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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9/09
    민중 철학의 비평 원칙: 도입 보유(補遺)〔 上 〕
    디아마트
  2. 2025/05/10
    민중 철학의 비평 원칙: 도입
    디아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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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철학의 비평 원칙: 도입 보유(補遺)〔 上 〕

민중 철학의 비평 원칙: 도입 보유(補遺 총명한 유물론 2 가을


한동백 | 집행위원


L9 R9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BW BX BY BZ CA CB CC CD CE CF CG CH CI CJ CK CL CM CN CO CP CQ CR CS CT CU CV CW CX CY CZ DA DB DC DD DE DF DG DH DI DJ DK DL

입 보유(補遺)

 

§ 1 철학적 비평의 사회경제사적 본성 I || 백가쟁명식으로 출현하는 정신의 외화의 그 특유 현상형태를 띠는 각이한 철학적 비평에서 최종 심급은 무엇인가?

 

철학은 학문적 체계 속에서의 철학적 사유이고, 이 사유 그 자체가 마음·정신의 고유한 양태이다. 본디 마음·정신은 동물 또한 녔다. 즉, “진화의 비교적 늦은 어느 단계에서 활동은 내면화[즉, 관념화]될 수 있다.”1 하지만 내적인 것 일반과 철학적 사유는 다르다노동으로써 만색(萬色)의 생동하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만 이 내적인 것마음·정신은 자신을 철학적 사유로 정제할 참된 추동원(推動原)을 함유한다. 이 추동원은 영장류의 그 엄밀한 인간화가 진전된 이래 원시적인 노동부터 역사적인 최고 발전 형태의 노동에 도달하기까지 변화를 겪었는데, 그것은 노동으로써 갱신된 욕구를 다시 노동 자체의 변혁으로 어떻게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와 직접 관련된다. 즉, 부단히 갱신하는 욕구는 그 충족의 도정에서 전문화된 분업, 그리고 생산적 과업 자체의 분화농업, 목축업, 후진적인 어업만이 아니라 광업, 임업, 야금업 등, 무역의 물질적 발달을 가져왔다; 이는 인간 사이의 번잡해진 사회경제적 제 관계에의 의지적이고 도덕적인 척도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 척도는 그 자신에 당위를 주입할 특수한 형태의 정신적 고도화의 향도였다. 예컨대 크세노폰의 『가내 경제(Oikonomikos)』는 경영에 관한 소크라테스와 크리토불로스(Kritoboulus)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현명한 노예주는 훌륭한 노예를 기르며 재산을 효과적으로 불리는 반면, 그 반대는 노예를 혹사하여 “재산을 거덜[냄]”을 경고한다.2 이는 철학적·도덕학적 대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 노예제하 노예주가 가내 경제를 높은 수준에서 관리하고자 하는 갱신된 욕구 및 그를 둘러싼 제 관계 속에서 정신의 피규정적 개진의 양상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이 양상은 추상적인 순수 사유로 증류되었고, 직접 생산자들과 정신적 지배자들은 그것을 물질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절대적으로 자립하는 것으로서 찬미하였다. 이 절대적 자립성은 순전한 가상3이나, “사변적 형이상학은 종교적 세계관의 세속화로서 형성되었으며, 과학적 탐구의 길을 열어 주었다.”4 엥겔스는 사회경제적 제 관계의 발전과 정신의 상호 연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대마다 노동 자체는 달라졌으며, 그보다 완전하게 되고 보다 다양하게 되었다. 농업이 사냥과 가축 기르기에 추가되었으며, 다음에 실잣기, 옷짜기, 금속 작업, 도기 제조, 어로 등이 추가되었다. 교역과 산업에 따라, 마침내 예술과 과학이 나타났다. 부족들로부터 민족들과 국가들이 발전되었다. 법률과 정치가 발생했고, 그와 더불어 인간의 정신에서 인간적인 것의 환상적인 반영이 종교가 발생했다. … 문명의 신속한 발전의 모든 장점은 정신, 두뇌의 발달과 활동으로 돌려졌다. 인간들은 그들의 활동을 그들의 필요어쨌든 정신에 반영되며, 의식하게 되는 필요대신에 그들의 사유로부터 설명하는 데 익숙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특히 고대 세계의 몰락 이래 인간 정신을 지배했던 관념론적 세계관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발생했다.”5

구 소련의 심리학자 A. N. 레온티예프(Leont’ev)는 “동물이 ‘도구’를 사용하는 활동은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결코 사회적 과정의 성격을 갖지 않고, 집단적으로 수행되지 않으며, 그 활동 자체가 그것을 수행하는 개체 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지배하지도 않”6는다고 하였다. 동물적 반사 작용의 이러한 물성 탓에 동물 욕구는 인간 활동이 개입되지 않는 한 갱신되지 않으며, 동물 군집을 지배하는 제 관계는 자연과 직접적 일치 속에서 고요하게, 자기 궤도의 조금의 이탈도 없이 회전할 뿐이다. 욕구가 극히 한정되어 끈의 분화를 추동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새로운 그 끈이 몰아치는 신비와 파열이 없다면, 관념을 자기의 자립화로 밀쳐낼 포텐츠는 존재할 수 없다. “정신에 대한 이러한 접근의 관점에서 볼 때, 정신 진화의 진정한 역사는 이전에는 단순했던 삶의 통일성 속에서 ‘분열(split)’이 일어나는 역사로 나타난다.”7 그러므로 동물은 쟁론하고 비평하지 않으나, 노동의 신체적 기체(基體)인 인간은 쟁론하고 비평한다. 즉, “이 분열의 시작은 동물의 원시 정신을 낳았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식적 삶에서 그것이 온전히 표현되었다.”8 헤겔에 의하면 동물의 욕구는 자연에 외적으로 마주하는 자립적인 대자적 의식으로서 있지 않고, 단지 자연과 직접적 일치를 이루며 비자립적인 즉자성을 띨 뿐이다.9

 

내적인 것 또한 외적인 것과 대립물의 통일이다그 부정태(否定態)는 세밀한 탐구를 요하는 뇌신경의 생화학적 작용, 단순하고 복잡한 신체 활동손짓·발짓·몸짓, 수다한 상징적 행위 등, 말과 글까지를 아우른다. 정신은 이 신체적 힘의 총체로 형태 변화될 때만 개시된 규정력이고, 이 힘만이 활동적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그것의 활동성은 오로지 물적-감성적 매개·연관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정신은 또다른 이념적 타자를 자신의 무한한 거울로 삼아, 그 속에서 자기로 복귀함으로써 자신의 대자적인 ‘원상(原象)’자기의식을 빚는데, 타자의 이념 또한 오로지 역사적이고 감성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확증한다. 선사시대에 이는 무리의 상과 완전히 일치했다. 무리의 상은 그것의 자연사(自然史)적인 원본으로서는 순전히 협동 속에 놓고 구해지며, 아무런 분란을 유발하지도 않는 채로 자족했다. 하지만 이 빚음은 이제 현실에서 생사를 건 지배와 예속을 거쳐 스스로를 관철한다: 가장 잠재적으로는 원시 공산제하에서의 씨족 전쟁, 그리고 오늘날까지 동일한 형태로서 내려오는 것으로서는 적대적 계급으로 분열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의 계급투쟁이 그것이다. 두 질점에서, 인류와 자연의 투쟁은 보편사적 지위를 가진다.

 

인류는 자연과의 투쟁, 그리고 서로 적대적인 현존 계급 간 투쟁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리를 인식해 나가고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감성적 폭력으로서의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추진기관(推進機關)을 창조해 낸다. 헤겔은 “자기의식이 다른 또 하나의 자기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펴나가는 운동”10, 즉 “일자의 행위(das Tun des Einen)”11가 “모름지기 자기의 행위이면서 또한 못지않게 타자의 행위라고 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11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 이념은 타자에 규정 작용을 가하며, 또 타자로부터의 자기 인식자기에 함유된 진리에 관한 더욱 확장된 이해를 꾀하고, 타자가 자기를 빚는다는 점에서는 이념과 그 타자의 이념의 동일성은 쌍방을 향한 힘이기 때문이다; 즉, “이 타자도 역시 자립적이며 동시에 그 자체의 결집력을 지닌 것이어서 그 속에서는 바로 그 타자 자체의 힘을 입지 않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13 헤겔에게 벌써, 인식주체로서 개인에의 데카르트적 세계상의 한정성은 극복된 것이었다.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정점에 달하는 자기의식의 역사는 생사를 건 투쟁 속에서만 진리와 일치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투쟁은 개개인의 고립된 지성에서가 아니라 인류의 집체적인 상호 투쟁과 인정의 역사, (그의 관념론적 표현으로) 세계영혼(weltseele)의 차원에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넘나드는 생동한 것으로 묘사된다. 자연은 본디 자기 운동하는 총체성의 사유의 부정태이고, 그것이 이 사유의 부정태인 만큼, 자연은 이 사유를 담지하고 있는 “표면(oberfläche)”으로서 실존한다. 표면으로서 자연이 머금은 이 보편성이 세계영혼이며, 헤겔 학설에서는 이 세계성이 제 특수자의 개별적인 지향을 조정한다.

 

헤겔에게 그 여정의 출발은 자연의 첫 번째 포텐츠(Die erste Potenz der Natur)로 묘사된다. 피히테의 『자연법의 토대(Grundlage des Naturrechts, 1796)』에 대한 체계적인 비평인 『인륜성의 체계(System der Sittlichkeit14, 1803)』에서 그는 그것을 “직관으로서의 자연적 인륜성. 완전한 무차별성 또는 개념이 직관에 포섭되어 있는 것; 즉 본래의 자연”15이라 썼다. 이 단계에서 자연의 보편성은 “개별 안에 전적으로 함몰”되어 있는데, 이 함몰은 감정(gefühl)이고, 감정은 그에 의하면 “실천적 포텐츠(praktische Potenz)”이다.16 “분리의 감정은 욕구이며; 분리의 지양태인 감정은 향유이다(Das Gefühl der Trennung ist das Bedürfnis; das Gefühl als Aufgehobensein derselben der Genuß).”17 국가의 탄생, 인륜적 감정의 고양에서 추상적이고 시초적인 계기적 지위에 놓일 이 인간 욕구향유는 욕구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세계사적으로 인류가 자연에 가하는 주체적 포텐츠의 증대로써만 참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증대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지양하는 데에 달려 있는데, 이를 위한 기초노동이다. “노동 속에서 욕구는 [욕구의 충족과 함께] 소멸되어야 할 대상을 연관에서 분리시키고, 그것을 욕구하는 것과 관계지어진 것으로 설정”18한다. “욕구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한, 양자[욕구와 그 대상]는 이 관계 속에 존속하며, 휴지(休止) 상태에 있으면서, 단지 관념적으로만 지양”8된다. 즉 노동은, 욕구가 그것 충족의 완료에 이르러 소멸하고, 머지않아 결핍 속에서 동일한 욕구가 재생하여 다시 이를 일회적으로 충족하고 또 그러한 부정을 끊임없이 요구·지향하는 이 동물적 욕구 특성의 지양태이다. 노동으로써 욕구는 자신이 미래에 다시 한번 그 충족을 요구할 사태를 관념적으로 대비(=지양)하여 욕구되는 것을 축적하는 능동성으로 이행한다. 이제 “욕구는 그 소멸 속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며, 대상은 소멸됨 속에서도 존속한다.”20 “노동은 관계, 보편성, 양자의 일자존재(Einssein)로서의 이러한 실천적 의식”이며, “그것은 또한 그 안에서 양자가 대립적으로 관계를 맺고, 분리된 채로 존속하는 그러한 중심 존재(Mitte sein)여야 하는데, 이로써 노동 그 자체는 영속적인 실존을 지니며, 또 하나의 사물[로 된다].”8 노동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잇는 실천적 교량이다. 이 도정 없이는 인간 욕구는 단지 실재성 없는 관념성, 즉 더 높은 총체성 속에서 자기의 자립성을 잃고 계기로만 작용하는 상태로서만 서 있을 따름이다. 이는 비록 상호 적대적인 세계관 속에서지만, 레온티예프가 욕구와 관련하여, 동물적 행위 및 반사 작용과 인간 활동성의 본질적 차이를 해명한 것에 밀접해 있다.

 

이 지양의 도정에서 헤겔은 말(rede)이 가산(familiengut), 자식(kind), 도구(werkzeug) 순으로 정립됨을 체계적으로 해명한 바 있다. 이 연계 하에서 헤겔에게 감정은 데카르트적 전통에서피히테까지 계승된 바로 그것취급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순수 개인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특수자로서, 특수자로서의 자연 및 개인과의 대립적 교호 작용 속에서 규정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에게 “주관성과 객관성의 분리를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감정은 그 자체가 스스로를 총체성으로 드러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포텐츠들의 총체성이 되어야 한다.”22

 

말은 그 포텐츠의 전개에서 특수자들인 타자 사이를 연결한다. 말은 개별 혼을 에테르와 같은 객관적인 것으로서 물체성으로 표지해 주는데, 이는 “노동하는 주체의 권력 안에 있으며, 노동하는 주체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고, 마련되고 가공”23되는, 주관적인 것으로서 도구가 할 수 없는 것이다. 말이라는 표지는 “개념에 따르면 실제적이지만 또한 그 물체의 본질은 직접적인 소멸이고 그 현상은 나타남과 소멸함의 직접적인 얽힘인 그러한 관념성을 지닌”17 것이다. 그러므로 이 “중심은 지성적이고 주관적이며 지성적 개인들 안에 존재”하지만, “그 물체성에 있어서는 객관적이다.” 즉, 도구의 물질성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개인의 주관성에 압도되어 특수한 개인의 지성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그러한 객체적 전달의 중심으로서 설 수 없다. 하지만, 말이란 개인의 지성을 표현하면서도 그 지성으로부터 분리된 객관성을 지닌 물체성으로서 현존한다. 말은 비로소 특수자 사이의 집체적이고 공동체적인 연계를 불러온다.

 

헤겔은 말의 총체성이 다음의 세 가지 “포텐츠의 형식들로 존재한다”25고 썼다: “. 자연 또는 내적 동일성(der Natur, oder der innern Identität)17 … ב. 개념 아래로 포섭된 말의 직관(Die Anschauung der Rede unter den Begriff subsumiert)27 … ג. 육체적 표시의 객관성과 표정의 주관성을 통합한 것인 발성어(Die tönende Rede vereinigt die Objektivität des körperlichen Zeichens und die Subjektivität der Gebärde)28”의 형식이다.

