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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 『옥중수고』의 레닌주의 정치사상: 제4강

한동백 |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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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패권〉은 시민사회와 국가에서 서로 적대하는 기본 계급의 역관계 파악하는 척도이다. 지배력의 수준은 영역의 수많은 분지에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가지 요인은 모두 이데올로기에 포괄된다) 계급적 역량을 얼마나 발휘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패권〉의 운동에서는 지적인 작업의 주체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람시는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지식인〉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패권〉은 또한 발생한 역사적 생산양식의 현실적 공고화 필연적 연관을 가진다. 예컨대 그람시는 〈지식인〉의 역사적 지위와 역할과 관련하여 이를 다음과 같이 적는다: “1. 기본적인 지배 집단이 사회생활에 부과하는 일반적인 지도에 대한 주민 대다수의 ‘자발적’ 동의, 이러한 동의는 이 집단이 생산 세계에서의 위치와 기능 덕택으로 누리는 위신(그리고 그 결과 얻게 되는 신임)에 의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다.”1  역사적 생산양식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에서 이를 주도하는 기본 계급이 군중의 〈동의(accordo)〉를 확보하는 작업에서 〈지식인〉은 세포적인 역할을 한다; “2. 국가기구는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동의하지’ 않는 집단을 ‘합법적으로’ 징계하는 강제력을 행사한다. 또한 이러한 국가기구는 자발적 동의를 얻어내는 실패했을 오는 지배와 지도가 위기에 처한 순간에 대비하여 사회 전체에 걸쳐 구성되어 있다.”2  국가기구가 생산양식의 자기 보존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동의가 필요하며, 이의 실패가 야기하는 〈지배(dominio)〉와 〈지도(direzione)〉의 위기를 무마할 있는 메커니즘도 〈지식인〉에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으로서의 역사적 지위를 갖춘 〈지식인〉은 〈유기적 지식인(intellettuale organico)〉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역사에서 〈지식인〉은 여전히 역사적 당파에 의해 정립되지 않은 부위, 즉 “‘집단정신(esprit de corps)’을 통해 부단한 역사적 연속성과 특수한 자격”3을 갖춤으로써 “자신을 지배적인 사회집단으로부터 독립된 자립적인 집단으로 규정”2하는 집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 〈전통적 지식인(intellettuale tradizionale)〉이라고 한다. 이 집단은 사회에 자기의 이해를 반영하는 방식에서 한 사회의 주요한 계급 대립을 거치기보단 분산된 채 소생산자적으로 존립하는 (고로 이들 역시 분명히 어떠한 계급적 성격을 띠는) ‘자기 자체’의 관계에 자기 이해를 한정한다. 이들은 대개 폐쇄적인 인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실천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시야 범위가 특수한 분야에 한정(Fachidiot)되어 있으며, 사고 체계와 생활 영위에서 학연(學緣) ‘공동체’에의 병적 의존성 또한 두드러진다.

 

§ 21. 〈지식인〉은 사회적 생산력이 작동하는 일정하고 특수한 기간에 걸쳐 정신적인 복잡 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집단이다. 계급투쟁의 전장에서 이들의 즉자적이고 유기적인 성격이 정립된다.

 

〈유기적 지식인〉은 서로 적대하는 기본적인 사회집단 모두가 갖출 수 있으며, 그것은 〈전통적 지식인〉을 각종 정치 문건의 편집 회의로써5 자기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방식, 또는 시민학교의 설립 및 정치 학습과 경험적 지도를 통해6 〈지식인〉을 자체 양성하는 방식으로써 전개된다. 피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을 창출해 나가는 초기 단계에서 양성은 “엘리트”를 매개로 하지 않고서 이루어지기 힘들다.7

 

§ 22. 〈동의〉가 〈지도〉를 매개로 하는 〈설득(persuasione)〉으로써 보장된다. 군중의 〈동의〉는 새로운 생산 체계가 낡은 생산 체계를 교체해 나갈 때, 즉 이러한 진보적인 생산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사회계급의 투쟁에서 자발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들이 지배계급으로 되고 머지않아 이들이 대표하는 생산 체계가 낡은 것으로 된다면 이 자발성은 소멸하며 단지 ‘자발성의 외양’을 띨 뿐이다.

