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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생활

떠돌이 생활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 벌초를 다녀온다.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에는 옛집들이 그대로 남아 마을을 지키면서 가끔씩 찾아오는 오래전주인을 반가이 맞아준다. 들판에는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 풍요로움을 더해주고, 먼 산을 바라보노라면 나무들 사이로 뛰어놀던 지난날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동네 어귀에서는 동네어른들과 어린아이들도 다정하게 맞아 준다. 나고 자라면서 마을 구석구석과 동네사람 모두와 정이 들어 엄마의 품속 같은 고향이다.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는 동안 머릿속에서 이런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온 나날들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살았겠지만, 나의 도시생활도 30년 넘게 서울의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 청년시절에는 이사가 잦았고, 결혼해서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한동네에 좀 오래 살았다. 살아온 동네들은 서대문, 영천, 홍제동, 뚝섬, 가리봉, 현저동, 녹번동, 사당동, 무악동, 잠실, 수서로 이어진다.

처음 영천시장위 언덕배기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놓고 시장에서 이불과 약간의 살림살이를 사들고 집을 찾아가는데, 좁은 골목들이 어찌나 비슷비슷해 보이는지 많이 헤매기도 하였다. 주택주변이 채소밭으로 가득한 뚝섬에서도 지내보았고, 가리봉의 벌집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살아 보았다. 벌집은 연탄부엌과 방 하나의 구조로 이루어진 셋방들이 2~3층 규모로 된 집에 수십 개씩 있었다. 이런 집에 하나뿐인 화장실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다 보니 줄을 서야 하고, 불결하고 냄새도 많이 났다. 홍제동에서는 살던 집에 불이 나서 총각 살림살이를 홀라당 다 태우게 되어, 불탄 집을 고치기까지 친구들 집으로 피신을 다니기도 했다. 당시 군사정권 시절에는 해 마다 투표를 하다시피 했는데,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기 까지 한 적도 있었다. 서대문에서 생활할 때에는 식당에서 세끼 밥을 다 사 먹으면서 식당 밥에 질리기도 했다. 한 밤중에 서대문대로에서 탱크와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문틈으로 보면서, 약간 무섭기도 하면서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 훈련이 80년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훈련을 했던 것 같다. 현저동의 세모진 작은방에서 살기도 했는데, 그곳 독립문 뒷길에는 김밥 집과 떡집들이 많이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할머니들이 분주하게 각종 떡과 도넛 김밥 튀김 등을 만들어,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팔러 나가는 모습을 보아왔다.

82년에 결혼을 하면서 녹번동에 2층 방 하나를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5만원에 얻어 살게 되었다. 옥상에 처마 밑을 슬레이트로 막아 연탄아궁이를 만들어 밥을 해 먹고, 화장실도 주인식구들이 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함께 사용을 했다. 사당동은 잠시 살았고, 그 후 인왕산 자락인 무악동에서 십여 년을 살았다. 그 동네의 절반 한쪽은 80년대 초반에 연립주택을 지었고, 절반은 노후주택이 남아있는 동네였다. 그 연립주택에서 몇 년 살다가, 부모님의 도움으로 같은 동네에 노후주택 16평짜리 허름한 집을 1,200만원에 사서 살게 되었다. 그 집은 비좁아 불편하고 언덕길을 오르내리기에 힘이 들었으며, 화장실도 수세식이 아니어서 냄새가 났다. 그래도 부모님의 정성이 담겨있고 내 집이었기에, 살아온 집중에 가장 편안했던 집이라고 기억된다. 골목길에서는 동네아이들이 뛰어 놀고, 아주머니들이 자리를 펴고 음식을 나누면서 함께 어울리던 정겨운 마을이었다. 이런 동네에 올림픽 즈음해서 동네 사람들이 구청으로 몰려다니면서 개발해야 한다고 하더니, 재개발을 하게 되었다. 가난한 마을이 개발되면 살고 있던 주민들 대부분이 떠나게 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도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일터가 잠실에 있어 가까운 잠실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잠실을 주변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걱정도 했었다. 살다보니 이곳도 익숙해지고, 새마을시장이 가까이 있어 서민들이 살기에 알맞은 동네였다. 우리 아이들은 독립문에서 초등학교를 시작을 하였지만, 이곳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10여 년 동안 잘 살고 있는데, 이 아파트도 지은 지 오래되어 재건축사업이 진행되면서 또 다른 곳을 찾아 가야했다. 낮은 아파트이기에 파란하늘과 별들이 창문 넘어 보이는 소박하고 편안한 집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개발이 완료된 지금 잠실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수십 층의 아파트들이 수만 세대나 들어서 있다.

생활터전이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우리에게 마땅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위에 우리가 찾는 아파트들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지라, 멀지 않아 재건축을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멀지 않은 수서가 다른 곳보다 부담이 적은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되어, 적당한 집을 찾아서 이사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사를 오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이제 서울 끝자락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떠나게 되면 다음은 또 어느 곳을 찾아가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을 미리 해 보기도 했다. 이곳은 주변에 번화가가 없어 동네가 조용하고 아늑하다. 아파트 앞뒤로 푸른 산과 하늘이 항상 보이고, 창문만 열면 시원한 공기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동네 앞에 대모산이 있어 쉽게 산을 오를 수 있고, 약수터 아래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감자 고구마 채소를 길러 먹는 재미까지 더해지니 더욱 즐겁다. 이제는 복잡한 도시 한복판이 도리어 어색하게 느껴지고, 이 동네에 정이 들어 계속 살았으면 하는 마음까지 생기고 있다.