 

말의 첫째 형식은 “표정, 안색과 그 총체 그리고 눈의 자극”25인데, 이것들은 “자신이 지닌 객관적인 것의 관념성도 없고 … 자신의 고유한 물체성도 없다.”17 즉, 이 형식은 개별 혼을 매개로 한 이념의 자기 현현으로서의 사유의 담지자로서 물체성이 될 수 없고, 다만 “객관성의 형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17인 그러한 물체이다. 왜냐하면 이는 개인의 지성 또는 의지로 대표되는 주관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의지의 소산으로서 따스한 웃음은 그것을 마주하는 타자에게 음흉함의 인상을 줄 수 있듯, 어떠한 인상이나 표정은 각각의 주체와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표시라서 주관성이 너무도 깊다. 이는 주체와 분리된 척도로 기능할 수 없다; 말의 둘째 형식은 비로소 “관념적 본성[사유]이 개념 안에 정립”되어 있는 것으로서 출현한 것으로,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물체를 가진다.”17 그런데 이 “질료 자체”는 “그 실체적 내면성과 대자존재에서는 전적으로 무화되어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관념적”인데, 헤겔은 그 대표적인 것을 기호(Zeichen)라고 한다.33 헤겔은 그것을 또한 육체적 징표(körperliches Zeichen)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신체 기관으로 직간접적으로 형상화되는, 그리고 그 기관의 힘으로 완성되는 객관적이며 고정적인 지시체(指示體)를 뜻한다. 기실, 기호는 자립적인 것으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띠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고유한 의미를 독자적으로 지니는 것으로서의 자신이 무화되어 있다는 점으로써, 즉 자신의 내적 무의미성으로써 그러한 결합[의미]을 표현”34하는 게 기호이다. 기호에서 각 형태소는 자립적인 의미를, 또는 비자립적인 의미를 띤다고 취급되지만, 실은 각각이 최소 단위의 단일 음절의 기호로 분해되었을 때, 그 분해의 산물은 오로지 자신의 무의미성을 전제한 속에서 타자와 부정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말의 포텐츠에서 그 마지막 형식은 발성어이다. “발성어는 육체적 징표의 객관성과 표정의 주관성을 통합한다.”35 하나의 의미있는 단위로서 형태소는 발성어와 통일되어 있다는 점에서, 발성어의 현존은 규정적인 언어 일반의 개별적인 현존을 가리킨다. 발성어는 신체적 호흡, 발성, 공명을 통해 그 피치와 음색, 기도를 조절하여, 기호에서 음절 표시의 한정성을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발성어는 사변적인 것의 개별성에 상응하는 더 수다하고 개별적인 것으로서의 실재성으로 스스로를 고양한다. 이는 관념성으로서 개별 의지의 육체적 생동성인데, 그것은 시공간 속에서 의지의 활동성을 가장 또렷하게, 가장 판연히 현출한다. 따라서 “발성어는 모든 무규정성을 분절시키고 확립시키는 절대적 개별성의 육체성이고, 바로 이 육체성에 의해 직접 절대적이라고 할 승인이다.”17 내가 보건대, 발성어의 정립은 노동의 성립과 함께,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아주 강력한 요소의 하나이다. 헤겔에 의하면 “자연은 지성 속에서 절대적 고독에 잠기게 되는데, 이런 고독이 동물에게는 결여”해 있으며, “동물은 고독을 자기 안으로 환수하지 않고, 자신의 음성을 이러한 고독 속에 존재하는 총체성으로부터 내지 않으며, 그 음성은 공허하고 총체적이지 못하고 형식적인 것이다.”37 동물의 ‘말’(=동물적 음성)은 기껏해야 자신의 욕구, 자신의 ‘애절함’을 순전히 자연적 감각 지각의 형식에 따라 표현될 뿐이다. 헤겔은 그것에서 지성적 주관성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으로 죽음에 처할 위험에 직면했을 때 동물의 울부짖음을 예로 드는데, 이는 동물의 ‘말’ 중 가장 발달한 것이다.38

 

도구에서 완성된 말로 이행하는 이 변증법은 헤겔의 체계 기획과 『엔치클로페디』 「정신철학」에서 점진적으로 언어(sprache) 일반으로 편제되어 나간다. 예나 시기 자신의 체계 기획에서 그는 언어를 동물 유기체에서 관념성이 자기 실재화를 펼쳐 나감에 있어 그 중심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의식의 현존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고정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소멸한다. … 음성의 순수한 발성 요소인 모음은 발성기관이 그 자체의 분절을 그 차이로 드러내는 식으로 스스로를 구별한다. 이 순수한 발성적 요소는 약음(約音), 즉 단순 발성의 실제적 억제로써 중단되며, 그로 인해 각 발성은 무엇보다도 그 자체 의미를 지닌다. 노래에서 단순 발성 차이는 그 자체 규정된 차이가 아니라, 오직 앞과 뒤의 발성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소리로 구조화된 언어는 모든 소리가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즉 그 안에 이름이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의 관념성이 존재하며, 동일한 것의 직접적인 비존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식의 목소리이다.”39

세 번째 체계 기획에서 언어는 “존재로의 복귀”로서 “이름을 부여하는 힘(Nahmengebende Kraft)”으로 취급된다. “언어는 내적인 것을 존재자로 정립하는 힘”으로, 예를 들어 사물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 사물을 자신의 정신에 내속시킨다.40 언어는 외적 사물에 정신의 내면성을 외적인 것으로서 부착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정신이 수행하는 최초의 창조력41​이다. 헤겔이 “개별적인 인간 존재로서 개인 안에서 절대적 사고를 통해 성취되는 자기 인식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어는 사고가 자기인식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는 요소들 속에서 외적 표현의 특권적인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42 “사고는 바로 언어 속에서, 언어를 통해서 자기 소외의 모든 순환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다시 한번 본래의 상타락하기 전의 상”43​을 재수복한다. 이 점에서 헤겔에게 언어는 유한한 정신을 뛰어넘는 무한한 정신으로서 철학적 정신에 있어 활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그의 학설에서 감정, 의지 그리고 욕망을 뿌리로 지닌다.

 

『정신현상학』에서 언어는 벌써 감각적 확신에서 “보편적인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 통찰된다. 예컨대 “[우리는] 감각적인 것을 표명할 때조차 이를 보편자라는 뜻으로 언표한다.”44 즉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이것이며, 또한 무엇이 있다(es ist)라는 경우에도 존재 일반(das Sein überhaupt)을 말”45한다. “이때 우리는 비록 보편적인 이것, 혹은 존재 일반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우리는 보편자를 언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46 언어의 물체적 매체성은 『정신현상학』에서 자연적 의식(=감성적 의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언어는 현상학적 지의 전 도정을 매개하는 중심, 즉 “지성들 사이를 잇는 중심, 로고스이며 지성들을 이성적으로 묶는 끈(das vernünftige Band)이다.”47 “이런 점으로 볼 때 결국 언표될 수 없는 것(das Unaussprechliche)으로 불리는 것이란 오직 비진리이며 비이성적인 것”48일 따름이다. 『엔치클로페디』 「정신철학」에서 음절화된 소리(artikulierte Ton)인 낱말(Wort)은 “사상(思想)에 의해서 생명이 불어넣어진 현존재”인데, “이 현존재는 우리의 사상에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49 “우리가 우리의 사상에 대해서 대상성, 따라서 외재성이라는 형식, 즉 우리의 내면성구별되어 있는 존재라는 형식을 부여할 때만, 더구나 동시에 최고 내면성의 각인을 지닌 그러한 외재성의 형태를 부여할 때만, 우리는 우리의 사상에 관하여 알게 되고, 또한 명확한 현실적 사상을 가진다.”8 철학은 순전히 머리의 내면이 아니라 외면적인 것, 즉 말과 글로써 내면적인 것이 외화되었을 때 실재적인 규정을 가진다. 철학은 그 사고 작용과 형식에 있어 언어에서 시작되고, 언어에서 죽는, 언어의 뒤범벅된 언어의 최고 산물이다. 언어는 도구로서, 의욕하는 것을 기호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취하고자 하며, 그 취함에서 전체와 부분이 복잡하게 엮여 있는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본질적 사유가 철학이다. 따라서 철학은 언어에 스며 들어간 의욕을 잊어버릴 수 없다. 헤겔이 일생 동안 철학을, 실증과학의 제 문제에 관한 해소를 본유한 것으로서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함은 이와 관련된다.51

 

헤겔 학설은 그 체계 형성에서 약 30년의 세월을 거쳤다. 그간 그의 학설에서 인간의 욕망, 감정, 주관 정신의 형식들감각 및 오성·직관·표상·사유그리고 말·글의 규정 순서가 변화를 겪었을지라도, 인간의 욕망이 심리적 작용과 언어의 필연적 계기임은 『엔치클로페디』의 「정신철학」에서도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 체계에 편제된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의 첫 번째 계기인 욕망(begierde)은 충동(trieb)으로서 출현한다. 욕망은 “사유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자신의 충족을 추구하고자 하는 외재적 객체”의 지향으로 되어 있는 한 충동이다.52 충동이란 “자신과 동일한 것이 자신 안에 모순을 지니고,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자기 스스로와의 동일성의 감정에 의해서 충족되고, 마찬가지로 이와 반대되는 내적 모순의 감정에 의해 충족된 곳”, 즉 이 모순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모순을 지양하고자” 출현한다.8 충동으로써 충족되는 “욕망은 그 내용 측면에서 볼 때 이기적인 것처럼, 그 충족의 측면에서는 전적으로 파괴적”인데, 왜냐하면 “욕망 충족은 단지 개별적인 것 속에서만 행해지지만, 이 개별적인 것은 일시적이므로, 욕망은 충족되면서 다시 생겨”나기 때문이다.54 이 내용은 악무한적 부정에 정체된 상태에 있는 인간 욕구의 단면에 관해 헤겔이 해명하였던 그 체계 기획의 내용과 맥이 닿는다.

 

“욕망에 사로잡힌 자기의식은 타자를 아직 독립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힘이 없으므로, 욕망에 사로잡힌 자기의식의 충족에 의해 객체의 자립성은 파괴되고, 그로써 주관적인 것이라는 형식은 객체 속에서 결코 존립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객체의 자립성을 온전하게 살려놓지 못한 채 자신의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정립하지 못한 이 욕망은 자신의 당최 목표를 이루지도 못한 채, 그 덧없는 “무한 진행만을 초래할 뿐”이다.8 “충족의 지루한 교체”56로부터의 자유는 “타자 속에서 자아로서의 나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다른 객체를 직관”57함에 있다. “이러한 모순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자기로서 나타내고, 타자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자기로서 여기에(da) 존재하고자 하는 충동을 [주는데] … 이것이 인정(Anerkennung)의 과정이다.”8

 

인정하는 자기의식(anerkennende Selbstbewußtsein)은 “열망(Beiger)에 사로잡힌 자기의식과 직접성이라는 규정을 공유하고” 있다. 헤겔은 “이 규정 속에는 다음과 같은 거대한 모순이 있다”고 한다: “자아는 전적으로 보편적인 것·절대적으로 관통하는 것·어떠한 제한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 것·모든 인간에 공통적인 본질이기 때문에 … 여기서 서로 관계하는 양쪽의 자기는 하나의 동일성, 말하자면 하나의 빛을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두 개자기인데, 이 두 개의 자기는 서로에 대해 완전히 완고함냉담함을 가지고, 각각이 자신 안으로 반성한 것·타자로부터 절대적으로 구별된 것·깨뜨릴 수 없는 것으로서 존립한다.”8 이는 감정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욕구하는 대상인, 규정된 특성을 띠는 사물 일반과 그에 맞서 있는 주관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본디 욕망의 대상은 그 가치를 욕망의 주체에 의해서가 아닌, 그 스스로로서 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의 가치는 자립적인 가치이며,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욕망 충족의 실현으로부터 배제된다. 먹고자 하는 음식, 착용하고자 하는 장신구, 나의 의견에 동의해야 할 존재로서 현재는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타인은 나의 주관적인 욕망에 대한 대상적 존재이자 흡수되는 객체로서 되면서도, 그 자체 가치를 스스로 마련한 주체로서, 누구에게나 본질적인 것으로서 취급되어야 한다. 욕망으로서 자기의식에서 인정하는 자기의식으로의 이행은 『정신현상학』에서 그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실제적인 상호 투쟁과 고차원적 일치를 야기한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계기이다. 이 절에서 욕망, 그리고 인정하는 관념은 자신의 주관성과의 동일성을 취하고자 지향하는 대상은 순전히 심리적인 양식으로서의 감정으로도, 그 감정의 객관적 표출태로서 객체로도 취급되고 있다.

 

인정하는 자기의식은 보편적 자기의식을 거쳐 이성으로 고양되고, 이성은 이론적 정신(theoretische Geist)으로 이행한다. 이론적 정신에서 지성에 있어 그 동전의 양면이자 그 외적 형태인 언어가 논구된다. 철학 또는 예비적인 철학의 절대적인 수단·은 인간의 실제적인 욕망의 역사가 내려준 선물임은 우리는 헤겔 학설에서 그 맹아로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객관 정신인 욕구(bedürfnis)는 이미 그 “가능성[이] 보편적 자산인 사회적 연관 속에 놓여 있[는]” 것인데, “여기서 대상은 재산”이며, “대상의 획득은 한편으로 특수한 것으로서 다양하게 규정된 욕구의 충족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점유하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제약되고 매개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으로써 교환 가능한 수단을 항상 새로이 산출하는 것에 의해 제약되고 매개되어 있다.”60

 

헤겔 학설에서 혁명성의 하나는 주관적 욕구에서 철학이 전제할 이론적·실천적 정신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계기를 드러내고자 하였다는 데에 있다. 즉, 철학이 언어라는 도구로 구축되고, 직관·표상·사유 및 그보다 높은 개념적 경지를 요한다면, 철학-함은 또한 필연적으로 그 계기의 근거를 자기 내에 지양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욕구와 감정이다.

 

하지만 욕구와 감정은 학이 없이는 그 자체만으로는 마냥, 인간적이며 문명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은 욕구와 감정의 이 대립과 투쟁의 씨앗을 먹고 자라온 나무인 만큼, 그 계기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이론적 인식의 ‘경이로움’에 덮어져 있던 철학의 본성에는 깨질 수 없는, 인간 삶의 욕구 증대의 법칙이 있음을자신의 체계에서 욕구·욕망을 지성의 계기항으로 둠으로써 명료하게 총괄한 것은 헤겔이었다. 즉, 철학-함의 사회경제사적 본성에 관한 것은 벌써 헤겔 학설에서 표명되었다.