 

〈지도〉는 빈번히 〈강제(coercizione)〉를 동반하기도 하는데 이는 〈동의〉가 일정 궤도에 오른 때, 그리고 〈지도〉의 역량과 이를 운용하는 주체가 그 〈지도〉의 내용에 부합하는 집단적 특성을 갖추었을 때 유효하다. 이처럼 지배적인 사회집단이 〈지배〉를 완성하는 데서 시작점은 〈지도〉이다. “우리 연구가 의거해야 방법론적 기준은 다음과 같다: 사회집단의 우위성은 ‘지배’와 ‘지적·도덕적 지도’라는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8 “한 사회집단은 통치권을 획득하기 전에 이미 ‘지도력’을 발휘할 있으며, 발휘해야”9 하는데, “그러다가 집단이 권력을 행사하게 될 때, 그 집단은 지배적”이게 되고,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할지라도 ‘지도’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2 〈지도〉에서 핵심적인 역량은 〈유기적 지식인〉이다.

 

〈지도〉는 단지 전통적으로 분류된 ‘학술적인’ 측면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도〉는 주어진 (초기적인) 역사적 생산 조건에서 특히 인력이 생산관계의 자체 요구에 따라 정신적으로 조직화되어 가는 것의 지도까지 포괄한다. 그람시는 「미국주의와 포드주의」로 분류된 수고에서 미국의 부르주아 당파에 속한 〈유기적 지식인〉이 매우 전면화한 방식으로 생산관계에 맞춰 생산 조건을 구성해 나가는 것을 “청교도주의적 투쟁”에 방점을 찍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미국에서 작업의 합리화와 주류의 양조·판매 금지는 의심할 바 없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의 사적 생활을 조사한다거나 어떤 기업에서 자신의 노동자들의 ‘도덕성’을 통제하기 위해 감사(監査) 활동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새로운 작업방식에서 비롯되는 요구이다. 이러한 시도들비록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하더라도을 비웃고 그것들을 단지 ‘청교도주의’의 위선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미국적 현상의 중요성, 뜻, 객관적 내용들을 이해할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미국적 현상이란 역사상 그 전례가 없는 속도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와 인간을 창출하고자 한 지금까지의 가장 거대한 노력인데도 말이다. … 테일러는 사실상 미국 사회의 목적을 노골적인 냉소주의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란, 노동자 속에 자동적·기계적인 태도를 최대한으로 조장하고, 노동자 쪽의 지적·상상력·창의력들의 적극적 참여를 일정하게 요구하는 기능적·전문적인 작업의 구래의 심리·신체적 연관을 파괴하여 생산적 활동을 오직 기계적·신체적 측면으로만 환원시키는 것이다.”11

이때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 방법’에 기초한 “작업의 합리화”는 가치 생산 과정에서 집체적 노동의 조직 조건을 구현하는 것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데, 이는 시민사회에서 〈지도〉를 매개로 하여 생산관계와 국가기구의 일체화를 가일층 심화하고자 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지도〉는 단지 직접적인 가치 재생산 과정이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산에서 요구하는 ‘도덕성’이 주조·주입되는 영역까지 뻗쳐 있다.

 

