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제1장: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의 문제


ε.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의 문제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파괴로 인해 소련에 야기된 문제들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뜻 보기에 지엽적인 문제로 보일 수 있는 문제를 살펴보면 그 심각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7월 이래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포츠담 협정의 이른바 ‘가혹함’에 대해 많은 글이 쓰여졌다. 배상금 적용과 독일에서의 나치즘과 군국주의의 뿌리를 파괴할 데에 대한 원칙은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코노미스트와 같은 공신력 있는 언론도 포츠담 회담의 적용이 독일을 “경제 최빈국”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단언했으며, 뉴스 크로니클의 의장은 독일이 “유럽 중심부의 황무지”로 되고 있다고 말했다. 1947년 3월 모스크바 외무상 회의에서 영국 외무성 장관은 독일이 “경제적 시궁창"으로 굴러떨어질 가능성을 전망했다.

이러한 진단들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단에 내포된 함의를 검토하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연합국은 독일 경제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것은 1949년까지 독일산업이 1938년 생산량의 50-55%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석탄과 철강은 예외로, 석탄의 경우에는 생산량을 최대한 늘려야 했고 철강은 독일의 전쟁 잠재력을 줄이기 위해 최대 수치가 고정되어 있었다. 독일에 대한 가혹한 대우를 개탄하면서 이 허용 수준이 무엇을 의미할지 밝히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 저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공식 통계는 1946년 3월에 출판됐다. (일간동향(Tägliche Rundschau), 1946년 3월 29일호) 이상의 수치들은 허용된 철강생산량(580만 톤)조차도 1938년 당시 미국과 소련, 영국,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생산량보다 높았고, 그 해의 생산능력(750만 톤)도 프랑스의 생산량보다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전력의 경우 허용된 출력 용량(900만 kW)은 독일이 425억 kW.h.의 전력을 생산했던 1936년 수준의 60%에 불과했다. 이 중 60%인 255억 kW.h.는 1938년 독일을 캐나다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 미국, 소련, 영국 바로 아래 두었을 것이다.1 시멘트 생산 허용량(800만 톤) 덕분에 독일은 1938년 미국을 제외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시멘트를 생산할 수 있었다. 독일은 연간 4만 대의 트럭을 생산할 수 있었다(1938년 생산량의 60% 이상): 이는 1938년 캐나다와 비슷한 수준이며 미국, 소련, 영국의 생산량에만 뒤떨어지는 수치다. 독일 엔지니어링 산업은 1938년 중자재 생산량의 30%와 경자재 생산량의 50%를 허용받았다이는 총 160만 마르크로, 1938년 총 44억 마르크의 38.1%이다. 이는 (1928년과 비교했을 때 56.4라는 지수는) 히틀러가 이미 대규모 재무장 계획을 개시하고 독일 엔지니어링 제품이 많은 시장에서 영국과 성공적으로 경쟁하던 1933-4년 수준으로 독일을 되돌렸을 것이다. 제지 생산량은 2,129,000톤으로 1938년 영국보다 (약간) 적었고, 미국과 캐나다 생산량보다는 적었지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았다. 기초(전쟁용) 화학물질 생산량은 1936년 수치의 40%로 줄어들어 독일은 세계 6~7위로 밀려났지만, 일반 화학물질 생산량은 1억 4,773만 마르크로 1938년 수준의 70%로 미국과 소련을 제외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 훨씬 앞서게 한 채로 놔두었다.

독일의 영토상실은 석탄의 생산을 1938년의 총 1억 8,600만 톤에서 1억 5,500만 톤으로 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산량으로도 독일은 여전히 영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제3위로 남아있을 터였고, 실제로 소련보다 훨씬 더 높은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으며,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합한 것보다 여전히 더 많은 석탄을 생산하고 있다.2

