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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편지

 

 

같이 일하는 아이가 푸른하늘의 테잎을 가져왔다. 혼자 사무실을 지키며 음악을 듣다가 ‘꿈에서 본 거리’를 듣는다. 돌려 듣고, 또다시 돌려들으며 내가 이 음악을 어디서 들었던가 생각해본다. 아주 오래 전, 대광아파트에 살 때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반복해서 들려주었지.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낯설어 했지. 네가 이런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 작년 초에 네게 아주 긴 편지를 썼었는데, 그 편지는 그만 둔 학원의 어딘가에, 교재의 어딘가에 꽂혀있을 것이다. 부치지 못하는 편지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속내를 담았다는 이유로 읽어보고 읽어보다 그냥 스스로에게 부치고말게 되지. 그렇게 상처도 아물고.

이건 어쩌면 네게 보내는 첫 편지이겠다. 아니지, 또다시 어딘가에, 이번엔 수학교재가 아니라 『편집기술론』이나 읽지도 않은 신간 틈에 끼워졌다가 또다시 어느날 생각에 잠길 수도 있겠지. 너의 생각을 가끔 한다. 나 말고, 내 가족 말고 다른 사람들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 가끔 외로우면 너의 생각을 한다. 인권영화제를 한다고 해서 구경을 갔다가 옛날 사람들을 봤다. 토요일에 시작한 영화제를 사흘째 갔었는데…. 어제는 아무도 보질 못했구나. 첫날은 경수와 그의 애인을 보았지. 1월 4일에 결혼한다고, 날을 잡았다고 그러더라. 석근이형도 우연히 만나 넷이서 소주를 한잔 했다.

둘째날에는 병섭이와 재훈이와… 희수를 보았다. 아주 오랜만인데 오랜만에 사람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웃으며 희수에게는 빵을 주고 병섭에게는 명함을 주었다. 빵을 먹은 희수나 명함을 받은 병섭이나 돌아서고 나면 잊을 터이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진 않지만 나는 꼭 덧붙이지. “연락해. 술마시자.” 내가 그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하는지,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고 그냥 잊고 산다. 그들이 나를 잊는 것 처럼. 승환이가 원직복직 싸움을 하다가 폭력혐의로 수감중이라더라. 그 말을 하는 경수에게 어디 있느냐고 물어봤어야 하는 건가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물어서 내가 어떻게 할 생각이 있는 건 또 아니었던 것 같아서 그냥 잊는다. (혹시나해서 경수 삐삐를 적는다. 012-870-5743)

인권영화제란 이름의 영화들을 보면서 파업을 하는 미국의 노동자나 혹은 군부에 의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한 친구를 둔 니카라과의 여성운동가를 보면서 이제 인권이라는 것을 나는 영화에서만 느끼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친구였던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접어버리는 나를 느끼면서.

얼마 전 결혼 준비를 하면서 우리 집 방이 두 개이면 네가 서울에 왔을 때 같이 잘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 모든 것이 ‘없었던 일’로 돌아간 지금도 가끔씩 벼룩시장을 보면 두 개의 방을 구하던 나와, 그 방에서 언젠가는 같이 누울 걸 꿈꾸었던 너를 생각하기도 하고…그리고 오늘처럼 우연히 음악을 듣다가 오랜만의 멜로디에 기억 속의 너를, 우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일요일에는 참 오랜만에 준호가 전화를 해서 오랫동안 얘기를 했다. 그런 거지. 오랜 친구의 전화란 지나간 시간의 일부를 뭉텅 잘라서 오늘 잠깐 펼쳐보는 것이겠지. 생각해보니 너의 집 주소를 모르는구나. 주소를 묻는 전화를 하는 것도 열적고 그렇군. 결혼얘기를 하지 않은 건 날짜, 장소가 잡히면 아예 청첩장이랑 같이 연락하려고 했던 건데 다 무산이 되어버려서 그렇게 되었다. 전화를 안했다고 원망은 말아라. 우리가 언제는 연락하고 지냈니.

토는 잘 크겠지. 형은 여전히 네게 잘 해주는지. 어쨌든 세 식구가 길게 행복할 거라 믿는다. 잘 지내.


96년 11월 5일에. 미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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