〈지도〉의 대상으로서의 노동의 대거 출현에 관해 마르크스는 이를 “살아 있는 노동 능력이 자기의 객체적 실재로부터 분리되고, 따라서 살아 있는 노동 능력의 생존 수단, 생활 수단, 자기 보존 수단과 같은 살아 있는 노동의 조건들로부터도 마찬가지로 분리된 단순한 주체적인 실존으로서 존재”12하는 객관적 양태로서의 노동으로 고찰하였다. 산 노동은 자본의 발생 과정에서 비로소 그것의 객체적 전제조건과 완전히 분리되어 자본 증식의 현실적인 독립적 수단으로 전화한다. 즉 “그가 자신의 무기적 현존, 그의 힘의 실험실이자 의지의 영역으로서 관계하는 자연적 생산 조건으로서 대지토지에 대하여 관계하는 것의 해체13토지에서, 더 광범위하게는 자신의 노동도구에서 산 노동이 분리되었을 때, 노동은 곧 이 능력의 재생산을 위한 생활 수단들로부터도 분리된다. 그러나 이 노동이 자본의 자기 증식의 확실한 필수 매개로 되기 위해서는 상품 생산 과정에 편입되어 아직 잔존해 있는 그 사적인 것으로서의 성격이 완전히 ‘극복’되어야 한다. “자본가는 노동이 질서정연하게 수행되도록, 생산수단이 합목적적으로 사용되도록, 그리하여 원료가 낭비되지 않으며 노동도구가 신중하게 취급되도록, 다시 말하면 작업에서 그 도구가 사용될 때에 도저히 피치 못할 정도 이상으로는 그것이 조금도 파손되지 않도록 감시”14해야 한다. 그런데 이 규율은 단지 직접적 가치 생산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이 과정 외부, 즉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영역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보조되어야 한다. 이는 특히 자본주의 경제가 충분히 성숙하여 세계적인 수준에서 부문 내, 그리고 부문 간 경쟁이 치열해졌을 때 개별 자본의 성쇠(盛衰)을 판가름하는 주요한 것 중 하나라는 점에서 국가적인 규모를 지니는 것으로 된다. 이를 위한 〈지도〉는 각 지역의 특수성에 근거하여 상이한 내용들을 지닌다. 이 점에서 “청교도주의적 투쟁”은 미국 자본주의의 특수성 하 토대-상부구조의 연결 확립15만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공고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람시는 이 도정에 〈지도〉가 필연적인 매개로 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지도〉에서 자본가계급의 군중을 향한 〈동의〉와 〈강제〉는 제국주의의 기생성과 부후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 〈지도〉를 확립하는 주체의 정신적·도덕적 퇴행으로 말미암아 실패를 향해 가고 있다. 상층 계급에 “고유한” 정신적·도덕적 타락은 “노동대중들을 새로운 산업의 요구에 순응시키기 위해 강제를 쓴다는 것”16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그 집단들을 고착화·포화시켰으며, 그리하여 이러한 집단들이 유럽에서처럼 신분 집단으로 변형되는 방식을 분명히 보여주었다.”2 이는 〈패권〉의 낡은 판도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 23. 〈지도〉의 역사적 전제조건, 그리고 〈지도〉의 발전 동력이 그것의 대립물로 전화하여 소멸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으로 전변할 때, 이 두 가지 측면 모두 역사적인 물질적 생산 체계의 자체 모순으로부터 유래한다. 〈지도〉의 부재가 그 사회 지배계급의 역량 부재로부터 나왔다면18, 그람시는 이미 이 역량의 부재가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자체 모순으로부터 필연적임을 강조하였다: “1. 어떠한 사회구성체도, 그 내부에서 성장한 생산력이 아직도 발전할 여지가 있는 한 소멸하지 않는다; 2. 사회는 그 해결을 위한 필요조건들이 이미 배태되어 있지 않은 과제를 스스로 제기하지 않는다.”19 낡은 사회형태에서 〈지도〉 영역의 균열은 새로운 계급이 〈지도〉를 확보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새로운) 〈지도〉의 역사적 전제조건의 확립과 이어진다. 이데올로기 투쟁으로서 〈지도〉가 사회를 규제하는 일정한 물질적인 힘, 즉 “무기의 비판”으로 전화한다는 점은 본질적으로 의식적인 요인이 자기의 대립물과 통일을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어떠한 의식적인 요인도 가장 낮은 힘의 수준에서 매우 강한 힘의 수준까지 일정한 물질적 규제력으로 전화할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모든 특수한 의식적인 것은 순전히 이러한, 대립적인 자기 구체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것으로서 규정성을 띠는 의식적인 것은 전혀 자기 규정적인 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사에서 모든 유한자는 그 존립에 있어 부분적인 자기 부정을 필연적으로 내함한다고 한 스피노자의 탁견은 종국에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에 귀착한다. 모든 동일한 것은 오로지 비동일적인 것의 바다에서 비로소 규정적일 수 있으므로 부정은 단지 부정일 뿐만이 아니라 규정적 부정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자기 부정도 없이’ 직진하는 ‘행위’에의 찬양인 젠틸레의 “‘순수’ 행위의 철학”에서 ‘행위’즉, ‘순수’ 의지적인 것은 실지 역사적-사회적인 성격을 띠는 물질적 이해 관계로서의 제 계기와 반성 작용한 결과물이자, 이것들과 연결된 복합체에 지나지 않으며, 이 점에서 “‘순수’ 행위의 철학”은 “가장 세속적이고 실제로 ‘불순한’ 행위의 철학이다.”20

 

