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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괜찮아

편집을 하는 내내 나는 내 영화가 외로울까 두려웠다.

물론,나와 같은 경험,나와 같은 무늬를 가진 이들과 교감하는 걸 꿈꾸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다른 경험, 다른 자리에 선 이들에게 딴 세상 얘기로  여겨질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보는 사람들의 상황과 조건이 다르더라도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랬다.

 

저번 비밀상영회 후 올라왔던 리뷰.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깨알같이 읽어준

고마운 리뷰.

 

[다큐멘터리 - 아이들] 엄마, 괜찮아!

Posted at 2011/03/03 05:30// Posted in 문화예술방 Posted by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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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My Sweet Baby, 2010, 류미례 감독)

 아이들, 하고 검색을 하면 개구리소년 사건을 다룬 이규만 감독의 ‘아이들…’만 뜬다. 뭐, 2주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리뷰를 쓰려고 하는 아이들은 그 ‘아이들…’이 아니라 류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이들’이다. 검색창에 ‘류미례 아이들’이라고 입력해야 검색되는 바로 그 아이들. ^^);;

이곳에는 상세히 밝힐 수 없는 특별한 기회가 생겨 그 아이들 특별시사회에 가게 됐다. 시사회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정을 조정했다. 함께 갈 사람을 조직했다. 작년에 이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딱히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미례 감독의 다큐라면’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 있었다. 류미례 감독의 영화는 인천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엄마…’가 전부였으면서도 그랬다. 그녀의 다큐멘터리는 마치 내 속을 다 알고 있는 절친, 혹은 언니가 내 등을 다독이는 것 같은, 공감과 치유의 힘이 있었다. 그녀가 엄마에서 아이로 시선을 옮겨 10년 동안 세 아이를 키우며 영화 찍는 워킹맘의 육아일기로 다큐를 찍었다면? 비록 내가 아이를 낳아 보지도 길러 보지도 않았지만, 분명 공감할 만한 따뜻한 다큐멘터리일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엄마, 괜찮아요… 고마워요…

 

 나의 밑도 끝도 없는 기대는 현실이 됐다.

우선 류미례 감독의 아이들, 이제는 엄마의 다정한 친구가 된 첫딸 하은이, 삼남매 중 가장 유약하고 여린 둘째아들 한별, 제일 씩씩하고 거침없는 막내딸 은별이까지, 세 아이가 너무 예뻤다. 아이들이 때론 칭얼대고 때론 귀염을 떨고 때론 서럽게 울먹이는 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그래, 안다. 스크린 속 아이들이니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는 거. 내 성격에 저 아이들 코 앞에 두고 30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자신없다. -_-);; 아무튼! 아이들은 역시 예뻤다.

이 영화는 참 이상했다. 그렇게 빙그레 웃음이 번지는 가운데서도, 계속 울컥거렸다. (생각해 보니 전작 ‘엄마…’도 그랬다. ‘전통적인’ 엄마로부터 한참 벗어난 마요네즈 엄마인 감독의 엄마 모습에 깔깔대면서도 눈가엔 물기가 번졌더랬지.) 대책 없이 덜컥 덜컥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잡지 못하면 안달이 나서 카메라가방과 아이를 들쳐업고 집과 어린이집, 학교, 푸른영상을 오가는 그녀의 동동걸음을 보며 왠지 모를 울컥거림이 올라왔다. 이건 뭐지?

그래,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 자체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별다른 고민 없이 덜컥, 저질러 버린 결혼과 도대체 성교육은 제대로 받긴 한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대책 없이 아이를 만들고 마는 류미례 감독의 육아는 더더욱 버거워 보인다. 허덕이며 아이를 키우고 그 와중에도 영화 작업하겠다고 그림자 엄마 되기’(이건 영화를 봐야 안다.)라는 독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 감독을 보는 게 안쓰럽다. 왜 여자는,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저렇게 가혹한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내게 울컥거림을 안겨준 것은 출산과 육아, 그리고 사회적 일(그럼 출산과 육아는 사회적 일이 아니란 말야? 쳇! 이 표현 정말 맘에 안 드는데 달리 어찌 표현해야 할지… ㅠㅠ 통념상 구분을 따를 수밖에… 젠장! -_-)을 병행하는 워킹맘의 애환은 아니었다. 솔직히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은 왜 이렇게 울컥거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영화가 끝난 후 류미례 감독과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쌤이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에 이르러서야 나를 울먹거리게 한 이유를 깨달았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엄마들

 


감독은 첫째 하은이가 갓난아이이던 시절 분리장애를 겪게 했던 것에 마음아파하며 둘째 한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긴 육아휴직에 들어간다. 그러나 카메라를 잡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 이게 어찌 성격이리오!) 탓에 다시 일을 시작하고 그 와중에 셋째 은별이가 태어난다.

