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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7

** 매일 작업일지 쓰기

 

기러기  메리 올리버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사막을 가로지르는 백 마일의 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며 참회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어요.
절망에 대해 말해보세요, 당신의 절망을, 그러면 나의 절망을 말해줄게요.
그러는 동안 세상은 돌아가죠.
그러는 동안 태양과 맑은 빗방울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나아가요,
넓은 초원과 깊은 나무들을 넘고
산과 강을 넘어서.
그러는 동안 맑고 푸른 하늘 높은 곳에서
기러기들은 다시 집을 향해 날아갑니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고
기러기처럼 그대에게 소리쳐요, 격하고 또 뜨겁게 -
세상 만물이 이루는 가족 속에
그대의 자리를 되풀이 알려주며.

*시집 <꿈 작업>(Dream Work, 1986)

 
 

1. 작업일지가 되기 위해서는 작업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냥 일지만 이다.

그래도 매일매일 쓴다.

매일매일 생각하고 매일매일 기록하다보면 

일상의 단상들과 작업의 상념들이 섞여들다가 

어느 순간에는 작업의 상념들이 더 많아질거야.

기록들을 보며 곱씹고 변해가고 그리고 나아져야지.

 

2. 작업에 집중할 상황이 되면 늘 다른 일이 생긴다.

어제도 그랬다. 어제, 파일리스트를 작성하다보니 약속시간이 다 되었다.

막내를 데리고 하점면에 사시는 안선생님 내외를 모시러 감.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는 연례행사는 두 개다.

점심식사와 정동진영화제 참석.

1년간의 근황과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48년을 감옥에 있었던 '세계 최장기수' 기록을 가진 분보다 

딱 1년이 모자랐던 안선생님의 삶은

좀 안타깝다.

그 분은 늘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방식이 옆에 있는 동지에게 상처를 준다

준법서약서를 쓴 김선생님이 나는 좋다.

선생님은 어제도 내 선물로 포스트잇 세트를 주셨다.

신문지로 둘둘 말린 걸 건네시며 "00하는 거"라고 하셨는데

"뒤로 가는 거"라고 잘못 듣고서 "장난감 자동차예요?"하고 풀어보았더니....

포스트잇 세트였다. 선생님 말씀은 "기록하는 거"였어. 하하

 

안선생님이 자신의 고통을 말하며 "김선생은 진짜 징역맛을 몰라"라고 말할 때

"김선생은 북에서 편안하게 살다 내려왔지."라고 말할  때

그래선 안되는데 안샘이 살짝 미웠다.

선생님 그러시면 안돼요.........

라고 생각은 하지만 말할 수는 없다.

상상못할 고통에 젊음을 다 보낸 이 분들에게

삶은 너무 무심하다. 

선생님들과 김포 어딘가에 있는 집구경 다녀옴.

다시 찾아보니 월곶면 용강리네.

  

3. 강화로 돌아와서 문학기행을 다녀온 큰애를 데려오기 위해 강화읍에서 기다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해야 하는데

도서관 앞에 차를 세운 후 잠깐 쉰다는 게 깜박 졸았다.

트렁크에 있는 책을 꺼내서 반납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동력이 끊긴 로보트처럼

나는 '얼음'이 되어 손끝 하나도 움직일 힘이 없어 차에서 잤다.

큰애의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책을 반납하고 

큰애와 함께 집에 와서 아이들 먹을 걸 챙겨주고 또 잤다.

잠깐 자고 일어나니 10시. 

막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다시 자려는데

이런 저런 생각들이 쉴새없이 올라온다.

 

더그 블락 감독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대학을 가기 위해 집을 떠나는 딸을 심정적으로 독립시키지 못하는 부모의 자전적 다큐.

20년 가까운 세월의 푸티지가 있다.

<아이들>을 편집하며 '푸티지 절제하기'를 배울 수 있었던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감독이 우울증 있는 아내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아내에게 우울증이 왔다. 우울증이 오면 아내는 며칠동안 침대에만 누워있다"

나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안하고 쉴 수 있는 감독의 아내가 부러웠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감독을 남편으로 둔 게 부러웠고

그렇게 일을 쉴 수 있는 처지가 또 부러웠다. 

 

정말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요즘이 그런 것같다.

이상하게도 일이 몰릴 때가 있다.

1년에 네 번 쓰는 인권포럼

두 달에 한 번 쓰는 보이스

한 달에 한 번 쓰는 작은책, 주간기독교, 경기도 장애인정보신문,

인터벌을 알 수 없게 부정기적으로 청탁이 오는 강화 마을 신문

목요일에 마감했던 작은책 원고를 시작으로 이 모든 글의 마감이 다음 주로 몰렸다.