 

§ 2 철학적 비평의 사회경제사적 본성 II || 하지만 헤겔 학설에서 욕망은 철학 일반으로서 관념 형식의 세포의 하나이지만, 한편으로 신비적인 이념의 자기 소외로써 섭리화된 객관적 관념의 자기 현실화로서 존재한다. 주지하듯, 헤겔의 견지에서 물질적·감성적인 것은 이념의 외화일 따름이었다정신은 물질적 생산과정과 그 자립화한 물질적 포텐츠의 강제 명령에서 생성되는 피규정적 교량 및 수단이 아니라 이것들의 조물주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피조물이다. 예술철학에 관한 1826년 강의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정신과 자연을 나란히 두는 데 익숙하다. 우리는 이와 더불어 여기서 자연에 대한 정신의 관계를 지닌다. 정신이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하는 활동인 데 반해, 자연은 정신 속에서 이념적인 것으로서, 피정립태로서 현상한다. 정신과 구분되는 것으로 규정된 것은 즉자적으로는 전체 이념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정신의 참다움이 아니고, 정신의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자연의 진리는 바로 이러한 자연의 관념성, 부정성이다. 그리고 주관성조차 다른 것[정신]이 부여한 것이며, 사실 이러한 다른 것만이 주관으로서 감득될 수 있다. 정신은 그러니까 총체성, 이러한 최고의 진리이다.”61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Erfahrung des Bewußtseins)”은 최종적으로, 점진적이고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지성(intelligenz) 속에서, 물질적 생산·대사(代謝)가 아니라 순수-사변적인 범논리주의(汎論理主義)의 산물로 ‘정화’된다. 헤겔에게 그것은 “자아의 본성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동시에 자신을 “타자”로부터 자신으로 귀환하는, 즉 개별적으로 규정되는 동시에 그 규정 안에서 순수하게 자기 관계하는 보편성이 되는 것”62이다. “헤겔이 “부정적 자기 관계” 내지 “절대적 부정성”으로 묘사하는 자아의 의미는 자아가 자기 다양성에 대한 관념성 내지 순수한 보편성이자 추상적인 단순한 개별성이라는 사실에 담겨 있다.”63 이로써 획득되는 정신의 현상은 절대자64로서 이념의 밖으로 뻗어 나온 줄기이다: 『엔치클로페디』에서 헤겔은 자연을 논리적 이념의 산물이라 하였다. 그의 인간학에서 인간지(人間知)로서 주관 정신(subjektive Geist)은 객관 정신(objektive Geist)의 예비인데, 주관 정신에서 첫 번째 계기인 (seele)은 “단지 대자적으로만 비물질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보편적 비물질성(die allgemeine Immaterialität)이다. 혼은 자연의 단순한 관념적 생명”65이며, “실체이고 정신의 모든 특수화와 개별화의 절대적 토대이다.”8 “정신은 우리에게는 자연(für uns die Natur)을 그 자신의 전제로 하고 있으나, 그것은 자연의 진리이므로 자연에서 절대적인 시초(absolut Erstes)는 바로 정신”67인데, 여기서 정신은 논리적 이념이다. “정신은 자연의 대자존재에 도달한 이념으로서 출현”8한다. 이 출현한 “이념의 객관개념이요 주관 또한 개념8이며, “이 동일성이 절대적 부정성이다.”8 즉, 『엔치클로페디』 「정신철학」에 이르러서야 정신은 인류사에서 자신을 유기적으로, 총체적으로 그리고 완전성으로 개시함으로써 이념으로 복귀한다. 그 복귀는 물론 모든 대립과 외화의 무화가 아니라 “이원적인 상태로까지 확장된 자아의 현존재를 뒷받침하는 게 될뿐더러 또한 이 자아는 그의 이원적, 양의적(兩義的) 상태에서도 자기 동일자의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의 완전한 외화와 대립 속에서도 오직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것”71인 경지이다. 헤겔은, “이념은 국가와 세계의 지도자이고, 정신은 세계를 이끌며, 우리는 그 이끎에 대해 배우고자 한다”72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헤겔 학설에서 우리가 톺았던 모든 ‘구체적인 것’은 실상 추상적 이념이 자기 소외로써 자신을 인식해 나가는 전개상이다. 즉, 그의 ‘구체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 자체로 서 있지 않고 오로지 추상적 이념을 각주로 하여 응고된 겉모습일 뿐이었다. 이 점에서 예컨대, 인간의 의욕은 특수 과학으로써 발견될 물질적 구성 요소의 산물, 그 통합으로서의 참된 인간적 의욕이 아니라 자기 분화하는 보편으로서 이념대자적인 것인 관념성이 자기의 소외를 실현하기 위해 수놓은 특수로서 이념이 그 자신이 특수인 한에서 강제한 규정된 실재성이다. 그래서 그의 학설에서 인간적 의욕의 본질이라고 할 그 구성 요소와 상호작용은 과학적으로 분석될 그것들의 물질적 존재 양식에서 끝을 맺는 게 아닌, 추상적 이념의 이야기에서 끝을 맺는다. “『엔치클로페디』 전체는 철학적 정신의 확대된 본질, 철학적 정신의 자기 대상화일 뿐”인데, 그것은 “자기 소외의 내부에서 사유하면서, 다시 말해서 추상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소외된 세계정신일 뿐이다.”73

 

그 귀결로 헤겔에게 있어 실재성의 변증법‘자연철학’, 그리고 무수한 역사적 실존의 개입이 거론되는 그의 ‘역사철학’은 그의 순수개념의 변증법에 비해 초라한 체계를 띠고 있다. W. R. 바이어(Beyer)에 의하면 “헤겔이 사실 실재성의 변증법을 너무도 불친절하게 다루어, 그것을 그의 개념의 변증법으로써 밀어 넘어뜨리고, 사물의 변증법 안에서 개념의 변증법의 ‘내재존재’를 결코 철학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오직 단순히주장하였을 뿐이므로, 말하자면 “추량(推量)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74 물론 그의 학설에서 ‘합리적 핵심’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인 ‘신비적 외피’와 구별될 때, ‘외피’는 그의 개념의 변증법에서 필수적인 것인 개념적 파악을 지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이어가 지적한 그대로 “이 ‘개념의 노력’이야말로 ‘합리적 핵심’의 내용에 가산되는 것”75이다. “또 ‘이러한 개념적 파악’, 즉 헤겔 철학 및 본래의 과학에 대한 관심사를 위한 그 이용 가능성의 개념적 파악은 헤겔 철학의 ‘합리적 핵심’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76 우리가 제1의 자연을 관조하고 관찰할 때조차도 헤겔이 추구하였던 이성의 조각이 사유 형식으로서 발견되는 것은 그의 ‘신비적 외피’가 전제한 게 아니라, 과학 탐구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출현하는 행로이다.

 

M. E. 오멜랴노프스키(Omel'yanovsky)는 “자연과학 중에서도 물리학은 항상 철학과 특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왔[음]”을, 그리고 “우리 시대에 이 연결을 더욱 긴밀해졌으며, 이제는 물리학, 유물론, 변증법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수준에 도달하였[음]”77을 논하였다: “레닌주의 사상은 그것이 물리학 발전에 적용될 때, 비고전 물리학의 인지적 가치를 이해하고, 그 사고방식을 특징짓는 데 매우 중요하다. 비고전 이론의 출현과 발전 과정에서 ‘개념의 운동(Bewegung der Begriffe)’에 대한 연구는 어떠한 경우에서든 그 이론의 방법론에 관한 연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론이 없다면, 물리적 경험을 일반화하는 비고전 이론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78 예컨대 “고전 물리학은 자연발생적-유물론적 인식 이론을 지향하였다.”79 “경험적 자연과학”은 “개별적 지식 분야를 상호 옮게 연결시키는 과제도 역시 불가피한 것으로 되고 있”는데, 바로 “그에 의하여 자연과학은 이론 분야에 들어서”고, “여기에서는 경험적 방법이 무력하며, 오로지 이론적 사유만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80 “그런데 이론적 사유가 타고난 속성인 것은 오질 소질로서만 그러할 뿐이다.”81 즉 그 소질은 “발전되고 완성되어야만 하는데, 그러자면 지금까지 종래의 모든 철학을 연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수단도 없다.”82 변증법에서 핵심이 개념적 파악인 한, 변증법이 물리학을 포괄하는 제반 자연과학의 사유 형식에 개입하는 한, 과학 분야에서 개념적 파악으로서 사유는 언제든지 재생된다 해야 한다.

 

헤겔 학설에서 ‘신비적 외피’에 관한 총괄은 마르크스가 1844년에 작성한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가장 명징한 형식으로 발견되는데, 이 문헌에서 헤겔 학설에 대한 비평은 1845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제출된 그의 실천의 맹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초고에서 “대상적인 본질적 힘들의 주체성”으로서 “정립”83, 즉 정립의 주체를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자연에 두고 있다.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이 자신의 현실적이고 대상적인 본질적 힘들을 자신의 외화로써 낯선 대상들로 정립한다면, 그 정립이 주체인 것이 아니”11라는 마르크스의 통찰도 이와 관련된다. 인간은 상대적으로 정립의 주체이지만, 인간적 활동을 정립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외적 자연이다. 그리고 자연의 근저에는 또다른 형태의 자연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는 자연의 뿌리가 비물질적인 규제 원리임을 내세우는 헤겔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고로 욕구·욕망·의욕으로서 인간에 내적인 자연력은 순전히 이질적인 형태의 자연력이자 보편으로서 자연의 자기 특수화일 따름이며, 논리적 이념의 규준의 현실적인 표현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초고에서, 자연에서 시작함을 구체라 하고, 관념에서 시작함을 추상이라 하는데, 이는 헤겔이 제공한 논리적 이념이 항상적으로 그 ‘순수한’ 시원점(始原點)부터‘순수존재(reines Sein)’감각적(감성적)이고 역사적이며 현실적인 것을 두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순수한’ 시원은 단지 감각적 현실의 압축인 점에서 추상적인 것이고, 감각적 현실은 시원의 창조자, 시원의 필연적 참고점(參考點)이라는 데서 구체적인 것이다.

 

이는 포이어바흐의 헤겔 철학 비판에서 더욱더 정교한 해명의 내용과 형식을 띤다: “헤겔 철학은 순수존재로부터 출발”하는데, 이는 “특수한 시초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무규정적인 것, 즉 시초 자체로부터 출발”을 의미한다.85 하지만 포이어바흐는 “과연 그러한가?”11라고 의문을 표한다. 포이어바흐는 ‘순수존재’가 순전히 “특수한 시초”임을 여러 방식으로써 증명하지만, 그중 단연 빼어난 것은 ‘순수존재’를 “그 제시에 있어 시초의 것도 이제는 결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립된 것, 의존적인 것, 매개된 것”87임을 폭로한 것이다. 헤겔의 “최초의 것은 사상(事象) 규정들에 의해 규정되는바, 이 사상 규정들은 스스로에 의해 확실하며, 자신을 제시하고 시간적으로 개진하는 철학보다 먼저 있고 그로부터 독립적”88이다. 예를 들어, 헤겔의 말마따나 “존재는 직접적인 것, 규정되지 않은 것, 자기 자신과 동등한 것, 자기와 동일한 것, 구별이 없는 것”이나, 벌써 “여기에서 어쨌든 직접성과 무규정성이나 동일성과 같은 개념들이 전제”되어 있다.11 존재와 무의 통일인 생성(Werden)으로 전진해 가면서, 존재의 소멸을 전제하는데, “소멸이란 것도 개념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감각적 표상”이다. 그런가 하면, “생성은 동요(Unruhe)이며, 존재와 무의 불안정한 통일”이라고 할 때, 동요는 “고요(Ruhe)와 같은, 극히 의심스러운 표상이 전제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받아들여”진다.11 이로써 『논리의 학』은 『정신현상학』으로 전락한다. 일련의 비평은 헤겔의 철학 체계의 뿌리를 흔드는 매우 강력한 것으로 된다.

 

물론 그렇다 하여도 논구되는 사상이 표상 속에서 재현되는 한, 즉 그것이 표상과 필연적인 매개를 이루는 한 표상이 그 자체 즉자대자적인 것으로서, 사상을 불러오는가, 아니면 사상이 표상을 불러오는가에 관한 문제가 곧바로 청명한 해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유가 (원시적인 또는 고등한) 기호와 절대적인 결합력을 띠고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데, 이는 글에서 총명한 유물론과 마음-언어에 관해 논하는 각각의 장에서 해명하도록 하겠다.

 

구체적 현실과 추상적 관념의 끈을 유심론적으로 전도한 헤겔에게 있어 예컨대, “국가의 필연성(Die Notwendigkeit des Staates)”의 견지에서 “상이한 제 권력”은 “개념의 본성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91 이 권력들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낯선(fremd) 본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11 “낯선 본성”이란 이념의 “생활사”, “본성”인데, 헤겔에게 그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고 “그것 생활사의 한 고리마디(ein Glied)로서 등급을 배열하는 것”이 그에게 씌워진 “공공연한 신비화”이다.11 이 방법의 한정성은 포이어바흐가 비판한 그대로, 그 신비화의 시초나 본성『논리의 학』의 전 체계, ‘순수존재’이 이미 그 고리마디로서 규정되어야 할 것의 피규정태로서 현존함에 있다. 헤겔의 이념은 그의 전체 철학 체계에서 안류의 지성이나 사고 작용을 인류사와 인격의 조상으로서 절대자라는 고체로 응고·격상시킨 산물이다. 그래서 이념은, 정립의 본질을 자기 자신에 두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이 쌓은 건축물은 국가 목적과 국가의 보편성 및 필연성의 본성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학설은 이러한 한정성 하에 있었지만, 그가 성숙시킨 총체성의 사유는 학문에서 변증법이 없다면 그곳에서 그 명징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음을 예시(豫示)하였다. E. 랑게(Range)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헤겔은 진보적 독일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철학자로서 그들의 정치적 지배권 획득에 그 나름의 공헌을 하였다. 그와 동시에 때는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의 시기였으며, 이 혁명에 대해서 헤겔은 일생에서 감격에 넘쳐 말했다. 이 혁명은 독일의 사회상태와 독일 고전철학의 대표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므로, 헤겔에게도 그러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은 독일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의 예비를 도왔다.”94

 

§ 3 철학적 비평의 사회경제사적 본성 III || 관념론 철학을 발원지로 하는 도식 및 방법은 어떻게 하여 막장 갱도에 치닫게 되는가? 관념론적 도식은 그것이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간에 과학적 탐구의 목표 정향인 특수 사물의 본질을 소여된 감각이나 사변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일치시킨다는 데 있다. 도식이 참으로 그러한 일치를 보증할 만큼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 도식의 시원은 절대적으로 무규정적인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경우 시초는 근거 지어진 것이고, 근거 지은 것은 그것에 대해 외적인 필연성이고, 도식은 이 외적인 필연성이 자신의 시초를 규정하는 행정까지 진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주체에 내적인 것들, 순수 사변적, 또는 감각적 도식이 그 밖에 존재할 것인 필연성을 정초하려는 순간 그 도식이 천명한, 소여된 감각이나 사변과 사물, 즉 존재의 직접적인 일치는 붕락한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 권위의 옹호자는 완고한 수학자 또는 헤겔적 도식에 자기를 내맡겨야 한다. 하지만 그 도식에서 점지한 시초는 구체적인 역사, 현실적인 것을 자기에게 부착하지 않고서는 시초일 수 없다는 낭떠러지에 봉착한다.

 

도식은 그것의 ‘창조주’들이 집착해 마지않는 순수함에 상응하는 대로 폐쇄적이고 고정된 일련의 섭리론적 사변 순서헤겔은 이를 ‘관념성(idealität)’이라 하여 철학에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였다띠거나, 판단문과 추론문의 형식을 띤 자립화한 표상의 외면적 집적물로 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 형식 논리학에서도, 칸트의 ‘개혁적’인 초월론적 형식 논리학에서도,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도 관찰된다. 엥겔스는 뒤링에 대한 체계적인 비평인 『반뒤링론』을 저술하면서 학적 방법론에 관한 일반이론적인 글을 남겼다. 저작에서 엥겔스는 “사유 법칙의 이론은 속물적인 사고가 논리학이라는 말과 결부시키고 있는 그러한 것처럼 결코 종국적으로 확정된 그 어떠한 영원한 진리가 아[님]”95을, 그리고 “어느 과학 분야에서나자연의 분야에서나 역사의 분야에서나주어진 제반 사실로부터 출발하여야 하며, 따라서 자연과학에서는 물질의 각이한 대상적 형태와 각이한 운동 형태로부터 출발”96하여야 함을 철학적·과학적 탐구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머릿속에 주어진 연관을 사실에 기입하는 게 아니라, 사실에서 연관을 이끌고, “또 그것을 발견하면 가능한 한 경험적 방법으로 증명”11하는 것이다. 이를 총괄하면, 즉 사실은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경험으로 보증된다. 이 경험적인 것은 또한 실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구해진 사실은 아직 경험적이고 감성적인 단계에만 달했을 뿐이며, 철학적 사유는 그것을 변증법적 시스템으로 주조해 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은 조만간 상대적으로 불변적이거나, 또는 가변적일 논리적 범주 순서를 형성한다. 엥겔스의 통찰은 우리에게 과학적 방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 시스템이 탐구하며 마주할 특수 사물의 운동 방식과 형태에 상응하는 만큼 무수함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로부터 철학은 논리적 사유의 개념적 탑을 쌓는데, 그것은 현존하는 자연계의 구조와 사회구성체의 내재적 변화 양식에 따라 온전히 보존될 수도, 또는 무너질 수도 있다. 일련의 순서가 상대적으로 고정된 채로 있는 논리적 시스템은, 그 존재 자체에 관한 이해만으로도 몇 가지 과학적 예측을 달성할 수 있는데, 가장 흔히 그런 것으로 알려진 것은 수학과 통계적 추이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조차 대상 사물의 특수한 층의 객관적 운동 연관을 반영한 것이라, 이 사유 시스템은 오직 그 층의 관계만을 식별하는 데 적합할 뿐이다.