삼남매를 키우는 동안 감독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내가 과연 엄마 자격이 있는 것일까?’였다.

이 아이가 나 아닌 다른 엄마(보통 텔레비전이나 육아지침서에 나오는 훌륭한 엄마들)를 만났더라면, 하은이는 분리장애를 겪지 않았을 것이고, 한별이는 지금까지도 “엄마는 한별이 귀여워, 안 귀여워?” 하며 끊임없이 애정을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맏이로서 평소엔 꽤 성숙한 태도를 보이는 하은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도 하굣길을 엄마가 함께해 달라고 억지 부지리도 않을 텐데. 엄마 될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엄마가 되어서 아이들이 불행해지는 건 아닐까? 어릴 적 젖도 떼기 전에 엄마에게서 버림 받은 본원적(!) 상처가, 어머니에 대한 화풀이를 그 즈음에 세상에 태어난 어린 나에게 풀었던 아버지의 폭력의 흔적이,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엄마로 만든 것은 아닐까? 이렇게 불완전한 엄마의 불완전한 보살핌 속에 자란 아이들도 나처럼 불완전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10년 동안 아이를 키우는 내내 감독을 따라다녔던 자책, 죄책감, 자신없음…. 나를 울컥거리게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관객과의 대화 중 감독은 물론이고 남들 고민 다 해결해줄 것처럼 보이는 정혜신 쌤도, 아이 셋을 키우면서 매일밤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여성관객도, 자책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엄마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 이 엄마들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엄마… ㅠ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류미례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나름의 치유를 얻었다고 했다. 그렇게 자책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육아의 시절을 보내며, 그것을 영상기록으로 남기고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편집하며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단다. 엄마가 날 젖먹이 때 버린 것은 사실이고, 그 후로 아버지의 폭력에 상처입은 것 역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습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의 보살핌이 없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도 자기 몫의 인생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나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정혜신 쌤 역시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도움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엄마 역시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인간이고 자식 또한 불완전한 인간일 따름이다. 그 불완전한 둘이 관계를 맺는데, 누군가의 온전한 책임으로 떠넘겨질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이런 결론을 얻었다.

울먹이며 엄마로서의 죄책감을 말하던 한 관객은 한 사람의 성장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아기 엄마의 보살핌으로 돌리는 육아지침서와 교육서, 전문가들의 조언에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죄책감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그래, 왜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책임이 엄마한테 있다는 것인지, 왜 엄마들은 전업으로 육아에 매달리든 파트타임 육아(?)를 하든 자책과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것인지, 소위 전문가의 입을 빌어 그렇게 훈계하고 협박하는 그들의 말은 과연 정답인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아이를 낳아 보지도 키워 보지도 않은 나로서는 경험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더 엄마가 아닌 자식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어린시절 엄마의 보살핌은 어떠했는가?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는가?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 아래 삼남매의 막내딸로 자란 나는 방치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지도 못했다. 가난한 농사꾼 살림인지라 산후조리랄 것도 없이 곧장 밭으로 나가야 했던 엄마는 어린 나를 나무 사이에 묶어둔 포대기에 담아두고(?) 김을 맸다고 한다. 엄마가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애가 죽는 소리로 빽빽대길래 가보니 내가 바둥대는 바람에 포대기가 꼬여서 목이 졸렸다던가? 뭐, 그런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주던 엄마에게서는 (내가 무심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자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어렸을 적 얼마나 성질이 더러웠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로, 구박의 도구(!)로, 그 사연을 읊으셨다고 해야 옳다. -_-);;

갓난아기 때부터 시작된 아토피 발진으로 소 한 마리를 해치웠다는 것 역시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당시 소는 엄청 비쌌고 우리집 형편에 소 한 마리는 엄청난 출혈을 의미하니까. 내 어릴 적 아토피를 이야기할 때마다 소 한 마리’를 데리고 오시는(ㅋㅋ) 엄마를 보면, 아픈 딸 수발하느라 고생했을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많이 웃긴다. 그리고 그렇게 구박하듯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엄마가 참 고맙다.