거기에 송도교육 차시 평가서, 수강생들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오늘까지는 보내야한다.

한국장애학회 원고며 장애인캐릭터상 관련 실무도 지금쯤은 진행을 해야 한다.

결국은 제 때 일을 배분하지 못한 내 탓이긴 한데

쉴새없이 움직여도 늘 할 일은 쌓여있다.

 

목요일날 작업실 마당 구석진 곳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다가

사는 방식을 바꿔야할 것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2주 전쯤에 학자들 중의 대표격인 사무국장님이 내게 

천오백만원 예산의 영상물 하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동료들과 상의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도시락을 먹다가 갑자기 삶의 태도까지 생각이 튄 것은

그날 나는 잘 풀리지 않는 작은책 원고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고

도시락을 먹고 나면 얼마 안 있다가 송도로 떠나야했다.

그런 답답한 상황이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게 했을 것이다. 

가는 데 3시간, 오는 데 2시간. (김포의 도로는 항상 공사중이라 갈 땐 차가 막히니까)

왕복 5시간을 길에 쏟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교육을 다녔다.

한 시간에 6만원, 세 시간에 18만원인 그 교육을 받은 이유는

C를 돕고 싶어서였다.

C는 지역영화단체의 대표이고 지역에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고는 나 뿐인 것같았다.

(다른 사람도 많지만 다 서울이 주무대이니까. 나는 회원으로 가입도 했다.)

지역을 위한 C의 헌신에 감동한 나는 다큐강의가 자리잡히는 데 일조를 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주강사 18만원, 보조강사 6만원인 그 교육을 C에게 팀티칭으로 진행하자고 제안한 후

강사료 전체를 반으로 나눠서 12만원씩 갖기로 했다.

그러면 12회 강의가 144만원인 거다.

나누지 않았어도 216만원인거야.

그러니까 이동시간 5시간, 본강의 3시간에 차시안  쓰고 평가서 쓰고 하는 일을 열두번 한 댓가가

216만원인 거지. 기획, 평가 빼고 들어간 시간으로만 계산해보면 시급 22,500원.

송도며 파주며 서울을 동분서주하는데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대안학교 강의료 종합 585만원.

벌이없는 후배들을 보조강사로 고용해서 그 사례로 160만원 정도를 주고 429만원이 남음.

(벌이없는 후배들을 보조강사로 채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배로서의 의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나처럼  절박하지 않은 후배들을 보면 그냥 나만 생각할까 고민이 들기도 한다.

교육이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T선배는 단순 노가다로 돈을 번다. 일당 7만원이라고.

건축 현장 노가다로 돈을 버는 사람은 T선배 외에 DY가 있다.

파주 교육을 시작하면서 DY에게 강사를 같이 하자고 했더니  

그는 "교육한 지 오래되어서 까먹었어" 하며 그냥 몸을 쓰겠다고 했다.

저번에 고구마 모종을 심던 날 DY 생각이 났다.

엄마한테 일 못한다고 구박받으며

나는 육체노동자로는 돈을 못 벌겠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T선배나 DY처럼 살 수는 없는 거다)   

 

절반 정도 진행한 파주교육은 1년 강사료 총합이 420만원이다.

2학기 때 어떤 교육을 더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진행해왔고 앞으로 진행해야할 미디어교육의 전체 강사료를 다 합해도 1200만원 정도.

교육이 한 번 잡히면 그 날 하루는 다 날아가는데

그러느라 지금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래도 괜찮은 거냐....

 

나의 첫 연출인 T감독님은 3년을 함께 일하다가 2000년에 떠나면서

내게 당부를 했었다.

"촬영같은 단순 알바는 돈이 없어도 후배들에게 넘겨야한다."

"농부는 풍년이든 흉년이든 추수를 해야 한다. 그러니 농부의 마음으로 다큐를 해라"

이 두 가지 당부는 나를 등대처럼 이끌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촬영같은 단순 알바는 많지가 않다.

싸고 좋은 카메라는 넘쳐나고 영상인들도 넘쳐나니까.

그나마 나는 대학강의를 하고 가끔 심사를 하며 돈을 벌지만

나만큼의 경력이 되지 않는 후배들은 벌이가 없다.

내가 후배들에게 나름 의미있는 생계수단으로 추천한 게 미디어교육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는 교육기획을 해서 펀딩을 따내고 거기에 후배들을 고용했었다.

최초의 무엇, 이라는 이름을 따내가며 미디액트와 함께 이뤘던 성과들.