 

실천이 산업적·경제적으로 반복되는 경험적 사실과 어떠한 연계를 가지며, 물질성과 사유 법칙의 관계에서 물질적인 것이 어떻게 특수한 관념을 생산하고 조직하는가는 총명한 유물론에 관한 장에서 자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비평과 여타 철학적 사유는 구체적인 역사로부터 탄생한다면 그 역사의 대표자는 무엇인가? 엥겔스는 1890년 9월 21일, 그 대표자와 이데올로기의 상호작용에 관한 J. 블로흐(Bloch)의 물음에 답변하면서, 그 대표자를 경제적인 것에 두었다. 엥겔스는 먼저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지만,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놓는 것”임을 지적한다.98 그런데 이 “유일한”은 어떠한 의미로 쓰이는가? 그는 정치·법률·철학적 이론·종교도 하나의 외재적인 자립성을 띠며, 역사적 진행과 상호작용하나, “이 상호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을 …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해 나간다”고 한다.11 즉, “유일한”과 반대되는 ‘유일하지 않음’이란 경제적 운동이 역사의 진행을 지배적으로 규정해 나가는 데서 그 매개물인 우연들, 즉 상부구조의 작용을 뜻하는 것인데, 이 우연적인 항들은 상대적인 자립성을 띠고 하나의 원인자로서 작용하나, 그 원인자의 원인, 즉 다시 경제적인 계기에 종속되어 있다. “경제적 전제들과 조건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최종 심급]들”이다.100

 

엥겔스는 주데텐에서 타우누스에 이르는 산맥에 의해 형성된 지리상의 차이가 유발한 고지 독일어의 자음 추이의 기원을 “경제적으로 해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임은 지적하면서도, “그러나 둘째로, 최종 결과는 언제나 수많은 개별 의지가 충돌에서 생기며 또 이 각각의 개별 의지는 많은 특수한 생활 조건에 의해 지금과 같은 개별 의지로 다시 형성되는바”, 즉 “따라서 서로 교차하는 무수한 힘들, 무한한 힘의 평행 사변형들의 집합이 존재하며, 여기에서 결과역사적 사건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최종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동일한 운동 법칙 아래에 놓여 있[는데]”11, 그 “개별 의지의 소유자는 자신의 체질과 외적인, [즉] 종국적으로 경제적인 사정들(개인적인 수도 있고, 혹은 일반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는)로 말미암아 어떠한 것을 원[한다.]”102 이 개별 의지는 비록 경제적 총체성의 운동 여하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하나의 전체적 평균에, 하나의 공동 결과에 융합”될 수 있으나, “이로부터 개별 의지=0으로 놓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103 왜냐하면 “반대로 개별 의지 각각은 결과에 기여하는 그러한 한에서 그 결과에 함유되어 있는 것”11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로써 철학적 비평의 근본 목적, 본질에 관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 수많은 철학자가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하며, 또 세련된 문장과 수사를 구사함은, 그리고 스스로에게 초역사적인 가치를 부여함의 근원은 자신의 개별적인 욕구로 표현되는 각 의지에 따른 것이다. 예컨대, 기호의 선별·배치, 문장의 문법적 구조의 조작 등으로 완성되는 이 세련됨은 자신의 글이 더 많은 당위를 얻게 하기 위함이며, 그 당위를 거머쥐어야 함은 순전히 금전적인 목표일 수 있으며, 당장에 금전은 뒷전에 있더라도, 자신의 개별 의지를 실현코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별 의지의 실현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어떠한 의지는 외견상 너무나도 숭고해 보여서 그곳에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경제성”이 낄 데가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그것은 어느 데까지 나아가더라도 결국은 개별적인 이해관계의 실현과 관련된다. 이 이해관계의 추구에서 실현의 완성까지는 그 의지의 주체가 딛고 이 땅의 생산과 분배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승려가 수행하기 위해서는 절이 있어야 하는데, 절은 생산의 산물이다. 그것이 생산의 산물인 한 그는 그 생산의 교류 양태의 진흙탕에 발을 담가야 한다. 전근대부터 칭송받는 고승이 또한 당대의 경제적 권력과 밀착한 관계임은 이로써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생산된 종교적 교설은 작용에 의해 지배계급의 설교로 변화한다.

 

경제적 계기는 오늘날 “점점 더 대규모화되어 마침내 세계시장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105 것만이 아닌, 이 시대의 산업적 생산 수준에서 원시 공산제의 수렵과 채집, 초기 형태의 농업까지 관통하는 동일자이다. 하지만 절박함은 오늘날 더 극심해졌다.

 

철학-함이든, 철학적 비평이든, 그것이 무언가를 지향하는(의욕!) 사유인 한, 그 진술에서 현시대의 사회구성체의 조건에 조응하는 일반적인 경제적 의도를 은폐하는 것은 진리를 위해 투쟁하며, 민중 철학을 지향하는 모든 자가 경멸해야 할 태도이다. 철학의 뿌리에 경제적 개별 의지가 지지대로 있는 한, 철학의 진실성은 언제나 그 경제적 의지에 상응하는 경제적 체계, 사회경제적 조건의 문제에 철학을 하는 자를 이끌어 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더욱 정교한 과학적 방법론의 연구, 진보적 방법론의 철학적 사유를 통한 창조는 아주 흔히 생산적인 것과 연계되기 일쑤이다. 그 성과는 또한 (부분적인 예를 들자면) 천체우주에 관한 첨단 연구, 첨단 기기의 국가적 발명과 연관되고, 그것은 빈번히 지구와 환경과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것과 관련되는데, 자본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팽창한 현대에 이른 시점에서 연구는 그 자체로 잉여가치의 분배(자본 투자)에 직결되고, 수많은 연구 노동자의 경제적 생활과 직결된다. 근래 인공지능 연구에서 자연어 처리 방식에 관한 수많은 철학적 논의가 제국주의 국가 학술상에서 변함없이 중대사로 되어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물론 그것은 인공지능을 통한 자동화 설비, 첨단 침략 무기 및 첨단화된 파시스트 통치 수법 개발 등 각종 조야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것이지만, 이것 또한 종국적으로는 경제적 의지이다. 

 

철학-함의 목적에 개별적인 경제적 의지가 요지부동한 채 있으므로, 현상적인 세태가 어떠하든, 철학-함의 최고 영광은 방법론 연구이다. 왜냐하면, 실증과학에 실질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는 오로지 특수 과학과 상호작용하여 얻어낸 특수 과학 방법론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전히 통속적인 비유 덩어리로 되어 있는 문헌에서 특수 사물을 대하는 현실적인 방법론을 도출해 낼 수 없다. 이는 문예에서도 하등 다를 바 없는데, 다만 문예는 그 문예 창작의 방법론적 대상이 주관성인 탓에 체계화와 이론적 규준을 입히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철학을 격언의 모음집으로 취급하며, 거기에 만족하는 자들의 작태만큼이나 자신의 사회경제적 본성을 망각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들은 그러한 망각을 자신의 경제적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이자, 하나의 새로운 욕구로서 대한다. 그 조야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그들은 가상적인 철학-함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학문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없는 자들의 ‘특권’이다. 한편으로 기왕에 그러한 망각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 또한 얼마나 흔한가!

2025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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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 N. Leont'ev, Problems of the Development of the Mind, Moskva: Progress Publishers, 1981, 271.텍스트로 돌아가기
  2. Xenophon, 「경영론」, 『경영론·향연』, 오유석 역, 서울: 부북스, 2015, 제I/22절.텍스트로 돌아가기
  3. Problems of the Development of the Mind, 1981, 271-2.텍스트로 돌아가기
  4. 『철학의 근본문제』, 1990, 244.텍스트로 돌아가기
  5. F. Engels, 「원숭이의 인간으로의 진화에서 노동의 역할」, 『자연의 변증법』, 황태호 역, 서울: 전진, 1989, 167-8.텍스트로 돌아가기
  6. Problems of the Development of the Mind, 1981, 208.텍스트로 돌아가기
  7. Ibid., 272.텍스트로 돌아가기
  8.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9. 남기호, 「헤겔의 욕망 개념」, 『헤겔연구』, 26, 2009: 42.텍스트로 돌아가기
  10. G. W. F. Hegel, 『정신현상학 I』, 임석진 역, 서울: 지식산업사, 1988, 257.텍스트로 돌아가기
  11.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3. 같은 책, 257-8.텍스트로 돌아가기
  14. 이는 헤겔의 비평이 편집되는 과정에서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붙여진 제목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5. G. W. F. Hegel, System Der Sittlichkeit: Critik Des Fichteschen Naturrechts, Hamburg: Felix Meiner Verlag, 2001, 5.; 『인륜성의 체계』, 김준수 역, 서울: 울력, 2007, 14.텍스트로 돌아가기
  16. Ibid.; 같은 책, 15.텍스트로 돌아가기
  17. Ibid.;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8. G. W. F. Hegel, Jenaer Systementwürfe I: Das System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86, 210.텍스트로 돌아가기
  19.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20. Ibid., 211.텍스트로 돌아가기
  21.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22. System Der Sittlichkeit: Critik Des Fichteschen Naturrechts, 2001, 5.; 『인륜성의 체계』, 2007, 15.텍스트로 돌아가기
  23. Ibid., 16.; 같은 책, 33.텍스트로 돌아가기
  24. Ibid.;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25. Ibid., 17.; 같은 책, 34.텍스트로 돌아가기
  26. Ibid.;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27. Ibid.; 같은 책, 35.텍스트로 돌아가기
  28. Ibid., 18 .; 같은 책, 37.텍스트로 돌아가기
  29. Ibid., 17.; 같은 책, 34.텍스트로 돌아가기
  30. Ibid.;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1. Ibid.;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2. Ibid.;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3. Ibid., 18.; 같은 책, 36.텍스트로 돌아가기
  34. Ibid., 17.;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5. Ibid., 18.; 같은 책, 37.텍스트로 돌아가기
  36. Ibid.;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7. Ibid., 19.; 같은 책, 38.텍스트로 돌아가기
  38. Ibid., 18.; 같은 책, 37-8.텍스트로 돌아가기
  39. Jenaer Systementwürfe I: Das System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1986, 201-2.텍스트로 돌아가기
  40. G. W. F. Hegel, Jenaer Systementwürfe III: Naturphilosophie und Philosophie des Geistes,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87, 174.텍스트로 돌아가기
  41. Ibid., 175.텍스트로 돌아가기
  42. E. V. Il'enkov, “Hegel and Hermeneutics: the Problem of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nd Thinking in Hegel”, Intelligent Materialism: Essays on Hegel and Dialectics, ed. E. V. Pavlov, Leiden & Boston: Brill, 2018, 98.텍스트로 돌아가기
  43. Ibid., 98-9.텍스트로 돌아가기
  44. 『정신현상학 I』, 1988, 163.텍스트로 돌아가기
  45. 같은 책, 163-4.텍스트로 돌아가기
  46. 같은 책, 164.텍스트로 돌아가기
  47. System Der Sittlichkeit: Critik Des Fichteschen Naturrechts, 2001, 18.; 『인륜성의 체계』, 2007, 37.텍스트로 돌아가기
  48. 『정신현상학 I』, 1988, 173-4.텍스트로 돌아가기
  49. G. W. F. Hegel, „Enzyklopädie III“, Werke, Bd. 10, Erste Auflage, Berlin: Suhrkamp Verlag, 1986, § 462.텍스트로 돌아가기
  50.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51. 물론 이때 언어는 사유[관념]의 힘이 순수하게 간직하는 개별성의 최종적인 현실-매체적 현현으로 매듭 지어진다. 하지만 헤겔에게 있어 언어가 사유 형식의 그 실천적 현현에서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헤겔 학설에서 사유는 (비록 불완전한 것이지만) 충동 의지, 노동, 생활 영위 등 다양한 형식으로 스스로를 현현한다. 헤겔에게서도 언어는 이것들의 변증법적 산물이다. 일리옌코프는 헤겔이 사유 형식의 유일한 발현 형태를 언어라고 보는 편견을 흔들었다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이 적는다: “논리적 형식[사유 또는 관념의 그것]이 주변 세계에 대해 말하는 행위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변화시키는 행위, 즉 인간 실천 속에서도 드러난다면, 실천은 인간 언어를 지배하는 논리적 형식, 즉 언어로 표현된 자기 인식의 ‘정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논리적 형식(도식, 형식)은 인간 활동 전반이 수행되는 틀이며, 그 활동의 대상이 단어, 사물, 사건, 역사적 상황 등 무엇이든 간에 적용된다.” (E. V. Il'enkov, „Problema protivorechiya v logike“, Dialekticheskoe protivorechie, Moskva: Politizdat, 1979, 123-4.)텍스트로 돌아가기
  52. „Enzyklopädie III“, Werke, Bd. 10, Erste Auflage, 1986, § 426.텍스트로 돌아가기
  53.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54. Ibid., § 428.텍스트로 돌아가기
  55.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56. Ibid., § 429.텍스트로 돌아가기
  57. Ibid., § 430.텍스트로 돌아가기
  58.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59.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60. Ibid., § 524.텍스트로 돌아가기
  61. G. W. F. Hegel, 『헤겔 예술철학 1826년 강의』, 권정임 역, 서울: 세창출판사, 2023, 87-8.텍스트로 돌아가기
  62. M. Greene, 『헤겔의 영혼론: 사변적 인간학』, 신우승 역, 서울: b, 2003, 250.텍스트로 돌아가기
  63. 같은 책, 251.텍스트로 돌아가기
  64. 『정신현상학』의 서론은 이를 철학사에서 고구(考究)된 바의 “사물 자체”, 즉 인식이 취하고자 하는 “즉자적인 사물”(=“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사실 자체로서 진리”)로 취급하였을 때 학문상에 근본적인 한계가 노정됨을 밝히고 있다. 예컨대 칸트는 “사물 자체”와 인식을 추상적으로 자립화하여 서로를 절대적으로 분리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헤겔에게 “촉발된” 인식 작용이란 절대자의 활동적이고 내재적인 생산물이자 자기-외화의 전체이므로 인식 작용에는 그러한 생산적 계기가 담겨 있다. 진리는 이 주체-객체의 일치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 … 이 두 경우에서 똑같이 우리는 원래 수단이나 방편이 목적으로 여겨진 바와는 반대되는 것을 산출하는 그러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되었으니, 여기서 무엇보다도 역겹게 생각되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어떤 도구를 이용하려 한다는 바로 이 사실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이러한 도구의 활용 방법을 제대로 습득함으로써 이상과 같이 빗나간 상태를 모면할 수 있을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도구 사용[인식]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이 도구를 방편으로 하여 절대자에 관하여 획득한 표상 내용 가운데서 오직 그 도구적 역할에 힘입었다고 여겨지는 부분만을 고이 도려내고 나면 결국 순수한 형태의 진리가 포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만약 어떠한 형상화된 사물로부터 이른바 인식의 도구가 작용한 만큼의 영향력이나 결과를 배제해 버린다면 결국 이 사물은─여기서는 절대자가 되겠지만─우리에게는 마치 그 모든 불필요한 도구적 작용이 가해지기 이전의 단초적인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다.” (『정신현상학 I』, 1988, 138.)텍스트로 돌아가기
  65. „Enzyklopädie III“, Werke, Bd. 10, Erste Auflage, 1986, § 389.텍스트로 돌아가기
  66.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67. Ibid., § 381.텍스트로 돌아가기
  68.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69.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70.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71. G. W. F. Hegel, 『정신현상학 II』, 서울: 지식산업사, 1988, 809.텍스트로 돌아가기
  72. G. W. F. Hegel, „VPdG: Nachschriften zu dem Kolleg des Wintersemesters 1822/23“, Gesammelte Werke, Bd. 27.1, Hamburg: Felix Meiner Verlag, 2015, 14.텍스트로 돌아가기
  73. K. Marx, 『경제학-철학 수고』, 강유원 역, 서울: 이론과실천, 2006, 188.텍스트로 돌아가기
  74. W. R. Beyer, 「헤겔의 이중성」, 『헤겔과 현대: 현대세계의 본질규명을 위한 헤겔철학의 재조명』, 신민우 역, 서울: 풀빛, 1985, 259.텍스트로 돌아가기
  75. 같은 책, 260.텍스트로 돌아가기
  76. 같은 책, 262.텍스트로 돌아가기
  77. M. E. Omel'yanovsky, „Lenin und die Dialektik in der modernen Physik“,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8 (1), 1979: 6.텍스트로 돌아가기
  78. Ibid., 16.텍스트로 돌아가기
  79. Ibid., 6.텍스트로 돌아가기
  80. F. Engels, 「변증법에 대하여」, 『반뒤링론』, 한철 역, 서울: 이성과현실, 1989, 417.텍스트로 돌아가기
  81. 같은 책, 417-8.텍스트로 돌아가기
  82. 같은 책, 418.텍스트로 돌아가기
  83. 『경제학-철학 수고』, 2006, 197.텍스트로 돌아가기
  84.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85. A. N. Feuerbach,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19세기 독일 사회철학』, 차인석 역, 서울: 민음사, 1986, 179.텍스트로 돌아가기
  86.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87. 같은 책, 188-9.텍스트로 돌아가기
  88. 같은 책, 189.텍스트로 돌아가기
  89.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90.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91. K. Marx, 『헤겔 법철학 비판』, 서울: 아침, 1989, 23.텍스트로 돌아가기
  9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93.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94. E. Range, 「『정신현상학』─헤겔철학 탄생의 진정한 근원과 비밀」, 『헤겔과 현대: 현대세계의 본질규명을 위한 헤겔철학의 재조명』, 1985, 14.텍스트로 돌아가기
  95. 「변증법에 대하여」, 『반뒤링론』, 1989, 418.텍스트로 돌아가기
  96. 같은 책, 422.텍스트로 돌아가기
  97.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98. F. Engels,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1890년 9월 21일, 런던)」,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6권, 최인호 역, 서울: 박종철출판사, 1997, 508.텍스트로 돌아가기
  99.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00. 같은 책, 509.텍스트로 돌아가기
  101.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02. 같은 책, 509-10.텍스트로 돌아가기
  103. 같은 책, 510.텍스트로 돌아가기
  104.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05. MEW, Bd. 3, 47.; 『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2019, 81.텍스트로 돌아가기

