연합국으로부터 4천만 개 이상의 포탄을 받았고, 1944년에만 자국의 공장에서 2억 4천만 개 이상의 포탄을 자체적으로 생산했다. 마찬가지로, 같은 해에 소련은 74억 개의 탄창을 생산했고3, 연합국으로부터는 전쟁 내내 총 13억 1,600만개의 탄창만을 받았다. 이상의 수치들과 그와 유사한 지표들은 제정 러시아를 쓰러뜨린 것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소련이 꿋꿋히 이겨낼 수 있게 했던 엄청난 경제적 변화를 보여준다.4

전쟁 말엽과 그 이래로, 이러한 성과들에 대한 정당한 자부심을 드러내지 않는 그 어떤 소련의 출판물도, 소련 시민과의 그 어떠한 대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부심에는 소련에게 전쟁이 강제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성과들이 보다 평화적이고 인간적인 조건에서 실현될 수 있었을지에 대한 통한이 언제나 뒤따른다. 그리고 소비에트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을 혁명 직후부터 계속 견지하고 있다. 중단된 제3차 5개년 계획과 그 후속인 제4차 5개년 계획의, 아직 주목받지 못한 한 가지 특별한 측면 때문에 이러한 통한은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것이었다. 보즈네셴스키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은 1946년 3월 15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서 한 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5개년 계획은 소련 국민경제를 복구하고 발전시키는 동시에 소련 공산당 제18차 대회에서 제시됐으나, 소련에 대한 히틀러 독일의 배신적인 공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중단됐던 소련 사회의 발전의 길의 재개를 의미한다. 이는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완성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목표로 한다. 이는 소련의 기본 경제적 과제, 즉 1인당 산업 생산량의 측면에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을 추월하고 능가하는 것을 예견한다.”5

이 문제는 이미 1939년에 스탈린에 의해 정면으로 제기되었다. 주지하듯, 소련은 전전 수준의 생산량에 도달하는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고, 그 기초 위에서 경제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킬 역량을 가진 산업을 건설하는 문제를 해결했으며, 농업과 공업, 무역에서 공공 소유의 기업소를 제외한 일체의 기업소들을 일소함으로써, 또 삶의 질의 향상과 문화적 수준의 향상, 노동에 대한 태도 자체를 개선하는 문제를 차례로 해결함으로써 실제로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6

“우리는 생산기술과 공업발전의 속도에서 주요 자본주의 국가를 추월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경제적으로도 추월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오직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추월할 때만이 우리는 우리나라가 소비재들을 풍족하게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고, 다량의 생산물들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할 있다고 비로소 말할 있다.”

스탈린은 한 나라의 산업의 경제적 힘은 인구의 크기와 무관하게 전체 산업 생산량의 규모가 아니라, 1인당 산업 생산량의 규모로 표현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국과의 몇 가지 비교를 통해 이를 설명했다. 1938년에 소련은 영국의 선철 생산량의 두 배였지만, 1인당 생산량은 영국의 5분의 3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의 철강 총 생산량은 영국의 약 70% 이상에 달했지만, 1인당 생산량은 영국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소련의 전력 생산량은 총 390억 kW.h.로, 영국의 290억 kW.h.보다 많은 양이었지만, 1인당 전력 생산량은 영국의 620kW.h.보다 낮은 233kW.h.에 불과했다.7

몰로토프는 같은 대회에서 한 제3차 5개년 계획 보고에서 이 점을 짚으며, 스탈린이 언급한 기초 산업이나 석탄과 시멘트뿐만 아니라 면화와 모직물, 가죽 신발과 종이, 설탕과 비누 같은 소비재 생산에서 소련과 당시의 5대 열강당연하게도, 독일과 일본이 포함하는과, 비교했던 인상적인 일련의 수치들을 통해 주장을 보강했다. 소련은 그 사회주의적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1인당 산출량을 기준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른 열강들에 비해 뒤처지고 있었다. 왜일까? 몰로토프는 그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답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가장 최근까지도 공업적 측면에서 대단히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인구의 상당수가 극히 낮은 수준의 1인당 산업 생산량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 이래로, 소련은 짧은 기간 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완전히 만회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1913년만 해도 레닌이 프라우다에 어떻게 썼는지를 상기하며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전례 없이 후진적인 나라로, 영국보다 4배, 독일보다 5배, 미국보다 10배 더 낙후된 근대적 생산설비들만이 구비된, 가난하고 반쯤 미개한 나라로 남아 있다.”8

제3차 5개년 계획 하 제시됐던 생산의 증대된 규모는 소련과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보즈네센스키도 또한 제18차 당 대회에서 소련의 공업 노동자들이 미국의 노동자에 비해 1인당 생산량을 기준으로 여전히 두 배에서 2.5배 적게 생산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스탈린은 전반적으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같은 연설에서 “향후 10년 혹은 15년”을 언급했다.