하지만 그후 공적기관이 생기고 공적자금은 기관으로만 몰렸다.

기획을 해서 기금을 따내고 내가 운영의 주체가 되는 방법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미디액트의 성과들은 인장없이 공적 기관에서 마구마구 쓰여지고 있다.

괜찮다. 잘 쓰이니 다행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념이나 취지는 쏙 빼놓은 채 그냥 서식이나 방법론만 쓰이고 있다는 거다. 

씨를 뿌려 새싹을 돋게 하고 뿌듯한 성과를 얻었다.

그런데 그 성과물만 싹 다 가져간 이들이 우리를 배제한다.

2014년에 후배들에게,

"이젠 내가 교육기획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제 공적자금이 몰리는 기관의 강사가 되자" 

라는 말을 하고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소외계층미디어교육 ' 강사 신청을 했다. 

인터뷰자리에서 생각지도  않은 모멸을 당함.

"경력은 많으신데 방송은 모르시네요. 방송을 배우실 건가요,  방송을 배제할 건가요?"

너무 황당한 질문이라 뭐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상언어는 다양하다. 그 언어 사이의 위계는 없다.

방송출신 독립PD들이 독립다큐감독들을 아마추어 취급하는 건

방송언어를 최상위에 두는 오만에 기초한다. 

과도한 설명, 과도한 음악, 

그런 과도한 가이드 때문에 싼티나는 영상을 만들어내면서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물이 영상언어를 가장 훌륭하게 구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아마도 외주프로덕션에서 굴러먹다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밥벌이를 하면서

방송언어만이 최고라는 마인드로 교육운영을 책임지고 있겠지.

암튼 그렇게 첫번째 시도는 불발.

그 후 C의 부탁으로 교육을 맡으면서 인천에 다시 다니게는 됐지만

그날 면접자리에서 봤던 팀장과 센터장에게 나는 꼭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는다.

그들도 불편하겠지만, 내가 아쉬운 그들은 나를 보고 친절하게 웃는다.

흥! 나는 뒤끝이 아주 긴 사람입니다.

 

어쨌든 촬영알바는 절대 넘보지 않고

교육을 만들다가

이제는 교육기관에 소속되어서 강사로 활동하고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해서 돈을 번다.

그런데 목요일 점심, 잘 풀리지 않는 원고와 곧 떠나야하는 먼 길을 앞에 두고

왜 이렇게 살아야하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 거다.

나는 작업을 하고 싶어.

9시부터 6시까지 열심히 작업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하루 일을 도란도란 나누다 잠자리에 들고 싶다고.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대안학교 교육

10회로 끊어가는 서울교육

역시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송도교육

6월의 어느 날, 이 세 개가 겹친 하루가 있었다.

이동시간이 빠듯해서 삶은 감자를 싸왔다.

아침에 회의 하나를 끝내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감자를 먹으려고 했는데

그날은 너무 더웠고 그래서인지 차 안에 두고 갔던 감자가 쉬어버렸다.

이동시간 때문에 밥을 못 먹은 날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그 날 갑자기 쉰 감자를 한 입 베어물었다가 뱉고 나니 눈물이 났다.

 

학력고사가 끝나자마자 담임선생님은 나를 불러서 과외를 소개시켜주었다.

우리 반 어떤 애의 친척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은 내가 학비를 벌어야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니까.

그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돈 버는 일을 멈춰본 적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헤맬 때조차 나는 학원강사를 했고

아이를 낳고 기를 때에는 아이들이 자는 새벽에 일어나 방송원고와 기고글을 썼다. 

아 맞다. 민예총 편집실을 갑자기 짤리고 다큐멘터리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은평소방서 앞의 공중전화박스에서 러시아 언니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를 했었다.

나는 그 때 '결혼이 아닌 독립'을 시도한 터라 그동안 저금한 돈을 몽땅 방 얻는 데 쓴 후였다.

언니에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돈이 한 푼도 없거든. 백만원만 빌려줘. 나중에 꼭 갚을께"

가까이 있는 오빠나, 한국의 다른 언니들이 아닌,

먼 데 러시아언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건

심정적으로 러시아언니가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어서였을 거다.

그때 돈벌이에서 해방되어 몇 달을 살면서 편안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던 건 그 안락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일이 몸에 배어있어서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2013년 사태'를 겪으면서 내가 어떤 자리에 서있는가를 확실히 알았다.

집이 없어지고 차가 없어지고 직장이 없어졌다.

나는 그동안 저금했던 돈을 다 털어서 남편의 벌금을 물고 남편의 차를 샀다.