민중 철학의 비평 원칙: 도입

민중 철학의 비평 원칙: 도입 총명한 유물론 2


한동백 | 집행위원

    도입
    1. 철학-과학-세계관
    2. 총명한 유물론
    3. 본질을 드러내는 내재적 비판, 그리고 변증법
    4. 진보의 문제
    5. 역사주의 원리
    6. 물질적 포텐츠로서 사회적 존재의 양식
    7. 마음과 언어
    8. 민중의 도덕학


도입: 현시대에서 민중 철학에 입각한 비평은 왜 요구되는가?


L7 R7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BW BX BY BZ CA CB CC CD CE CF CG CH CI CJ CK CL CM CN CO CP CQ CR CS CT CU CV CW CX CY CZ DA DB DC DD

민주주의가 세계적 규모에서, 전방위적으로 공격받는 현시대 아래에서 진보의 지향은 더 많은, 그리고 더 깊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민중·민족적 민주주의 진영이 투쟁의 성과로써 쌓아 온, 우리가 당연시 민주주의적 경향 후퇴의 α. 세계관적 계기 β. 현실적 결과 속에서 점점 구체화하고 있다이 두 항의 구성요소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각계에서 일반민주주의 쟁취 과업을 축적하고 또 그 성과를 수호하고자 한다면, 이 흐름에 정치적 당위를 부여할 수 있는 사상 투쟁은 필수이다. 이 투쟁은 마주한 개별 현실을 감각되는 그대로가 아니라 현실 전체에 걸쳐 작용하는 최고 심급인 보편과 매개된 사유 내용에 근거하여 전유해야지만 진보의 지향에 조응하는 형태로 이끌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시대에서는 이 진보적 정신총체적 사유의 현실적 계기라고 할 대상의 범위가 질적·양적 수준에서 크게 확장하였다. 그것의 본질은 이 사유가 단지 (외적 실재로서) 억압의 현장이 아니라 억압의 정신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정립을 해야 하는 때가 사회주의 진영의 세계사적 후퇴촉발하였던 그 과거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해졌다는 데에 있다. 즉, 약 30년 전보다 억압의 사념(邪念)1​이 전 영역에 걸쳐 있으며, 또 그 외양상(그러므로 종국적으로는 거짓된) ‘학문적 깊이’가, 그것의 ‘세련됨’철학적 가림막이 더하는 그것, 즉 다수 노동 대중이 자신의 이익을 최상의 조건에서 찾을 수 없도록 강제력을 가하는 기만성이 고도화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진보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서 그 국면마다 형형색색인 이 가림막을 둘러싼 의식 형태는 현존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근본적으로 지양되지 않은 만큼이나 항상 동일한 본질을 가진다. 현시대 무수한 상이성 일반으로 서 있는 이 ‘철학적’ 사념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표현이다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보편적 논리·도덕학적 특성은 현존하는 사회형태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사유 형태에 합치하며, 또 이 영원성에 저항하는 모든 사유 형태에 타격을 가하는 데 합치한다. 예컨대 이 사념은 특수한 논리·도덕학적 사유 매개를 거쳐, 자본주의에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극단적인 빈익빈 부익부에 현실적 당위를 부여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심지어 최근래까지도 이러한 현실조차 감추는 데 그 무엇보다 ‘탁월’할 경제조사방법의 방법론에서 핵심 부품이 될 현대 신실증주의 아류의 갖가지 철학적 도구가 외양만 바꾸며 성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지양하는 데서 필수적인 논리 사유 및 그 미발아 원형태를 발전 순환의 꼴로 종합하는 데서 교체적으로 탐구될 사회적 존재론, 변증법, 논리학 그리고 심리-철학적2​ 중간물은 이 사념에서 “형이상학적인 것”, “흐리터분한 것”, “낡은 것”으로 규정되어 배격된다. 즉, 이들은 민중 당파의 정치-정신적 지도의 토양을 제거함으로써 역사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립된 지배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 관계로서 구형 장비·부품들을 자기 내 보유하며 자기 작동 여부는 그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1. 과학과 철학의 ‘상호 영역 존중’으로 선언되는 두 항의 절대 분리; 2.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 물질의 관념에 대한 존재론적 선차성을 거부한 채, 물질과 관념에 대한 제3항 또는 상호 ‘무경계’의 제출; 3. 모든 사물의 절대적 부정성에의 몰이해, 즉 (無)모순의 학문 정립이라는 미몽에의 강박적 의존; 4. 진보·상승·발전의 객관적 실재성의 부정; 5. 탐구대상의 구체성을 취함에서 그것의 역사성을 취함이 보편적 조건임을, 법칙 작용이 언제나 상대적 목적 규정과 통일되어 있음을 몰각; 6. 사회의 자연에로의 또는 자연의 사회에로의 단순하고 환원적인 용해; 7. 객관적 총체성-언어-마음(주관적 총체성)의 연쇄적 작용반작용의 진리성을 부인함으로써 세계 인식의 불가지성 정당화; 8. 원자화된 개인의 추상성에 상응하는, 극도로 단순화한 논변으로 ‘윤리학’을 수립함으로써 피지배계급의 당파적 도덕 테제가 전 포괄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확정’하고 이로써 그것이 매 국면에서 정치적 규정력을 확립할 여지를 차단·봉쇄속류 철학가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모든 특질은 현시대 민중의 유일한 세계관적 구축물인 마르크스 학설에 전적으로 적대적이다.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가 전 세계적으로 재편된 이래 철학의 무용성은 바로 저 본질적 관계들의 구체 분화로 인해 심화하였는데, 이는 철학이 계속되는 과학 발전과 정치적 실천에 매개되지 않은 채 폐쇄적인 자립성에 가두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서 철학의 쓸모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지식상(知識商)이 “우리는 인문학 멸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며, 시대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이는 철학에 관한 실제 대중의 동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본질적 계기는 생활의 전 영역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자립체인 상품교환관계 및 그것의 자본주의적 화폐 증식을 매개로 한 발전과 공고화가 개개인의 인격적 관계까지 추상으로 정립함에 있다. 철학은 이러한 추상적으로 실재적인 인격적 관계 연장의 의지적 반영이다. 그러나 한편 이는 자본주의의 보편적인 사회경제적 작동 원리를 규정하면서 지식 소비재 생산 단계에서 철학의 속류화에 더 구체 분화된 규정성을 더한다. 위기는 계속 개별화되는 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더 풍부해진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의 사회화가 전개되는 만큼 분업의 중요성이 날로 확대되는데, 이는 전일적 사고의 발양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지적 생산물의 사회적 사용가치를 소멸시키는 요인으로 된다. 자본주의 발전 경향에서 모든 지식의 성장은 분업의 제약성을 더욱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철학도 예외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그 학문의 근본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다른 영역보다 분업 효율화에의 기여에서 더 큰 제약을 지닐 수밖에 없다. 자본의 부문 간 경쟁에서 수반되는 제 법칙은 자본주의 국가와 개별 자본 전체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 가장 적합한 노동력을 형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강제한다. 개별 자본가가 원하는 지식은 자연과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아니라, 생산 기술의 첨단화 및 자기 상품의 수요 증대를 보조할 수 있는 모든 학문적 수단이다. 그리하여 현시대 지배계급 철학은 그보다 제한된 영역을 중점으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소비의 한 부문인 유희 수단으로서의 그것이고, 하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선전 수단으로서의 그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 산 노동의 특수한 결합 양식, 무정부적인 사회적 생산의 발전으로부터 끊임없이 야기되는 소외는 사회에서 철학의 쓸모가 제약되는 양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철학자들 스스로가, 철학이 실제로 우리 시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상응하는 정도의 쓸모를 지니고 있음을 입증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데 열중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실제이다. 그들의 행동 양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을 반영한다. 자기 자신과 타자 사이의 구체적 관계를 직접적 사물의 관계로 나타나는 물신화와 더불어, 주관적인 영역 내에서 소외의 주요한 양상개인을 구성하는 사회의 내적 관계와 개인이나 개체의 인격성 자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소외된 의식의 보편적 양태는 지배계급 철학 특유의 경향성을 산출하였다. 철학이 응용 실증과학의 정교화에 어떠한 보조적인 역할도, 또 상대적으로는 주도적인 역할도 할 수 없도록 하는 그들 체계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을 때부터 학문의 진보에 있어 철학의 무용성은 이미 입증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본의 의도 위에서는 아직 일정한 유용성을 지니지만, 철학이 그러한 유용성을 지닐 수 있는 형태로 전화되었을 때는 이미 철학이 달리 전개할 수 있던, 또는 그럴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수많은 영역이 철학에서 잘려 나간 뒤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에서 철학이 실질적으로나 공식적으로나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은 과거보다 명백히 축소되어 있다.

 

부르주아 철학자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기존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과학적 개념 구성이나 서술의 본질은 우선 각각의 개별적 형상이 ‘사례’로 종속되는 보편적 개념을 구성하려는 데 있다. 이 경우, 사물이나 현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물과 현상이 동일한 개념에 속하는 객체와 공통으로 갖는 어떤 것이고, 순수하게 개성적인 모든 것은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과학에 포함되지 않는다.”3 자연과학의 ‘한계’를 발견한 그는 자연과학과 달리 ‘개성적인 것’을 간취할 수 있는 ‘문화과학’의 토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확실히 문화 현상의 의의는 오직 문화 현상의 개성적 특성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문화과학에서 문화 현상의 보편적 ‘본성’을 밝혀내길 원할 수 없고, 개성화하는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4 이 바덴 학파의 이론가가 제출한 ‘문화과학’에 어른거리는 과학으로부터 철학의 독립 열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부르주아 철학자에 의해 매우 다양한 양태로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주관주의 철학체계로 재생산되어 왔다.