몰로토프는 "최소 두 차례, 혹은 세 차례 이상의 5개년 계획이 추가로 필요할 것"이며, 그 기간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평화적 경쟁의 시기로,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 경쟁으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쟁의 위협이 매우 가까이 다가왔고 소련 지도자들에게 결코 감추어졌다고 할 수 없을 때, 1941년 2월 22일즉, 5개년 계획의 첫 3년의 만족스러운 결과가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을 때에 그들이 국가계획위원회에 내린 지시는 의미심장하다.9 이는 "앞으로 15년 동안철과 강철, 연료, 전력, 기계와 기타 생산수단 및 소비재 부문의 1인당 생산에서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을 추월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련의 경제계획을 편찬하기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거의 5년 후, 가장 참혹한 파괴가 현대의 그 어떤 나라에서의 파괴와 비교될 수 없는 가장 참혹한 파괴가 가해진 후, 스탈린은 선거 연설(1946년 2월 9일)에서 장기계획의 목표로 일련의 생산 수준들을 언급했는데, 이는 실제로 소련을 소련공산당 제18차 대회에서 논의됐던 지위로 끌어올릴 것이었다:

“장기계획에 있어서, 우리 당은 국민경제의 새로운 강위력한 대고조를 조직하려고 한다. 이는 예를 들어, 우리의 공업 수준을 전전 수준에 비해 3배로 높일 수 있게끔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업이 연간 최대 5천만 톤의 선철, 최대 6천만 톤의 철강, 최대 5억 톤의 석탄, 최대 6천만 톤의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우리는 우리나라가 그 어떤 재난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아마도 세 번의 새로운 5개년 계획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를 우리는 달성할 수 있으며,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10

스탈린이 언급했던 철강 수치는 소련이 (1929년 호황기에) 미국의 1인당 생산량을 따라잡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그와 몰로토프가 (1939년 3월에) 제시했던 수치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1939년보다 더 많은 것을 해결해야 했다.

번역: 김의진 | 회원

 

2024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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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rokin, Sotzialislichtskoe Planirovanie Narodnogo Khoziaistva SSSR, 1946, 54-55.; Soviet News, March 18, 1946, 6.; Broadcast by P. Moskatov, “head of Chief Department of Labour Reserves”, Soviet Monitor, 2nd November, 1944.텍스트로 돌아가기
  2. Pravda, 23rd February, 1936.텍스트로 돌아가기
  3. 수입에 관한 정보는 A. Rothstein, Soviet Foreign Policy during the Patriotic War, Vol. 2, London: Hutchinson & Company, 1946, 86-88.를, 소련의 군비 및 탄약 생산에 관해서는 Law on the Five Tear Plan, 1946, B.를 참조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4. 〔역자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방 국가들에서는 현재까지도 소련이 승리할 수 있었던 중대한 요인을 미국, 영국 등의 '랜드리스'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캐나다의 역사학자인 자크 파월(Jacques R. Pouwels)이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에서 밝혔듯이, 미국과 서방의 원조는 소련의 전쟁물자 총생산량의 4~5%에 불과했고, 1942년과 1943년 이후에야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소련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을 격퇴했고, T-34 전차를 비롯한 고성능의 경화기, 중화기들을 자체적으로 대량생산했으며, 이러한 추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서방 연합국들의 기여가 없지는 않았다고 해도, 전세를 바꿀 정도로 결정적인 요소가 된 것은 아니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Soviet News, March 18, 1946, 10.텍스트로 돌아가기
  6. Leninism, 1944, 633.텍스트로 돌아가기
  7.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8. Tretii Pyatiletnii Plan, 1939, 14-6.텍스트로 돌아가기
  9. Voznesensky의 소련 전시 경제 조사는 1941년 6월까지 제3차 경제 계획의 성과 수준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담고 있다. (Ekonomika SSSR, 1947, 14-5.)텍스트로 돌아가기
  10. “Stalin and Molotov Address Their Constituents”, Soviet News, 1946, 17.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