§ 24. 자본주의 하 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을 창출하는 데서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공식적인 교육 기관단지 공식적인 교육 기관을 넘어, (특수한 육체적 및 정신적 작업장의 형태를 띠는) 한 사회의 지적 메커니즘을 가르치는 모든 ‘기술학교’이 체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기관의 교육 과정은 그간 〈전통적 지식인〉이 스스로를 주요 계급 대립의 전선에 대해 자립화하는 데 핵심 수단인 제 지식을 그 체제의 안정적인 작동에서 유기적인 ‘부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획기적으로 변형하는 데서 두각을 보였다. 예컨대 “[부르주아적] 심의 기구를 위해 기술적인 자료를 준비하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문부서와는 별도로, 산업 부문과 은행 그리고 금융기관 등에서 다양하게 선발된 상대적으로 비타산적인 ‘자원자’들로 구성된 제2의 기능집단”21이 만들어졌는데, 이 집단은 “직업 관료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민주적인 정권과 의회를 통제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이다.”2 이러한 “메커니즘은 유기적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사기업의 고급 전문인력까지 흡수하는 중이다.”2 이 점에서 교육은 〈지도〉의 개별자이다. “‘지도’가 ‘교육’과 전혀 다르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24

 

이처럼 〈유기적 지식인〉들은 〈전통적 지식인〉에서 충원되거나, 아예 체계적으로 교육되는데, 이 부위에서 신생적인 부위는 점차 지배계급과 단지 당파적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동질화되어 나간다. 왜냐하면 이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수준의 ‘효율적인 교육 체계’를 요구하는데, 이를 충족할 수 있는 공간은 직업적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공식적인 교육의 장에서 역시 “기숙사, 휴게실, 전문도서관, 세미나실 등을 구비한 학원이어야 하기 때문”25이다. “초창기 이런 유형의 학교는 경쟁을 통하여 선발되거나 유사한 계열의 학교가 추천한 청소년들로 구성된 한정된 집단들만을 위한 곳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2

 

오늘날에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시설적인 요인에서 일정 정도의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교육 과정에서 주입하는 지식의 내용적 수준에서의 격차가 또다른 ‘공간적인’ 격차를 만들어 내고, 이 경제적 능력으로 매개된 격차는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도〉을 전개하는 데 요구되는 여러 전제조건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예컨대 “직업학교의 증가는 전통적인 사회적 차별을 영속시키는 경향을”27 갖는데, 왜냐하면 직업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비록 미숙련 상태의 작업자가 숙련 노동자로 될 기회를 제공할지라도, “모든 ‘시민’이 ‘통치’에 참여”2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지적 조건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파시스트 정권의 교육부 지도자인 젠틸레가 주도하는, 인문교육과 직업교육을 엄격한 분리를 전제한 속에서 직업학교를 증가시키는 정책은 본질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이다.

 

1870년대에 들어 자본주의가 사멸 단계에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부르주아의 〈패권〉이 여전히 지배적인 정권에서 노동계급이 〈유기적 지식인〉을 형성해 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동계급이 〈전통적 지식인〉을 유인할 조건은 여전히 크게 제약되어 있으며, 자체적인 양성을 위한 전문적이며 기술적인 수준이 갖춰진 기관의 설립과 운영에는 막대한 자금과 ‘여유’가 요구된다. 그람시는 이를 정치 일선에서 종합적 문건의 편집 토론과 그 지적 결산을 적극적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점을 공격해 들어가는 것으로써 자체 양성의 순환을 형성해 나가야 함을 역설한다. 양성된, 그리고 재편된,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 군중에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적인 개입을 해 들어갈 것이고, 이는 인식론적으로 〈외부로부터 계급의식의 주입〉의 형태를 띨 것이다. 현실적인 〈지도〉는 이 기초 위에서 광범한 노동자가 경험을 쌓아 나가며, 낮은 수준의 과업에서 높은 수준의 과업을 설정·해소해 나가면서 확고한 〈현대군주〉의 틀을 구성한다. 〈지도〉의 제약성은 각 수준에서 다른 내용으로 형성된다. 이 점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은 낮은 수준의 투쟁인 경제 투쟁과 가장 발달한 수준의 투쟁인 정치 투쟁을 매개한다.

 