 

지배계급 철학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이러한 ‘독자성’의 독은 철학의 쓸모를 매우 제한적인 틀에 가두고자 하는 그 반대급부의 편향과 함께 자라났다.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는 철학의 ‘역할’과 관련하여 ‘낡은 철학’과 비교되는, ‘새로운 철학’을 주문하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학문으로서의 철학’[그가 가치를 두는]은 역사주의에서 벗어나서, 우리 시대의 과학이 보여준 성과들만큼 정확하고, 정교하고, 신뢰할 만한 결론들에 도달하려고 논리적 분석을 시도한다. 새로운 철학은 절대적 진리를 찾아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철학은 경험적 지식에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5 과학과 철학이 상호 정립적이라는 경험과학의 발전이 보편적이고 특수한 논리적 문제를 항상 야기하며, 논리적 문제가 철학적으로 다루어지고, 정리된 지식 체계가 조만간 과학 발전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전보다 더 광범위한 지식 영역에 활용되어 간다는 역사적 발전 경향, 그것이 진리의 한 축을 구성함이 그의 저술 곳곳에서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순전히 자연과학의 특수한 방법론이 과학사적으로 그 유효성을 증명하였고, 그러므로 이 방법론은 철학함의 당위를 규율하며, 철학은 이에 의해 ‘순화(純化)’되어야 한다는 사념이 되풀이된다.6 그는 그 특수한 방법론에도 철학적 사유가 전제되어 있음을 보지 못 하고 있다. 경험적 지식에 객관적 실재의 본질적 관계가 함유되어 있으며, 외적인 경험이 사유로 전화되었을 때 그것 사유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변증법의 핵심과 그의 견해 사이에는 근본적인 적대가 놓여 있다. 발전과 지양의 경향성을 절대적으로 무시하는 귀결로 그의 주장은 케케묵은 철학적 불가지론의 전형을 또다시 제시하는 것을 넘지 못하였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물리 세계에 관한 어떤 지식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개별 사건은 물론이고 개별 사건들을 지배하는 법칙조차도 확실성을 갖고서 진술할 수 없다.”7 이미 엥겔스는 과학과 철학적 사유 사이의 관계를 정함에서 그것이 하나의 정해진 일방적 방향성만을예컨대, 철학적 사유가 순전히 실증과학의 명제를 형식 진술화한다는 점에서만 학문성을 지닌다는 경험론적 편견 존재론적 사유가 실증과학을 ‘메타적’으로 초월하여 ‘존재의 진리’에 도달할 있다는 낡은 사변적-형이상학적 전통띤다는 견해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대부분 자연과학자는 아직도 낡은 형이상학적 범주들을 고수하며, 말하자면 자연에서 변증법을 증명하는 이러한 근래 사실들이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그것들을 상호 간 연관하여야 할 때 어쩔 없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유 필수적으로 요구된다.”8

 

20세기 초에 들어 과학이 취급하는 대상의 수많은 연관 작용이 실제적인 만큼, 과학에 대한 철학의 관계도 실제적이며, 이것 역시 보편과학으로서 철학의 객관적 탐구 영역으로 될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설명[사실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사라져야 하고, 기술(記述)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9 한다는 주관주의적 소망과 결합하였다. 지배계급 철학의 이러한 퇴행적 경향동시에 자기 모순적인은 아주 정확히, 철학이 인간 지식 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고 할 때 합리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강화할 수 있게 하는 학문적 토양을 그것 발생의 기점보다 훨씬 근본적인 수준에서 제거하였다. B. M. 케드로프(Kedrov)는 이러한 실증주의적 시도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어떠한 단일 실증과학이 연구하지 않는 모든 것, 또는 자연과학과 사회역사 과학을 모두 합쳐도 연구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철학의 영역 안에 남아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주제가 된다. 그러므로 특수 과학들이 철학에서 갈라져 나오는 과정은 원래 철학을 구성했던 모든 것의 완전한 ‘증발(evaporation)’로 끝날 수도 없고 끝나서도 안 된다. 이는 철학에 대한 공허한 부정이며, 철학에 순전히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만을 부여할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까지 확장된 실제 지식사에서 이러한 ‘증발’ 과정의 결과는 오늘날 진정한 과학적 철학의 주제를 구성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견고한’ 잔류물이었다.”10

 

이러한 경향들은 또한 인식된 수다한 것을 구체적 보편으로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철학적 기반인 일원론적-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적 관점을 양산해 냈다. 수많은 부르주아 철학자가 사이비 ‘자유’ 관념을 퍼트렸다. 이 영역에서 그 누구보다 선두를 달린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결정론이라면 모두 그러하듯이 이러한 태도에서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개념이 배제된다. 이론들이야 무어라고 하든지, 사람들이 어떤 사태에 대하여 만족하거나 우려하거나 열광하거나 두려워할 때, 그 일에 대한 책임이 누구 또는 무엇에게 있는지를 실천적인 이유에서 또는 지적 고찰을 위하여 묻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세계의 역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에 (이것들이 어떤 개별적 상황에서 실제로 발생했든지 않았든지) 별로 영향받지 않고 별도로 존재하는 힘의 작용 때문이라면, 세상사의 진행에 관한 설명은 그러한 힘의 전개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주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거대한 힘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11

‘자유’에 관한 그의 여러 논문에서 드러나는, 철학사에 관한 극도의 몰이해와 무지는 다루지 않더라도, 그가 결정론을 비난하는 것만큼 “책임”이 어떠한 “실천적인 이유”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제공하는 논리적인 근거의 설 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대로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이유”가 없이 임의로 “자유의지”나 “자유로운 선택”이 나타난다고 하는 설명만큼이나 신비주의적이고 신학적인 잠꼬대는 없을 것이다. 대체로 일원론적-결정론적 세계관의 노골적인 비난자들은, 그 비난이 최소한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데에 얼마나 많은 일원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성격의 해명이 필요한지 조금의 가늠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아주 단순한 수준에서 관찰을 구체적 사실로서 진술하기 위해 수많은 근거를 찾아내고, 근거를 통해 얻은 초기 수준의 범주 구조를 일관한 내용과 형식으로 체계화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물을 언뜻 보아 상이한 사태들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또한 불가피하게 일원론적-결정론적 체계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토대를 허물려 한다면, 탐구란 애당초 필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동시에 제한적인 경험들에서 도출되는 각각의 견해가 둘 이상의 ‘새로운 시작’, 즉 근원 명제로서 규정으로서 ‘자기만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원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의 무화(無化) 속에서는 예컨대, 지금 당장 지구가 원판의 입체 형태를 띠고 있다고 주장해도 이에 반박할 그 어떠한 해명을 가할 수 없다. 해명은 감각적으로 제출된 지적 구조물 사이에 공통항을 이어 특정 현상을 전체로서 매개적인 단일 원인으로 수렴케 하는 작업인데, 근원 명제로서 규정이 수다하다면 전 매개적인 단일 원인은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서로 공통항이 전혀 없는 둘 이상의 ‘원인’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진리 정립의 진리와 그 종점도 상호 공통항이 없는 둘 이상이어야 해서 종국에는 근원 명제로서 규정이 둘 이상이라는 것의 근거에 관한 통일적인 해명 원리조차 수립할 수 없다. 이제 원판의 평평한 지구와 구체의 지구는 공존하며, 정육면체의 지구 또한 가능한데, 허나 이 모든 것은 유효한 필연적 논증으로서 서 있지 않은, 무근거한 것으로서 형식적 가능성일 뿐이다. 일찍이 피히테는 스피노자에 이어 다원론의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간단히 말하여, 어째서 저 완성된 체계 이외에 하나 또는 여럿인 다른 체계들이 인간 정신 속에 존립할 수 없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 체계들은 저 첫 번째 체계와는 물론이고, 또한 자기들 사이에서도 최소한의 연관 내지 최소한의 공통점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여러 체계를 이루어야 하므로 그리 되어야 마땅한 것으로서 그렇다. 따라서 그러한 새로운 발견들의 불가능성을 만족스럽게 증명하려면, 인간의 지식 안에는 오직 하나의 체계만이 존재할 수 있음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 즉 인간의 모든 지식이 자기 자신 속에서 연관되어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지식을 형성한다고 하는 명제 자체가 인간 지식의 구성부분이어야만 하는 까닭에, 그것은 모든 인간 지식의 근거명제로서 세워진 명제 이외에 다른 어떤 것 위에도 근거지어질 수 없으며, 그 명제로부터가 아니라면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증명될 수 없다.”12

 

다원론의 사상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일련의 자기 모순은 그러한 주장마저 그것대로 다른 체계와 완전히 차폐된 속에서 나름의 ‘사실성’을 보증한 무언가로 있을 수 있다는 논리를 개별 사유 주관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현대 지배계급 철학은 이 역설적인 내용이 자기의 체계 내에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철학적 인식에서 총체성의 공백은 통속 철학과 이른바, ‘비합리주의’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물론 대중적으로, 철학을 소박한 인생철학, 속류 격언 모음집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현상이 된 것은 결코 근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력의 진보와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격화되는 대립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상실해 가는 지배계급의 사고 체계, 즉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경향이었다. 19세기 말에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이래 그것은 지배적인 현상이 되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통속 철학은 이러한 퇴행을 보여주는 내용의 집약체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철학은 과학의 발전 경향과는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없는, 또 그래서는 안 되는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다. 근거의 총체적인 부실 속에서 제출되는 테제의 정당화는 곧 근거 없이 행해지는, 더 정확히는 ‘직관’을 무기로 하여 수행되는 모든 편견의 정당화였다.

 

이 모든 경향이 정권에 대한 노동 대중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최대한 단순화하기 위한 지배계급 각고의 노력에 보조되어 발전해 왔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앞선 모든 기조가 각자 힘을 키워오면서 부르주아 국가의 정규적이고 지배적인 철학에는 어떠한 실제적인 연관 체계나 매개된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초월적인 ‘직관’의 강조, 연관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할 대상의 내부에 포함될 연관의 자의적인 ‘넘어섬’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발전하였다. 이는 논리적 범주 체계의 연속성을 경시하거나, 그러한 것의 원천적인 부정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짝으로 달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으로, 구체적 논증을 매우 원시적인 수준의 유비(類推)로 대체한다. 그리고 이 모든 양태는 다시, 철학에 관한 현대의 더욱 노골적인 속류화의 예비 작업일 뿐이다.

 

철학의 속류화가 철학의 무용함의 원인이 아니라, 철학의 무용함, 즉 그것의 산업적 무용함이 철학의 속류화 원인이다. 철학의 속류화란 다름이 아니라 지배계급 철학의 속류화이며, 지배계급 철학의 속류화는 곧 지배계급 사유 체계의 특질이다. 전자본주의 시기 순수 철학자들신학자들이 누렷된 현실적 권위는 당대의 산업적 발달의 미비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즉, 여기서 지배계급 사고의 비과학성은 실제 경제적 생활을 구성하는 여러 기술적 측면에 있어서 은폐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력 앞에서 그것은 더이상 현실적인 경제적 생활에 조금도 호환될 수 없었고, 그 탓에 그것의 비과학성은 조금도 은폐될 수 없었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는 이제 자연사물의 운동과 특성에 대한 신성한 해석권을 박탈당했으며, 그들은 불가피하게 현대과학이 다루는 영역과 철학이 다루는 영역을 절대적으로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다.

 

“인문학의 위기”란 두 방향에서 가속화된다: 하나는 지배계급 “인문학”의 내용적 퇴행에서 자연 추동되는 영역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또 하나는, “인문학”에 대한 산업적 수요를 감소시키고,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하나의 출판 생산 부문으로서 존립할 공간이 더 이상 확장해 가지 못한다는 객관적 과정으로서 전개된다. 이 발전 방향은 기존 철학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학문에 대한 최후의 구시대적 잔재를 파괴하는 데 공헌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이 지배적인 운동의 저변에는 ‘인문적 지식에 대한 순수한 추구’가 존재하는 법이지만, 그러한 ‘추구’ 역시 적대적 생산관계의 사회적 분업에 빚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므로, 현대의 소부르주아 지식 상인의 현존은 오히려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 속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한 빚을 질 기회는 점차 협소화된다. 철학에 관한 시민사회의 경제적 동기는 (오늘날에도 쉬이 관찰할 수 있는) 자본주의 상부구조와 철학의 일반적인 상호작용을 만들어 내었다.

 

장기적인 이윤율의 저하 경향 속에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변동 사항들, 다시 말해 그보다 단기적인, 또 개별적인 생산 부문에서 경제적 상황의 변화 본질인 각 부문의 변덕스러운 이윤율의 변동 속에서, 지적 소비재에 대한 자본가의 생산 여부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철학과 연관된 제 부문은 더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지이다. 그러나 지식 상인들이 그 자신 노동력을 형성하는 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러므로 일단 무계획적으로 양산된 노동력의 판매자, 즉 강단과 그 주변에서 최후의 자존심육체노동에 대한 오로지 계급 사회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천시를 항상 달고 재생산되는을 사수하고자 하는 소부르주아 지식 상인에게 “인문학의 위기”는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는 자본의 부단한 이동에서 배제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지식 상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일정 혁명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현시대에서 지배적인 철학은 부르주아 관변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교양’을 제공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소부르주아적 허세 속에서 재생산되는 지적 유희로서, 하나의 자극적인 지적 소비재의 생산을 위한 ‘교양’을 제공할 뿐이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와 그 상부구조인 국가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 하에서 노골적인, 또는 시민사회의 외피를 입은 국가적 지배력으로써 추동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당초 민중민주 제 세력의 세계사적〔즉 제국주의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이라는, 현시대 근본 모순의 제 특성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경제의 근원적인13 계급-주체적 대립물로 되는, 그 모순의 해소의 정치사회적 열쇠를 거머쥔〕 지도 계급인 노동계급의 세계관이 현시대 철학의 주요한 양태를 재생산하기 위한 제 기관에서 그 어떠한 지배적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다는 건 자본주의적 발전 도상에서 필연적이다. 철학의 주요한 경향은 노동계급의 의식화에 그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

 

현시대의 지배적인 철학은 노동계급 의식화의 반대 작용으로서의 특수한 학문적 체계이다. 노동계급의 철학과 계급 사회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한 철학은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민중적·민족적 민주주의 당파로서 철학의 쓸모를 말한다면 현대사회에서 주로 논해지는 기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에서 논구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적 전제조건, 즉 그것의 보편적인 발생적 계기가 물질적 생산관계를 둘러싼 계급투쟁인 것과 동일하게, 한 시대의 계급투쟁과 생산관계의 발전 양상은 그 시대 철학적 사유와 현실적으로 제출되는 개별 철학의 내용을 규정한다.14 엥겔스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보다 고차적인 이데올로기, 즉 물질적, 경제적 기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데올로기는 철학 및 종교의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서의 관념과 그것의 물질적인 존재 조건과의 연관은 더욱 복잡해지고 매개 고리들에 의하여 더욱 모호한 것으로 된다. 그러나 여하튼 연관은 존재한다.”15

 