그 때 내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말은 새언니의 "아가씨, 뭐가 필요해? 뭐든 말해"라는 말이었다.

나는 내 가족들 중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았다.

반면 남편의 가족들은 내게서 빌려간 돈도 갚지 않았다.

남편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편 또한 스무살부터 혼자 몸을 꾸려온 사람이다.

기숙사가 문을 닫는 방학이 되면 갈 데가 없어서 친구 집을 전전했다고  한다.

형제들이 있었음에도 남편의 형제들은...... 남편에게 그런 존재들이다.

모두들 집 한 채씩은 가지고 있었고 우리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식사자리에서는 늘 남편이 돈을 냈다.

'시댁'이라고 불리는 그 집안에서의 남편의 위치와 행태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고 오로지 나와 아이들밖에 남지 않은 남편에게 나는 선언했다.

나는 당신 하나를 거두는 것만으로도 벅차니 이제 당신 가족들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당신 가족의 집에는 가지 않겠다, 공평한 걸 원한다면 우리 가족의 집에도 가지 않겠다.

지금 나는 당신을 버리지않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나의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변한 것은 없었다. 

남편은 아이들과 자기 가족들과의 끈은 유지하기를 바랬고

그래서 명절 때면 나는 늘 혼자 집에 있다.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 있는 것으로 남편과의 의리를 지킨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013년 사태'는 내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남편도 믿을 수 없다. 

남편은 돈을 못 번다. 돈은 못 벌어도 하고 싶은 일은 많다.

남편이 돈을 못 버는 건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남편이 자신이 버는 것 이상으로 돈을 쓰는 데 있다.

결혼을 하고 남편 통장을 집안의 주통장으로 정하고 관리를 맡았는데

결혼 전에 저금했던 돈을 거기에 다 넣으니 -150이 찍혔다.

내가 모르고 마이너스 통장에 돈을 입금한 거다.

한 달 백만원이 못 되는 돈을 벌면서 그것보다 넘치는 지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너스 통장 덕분이었다. 

그런 식의 삶의 방식은 내게는 너무나 낯설다.

중학교 시절 눈앞에서 친구의 죽음을 본 후로

남편은 인생  뭐 별 거 있나, 와같은 태도로 살아온 것같다.

'지금 행복하자'는 삶의 모토에 관여하고 싶지는 않으나

빚을 지는 삶을 용납할 수 없다.

 

최근의 싸움에서 나는 아주 치졸한 말을 했다.

"고등학교 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어. 그게 내 일이었으니까.

좋은 대학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실패하더라도 내 앞에 제시된 과제를 수행하느라 노력하면서 문턱 하나를 넘는 거야.

청소년기에 문턱을 넘지 못한 당신의 그 습성이 인생 곳곳에 배어있어.

내 아이들에게 그것이 스미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다시 태어나길 바래.

제발 다이어리에 일정 좀 적어서 약속 펑크내지 말고 돈 좀 아껴.

당신 앞가림 좀 해."

 

15년 동안 통장관리를 하다가 남편의 씀씀이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서

직접 한 번 관리를 해보라 하고 맡겼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하고 맡긴 건데 매달 마이너스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카드결제일이 지난 다음에 통장잔액이 0인  것을

내가 물어봐야 안다는 거다.

통장잔액과 카드결제액을 맞추지 않으면 마이너스만큼 이자가 쌓인다는 것을 모르나.

모른다. 자기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내가 쉰 감자를 베어물었다가 눈물을 흘린 그 날,

왜 이렇게 살아야하나 회의하던 그 날,

그 날 오후에 때마침 남편이 전화를 해서 백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사무실 운영비가 모자르다고 했다. 

돈을 보내고 그냥 낮의 눈물을 잊었다.

이렇게 살아야한다. 

 

러시아언니와 카톡을 하다가, 쉰 감자 얘기를 했다.

그날 내 눈물에 대해서. 가끔 이 삶이 벅차다는 얘기를 했다.

이 결혼을 후회한다는 얘기도 했다.

그 말 끝에 언니가 말했다.

그래서 니가 니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야.

유능한 남자들은 뒷바라지를 원하잖니.

맞아. 이건 내 선택의 몫이다.

남자가 벌어들이는 돈을 관리하고 살림을 잘하면서 만족하는 삶도 있으니까.

내가 지금 겪는 일은 모두 내 선택의 결과이니 후회하면 안된다.

 

남편은 박사과정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학비가 얼마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를 너무 많이 믿는 거 아냐? 보통 사람들은 그럴 때 재정상태를 살펴.