난 나의 부모를 무척 존경한다. 두 분이 무슨 사회적 업적을 남긴 분도 아니고, 초등학교 간신히 졸업한 가난한 농사꾼 부부여서 요즘 엄마들이 읽는 육아전문서적 같은 건 한 줄도 안 읽어보신 분들이지만, 난 당신들의 양육방식을 존경한다. 아니, 부모님의 양육방식은 당신들의 삶의 방식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부모님의 삶을 존경한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다.

나의 부모는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심이 거의 없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소유와 소비에 무관심한 반자본주의적 인간형들이시다. ㅋㅋ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부모님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은 기억도 없지만, 또한 부모님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기대한 기억도 없다. 방목형 양육이라고 언니랑 농담처럼 이야기하곤 했지만, 자식을 당신들의 온전히 어찌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태도가 그런 양육 방식을 낳았을 것이다. 다만 당신들의 삶에 최선을 다하실 뿐이다.

부모님의 방목형 양육으로 나는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 나름 나쁘지 않다. (솔직히 속으로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뻑이거든. ㅋㅋ)

한 사람의 삶이 유아기 부모, 특히 엄마의 보살핌으로 결정된다는 소위 전문가들의 의견은, 결국 자식이 부모의 소유라는 관념으로부터 나온 게 아닐까? 그러한 관념이 양육은 사적, 즉 가족, 그 중에서도 엄마가 책임져야 하는 지금의 말도 안 되는 제도를 만든 게 아닐까? 그러한 관념과 제도가 세상의 엄마들을 죄책감의 노예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엄마, 괜찮아!

 


다시 또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정말 엄마는 나를 키우며 엄마로서 자책이나 죄책감을 안 가지셨을까? 글쎄, 평소 엄마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별로 안 가지신 것 같은데 말이지. ㅋㅋㅋ

아, 하나 떠오른다. 이것도 아토피에 관한 거다. (으이그, 징글징글한 녀석!) 내게 아토피 발진이 시작되었던 1970년대 초반엔 아토피란 말도 없었다. 갓난애의 피부에 발진이 생기면 태열이라고 했다. 많은 아기들이 갓난쟁이 때 잠시 발진이 생겼다가 가라앉기도 했으니 태열이란 명칭이 그리 틀리지도 않은 것 같다. 문제는, 그 당시가 아토피에 대한 아무런 의학적 약리적 기반이 없던 이 나라에 일본으로부터 부작용이 확인되지 않은 독한 스테로이드제제가 무분별하게 수입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스테로이드제제, 호르몬제제에 대한 규제따위는 물론 없던 시절이었다. (이 사실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_-);;

각설하고, 엄마는 앞서 말했듯 ‘소 한 마리’를 문제의 독한 스테로이드제제 사는 데 쓰셨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엄마는 아주 가끔, 아토피 발진으로 몹쓸 얼굴을 하고 있는 막내딸의 얼굴에 한숨을 지으며 아주 가끔, 미안하다고, 너무 무식해서 아무것도 몰라서 오히려 병세를 악화시켜 이렇게 어른이 돼서도 고생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건 당시 한국 의료체제의 탓이지 엄마 책임이 아니다. 솔까말, 정말 어릴 적 무턱대고 발랐던 그 비싼 약들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아토피로 고생하고 있는 건지는, 확실치 않다. 의사도 모른다. 그러니 엄마가 미안해할 일 전혀 없다.

그리고 류미례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지금의 내가 (아토피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최선을 다한 것이고, 나머지는 내 몫이다.

관객과의 대화까지 끝내고 인천으로 내려오는 길에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괜찮다고, 그건 엄마 탓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관뒀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런 전화는 안 걸었다. 솔까말, 그렇게 드라마 대사같은 대화를 주고받던 모녀지간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하려면 수족근육이 수축되는 느낌이 먼저 들어서 말이지. -_-);;

그래도, 언젠간 꼭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엄마, 나 괜찮아. 엄마 탓 아니야. 그리고 엄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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