§ 25. 이 이데올로기 투쟁의 시작점은 어떠한 특징을 띠는가? 예컨대 적지 않은 교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 전투에서 부르주아 체제의 외양상 가장 연약해 보이는, 그러나 실제로 상당히 견고한 지점에 공세를 퍼붓는다. “자본주의가 노동 생활에서 모든 고통의 원흉인데, 부르주아들은 이를 애써 은폐하면서 노동자를 기만”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식의 공격은 그것의 전형 중 하나이다. 문제는 실상이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매개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데에 있다. “노동 생활”에서 노동 군중이 겪는 거의 모든 고통과 사회적 난점은 직접적인, 그리고 감성적인 수준에서는 ‘체제 외적인 양태로 보이는 것들’에서 다가온다. 군중이 각자의 노동과정과 일상에서 정치적 본질과는 멀리 떨어진, 자잘한 사건들을 자신이 겪는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그것들이 여전히 그들을 일차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껍질로 되어 있다면 교조주의적 외침나름의 ‘경제적 분석’까지 포함하는은 〈지도〉에 아무런 효과를 줄 수 없다. 돌아오자면, 문제의 시작점은 노동 군중이 일차적으로 겪는 그 일련의 객관적 사태에 내재한 모순과 그것을 반영한 주관적 요인 간 상호작용의 고착적인 영역이다. 이 시작점은 개개인에게 처음에는 즉자적인 세계관으로만 정립되어 있지만, 점차 상부구조를 매개로 하여 “모두 어떤 특정한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으며 항상 군중 속의 한 사람이거나 집단적 인간”29의 그것으로 된다. 세계관이 여전히 분산적으로 자립화되어 있든, 계급투쟁의 기본 역량을 표징하는 당파적 세계관에 대자적으로 정립되어 있든, 세계관에는 (그것의 ‘지적 역량 및 수준’과 무관하게) 항상 철학의 논리적 발전 순서에서 보편적인 경향으로서 발현되는 사유 전제실제 역사를 자기의 전제로 가지는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점에서 바로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에게 고유한 ‘자생적 철학’의 영역과 특성을 규정함으로써 모두가 철학자라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30 “이런 철학은 1. 언어 자체에 담겨 있는데, 그것은 규정된 생각과 개념을 담고 있는 총체성이지 결코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문법적 단어의 총체가 아니다; 2. ‘상식(senso comune)’과 ‘양식(buon senso)’에 담겨 있다; 3. 대중 종교와, 또 ‘민속’이란 이름으로 집합적으로 묶이는 신념, 미신, 의견, 사물을 보는 방식, 행위 방식 등의 전 체계 속에 담겨 있다.”2

 

군중의 세계관은 단지 외양만 건든다면 그저 어떠한 질서도 잡히지 않은 잡다로 여겨질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해악성 및 이 이데올로기의 균열이 언제나 세계관에 침투하여 특수하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구체적 동일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개인의 세계관이 비판적·통일적이지 못하고 산만하게 흐트러져 있는 경우에도 그는 동시에 다수의 군중 집단에 속해 있다.”29 그는 균열의 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유물론의 물결’이라며 탄식을 자아내는 현대 위기의 바로 그 측면이 ‘권위의 위기’라는 것과 관계한다. 지배계급이 합의를 상실하는 것, 더이상 ‘지도적’이지 못하고 단지 ‘지배적’·강제적인 힘만을 쓴다는 것은, 거대한 군중이 자신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멀어져 이전에 믿었던 것들 이제는 더이상 믿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 위기는 바로,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로운 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이다. 이 공백기에 매우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나는 것이다. … 전후에 나타난 일반군중과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균열은 단지 강제를 통하여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대두되는 것을 막는다고 해서 ‘치유’될 수 있을 정도의 것인가? … 여기에서도 사적 유물론의 전례 없는 팽창을 위한 매우 유리한 조건이 창출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지 모른다. 처음부터 사적 유물론으로 하여금 군중 속에 널리 퍼지는 이론이라는 성격을 갖게 해 주었던 바로 그 빈곤33이, 사적 유물론이 퍼지는 것을 도울 것이다. 낡은 이데올로기의 죽음은 모든 이론과 모든 일반적 정식에 대한 회의주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또한 그것은 순수한 경제적 사실수입〔收入〕들로의 치우침, 그리고 사실상 전혀 현실적이지 않으며(모든 경우에서 그렇다), 그 표현에서도 단번에 냉소적임을 알 수 있는 정치학으로의 치우침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34

지배계급이 〈지도〉 없는 〈지배〉를 행사함은 이 집단이 군중 각각의 세계관이 자기 만족적으로 작동하는 데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협소한 지분만을 차지한다는 것, 또는 그것의 전적인 부재를 뜻한다. 이 경우 권위는 추락하는데, 새로운 것이 이를 메우지 않으면 여러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빈자리에는 온갖 종류의 회의주의, 속류 경제학 및 정치학이 자리 잡게 되는데 이것들은 극단적인 자기 모순적 양태를 띠며, 물질적 대상에 관한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 이 지적 공백은 과학적 세계관이자 실천철학으로서 역사적 유물론은 이때 허위의식의 본질적인 부위를 상대해 나가면서 그 진리성을 내보일 기회를 보다 풍부하게 제공한다.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것과 함께) “거기[각각의 세계관]에 체계적인 통일성을 부여하여 세계의 가장 진보적인 사상이 도달한 수준으로까지 고양”35한다. 진보적 계급은 “지적·도덕적 질서”를 확립해 나가면서 군중이 “체계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하고, 또 실제 현실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체계적인 방식으로 대할 수 있게”36 만든다. 그것은 “‘순진한’ 군중의 진정한 열정을 드러내 주고, 또 더 높은 문화 수준과 더 고차적인 세계관을 얻고자 하는 단호한 결심을 이끌어 내[는]”37 것이다.