그는 늘 그런 식으로 일을 벌인다.

돈이 없으면 현금서비스를 받고 현금 서비스로 모자르면 마이너스 통장을 쓴다. 

강화로 이사를 오면서 400만원 정도 예산 안에서 중고차를 사려고 했는데 

남편이 봐뒀다고 900만원짜리 차를 샀다. 

돈이 어디서 났나 신기해했는데 이율 높은 카드론대출을 받았다고 해서

또 그거 메꾸느라 골머리.

 

둘째언니가 학습지교사며 보험외판원이며 10년동안 온갖 고생으로 뒷바라지를 해서 

이제 막 대학교수가 된 형부를 두고 이혼을 결심했을 때

그 때 오빠는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서방이 바람을 피우냐,  도박을 하냐,  너를 때리기를 하냐. 참고 살아라"

남편이 실수로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오빠는 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유서방 기죽이면 안된다"

남자들은 참 좋겠다.

그런데 나는 이 남자가 필요하다.

 

나는 이른바 '정상가족' 안에서 내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한부모 가정의 아이로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지금 내 작업의 내용은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깨는 것이지만

나는 내 아이들은 이른바 '정상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키우고 싶다. 

이 균열이 나의 고통일지라도

이 고통이 나의 작업의 밑거름이 될거라고 믿어야한다.

돈 버는 일과 작업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말인데 단 한 번도 어떤 선택에서 돈을 고려한 적이 없는데

이제부터는 삶의 태도를 바꿔야겠다.

돈을 고려해야겠어.

돈은 곧 내 시간이고 내 정성이니.

같은 분량의 원고인데 인권포럼은 20만원을 주고 보이스는 5만원을 준다.

같은 분량의 원고인데 주간기독교는 7만원을 주고, 경기도 신문은 5만원,

작은책은 쌀 한봉지를 주고 마을신문은 아무 것도 안준다.

그래도 작은책은 계속 해야지. 그건 돈벌이가 아니라 내 활동이니까. 

그리고 영상물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얼른 하겠다고 해야겠어.

엄기호처럼  당당하게  "제 생계에 도움되는 일 외에는 활동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하며 거절도 잘 해야겠어.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날

살아가는 태도를 바꿔야겠어!

라고 결심한 날

나는 이 풍경을 보았다. 구름이 참 예뻤다. 

어린  시절,  모두가 들일을 하러 나가고 혼자 가게를 지키며 바라보면 

고개마루에 이런 하늘이 있었다.

나는 그 때로부터 아주 많이, 아주 멀리 떠나왔다.

 

가끔 <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만화에서 봤는지 드라마에서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서민 출신의 왕비 윤은혜를 국민들이 좋아한다.

그래서 윤은혜를 고민하게 만드는 송지효를 사람들이 미워한다.

송지효는 그 모든 욕을 묵묵히 견딘다.

송지효를 좋아하는 남자가 그런 말을 한다.

"잘 견디는 당신이 대단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아무도 없는 골목 끝에서 눈물흘리는 것을 보았어요"

송지효가 인적없는 골목끝에서 흘리던 눈물은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차 안에서 쉰 감자를 베어물다가 내가 흘렸던 눈물과 닮아있다.

삶의 무게로 등이 휠 것같아도 그것을 묵묵히 견디며 가는 거다.

가끔 물이 차오르면

차 안이나 인적없는 길에서

혹은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작업실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려 몸 밖으로 흘려보내면 되는 거다. 

나는 늘 최선의 것을 선택해왔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작은책 글이 너무 많이 퍼져나가버려서 20대의 인연들 중 연락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가 반가움 뿐이라면 괜찮은데 그것이 아닌 것같아서 불편할 때가 있다.

이룰 것은 이룬 40대 중후반, 빛나던 20대의 시간을 돌이켜보고 싶기도 하겠지.

나는 만남에 응하지 않는다.

국가기관의 높은 자리에 있는 어떤 선배는 집요하리만큼 자주 연락을 해온다.

이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더 피하고 싶다.(차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전화를 받지 않는 횟수가 늘어나면 그냥 알아서 내가 불편해한다고 알아주면 좋겠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너를 선택했다면 지금 더 편안하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보다는, 내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게 더 많아졌겠지,라는 생각에 아쉬울 때가 있다.

그런 마음이 너무 싫어. 

나는 늘 가장 최고의 것을 선택해왔다. 훗날 그것이 오류였다는 것을 알았다해도 후회는 안됨.

그냥 이 생애에서 내가 만들어온 이 길에서 다시 최고의 것을 선택하면 되는 거다. 

그 결심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음.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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