이러한 감축은 특히 1938년 당시 독일의 재정적, 경제적 장악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나라들에게 산업 설비를 이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유럽에 대한 독일의 산업지배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총수치로 측정하건, 인구의 1인당 생산량으로 측정하건, 독일이 1938년에 추월한 국가들이 순전히 ‘최빈국’들이었다는 주장만큼이나, 석탄 생산의 감축이 독일을 필연적으로 ‘최빈국’으로 변모시켰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1946년 영국과 미국에서 이 주제에 대해 제기된 비판의 특징은 소련이 입은 손실이 연합국이 부과한 조건들하에서 독일이 입은 손실보다 훨씬 컸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입은 명백한 손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도네츠 탄광과 모스크바 탄광에서 독일군은 연간 총생산량 1억 톤의 석탄 광산들을 파괴했으며, 1938년 당시 소련의 전체 석탄 생산량은 1억 3,300만 톤이었다.3 그들은 1,100만 톤의 선철과 천만 톤의 강철을 생산했던 제철소들을 파괴했는데, 이때 1938년 소련에서의 이들 품목들의 총생산량은 각각 1,460만 톤과 1,800만 톤이었다. 그들은 5백만 kW의 산출량을 갖춘 61개의 대규모 수력발전소들을 파괴했는데, 이때 1938년 소련의 전력발전소 총생산량은 870만 kW였다. 독일군은 전쟁 이전에 91만 9천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했던 749곳의 기계제작공장들을 파괴했는데, 전쟁 전 소련 엔지니어링 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는 약 250만명에 달했다. 독일군은 1938년 당시약 800만 개에 달했던섬유 공장의 방적기 중 300만 개의 방적기를 파괴했다. 독일군은 1937년 전체 산업 종사자의 5분의 2에 해당하는 4백만 명의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던 약 32,000개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였으며소련이 보유한 모든 종류의 기계 수만 대(공작 기계 17만 5천 대 포함)를 독일로 반출했다(소련 전체 보유 기계의 약 4분의 1). 그들은 또한 1938년에 존재했던 5만 4천 마일 길이의 철도노선 중 4만 마일 가량을 파괴했다. 소련 각료회의는 소련의 파괴된 지역들의 1946년도 공업생산량이 전쟁 이전 수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밝혔다(프라우다, 1947년 3월 1일자).

이러한 파괴는 소련의 시민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까? 여기서 몇 가지 증거들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벨라루스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파괴의 성격과 규모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침략자들은 우리 산업의 대부분을 파괴하고, 우리의 공작 기계와 기술장비의 재고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발전소 설비들의 95%를 폭파하고 파괴했다. 민스크, 고멜, 비텝스크, 폴로츠크, 오르샤와 기타 수많은 도시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농촌에서는 집단농장 농민들의 가옥 41만 2천 채와 집단농장 건물 50만 채가 파괴됐다. 독일의 점령 결과, 우리 공화국의 경제는 심각하게 약화되고 해체됐으며, 1913년 이전 수준으로 후퇴했다.”4

“우리 조사단은 우크라이나를 두루 살펴보았다. 파괴의 참상은 끔찍했고, 연합국구제부흥기관(U.N.R.R.A)의 구호계획은 필요한 양에 비하면 세발의 피에 불과했다. 나는 리비아와 시리아, 이라크, 에티오피아, 영국,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에서 전쟁으로 인한 파괴를 보았다. 우크라이나의 파괴와 견줄만한 곳은 바르샤바와 폭격으로 전소된 독일의 몇몇 도시들 외에 없었다. 키예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드네프로스트로이, 하르코프, 오데사의 산업 공장에서 나는 현대식 기계와 기계 공급품이 거의 완전히 제거되고 건물이 파괴되거나 부서져 껍데기에 불과한 상태로 남은 것을 발견했다. 해당 지역은 비록 2년 전에 해방됐지만, 규모가 가장 큰 제촐소 2곳은 아직 조업을 재개하지도 못했고, 중공업은 거의 가동되지 않고 있다.”5

“에스토니아SSR의 산업과 도시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상당수의 공장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장비가 독일로 반출되었다. 히틀러 도당의 파괴적인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섬유 산업에서 전쟁 전 70만 개의 방추들 중 16,500 개의 방추들 만 남았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연간 20만 톤의 셰일 오일을 생산할 수 있는 사업장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탈린의 발전소를 제외한 공화국의 모든 발전소는 독일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 나라의 교통수단 중 6-7%만이 남아 있다. 모든 철도 다리가 폭파되었다.”6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은 우리 공화국의 경제와 문화에 광범위한 손상을 가했다. 그들은 공장 부지 5,790곳과 전력발전소 53곳을 포함하여 14만 채의 건물들을 파괴했다. 4만 7천 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됐고, 의료기관과 약 1,000개의 교육시설, 유치원, 도서관, 박물관, 교회들이 파괴됐다. 독일은 우리 공화국의 수도인 리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우리의 대도시들인 리예파야(리바우)와 다우가우필스(드빈스크), 발미에라를 파괴했다. 옐가바와 레제크네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이 파괴됐다. 히틀러 도당은 공화국의 전력기반을 완전히 파괴했고, 리가 항과 다우가바의 거대한 화강암 제방을 폭파했다. 국영전기공장(VEF)과 바이로그스(Vairogs), 바로니스(Varonis) 및 기타 수많은 공장들의 1등급 설비들은 독일로 공출되거나 현장에서 파괴됐다. 모든 교량(철교와 육교)들은 폭파됐다. 수백 km의 철도가 특수장비들에 의해 파괴됐다. 독일은 라트비아의 근로농민을 모조리 일소했다.