이렇게 나의 도시생활을 되돌아보니 여러 곳으로 방랑했던 것 같다. 이는 한 사람의 경우가 아니고, 대부분의 도시사람들의 생활이 그러하다고 본다. 도시에서의 생활이 한 곳에서 정착을 하지 못하고 살기에, 살아가고 있는 동네가 나와 우리 동네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거나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기에 도시에서 마을공동체가 만들어지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시골의 고향마을이 우리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는 것은 오래된 마을과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고향은 우리에게 무한한 향수를 느끼게 해 주고, 고향을 찾는 우리에게 메마른 영혼을 포근하게 품어 주고 있다.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면서 살아가는 도시에서도 시골의 고향마을 같이 한곳에 계속 머물러 살면서, 마음을 주고 정을 나누는 도시속의 고향마을을 만들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아래는 지난 9월 작은책 글쓰기 모임때 쓴글이고, 위는 10월에 다시 고쳐 쓴글입니다.

 

이사

지난날 농경사회에서는 터를 잡고 살던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대대로 살게 되어 그 곳에서 사람들의 한평생 모든 삶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늘 도시화된 사회에서는 한곳에 정착하기 보다는  이곳저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니게 되어 정착을 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도시는 우리의 영혼을 포근하게 안아줄 고향이 되지 못하고 시골의 고향은 항상 그리움으로 남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나의 도시생활도 여기서 예외가 되지 않고 이 동네 저 동네를 이사 다니면서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청년 때는 비교적 한 곳에 오래 살지 못하였고, 결혼 후에는 한 동네에서 더 오래 살게 되었다고 기억한다.

  청년시절에 살았던 동네들을 기억해 보면..... 영천, 홍제동, 현저동, 서대문, 뚝섬, 가리봉 등의 동네에서 생활을 했다. 처음 영천시장 뒤편에 방을 얻어 놓고 시장에서 이불을 비롯하여 약간의 살림살이를 사들고 얻어 놓은 집을 찾아 가는데, 좁은 골목들이 너무나 비슷하게 생겨서 무거운 짐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손에 들고 몇 시간 동안을 헤매고 다니면서 고생한 기억은 잊혀 지지 않는다. 지금은 독립문이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때에는 금화터널을 뚫리기 전이어서 독립문도 제 자리에 있었고, 시영버스가 지금의 터널자리 길을 돌아서 다니기도 하였다.

뚝섬에서도 잠깐 있었는데 그 때 뚝섬에는 채소밭이 가득했으며 뚝섬에서 청담동까지 배도 다녔다. 가리봉의 벌집에는 연탄부엌과 방이 하나로 이루어진 방들이 한 집에 수십 개씩 있었다. 소설에서나 읽었듯이 하나의 화장실을 가지고 수십 명이 사용하다 보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여러 사람들이 사용하다보니 불결하고 냄새도 많이 났다. 영등포 구로공단 뚝섬 이곳은 공장지대였기에 젊은이들이 낮에는 공장에 가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골목길이 시끌벅적 하였다. 그런 동네가 요즘 가끔 가보면 공장은 없어지고 아파트와 상가들로 즐비하다. 특히 구로공단은 패션거리와 사무용 빌딩들이 들어서 지난날 공단의 흔적은 찾아보기 쉽지 않고, 가리봉 시장에는 중국인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가게 간판은 중국어가 더 많으며 거리에서는 중국 말씨가 더 많이 들린다.

홍제동에 살 때에는 화장터 길을 따라 안산에 피던 진달래가 눈에 아른 거리며, 살던 집에 불이 나서 총각 살림살이를 홀라당 다 태우게 되어 집을 고치기까지 친구들 집에 피신을 다닌  적도 있었다. 그 시절은 선거가 빈번해서 해 마다 투표를 하다시피 했는데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기 까지 한 적도 있었다. 서대문 큰길가에서 생활을 할 때에는 매번 사 먹어야 하는 식당 밥에 질려서 한 달에 한번 꼴로 식당을 바꾸어 보기도 했다. 밤에 자다가 한 밤중에 의주로 큰길에서 탱크와 군인들이 훈련을 하는 것을 문틈으로 보고는 약간은 무시무시했으며 무엇을 하는 일인가? 궁금했었는데 한밤의 그 훈련이 80년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훈련을 했던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전화가 귀해서 백색전화를 보증금 30만원에 월 3만원씩 내고 사용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서대문 구치소 뒤편 현저동에서는 세모 방에서 결혼직전 까지 살았는데, 독립문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에는 김밥과 떡집들이 많이 있었다. 새벽부터 할머니들이 쑥떡과 찹쌀떡 도너츠 꽈베기 김밥 등을 만들어서 아침 일찍부터 머리에 이고 시내 공원 같은 데로 팔러 나가셨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녹번동, 사당동, 무악동, 잠실을 거쳐서 오늘의 수서에 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결혼 후 처음에 녹번동 절집 옆에 2층 방을 보증금 50만원에 월 5만원씩 내기로 하고 얻어서 사는데 전화도 없었고, 화장실도 주인집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함께 사용을 해야 했고, 연탄을 때는 부엌 아궁이에서 밥을 해 먹고 난방을 했었다. 그 때에 벌이도 없이 지내는 때라 신혼의 즐거움과 걱정을 함께 가지고 살면서, 주인집에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셔서 말동무를 하고 살았다. 그 후 사당동으로 가서 살았지만, 녹번동이나 사당동은 오래 살지를 못하고 한두 해씩 잠깐 살게 되었다.