이러한 연관은 특히 오늘날에 이르러 더 전면적인 현상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 생산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국면 속에서 철학은, 각 계급을 둘러싸 실존하면서 각자의 계급적 지위를 강화하고 또 약화하는, 또 각 계급 간 대립의 성격을 규정하는 사회적 실재의 구체적 내용과 분리될 수 없다. 예컨대 수많은 식민지 모순이 격화한 단계에 이르러 있는 신식민지 국가에서 철학의 내용과 쓸모, 그리고 외양적 ‘주제’는 그 나라의 사회경제적 영역에 지배적으로 관여하는 제국주의 총자본제국주의적 지배가 관철되는 영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신식민지 민중 사이의 대립 내부에서 형성·발전한다. 마찬가지로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 철학의 내용과 쓸모는 노동 착취의 강화, 노동계급에 대한 회유, 노동운동과 질적이고 양적인 성장과 쇠퇴 및 이에 대응하는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이해 내부에서 운동한다. 이는 생산양식의 발전 양상 속에서 마치 정치적인 대립, 사회경제적 모순과 ‘무관한 것’으로서 제출되는 개별 철학의 성격이 실제로는 궁극적으로 지극히 정치적이며, (주로 지배계급의) 사회경제적 이해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파악함으로써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철학적 사유의 현실적 제출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계급모순은 향후 철학적 입장과 견해가 더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그 분화된 상이한 것으로서의 수다한 철학적 사유가 서로 부정적인 상호 연관을 맺게 하는 보편적 계기로 작용한다. 이는 철학적 대립의 전개 역시 불가피하게 계급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강조되어야 할 것은, 그 대립이 일반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반영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영역 내부에서 그 대립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철학적 실천, 더 구체적으로는 철학적 수단들철학적 사유와 언어, 외적인 표현의 형태로 현상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가령 “자기에 앞선 지배계급을 대신하는 모든 새로운 계급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해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공동 이해로서 내세울 필요”16가 있는데, 여기에는 철학적 수단이라는 재료가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현존 사회형태와 관련하여 혁명적인 성격을 띠는 계급 역시 지배계급의 낡은 사상에 대응하기 위해 당대에 학문적 형태로 실현된 갖가지 과학적 진보를 통일적인 정신적 구조물혁명적-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서 제출했어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기반하여 “독일 노동운동은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17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철학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는 영역의 무용함이 사회형태의 자본주의적 재편과 결부된 형태로서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의 무능함에 있음을 더 높은 수준에서 해명할 수 있게 하는 고리이다: 산업 자본주의의 계속된 발전은 물질적 자연을 포괄하는 전체 세계의 해석에 관한 지배계급 철학의 권위를 파괴했다. 생산력의 폭발적 증대와 상호 작용하는 자연과학과 공학의 발전은 전통 형이상학을 제반 자연 존재에 대한 보편적 해명의 영역에서 축출하였다; 그러나 그 파괴의 잔해에서 지배계급의 사상은 다른 경향으로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철학의 노골적인 속류화를 정당화하면서 등장하였다. 이러한 저속화는 철학적 사유가 과학 탐구의 논리와 방법론 발전을 조금도 규율할 수 없음을 강변하는 방식으로써, 즉 철학적 사유의 ‘무능’을 강조하면서 과학에 대한 철학의 ‘독립’, 그리고 과학 역시 개진되는 철학에 대한 어떠한 ‘간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학문의 세계에서 이러한 ‘원칙’은 자연스레 노동계급 철학에 대한 그들의 일반적 취급 방식에도 도입되었는데, 이러한 도입은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서, 총체성 및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 그리고 변증법적 논리를 적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기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기조는, 자본가계급이 바로 그것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사회형태를 영구적인 것으로 각색해야 할 때 빈번히 방법론적이고 논리적인 결함을 가져오게 하고, 과학사적으로 관찰되는 학문의 보편적 발전 경향에 포괄되기 어려운 성격의 견해를 재생산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제 부르주아들은 자연과학의 성과 일부를 왜곡하여 그것을 제 주장의 자양분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 측면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전개는 세 가지 국면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첫 번째로 19세기 중엽까지 그것이 역사적 진보에 관해 가지는 시민사회의 의식으로부터 계속 솟아오르는 진취적인 성격에 기반해 있는 국면이다. 이 단계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과학과 동맹을 맺어 신학의 낡은 세계관을 파괴한다; 두 번째 국면은 1870년대 말 독점자본주의가 발생, 자본주의의 부후성과 기생성이 심화해 가는 때로부터 한 세기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과의 독립’과학과의 적대를 선언하는 방식으로서의 국면이다. 이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실증과학에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진보적 부르주아의 합리성을 폐기했다18​; 세 번째는 세계의 발전상과 자기 체계의 점증하는 모순 속에서 과학의 성과 일부를 ‘도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부득이하게 ‘도용 당한’ 과학자들에게 일정 수준의 반발을 샀으며, 결정적으로는 첫 번째 부정에서 점증해 갔던 모순을 여전히 보존한다. 결과적으로 이 국면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어떤 측면에서 과학 발전의 경향에 전면적으로 적대하면서, 또한 ‘도용’하며 진동하고 있는, 즉 단지 ‘무한한’ 부정적 통일을 거듭할 뿐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국면에서 이는 경향적으로만 내재해 있었지만, 세 번째 국면에 이르러 그것은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써 둘째 경향과 셋째 경향은 모두 동일한 도피처철학적 불가지론을 택하는 것으로 나아갔으며, 현대 지배계급 철학에서 철학적 불가지론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요컨대, 그것에는 “현실(성)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 사유될 수는 있지만 서술될 수는 없는 것에 대한 암시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사실이 이제 분명해져야 한다”19는 식의 전통적인 형태가 있는가 하면, “객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움직임이 근본적으로 비결정적”20이며, “그 최소 규모의 층위에서 물질, 또는 물리학자들이 더 정확히 ‘에너지’라고 일컬을 것은 ‘비결정적 요동’”21이라고 간주하는 ‘새로운’ 형태가 있다. 두 번째 형태에 속하는 류의 견해는 흔히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귀착한다: “내가 보기에 물질의 움직임은 더 상위의 인과적 설명도 없고 외부의 인과적 설명도 없거나, 또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험적으로 검증된 것도 없고, 그에 대한 암시도 없다. … 기원전 1세기에 루크레티오스가 물질의 비결정적 클리나멘(clinamen)을 자기 철학의 핵심에 둔 후에 수 세기 동안 주해자들이 주저했지만, 이제는 이 관념이 강력히 귀환했다. 나는 이 전통을 되살리고자 한다.”22 그러나 ‘새로운’ 형태‘신유물론’, 더 세밀하게는 (‘신유물론자’들에 의하면 각각이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다는) ‘객체-지향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운동적 과정 객체론’ 등으로 불리는 것은 물리적 자연의 파악양자역학은 물론이고, 양자장론, 그리고 끈 이론과 그에 대한 모든 이론적 비판 모두에서 현대 물리학자들이 인과율과 그것의 위배에 관한 사항을 여전히 엄중하게 다루고 있음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우연성을 고립화하여 그것을 철학적 불가지론에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의 최종적인 보루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악용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이미 약 반세기 전 유물론 철학자 헤르베르트 회르츠(Herbert Hörz)는 당시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물리학의 진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파동은 회절을 통해 광속으로 무한히 전파될 수 있지만, 이러한 기본입자의 파동적 성질은 기본입자의 극미립자(Korpuskel) 성질의 존재로 인해 일정한 수준으로 제한된다. 반면 극미립자는 국소화되어 직선 방향으로 퍼져 나갈 수 있다. 기본입자의 극미립자적 및 파동적 성질의 존재는 에너지 교환 중, 윌슨의 안개상자(Nebelkammer) [내부에서], 그리고 판 너머의 종착 지점에서 명백히 관찰된다. 반대로, 회절과 간섭 효과가 존재한다. 기본입자는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지만, 무한히 퍼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직선으로만 움직일 뿐만이 아니라 파동적 성질에 따라서도 운동한다. 그것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운동하지만, 빛보다는 느리다. 운동에 대한 고전역학의 관점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는 객관적 모순을 인식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이나, 여전히 상호 의존적인 객관적 파동과 극미립자적 성질의 형이상학적 공존 수준에 머물러 있다. … 고전적인 공시점 도식(Raumpunkt-Zeitpunkt-Schema)은 기본입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데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도식은 벌써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통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운동은 다시 정지 상태(고정 상태)의 합으로 기록될 뿐이다. 기본입자 물리학의 진보는 한편으로 운동의 객관적인 변증법적 모순을 과학적으로 포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입자와 그 구조 사이의 연결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23

현대 물리학에서 기본입자의 운동은 특정 궤도 내에서 완전히 무작위적일 수 있지만, 이러한 무작위적 운동은 바로 그 특수한 궤도 내부를 한계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운동은 우연적인 동시에 필연적이고, 이 통일로서의 개별 운동은 확률적 파동함수로써 기술된다. 이것은 여전히 물리학자들이 원인-결과 연관이라는 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로 된다. 결정론이 여전히 과학탐구에서 막강한 방법론적 구조물로 된다면, 역사적으로 보아, 진보적 세계관의 강력한 철학적 무기가 될 변증법은 결정론에서 파악될 수 있는 체계를 정교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여기에는 현실성-가능성, 필연성-우연성, 전체와 부분, 총체성-부분합 등의 범주들을 엄밀하게 단독 연구한 결과로서의 요소 이론이 포함되어야 한다.24

 

“철학에서 볼 때 현대란, 한편으로는 변증법적·역사적 유물론이 확증되는 시대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관념론적인 철학 활동이 위기에 봉착한 시대이다. 현대 부르주아 철학의 특징이다시피 된 철학적 인식의 통일성의 가능성과 필연성에 대한 호전적인 부정도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시인일 뿐이다.”25 과학사에 관한 왜곡으로 점철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쇠퇴 과정의 구체적 내용은 증대되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객관적 모순, 심리적 공황으로 가득 찬 자본가계급의 의식적 측면, 계급투쟁 양상의 복잡한 관계가 규정한다.26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주요한 형태는 다름이 아니라 무용한 담론 체계의 끊임없는 과잉을 보여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그 역사적 축적으로서 실사구시적 특질의 거세 및 파산 과정이다. 그러나 파산 과정이 곧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생활 영역 곳곳에 자리 잡은 공식적인 영역에서 물러났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가 여전히 폭압적인 방식으로 그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 쇠퇴하고 있다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그저 쇠퇴해 가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될 뿐이다. 핵심은 이데올로기의 그 과학성과 대중성은 총체성의 사유를 담지한 계급적 주체의 역량이 확보되지 않는 한 유리돼 있다는 것이다. 쇠퇴의 속성에서 핵심적인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과학탐구에 대한 규제적 사유를 재생산하는 데서 완전히 실패했다는 데에 있다. 한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파산이 곧 노동계급 철학의 전면적 보급의 필연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는 한 나라, 또는 세계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붕괴가 자동적으로 사회주의 승리를 뜻함이 아닌 것과 같다. 언급한 바와 같이 계급투쟁 양상은 쇠퇴 과정의 구체적 내용을 규정하는데, 시기마다 비율적 차이가 존재한다. 현시대에서 파산의 징후는 노동계급 철학이 아직 관여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파산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일반적으로 노동계급의 투쟁과 무관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지속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게 낡은 부르주아적 담론의 잔해를 또다른 기만적 형태로서 ‘재건’할 기회를 끝없이 제공하고 있다.

 

최근래에 들어 허위의식의 거대한 부위는 “급진성”의 외피를 입은 주관주의적‘정신분석학’·‘실존주의’·‘생철학(生哲學)’·‘사회비판이론’·‘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생명정치이론’의 “좌익적” 변종형태로 발현하는데, 이는 민중의 지적 보고이자 유산인 마르크스주의 학설을 왜곡하면서 “철학의 쇄신”을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이 “과학 없는 사유: 반합리주의의 좌익적 변종”27에 대해 소련 철학가 L. G. 니키티나(Nikitina)는 그것이 “주관적 관념론적 경향과 회의주의의 만연화를 부추기며, 반합리주의, 주의주의, 숙명론, 사회적 염세주의, 모방주의(표면적 신규성으로 포장된)로의 기울음을 강화”28하는 것만큼, 단지 구세계를 위한 “철학의 쇄신”에 불과함을 폭로한 바 있으며, 단지 그것들은 부르주아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등의 대중 매체 수단으로 특정 사상적 흐름과 인물들을 홍보함으로써 허위적 권위를 조장해 왔다고 평하였다.29 “좌익적” 주관주의는 철학과 과학의 상호작용에서 두 항의 변증법적 통일성·자연의 변증법·단초적이고 아직은 빈약한 감각지(感覺知)의 상승 잠재력, 즉 사고의 상승과 하강의 일원성·안정적 동일성의 객관적 확보, 무엇보다 인간사유의 객관적 실재의 인식 가능성을 공격한 대가로 정치학적 개념에의 혼란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새로운 철학자들의 극도로 혼란스러운 권력 개념에서 권력은 극한의 (‘공허한’) 추상화로 다루어진다. 그들에게 권력은 단지 ‘모든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언제나 절대적인 ‘악’일 뿐이라고 하면서, 이를 구체적-역사적, 사회학적, 정치학적, 나아가 이성적-논리적 분석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묘사한다. … 실지 사회관계, 경제, 정치는 뒤틀리고 신비화된 형태로 제시된다.”30 비록 “급진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시도는 정신적 구조물의 본질적인 철학적 특성으로 인해, 제국주의 타파 제국주의의 부정인 참된 민주주의 고양이 아니라 “기존 제국주의 문화 내에서 또다른 ‘대안’ 문화를 내세우는 것”31​으로 귀결될 뿐이다. 자연계를 언어적 산물(‘해체화’된 ‘기표’, ‘기호’, 또는 그러한 것으로 구성된 ‘담론’)로 축소하는 경향 또한 존재한다. ‘포스트구조주의’ 및 ‘구성주의’는 이 경향의 본보기다. 그것은 객관과 주관의 차이성을 흐린다. 이는 “자연이 이 관념과 동일하고 그것이 바뀜에 따라 자연도 바뀐다는 불가사의한 명제이다. …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종류의 이론을 고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32  이들은 기후변화를 다룰 때에도 그것이 ‘담론화’또는 ‘의미화’된 속에서만 ‘생산됨’을 들며, 그것이 “자연의 종말”을 예증함을 강변한다. 이때 “종말”은 의지가 탄생하기 전부터 법칙으로 존재해 온 여러 규정된 그 객관적 자연력이 ‘담론’에 의해 아무렇게 ‘구성’될 수 있다는 점, 즉 관념에 대한 자연의 독립성이 더이상 남아 있을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자연의 종말”이다. “기후변화가 자연의 종말을 뜻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고착시킨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33 그러나 기후변화는 오직 실재하는 자연력의 테두리 안에서만 발현된다. 이산화탄소가 온실가스임은, 그것이 인류 활동으로 인해 증가함과는 독립적으로, 그것이 먼저 화학적-분자적 성질로서 온실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에 기초한다.

 

모든 소부르주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중의 상식을 지배하고 있고, 상식과 상식에 대해 규정적인 계급적-철학적 의지가 일반민주주의 쟁취의 투쟁 전선에서 에게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예컨대,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리 형태의 오랜 양대 전제인 자유’와 평등’은 (고전적 개념으로든, 현대적 개념으로든) 추상적인 표상물로서의 ‘가치’인 탓에 항상 이를 둘러싼 철학적 사유의 정치적 점취가 문제가 되었다. (이 ‘가치’에 근본적으로 친화적일)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줄기가 정치적 점취를 이루었을 때면 가치는 모든 반동적인, 근본적으로는 사적 소유 옹호 의도의 ‘방종’, 모든 부르주아-정책적 요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과도한 법률적 형식주의 및 경제적 부담의 기계적이고도 형식적인 평균화예컨대 간접세율의 증가 합리화, 사교육 확대 준거, 반민주주의 개악·폭거의 ‘명분’으로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식과 상식의 사유 지반에 균열을 내어 매개 목표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혁명하는 수단은 철학적 비평이다. 이때 비평 ‘가치’의 위선성그것들이 자본주의 지양에 적합한 모든 개념에 적대적이며 치명적인 모순의 집적이라는 만이 아니라 ‘가치’의 과도적 취급 모두를 취해야 한다. 

 

*   *   *

 

민중 당파의 철학적 투쟁은 ‘인문학의 위기’를 위기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위기를 새로운 인문적 토양으로의 지양발판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내적으로 과학성의 파산을 안고 있는 지배계급 철학의 한계가 단지 관념 속, 극단적 배타성을 띠는 지식인 무리 속에서가 아니라 대중의 생활 전반에서 노정(露呈)돼 있음을 뜻할 뿐이며, 이는 민중 당파에게 새로운 기회의 터전을 제공한다.