농민들이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지급받은 모든 토지는 곡물과 재산, 장비와 함께 빼앗겼고 부농과 지주에게 주어졌다. 점령당국은 소 80만 두 이상과 말 10만 두 이상, 최대 100만 두 이상의 돼지와 양, 염소를 독일로 공출하거나 도살했다. 농기계와 장비 수천 대와 과수 50만 개가 파괴됐다. 우리 농업의 사회주의적 부문국영농장, 기계-트랙터 기지(MTS), 농기계, 말 대여소들은 완전히 망가졌다. 이것이 바로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됐을 때 소비에트 라트비아가 처했던 상황이었다.”7

게드빌라스 대의원은 연방 소비에트에서 리투아니아가 해방됐을 때 공업생산량이 전전 수준의 25%였고, 그로부터 2년 후, 재건을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시기에 비해 2/3밖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이즈베스티야, 1947년 2월 21일자 기사)

1947년 말 연합국구제부흥기관의 총재인 로웰 룩스(Lowell Looks) 장군은 키예프에서 소련에 오기 전 영국과 이탈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를 방문했다고 진술했다: “도처에서 나는 히틀러 도당에 의해 초래된 엄청난 파괴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도시와 마을들의 폐허를 집과 생활수단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여러분의 나라에 초래된 파괴랑 피해와 비교될 수 없다.”8

“파시스트 야만인들에 의해 레닌그라드 시 경제에 가해진 전체 피해량은 55억 루블 상당의 가치로 기본기금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다. 1946년 무렵 우리나라의 공업이 도달한 수준은 전쟁 이전 시기의 33%밖에 되지 않았다.”9

이 모든 것은 소련에서 독일에 의해 초래된 파괴에 관한 수많은 사례 중 일부일 뿐이다.

1946년 10월 29일 스탈린이 미국 연합통신사 사장 휴 베일리(Hugh Baillie)의 질문에 답하면서 황폐화된 지역을 재건하는 데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6~7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 것은 수많은 유사한 보도가 나온 후였다. 제4차 5개년 계획 자체에 따르면 5년 동안의 기록적인 자본 투자 금액인 2,500억 루블 중 거의 절반이 폐허가 된 지역의 재건 작업에 배정되어 있다.

소련 경제 당국자들에게 막대한 문제를 안겨주고 있는 공업의 파괴 외에도, 농업의 파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포츠담 회담의 요구조건 완화를 옹호하는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조차도, 독일의 농업에 그러한 폐허를 방불케 하는 것이 있었다고 꾸며댈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점령지에서 독일군은 수천만 소련 농민의 농가와 생산 장비, 소련 농업의 5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98,000개의 집단농장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약탈했고, 4,700개가 넘는 국영농장과 트랙터 창고를 약탈했다. 과정에서 독일군은 700만 마리(1939년 영국 전체의 6배 이상), 소 1,700만 마리(1939년 영국의 2배), 돼지 2천만 마리(전쟁 전 영국에 비해 4배 이상)를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또한 소련군은 137,000대의 트랙터(전쟁 전 소련 전체 트랙터 장비의 1/4 이상)와 49,000대의 콤바인 수확기(전쟁 전체의 1/4 이상)를 파괴하거나 빼앗았으며, 265,000대의 파종기, 885,000대의 수확 및 곡물 선별기, 약 400만 개의 쟁기, 써레 및 기타 도구도 파괴하거나 빼앗았다.10 1946년 3월 말까지 황폐화된 지역의 마을에 140만 채의 주택이 재건되었지만, 4차 5개년 계획에 따라 같은 지역에 추가로 건설해야 할 주택이 여전히 200만 채가 남아 있었다.11