 

§ 26. 그런데 낡은 세계관을 진보적 세계관으로 교체하여 군중이 진보적인 철학 원리를 쥐었을 때, 이들이 이 원리를 각자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그람시는 주입된 “원리”와 각자가 시시각각 처하게 될 “현실적인 문제”를 철저히 구분하고 원리가 이 문제를 해명해 나가는 현실적인 철학으로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것이 실천철학이며, 이 철학은 “현실적인 문제”에 원리를 매개하는 것으로써 지식인과 군중이 연결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리고 “실천철학이 지식인과 군중이 연결될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과학적 활동을 제한하여 사회를 대중적인 저차원의 단계에 묶어 두기 위해서가 아니”38며, “오히려 소수 지식인 집단뿐 아니라 군중의 지적 진보까지도 정치적으로 가능하게 해 주는 지적·도덕적 동맹을 결연코 형성하기 위해서이다.”2 가장 초보적인 수준에서 원리를 매개하는 것부터 “지적·도덕적 동맹”의 확립까지 〈동의〉의 가능성은 기층에서 꾸준히 증대한다. 이로써 새 사회를 향하는, 즉 진보적인 〈지도〉의 텃밭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전문적 또는 ‘기술적’ 철학자와 그 외 많은 사람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40를 지닐 뿐이다. 그러므로 그람시는 “모든 사람이 ‘철학자’라는 원칙이 먼저 확립되어야 함”2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 27. 〈정치적 패권〉은 오로지 이러한 “윤리적 영역”에서의 ‘투쟁’의 성과가 양적으로 쌓여 그것이 질적 비약에 도달하게 될 한도를 넘었을 때라야 발생한다: “패권 개념의 정치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지적 통일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며 또 비록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상식을 넘어서 이미 비판적 안목에까지 이른 현실 파악에서 비롯된 윤리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42 이것이 〈문화적 패권〉의 본질이다.

 

윤리적 영역에서의 지적 투쟁의 출발 단계에서, 확립된 원리들이 현실적인 문제와 호환되기 위해서는 원리들이 이 문제들을 해명하는 데서 표층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을 점하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한 사람이 어떠한 사회모순으로 인한 문제를 겪게 되었을 때, 이 사람의 사고에 있어 그것이 왜 일어났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하여 작용했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것이 작용하는 특수한 힘으로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은 객관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나 자신에게 작용해 들어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며, 심지어 경험을 “자기 자신의 의지”의 소산이라고 단정해 버릴 것이다. 결국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객관적 힘, 사회적 작용력으로 간주함은 근본적으로 변증법적 결정론과 스콜라적 ‘의지’의 철학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적 투쟁으로써만 확산하는 혁신이다. 동일하게, “역사적으로 볼 때, 실제로 ‘평등’, 곧 ‘인간 본질’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도달한 ‘정신성’ 정도는, 국가와 세계 정치 체제와 얽혀 있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모임, ‘명시적이거나 함축적인’ 모임의 체계에서 확인될 수 있다.”43 그러나 이조차 “평등이나 불평등은 인간개인이든, 집단이든이 그것을 의식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2 이처럼 세계관은 대상적 활동의 인식 발전의 경로를 규정한다.

 

“이렇게 해서[이러한 사실로써] 우리는 ‘철학과 정치’, 사유와 행동의 동일성 또는 균형에 이르게”2 되고, “실천철학에 이르게 된다.”2 혁명적 당파는 독일 고전 철학의 사유에 그 핵을 두면서, 유아론(唯我論)에 반대하는 투쟁47, 경험주의와의 투쟁48, 실용주의와의 투쟁49, 회의주의와의 투쟁50, 필연성51 목적론52 문제들, ‘인간 본질’과 생물학의 연관에서 사회-역사적 실재의 지위53 및 그밖에 “윤리학”의 문제를 둘러싼 원리적인 질문54 등 “양식”을 굳히는 데 핵심적인 ‘원리’에 접근해 들어가는 철학적 투쟁 조직해 나가야 한다. 엥겔스는 “독일 노동운동은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55임을 공공연히 내세운 바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강령을 독일 고전 철학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56 실천철학은 “독일 고전 철학에 포함된 사상을 역사주의적으로 발전시켜, 그것을 군중으로 확산한 세계관과 ‘양식’의 형태로서 수용하고 적극적 행위 규범으로 개조할 수 있는 것이다.”57 그것은 “군중의 지각 방식을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군중 없이는 생각될 수조차 없는 현실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2