그 다음은 서대문 구치소 건너편 동네인 종로구 무악동에서 십여 년 살았다. 동네의 절반 한쪽은 80년대 초반에 연립주택을 지었고, 절반은 산동네 노후주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연립주택에 세 들어서 살기도 하였는데 주인 되는 아저씨는 중동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와서 일자리가 여의치 않자 나로부터 주식이 인연이 되어 주식투자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 후 부모님께서 돈을 마련해 주셔서 같은 동네 산꼭대기에 16평짜리 허름한 집을 1,200만원에 사게 되었다. 평생을 농사일만 하시면서 한 푼도 헛되어 쓰지 않고 모으신 돈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서 마련해 주었는데, 나는 자식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비록 비좁아 불편하고 언덕길을 오르내리기에 힘은 들어도 인왕산이 가까워 산을 오르기도 좋았고, 내 소유의 집이었기에 이제껏 살아온 중에 가장 편안했던 집이었던 것 같다. 동네에서 올림픽 즈음해서 동네 아줌마들이 구청으로 몰려다니면서 일을 꾸미더니 재개발을 하게 되어 우리는 그 동네를 떠나 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당시 나의 일터가 잠실에 있어 일터 가까운 잠실 주공3단지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시내 중심에서 가까운 곳에 살아오다가 그 때만 해도 잠실이 주변으로 인식 되었기에 처음에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사람이 살다보면 정이 든다고 이곳에서도 좀 살다보니 금방 익숙해지고 새마을시장이 붙어 있어 서민들이 살기에 알맞은 동네라고 보였다. 이런 서민 아파트도 지은 지 오래 되어 재건축을 한다고 하더니 사업이 진행되면서 또 다른 곳을 찾아 가야 한다. 좁은 저층 아파트라 아파트 주인들은 15% 정도 밖에 살지 않고 세입자 위주로 살고 있던 아파트였으나 공사가 완료되어 최근에 입주가 되고 있는데 입주자를 보면 대체로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살게 된다. 이전에는 넓은 공간도 있었고 저층이라 하늘을 쳐다 볼 수도 있어 편안한 공간이었다고 기억을 하고 있다. 지금 잠실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수십 층의 아파트들이 수만 세대나 들어서 하늘을 막고 있어 하늘은 보이지 않고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물이 앞을 막고 있어 답답함으로 다가온다. 우리 아이들은 독립문에서 초등학교를 시작했지만 이곳에서 초 중 고등학교 까지 마치게 되었으며, 잠실에서도 십여 년을 살게 되었다.

잠실을 떠나오게 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곳을 찾아보는데, 이제껏 생활과 일터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우리에게 마땅한 곳을 찾기가 쉽지를 않았다.  우리 형편에 비싼 곳으로 갈 수도 없고, 이 주변에 있는 작은 평수의 저층 아파트들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지라  멀지 않아 또 재건축을 할 대상들이다. 수소문 중에 멀지 않은 수서에는 임대아파트가 많다는 이유로 집값이 싼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우리 형편에 맞는 적당한 아파트를 찾을 수 있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이사를 오면서도 종로에서 잠실로, 잠실에서 서울 끝자락 이곳 수서까지 오게 되면서 이곳에서 또 떠나야 한다면 다음은 또 어느 곳을 찾아 가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을 미리 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곳이기에 적응을 하고 정을 붙이고 살아보니, 이곳은 주변에 번화가가 없어 동네가 조용하고 앞뒤로 산이 있어 앞산인 대모산도 쉽게 오르면서 약수도 떠먹을 수도 있어 이제는 이 동네에도 정이 들어가고 있다. 앞산 자락 약수터 아래 몇 해 전부터 하고 있는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감자 고구마 채소를 길러 먹는 재미까지 더해지니 이제 이곳에서 계속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단지 서울 끝이라 시내에 나들이를 할 일이 있으면 멀어 이동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이에 게으름까지 더해져서 어디 나들이하기가 싫어진다.

이렇게 되돌아보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오늘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동네 저 동네를 이사 다니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 곳에서 정착을 하지 못하기에 우리 동네라는 인식이 없거나 약해질 것이고, 그러기에 도시에서의 마을공동체는 형성이 되기가 아주 힘들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에서도 우리 영혼을 포근히 안아줄 수 있는 시골 고향 같은 마을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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