1946년에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볼가강 하류 지역에서 1921년 기근의 그것보다 더 많은 지역에 영향을 끼친 대규모 가뭄은 이들 지역의 생산력이 심각하게 약화하였을 때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소련의 식량 사정에 막대한 난관을 조성하고, 향후 수 달 동안의 계획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인위적인 재앙들에 대해 자선가들의 공적 모임도, 더 타임스나 기타 신문들에 대한 서한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소련의 역사에 친숙한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이것이 소련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과거 소련의 경제발전은 주로 외부로부터의 물질적 지원 없이 전개됐으며, 심지어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이라고 할지라도 소련의 시민들은 그와 같은 지원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독일의 공업생산능력에 제시된 감축량과 소련 공업에 가해진 실질적인 파괴 사이의 비교가 앞선 자료들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이는 논쟁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연합국통제위원회의 경제계획이 시행되었을 때, [그 계획이] 독일의 운명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리든, 그러한 결론이 소련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훨씬 더 잘 조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제4차 5개년 계획 하 대규모 자본투자를 “버터 대신 총” 정책의 증거로 해석하는 것이 개연적인 국제관계 발전의 지침으로서 유익한지 판단하는 데서 이제 더 나은 위치에 있다. 독일군의 파괴가 무거운 족쇄처럼 소련 경제의 목을 옥죄어 왔고,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은 지역들을 대상으로 계획됐던 건설적인 사업 자체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가장 평화적인 외교정책을 소련의 사활적인 요구로 만들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장기적인 여파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제3차 5개년 계획 하 1942년에 몇몇 분야에 제시된 목표량들과 제4차 5개년 계획 하 1950년에 제시된 목표량을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비교를 위해, 스탈린이 제시한 “장기계획”의 목표들3년에 걸친 성공적인 경제적 팽창을 통해 1940년 수준에 도달하는 것도 또한 첨부했다.

 

생산 부문 1942년도 계획 목표량 (제3차 5개년 계획) 실질 생산량 1950년도 계획 목표량 (제4차 5개년 계획) 장기계획12
2,200만 톤 1,500만 톤 1,950만 톤 5,000만 톤
강철 2,800만 톤 1,800만 톤 2,540만 톤 6,000만 톤
석탄 2억 4,300만 톤 1억 6,800만 톤 2억 5,000만 톤 5억 톤
석유 5,400만 톤 3,100만 톤 3,540만 톤 6,000만 톤
곡물 1억 3,100만 톤 1억 1,900만 톤 1억 2,270만 톤 1억 8,000만-1억 9,000만 톤
목화 320만 톤 270만 톤 310만 톤 -
전력 750억 kW.h. 482억 kW.h. 820억 kW.h. -
모든 산업부문 (1926-7년도 시세 기준) 1,840억 루블 1,385억 루블 2,050억 루블 4,000억 루블 초과

 

1917년 이래로, 소비에트의 모든 경험은, 소련이 향후 수년 동안 무기력한 상태에 놓이거나, 자국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국제문제에 있어서 소련을 좌지우지하거나, 강대국들의 대열에서 배제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서 이들 수치를 해석하는 것이 어리석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련이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과거에도 그러한 해석은 그것을 내놓은 저자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왔다. 그러나 통계들은 소련이 세계평화를 지키고, 평화를 위해 다른 열강들과 전쟁 당시의 친선을 공고화하는 데에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몰로토프는 1946년 2월 6일에 유권자들에게 연설했을 때 이러한 이해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독일이 1941년 6월에 공격했을 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목적을 다시 한번 설정할 필요성에 대해 거론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13

“이 중요한 과업을 최종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장기간에 걸친 평화와 우리나라를 위한 확실한 안보가 필요하다. 소련의 평화애호 정책은 모종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우리 인민의 근본적인 이익과 필수 불가결한 요구들물질적 수준을 가능한 한 빠르게 향상하고자 하는 열망과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활을 창조하기 위한 비상한 노력, 침략자 무리에게 족쇄가 채워진다는 전제하에서 소련이 이 모든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리라는 깊은 자신감로부터 기인한다. 소련의 인민들이 평화와 국제적 안보에 대한 침해의 원천, 또는 그러한 목적을 위한 음모의 문제와 관해서 그토록 경각성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 있다.”

이 점에서, 다른 많은 측면과 마찬가지로, 몰로토프가 한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럽에게 가장 유리할 것이다.