 

나는 사회주의 진영이 세계사적으로 크게 후퇴한 후 수십 년째 이어져 오는 반동기의 현 실정에서도, 지난한 정신사(精神史)에서 투쟁의 근원에 철학의 근본 문제가 있음을 꿰뚫고, 사물·(물적 및 정신적) 현상·경험의 발생-발전-사멸 사이클의 구성 요소를 내재적인 방법으로 추적하고 쌓는정연한 철학적 심안(心眼)을 도구로 현시대의 사념들을 정구(精究)하고 비평한다면 이 사념들이 걸친 ‘세련됨’의 위장막을 거둘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로써 우리는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예부터 쉴 새 없이 반복 제출되어 온, 가짜 자족감으로의 도피의 표현 및 출로 없는 자기 배반적 구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적 투쟁은 단지 위장막을 거두는 데에 그 종국 목적이 있지 않으며, 실지 그 효과도 위장막을 거두는 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투쟁은 한편으로 민중 당파의 철학의 정교화를 동반하고, 현실에서 정치문제에 관한 강력한 대응 능력과 그 세포인 원리·양식들을 낳는다. 이 지성적 과업에서 성공과 실패는 세계관적 제 계기를 구성한다. 이러한 전개로 대표되는 인식 상승의 철학적 비평으로의 발동은 수다한 일반민주주의 쟁취 투쟁에서 우리의 요구에 강력한 당위를 불어넣을 수 있는 주체 역량의 확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혁명 역량의 변동 정향에 따른, 물질적 힘으로서 그 정치적 제 결과를 나는 현실적 결과라고 한다.

 

“마르크스는, 그의 이론의 전체적인 가치는 그의 이론이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혁명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했다.”34 비평 세계관의 변혁을 이끌어낸다면, 이는 그람시가 전한 양식(良識)의 창출이다. 실지 그는 “실천철학은 출발점에서부터 기존의 사고방식과 구체적 사상을(기존의 문화계)를 전복하는 논쟁적, 비판적 외양을 띠지 않을 수 없다”35 하였다. 이 연장선에서 비평 “체계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하고, 또 실제 현실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체계적인 방식으로 대할 수 있게”36 만든다. 그것은 “‘순진한’ 중의 진정한 열정을 드러내 주고, 높은 문화 수준과 더 고차적인 세계관을 얻고자 하는 단호한 결심을 이끌어 내[는]”37 것이다. 그러나 비평철학적 전제원리는, “‘독창적’인 ‘철학적’ 사건”36이라고 비평은, “작은 지식인 집단의 전유물이 되고 마는  ‘천재적’ 철학자들에 의해”21 창조 및 갱신〔즉, 원리의 존립 양식에 있어 그것의 정세에 부응하는 내용으로의 부단한 보존적 재조직화40​〕되지 않는다. 오직 진보적 정치투쟁을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는 선진계급의 유기적 지식인만이 원리 계속적으로 정교화할  있다.

 

그러므로 수단으로서 근본적 비평 원칙은 오로지 정치 투쟁에서 제기된 치열한 고민 속에서 도출된 문젯거리 전반에 대한 그 범용성을 목적 규정을 지니며, 또 범용적이어야 한다. 이 범용성은 수다한 고민의 가상태에 잠재된 본질, 즉 구체적 보편성을 드러내는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이 형태는 여덟 가지의 주요한 변증법으로 수립된다.

2025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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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념이란 엄밀하게는 부르주아적 사념으로, 그것은 존재론적·논리철학적·방법론적 영역에서 현시대 지배계급의 근본 사고의 양상에 대한 역사적 소외 의식으로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가장 발전된 형태로서는 언제나 정치적인 전선의 문제, 강령적 요구와 접맥된 인간 행위, 인격이론 및 사회적 동기, 보편도덕에 관한 견해로 제출된다. 예컨대, I. V. Buchko는 부르주아 사회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과정은 다소 비범한 방식으로 외부에 표현된다. 객관적 진실의 요소들을 상실하고 반동적 구축물로 전환되는 것은 ‘과학에 접근한다’는 허위의 깃발 아래에서 일어난다. 어쨌든,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은 대중을 향해 그러한 주장을 펼치려 애쓴다. 부르주아 사회학 내 대부분의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은 방대한 양의 경험적 자료를 토대로 결론을 도출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러한 자료는 완전히 현대적인 사회학적 조사 기법과 수학적 장치, 컴퓨터 기술의 광범위한 활용을 통해 처리(및 수집)된 것이다. … 부르주아 사회학을 비판하는 문헌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운동 형태를 심리학적·인류학적·생물학적·지리학적 요소로 환원하려는 시도에서 드러나는 기계론적 성격에 주목한다. 사실 그러한 소위 이론들의 창시자들 자신은 고차원적인 것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데 특별한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단순히 ‘고차원적’이며 독자적으로 사회적인 것의 실체를 의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환원’을 사회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견해대로, 이미 ‘엄밀한’(혹은 ‘정밀한’) 과학으로 확립된 학문들의 원리와 방법이 사회학에 침투하는 것은 사회학자들로 하여금 사회 생활의 ‘혼돈스러운’ 자료들을 ‘통일적이고 엄밀한 체계’ 속으로 통합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는 마치 수학적 방법이 물리학과 화학에 적용되면서 그들을 진정한 과학으로 변모시킨 것과 같은 이치다.” (I. V. Bychko, “The Reactionary Essence of Bourgeois Sociological Concepts of Personality”, Soviet Studies in Philosophy, 15 (1), 1976, 83-4.) 이는 사회과학 연구에서조차 상위 체계로서 탐구대상의 그 하위 체계, 부분들의 집합으로의 환원, 질적 규정과 양적 규정, 구체적 도량의 통일성 등에 관한 철학적-방법론적 입장이 문제로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예컨대 의지에 초월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모든 ‘자유의지론’적 견해는 심리-철학에서 고대부터 현재까지 강력한 논의 대상인데, 이 역시 사회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전 수준을 걸친 강령적 요구의 충족과 결부된 연유로 마르크스 학설 발전의 계기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 G. V. 플레하노프는 일찍이 20세기 초에 이 분야에서 인민주의자들과 논쟁하며, N. G. 체르니셰프스키의 결정론을 심도있게 다루었다. (G. V. Plekhanov, “N. G. Chernyshevsky”, Selected Philosophical Works, Vol. 4, Moskva: Progress Publishers, 1980, 226-9.)텍스트로 돌아가기
  3. H. J. Rickert,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이상엽 역, 서울: 책세상, 2004, 87.텍스트로 돌아가기
  4. 같은 책, 152.텍스트로 돌아가기
  5. H. Reichenbach, 『자연과학과 철학』, 김회빈 역, 서울: 중원문화, 1994, 359.텍스트로 돌아가기
  6. 같은 책, 336 ff.텍스트로 돌아가기
  7. 같은 책, 337.텍스트로 돌아가기
  8. MEW, Bd. 20, Berlin: Dietz-Verlag, 1975, 475.텍스트로 돌아가기
  9. L. J. J. Wittgenstein, 『철학적 탐구』, 이승종 역, 파주: 아카넷, 2016, 제109절.텍스트로 돌아가기
  10. B. M. Kedrov, “Philosophy as a General Science”, Soviet Review, 4 (2), 1963: 58.텍스트로 돌아가기
  11. I. Berlin, 「자유에 관한 다섯 편의 논문」,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박동천 역, 서울: 아카넷, 2006, 258.텍스트로 돌아가기
  12. J. G. Fichte, „Ueber den Begriff der Wissenschaftslehre überhaupt“, Fichtes Werke I: Zur theoretischen Philosophie I, Berlin: Walter de Gruyter & Co., 1971, 60.텍스트로 돌아가기
  13. A. 코징(Kosing)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노동계급은 민족과 민족적 구분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민족적이며 또 민족적일 것이다. … 제국주의 나라의 경우 노동계급의 기본 투쟁 목적은 제국주의와 민족의 관계성 속에서 빚어진 민족 내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민족에 대한 자본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적 계급이해 즉 무엇보다도 이윤 동기에 의해 규정된다.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독점자본은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국제적으로 조직되어 간다. 민족의 절대다수 즉 노동계급과 농민, 지식인과 여러 소부르주아 계층들의 이해는 그러한 국제적 자본으로부터 배제당하게 된다. 자본의 재생산 구조와 자본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에 민족은 종속되어 있고 또 그렇게 취급당하고 있다. 제국주의와 민족 간의 깊고 첨예화된 갈등은 다름아닌 바로 독점자본 본질의 본질에서 직접 기인한다. 여기서 제국주의는 모든 민족적 이해에 위협을 가하며 민족적 부의 고갈, 민족적 이해의 국제독점자본의 이해에의 종속을 강요하면서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민족에 대한 발전적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A. Kosing, 『사적유물론적 민족이론』, 김영수 역, 서울: 아침, 1989, 181-2.) 제국주의의 세계적 규정력 하 각 신식민지에서 저항의 이해관계가 단지 노동계급에 한정되지 않고 (소수 지배집단을 제외한) 전민족화(全民族化)하는 것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 이해관계의 분산성은 항상 정치투쟁에서 선결 과제였는데, 분산된 이해관계의 혁명적 이해관계로의 통일 이행에 있어 근본적인 과업을 수행하고 또 끝마칠 수 있는 계급은 노동계급이다. 바로 그 근거는 제국주의를 물적으로 떠받드는 최종 심급으로서 조건이 광범위한 임노동에 기초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생산에 직간접적으로 내재한 모순에 있으며, 노동계급은 이 모순의 최일선에 있는 집단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4. MEW, Bd. 3, Berlin: Dietz-Verlag, 1978, 46-7.;『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이병창 역, 서울: 먼빛으로, 2019, 100-4.텍스트로 돌아가기
  15. F. Engels,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서울: 돌베개, 1987, 78.텍스트로 돌아가기
  16. MEW, Bd. 3, 47.; 『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2019, 103.텍스트로 돌아가기
  17.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2019, 86.텍스트로 돌아가기
  18. Otrechenie ot progressa, istorii, poznaniya i istiny, eds. M. Buhr & R. Steigerwald, Moskva: Mysl, 1984, 17-8.텍스트로 돌아가기
  19. J. -F. Lyotard,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이진우 편, 서울: 서광사, 1993, 79-80.텍스트로 돌아가기
  20. T. Nail, 『객체란 무엇인가』,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4, 31.텍스트로 돌아가기
  21.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22. 같은 책, 32.텍스트로 돌아가기
  23. H. Hörz, „Die philosophische Bedeutung der Heisenbergschen Unbestimmtheitsrelationen“,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8 (6), 1960: 706-7.텍스트로 돌아가기
  24. J. Schermer, „Philosophische Fragen der wissenschaftlichen Voraussicht“,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3 (4), 1965: 505-6.텍스트로 돌아가기
  25. T. I. Oyzerman, 『철학의 근본문제』, 서울: 세계, 1990, 21.텍스트로 돌아가기
  26. D. Bergner, „Philosophie als imperialistischer Ungeist: Zur marxistischen Auseinandersetzung mit der bürgerlichen Philosophie“,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3 (4), 1965: 419.텍스트로 돌아가기
  27. L. G. Nikitina, «Novaya filosofiya» dlya starogo mira, Moskva: Mysl, 1987, 61.텍스트로 돌아가기
  28. Ibid., 8.텍스트로 돌아가기
  29.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30. Ibid., 67.텍스트로 돌아가기
  31. Otrechenie ot progressa, istorii, poznaniya i istiny, 1984, 4.텍스트로 돌아가기
  32. A. Malm, 『이 폭풍의 전개』,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5, 49-50.텍스트로 돌아가기
  33. 같은 책, 61.텍스트로 돌아가기
  34. V. I. Lenin,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 김우현 역, 서울: 벼리, 1988, 200.텍스트로 돌아가기
  35. A. F. Gramsci,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서울: 거름, 1999, 170.텍스트로 돌아가기
  36. 같은 책, 164.텍스트로 돌아가기
  37. 같은 책, 169.텍스트로 돌아가기
  38. 같은 책, 164.텍스트로 돌아가기
  39.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40. 재편이란 추상적 경로로는 이론을 실천으로써 검증하여 이론의 현상 영역 포괄 범위를 넓혀가는 수순으로 전개된다. 이때 초기 이론은 실천에서 제기된 더 폭넓은 모순을 자체 내에 긍정적으로 통일시킬 수 있는 이론으로 복귀한다. 이론적 내용의 논리적 탑으로서의 보편층(普遍層)은 대상의 기본 질에 광범위한 비약이 관철되지 않는 한 실천적 지양 속에서 보존될 뿐, 소멸하지 않는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의 적용 대상이 자본주의 경제인 한 그가 추려낸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 법칙은 이 대상의 보편적 자기 재생산 체계와 일치를 이루므로 유효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기본 질이 지양된 사회(낮은 단계의 공산제, 높은 단계의 공산제)에서 더는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 법칙이 전체적 연관으로서 작동하지 않으므로 그것과 질적으로 완전히 구별되는 사회주의 경제학의 별도 수립이 요구된다. 이론은 그 보편층이 보존되는 한 일종의 문제 해결에서 도구적 매개물의 기능을 한다. G. 크뢰버(Kröber)는 과학 이론의 해명 수준을 보편과 개별로 나누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객관적 실재나 사고의 특정 영역에 대한 체계적으로 정렬된 진술들의 집합인 과학적 이론은 일반적으로 개별 사태와 관련된 진술과 (닫힌 또는 열린) 사태들의 범주와 관련된 진술을 모두 포함한다. 열린 사태 범주와 관련되면서 해당 범주의 요소들 사이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이며 불변적인 연관성을 반영하는 진술은 우리가 법칙 진술(Gesetzesaussage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개별 사태에 대한 진술은 만약 그것이 일반적인 법칙 진술로부터 유도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찰, 실험 등을 통해 획득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경험적 진술(empirische Aussagen)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과학적 이론은 반드시 다음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자신이 재현하는 경험적 사태와 법칙적 연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자신의 연구 대상 영역 내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예상 사태에 대한 예측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측은 한편으로는 인간 행동의 지향점 역할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 자체의 진리 함량(含量)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G. Kröber, „Prognose, Hypothese, Gesetz: Logisch-methodologische Bemerkungen“,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5 (7), 1967: 774.) 이론에 보존된 (초기의) 법칙 진술은 “직접적인 관찰, 실험”으로 대표되는 실천을 통해 경험적 진술이 지정하는 개별 사태(E)까지의 일반적 논리 경로(B)를 내함함으로써 구체성을 확보한다. 이 논리 경로는 법칙 진술(G)이 지정한 초기 보편의 총체성에 자리 잡은 보편의 구성물이라서 더 많은 논리 경로를 발견할수록 우리는 일반 법칙에 대한 더 심오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 이처럼 두 진술은 서로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그러므로 이는 “특정 질서의 본질(법칙 진술로 표현된)에서 보다 상위 질서의 본질(최대한 보편성을 가진 법칙 진술로 표현된)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Ibid., 775.) 즉, 이때에도 이론의 초기 단계에 간취된 보편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B는 연장된 G로서, E는 G-B 경로로 도출되며, 이로써 G-B는 G'로서 E와 연결(G'-E)을 이룬다. 이는 결코 쿤(Kuhn)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나 실증주의적 반증에 토대를 둔 식의, 이론적 형태의 악무한적 자기 부정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초기 이론 또는 매개 단계로서 이론의 보편 설정에 명백한 오류가 존재하여 외부 객관성의 기본 질의 전복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이론이 폐기되어야 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