 

혁명적 당파는 〈지도〉의 여정에서 “군중의 세계관이라든지, 가장 엄밀한 의미의 지배 집단(또는 지식인 집단)의 세계관도 탐구해야 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이 다양한 문화 복합체와 개별철학자들의 철학이 어떤 연관을 맺는지도 탐구해야 한다.”59 왜냐하면 “어떤 한 시대의 철학이란 이러저러한 철학자의 철학만도 아니요, 이러저러한 지식인 집단이나 일반군중의 철학만도 아니”2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모든 요소가 결합하는 과정이 한 시대의 철학이며, 이것이 정점에 이르면 전반적 추세를 형성하게 된다.”2 이럼으로써 “한 시대의 철학은 집단적 행위 규범이 되고 구체적으로 완성된(통합된) ‘역사’가 된다.”2 이 ‘역사’는 〈유기적 지식인〉과 군중이 이데올로기적 매개로써 “집체적인 것”으로 통합되어 나가는 운동이다. 그람시는 이를 〈역사적 블록(blocco storico)〉이라고 한다. “모든 철학은 그 사회의 반영이란 말이 사실이라면, 철학은 다시 사회에 영향을 끼칠 것이고, 따라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63 “이렇게 사회에 반항을 일으키는 정도가 철학의 역사적 중요성을 가늠하는 척도이며, 또 철학은 개인적 ‘작품’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보여주는 척도이다.”40 “구조[토대]와 상부구조는 ‘역사적 블록’을 형성”65하며 “상부구조의 복합적이고 모순적이고 부정합적인 총체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총체를 반영해 준다.”2 그리고 “이것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오직 전체주의적[전포괄적]67 이데올로기 체계만이 구조의 모순을 이성적으로 반영해 주고 또 실천의 혁명화를 위한 객관적 조건이 존재함을 표현해 준다.”68 그러므로 전포괄성을 갖추지 못한 이데올로기, 즉 낡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균열을 막을 수 없다.

 

§ 28. 진보적인 〈역사적 블록〉을 팽창하고 강화하는 핵심 계기로서 의식적 세포를 그람시는 〈카타르시스〉라고 한다. 〈카타르시스〉는 “순전히 경제적인(또는 이기적·감정적인) 계기에서 도덕적·정치적인 계기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69 즉, 그것은 “구조를 인간의 마음속에서 상부구조로 전화시키는 탁월한 조작을 뜻”2하고 “‘객체적인 것에서 주체적인 것으로의’ 이행과 ‘필연성에서 자유로운’ 이행을 뜻한다.”2 이때 “구조는 인간을 짓이겨서 소외시키고 수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외적인 힘임을 멈[추며] … 구조는 자유의 수단으로 변형되며, 새로운 도덕적·정치적 형식과 새로운 창발성의 원천을 창조하는 수단이 된다.”72 그람시는 이제 실천철학의 출발점을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그러므로 ‘카타르시스적’ 계기를 수립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모든 실천철학의 출발점이 되며 또 이 카타르시스적 과정은 변증법이 전화되어 나타난 종합들의 연쇄와 일치한다.”73 우리는 이로써 착취 체제에서 의식적인 것이 개입되어 피지배계급의 강력한 정치-정신적 집단체가 발전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단위로 발현하는 힘임을 알 수 있다. 즉 역능(力能)은 고독한 개인, 소승(小乘)적인 ‘귀족’이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 집단에 결속함으로써만 발휘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대상적 진리가 항상 개체적이고 원자적이 아니라 총체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에 대응된다. 그러므로 자유는 본질적으로 집단적이다.

 

이제 〈지도〉는 〈역사적 블록〉을 지어 정치 투쟁의 진지에서 더 많은 군중을 〈국민적 생활〉로 묶어 세우는 〈사회적 블록(blocco sociale)〉으로 이행할 계기를 창출해 낸다. 〈동의〉와 〈강제〉도 이제 이 발전 수준에서 새로운 운동 법칙을 가진다.