번역: 김의진 | 회원

 

2024년 12월 10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전력 부문에 관해서는 『국제연맹통계연감 1938/39(Statistical Year-Book of the League of Nations 1938/39, Geneva: League of Nations, 1939)』, 132-3.을 참고하라. 시멘트 부문에 관해서는 Ibid., 131.을, 운송 부문에 관해서는 197.을, 기계공업지표에 관해서는 186.을, 제지 부문에 관해서는 130.을, 화학 부문은 166-96.을, 석탄 부문에 관해서는 141.을 참조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2. 1947년 8월 30일에 발표된 영미 지역 내 독일 산업에 허용된 새로운 수준으로 인해 독일의 전쟁 잠재력은 이웃 국가들에 비해 더욱 높아졌다. 1946년 3월의 협정에 따라 허용된 철강 생산량대로라면 독일은 1938년에는 세계 4위가 아닌 세계 3위가 되었을 것이다. 1951년까지 엔지니어링 생산량은 1933~4년 수준이 아니라 공화당 스페인 침공이 있었던 1936년 수준으로 증가할 수 있게 되었으며. 황산 생산량은 1938년 미국과 타일 소련을 제외한 다른 어떤 국가보다 높아질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배상금으로 이전할 예정인 공장 목록이 “단축”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소련에서 독일군의 파괴행위에 관한 통계들은 1945년 9월 13일에 출판된 “Report of the Extraordinary State Commission for Ascertaining and Investigating Crimes of the German Fascist Invaders”에 수록되어 있으며, Soviet Government Statements on Nazi Atrocities 1946, 300-317.에 인쇄되어 있다. 전전(戰前) 소련의 석탄과 철, 강철의 생산량은 바이코프의 The Development of the Soviet Economic System, 1947, 291.에서 찾을 수 있다. 섬유 산업에 관한 통계는 Sotsialistickeskoe Stroitelstvo SSSR, 1936.에 주어진 수치들과 A. N. 코시긴이 최고소비에트 민족회의에 제출한 1929~37년 시기에 대한 추가자료들에서 산출되었다. 엔지니어링 산업에 관한 수치들은 SSSR-Strana Sotsializma, 1936, 85.에 수록된 1935년 통계치와 Statistical Year-Book of the League of Nations 1939/40, Geneva: League of Nations, 1940, 140., 그리고 소련 당국에서 제공한 1935년과 1938년의 산업 산출 지표에 근거하여 재계산되었다. 1938년의 발전소 용량은 Lokshin, Partia Bolshevikov v Borbe za Industrializatsiu SSSR, 1946, 64.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8년 철도 마일리지는 경제학자 유진 바르가(Eugen Varga)의 논문 U.S.S.R. Speaks for Itself, 1943, 61.에서 확인할 수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1946년 3월 18일 소련에서 P. K. Ponomarenko의 연설.; Zasedania Verkovnogo Soveta SSSR, I Sessia, 1946, 276-7.텍스트로 돌아가기
  5. M. McDuffie, “Chief of the U.N.R.R.A. mission to the Ukraine”, The New York times, 6th June, 1946; Russia Today News Letter, 27th July, 1946.텍스트로 돌아가기
  6. 1945년 4월 25일 소련에서 J. Vares의 연설.; XI Sessia Verhovnogo Soveta, 1945, 66.텍스트로 돌아가기
  7. 1946년 3월 16일 소련에서 Y. E. Kalnberzin의 연설.; Ibid., 91.텍스트로 돌아가기
  8. Soviet Monitor, 30th April, 1947.텍스트로 돌아가기
  9. 1946년 3월 18일 소련에서 P. S. Popkov의 연설.; Zasedania Verhovnogo Soveta, I Sessia, 1946, 270-1.텍스트로 돌아가기
  10. 특별국가위원회(Extraordinary State Commission), 보고서는 이미 인용됨. 13th September, 1945.텍스트로 돌아가기
  11. Law on the Five Tear Plan, 1946, 29, 58.텍스트로 돌아가기
  12. 1940년에 도달한 수치들은 마지막 품목을 제외하고 제4차 5개년 계획에 대한 통계에 주어져 있다. “모든 산업부문”에 대한 수치들은 제3차, 제4차 5개년 계획에 관한 통계들과 (장기계획에 관한) Pravda, 26th October, 1946.의 통계를 참고했다. 곡물 부문에 대한 장기계획 추정치는 T. Khachaturov, Planovoye Khoziaistvo, № 10, 1940.을 참고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3. “Stalin and Molotov Address Their Constituents”, Soviet News, 1946, 27.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