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토끼 이야기

<고양이춤>을 보고 와서

'내 인생의 고양이들' 뭐 비슷한 이름의 글을 써보려고

예전에 썼던 고양이 글을 찾으려는데....

토끼가 나오네. 토끼가....

 

2002년 8월 14일의 글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이제사 가슴에 묻었던 나의 토끼를 꺼내놓는다.

남편이 사제서품을 받은 다음 날,

우리는 바람도 쐴 겸 해서 집 앞 수퍼에 맥주를 사러 나갔다.

맥주 한 병을 사서 달랑달랑 들고 오는데 우리 집 쪽문 앞에서 까만 물체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고양이인가 했으나 그것의 움직임은 고양이의 유연함과는 확연히 달랐다.

 

토끼였다.

 

세상에, 토끼가 차가 다니는 집앞 골목길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주차해놓은 자동차 아래로 깊숙히 들어가있는 토끼를 꺼내기 위해

우리는 나뭇가지를 구해서 유인했다.

토끼는 하은이만큼 힘이 세서 나뭇가지를 뺏어 버렸고

먹을 수도 없이 빳빳한 잎을 입에 대고 우물거렸다.

며칠을 굶었는지 모를 불쌍한 토끼.

그렇게 토끼는 우리 집 마당에서 살게 되었다.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등에 업힌 하은이가 자동차에 머리를 찧는 사고가 발생하긴 했지만

마당에서 깡총깡총 뛰는 토끼를 보는 것으로 곧 울음을 그쳤다.

토끼는 신기하게도 오라고 하면 왔고 가라고 하면 갔다.

잘 지내나 궁금해서 마당에 나가 "토끼야~" 하고 부르면

얼른 뛰어나와 신발에 머리를 얹었다. '

토끼'라는 이름의 그 까만 토끼는 낮에는 마당을 뛰어다녔고

밤이면 옆집 고양이를 피해 예배실에서 잤다.

하은이도 마당에 나가면 손을 흔들어 토끼를 부르고

토끼는 그 작은 하은이의 부름도 무시하지 않고 뛰어나왔다.

 

일본과 러시아의 축구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아마도 토끼가 우리에게 온 지 열흘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나는 집 앞 수퍼에 감자를 사러 갔다가 토끼에게 줄 당근을 살까 말까 망설였지만

냉장고에 오이와 수박껍질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는 그냥 감자만 샀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센터에 살고 있는 우석씨가 뛰어왔다.

그는 남편과 무슨 대화를 나눴지만 난 자세히 듣지 못했다.

 

우석씨가 가고 남편에게 무슨 일인가, 물었다.

토끼가 황진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했다.

우석씨에게 다시 물어보니 황진이 옆에 놓여있던 당근을 먹으러 가다가 변을 당한 거라고 했다.

말리려고 했지만 황진이가 워낙 사나워진 상태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난 토끼의 죽음에 놀랐지만 더 놀라웠던 건 남편의 태도였다.

남편은 빨리 저녁을 먹자고 했다.

난 아무 말없이 저녁상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토끼는 까만 비닐종이에 담겨 쓰레기봉지에 버려져있었다.

 

나는 종이가방에 토끼를 담고 삽을 챙겨서 산으로 올라갔다.

밤중의 산 속엔 아무도 없었다.

적당한 곳을 골라 땅을 파고 종이를 깔고....그리고 토끼를 뉘였다.

토끼의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종이로 싼 토끼의 몸에 흙을 덮기 전

혹시 나는 토끼가 살아있는 건 아닐까, 잠깐 기절한 건 아닐까

다시 한 번 심장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손을 대보았다.

몸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움직이는 곳은 없었다.

 

내가 수퍼에서 당근을 살까 말까 망설이던 때로부터

1시간이 채 안되는 동안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보니 엄마가 하은이를 업고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은이가 날 찾는라 막 울었다고 한다.

하은이를 안고 집에 들어갔더니 남편은

축.구.를. 보.고. 있었다.

나는 축구를 보고 있는 남편을 낯선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고

남편은 울어서 눈이 빨개진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건 싸움도 아니었다.

열흘을 같이 산 토끼가 죽었는데 곧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

토끼가 죽었는데 기도 한 번 없이 축구를 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내가 왔다고 좋아하는 하은이를 보면서

나는 남편을 이해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은 축구 때문일 것이다라고.

축구가 잠시 저사람을 바꾼 거라고.

역시 축구는 싫다, 하면서.

 

며칠을 하은이와 관련된 말만 하면서 보냈다.

토끼가 뛰어다니던 마당에는 절대 가지 않으면서.

그러던 어느 날, 하은이를 재우러 마당에 나갔다.

나는 남편에게 그날 수퍼에서 팔던 당근 얘기를 했다.

내가 그 때 당근을 샀더라면

그 당근을 토끼에게 줬더라면

토끼는 죽지 않았을거라는 얘기를.

그리고 그 날 산 속에서 토끼를 묻던 얘기를 했다.

깡총거리며 뛰어놀던 토끼가 한순간에 세상을 달리한 것에 대한 충격을.

1시간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원했던 그 불가능한 간절함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남편에 대한 실망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생각이 달랐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토끼의 죽음을

남편은 다행으로 여겼다.

주인에게 버림받고 거리를 헤매다 고작 찾은 장애인센터,

낮이면 차가 빵빵거리고

밤이면 고양이며 쥐를 피해 답답한 예배실에 숨어있어야 하는 처량한 신세,

예기치 않던 사고였지만

이제사 편안하게 갔구나 싶었단다.

 

내가 죽음에 대해서 충격을 받을 때

그는 죽음은 이렇게나 가까이 있다..

살아가는 것과는 종이 한 장 차이도 안나게 가까이 있다,

그렇게 친근함을 느꼈다고 했다.

내가 남편에게 실망을 느낄 때, 그는 내게 거리감을 느꼈다고 했다.

저런 사람이구나...저렇게 우는구나,

그렇게 내가 낯설었다 했다.

 

싸움 한 번 없이 시작된 냉전은 그렇게 끝났다.

며칠동안 하은이는 마당에 나가면 손을 흔들며 토끼를 찾았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곧 하은이는 토끼를 잊었다.

우리는 여전히 집앞 수퍼에서 맥주 한 병을 사서 달랑거리며 들고 오고

마당에 나가서 하은이를 재우곤 한다.

 

그리고 가끔 남편에게서 새로운 점을 발견했다 싶을 때

나는 예전처럼 신기해하지 않는다.

그저 '토끼'를 생각하면 그 뿐이었다.

'토끼'와 함께 지내고 또 떠나보내는 동안

난 이제 더이상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세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나의 토끼는 죽고 없다.

그건 내가 죽어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