 

2025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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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 F. Gramsci,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서울: 거름, 1999, 22.텍스트로 돌아가기
  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 위의 책, 16.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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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실제적인 운영에 필요한 기술적 전문가들을 통합해 내고자 하는 특정 유형의 심의 기구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평론 잡지의 편집위원회가 편집위원회인 동시에 문화집단으로서 기능하려 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설명하는 데에서 언급된 바 있다. 그 집단은 하나의 기구로서 비판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개별 편집자의 과제를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실제로 각 개인이 자신의 영역에서 전문가로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해당 집단의 전문성을 제고시키는 식으로 진행되는 집단토의 비판─이는 제안, 충고, 방법에 관한 조언, 그리고 상호 교육을 위해 마련된 비판 등으로 구성된다─을 통해 개별 편집자들의 평균 역량은 최고도로 높아지게 된다. 그 결과 평론을 위한 보다 정선되고 유기적인 협력이 가능해질 뿐만이 아니라 정규적이고 논리정연한 ‘저술’ 활동─간헐적인 출판이니 소논문만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라는 차원에서─을 할 수 있도록 훈련된 동질적인 지식인 집단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 (위의 책, 41.)텍스트로 돌아가기
  6. 위의 책, 41 ff.텍스트로 돌아가기
  7. 위의 책, 176-7.텍스트로 돌아가기
  8. 위의 책, 77-8.텍스트로 돌아가기
  9. 위의 책, 78.텍스트로 돌아가기
  10.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1.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2006, 363-4.텍스트로 돌아가기
  12. K. Marx,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I』, 김호균 역, 서울: 백의, 2000, 87.텍스트로 돌아가기
  13. 위의 책, 124.텍스트로 돌아가기
  14. K. Marx, 『자본론』, 제I권 (1), 서울: 백의, 1989, 226.텍스트로 돌아가기
  15. 〈지도〉는 이를 위한 지식을 재생산하는 문화 및 당파가 직접 맞붙는 장이자 온갖 “국민적 요인”이 생성되고 발전하는 정치 투쟁의 영역에서도 발현한다. 이때 〈지도〉는 상부구조의 〈패권〉 전선에서 저마다의 특수한 형태를 띨 것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6.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2006, 368.텍스트로 돌아가기
  17.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8. 「왜 부르주아들은 더이상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가?」, 『옥중수고 이전』, 2001, 262.텍스트로 돌아가기
  19.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139.텍스트로 돌아가기
  20. 위의 책, 223.텍스트로 돌아가기
  21. 위의 책, 40.텍스트로 돌아가기
  2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23.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24. 위의 책, 48.텍스트로 돌아가기
  25. 위의 책, 43.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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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위의 책, 55.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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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위의 책, 162.텍스트로 돌아가기
  30. 위의 책, 161.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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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위의 책, 162.텍스트로 돌아가기
  33. 이 ‘빈곤’이란, 대중적 수준에서도 체감될 수 있는 사회모순을 총체적으로 해명한다는 바로 이 이유에서 진정으로 대중적일 수 있는 강점으로서의 ‘빈곤’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4.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2006, 327-8.텍스트로 돌아가기
  35.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162.텍스트로 돌아가기
  36. 위의 책, 164.텍스트로 돌아가기
  37. 위의 책, 169.텍스트로 돌아가기
  38. 위의 책, 173.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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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위의 책, 191.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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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위의 책, 174.텍스트로 돌아가기
  43. 위의 책, 203.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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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위의 책, 189-90.텍스트로 돌아가기
  48. 위의 책, 335.텍스트로 돌아가기
  49. 위의 책, 224-5.텍스트로 돌아가기
  50. 위의 책, 227.텍스트로 돌아가기
  51. 위의 책, 273-8.텍스트로 돌아가기
  52. 위의 책, 345.텍스트로 돌아가기
  53. 위의 책, 210.텍스트로 돌아가기
  54. 위의 책, 273.텍스트로 돌아가기
  55. F. Engel,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서울: 돌베개, 1987, 86.텍스트로 돌아가기
  56.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1999, 203.텍스트로 돌아가기
  57. 위의 책, 190.텍스트로 돌아가기
  58.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59. 위의 책, 188.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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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위의 책, 190-1.텍스트로 돌아가기
  64. 위의 책, 191.텍스트로 돌아가기
  65. 위의 책, 215.텍스트로 돌아가기
  66.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67. 여기서 “전체주의적”이라는 말은 ‘통합’ 및 ‘전포괄성’이라는 뜻으로 쓰인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8. 위의 책, 215-6.텍스트로 돌아가기
  69. 위의 책, 216.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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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위의 책, 217.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