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

나의 화분 2011/06/28 03:12

스쾃에 대한 논의는 국내에서 별로 없었죠.

서양의 신좌파들과 자율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의 정치적 실천 그리고 예술스쾃에 대해서만 논의됐는데, 저는 철거민의 스쾃, 농민의 스쾃, 빈민의 스쾃 그리고 잉여들의 스쾃에 대해 말할 예정입니다.

두리반의 마지막 대토론회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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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 대토론회 "매력만점 철거농성장"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오후 2시-6시 반, 두리반 3층

 

제목: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

발표: 조약골 (피자매연대 활동가)

 

글 순서

 

1. 점거행동의 정치학 - 우리가 살 곳을 되찾자, 스퀏팅!

2. 평택 대추리에서 빈집을 점거해 살면서 음반 ‘평화가 무엇이냐’를 만들다

3. 빈민들의 주거공간을 위한 점거(더불어 사는 집)

4. 생존권을 요구하는 철거민들과 연대하는 점거행동(용산참사 현장 ‘레아’에서 보낸 1년)

5. 두리반은 지금 가장 뜨거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6. 멕시코 와하까 꼬뮨의 점거운동

7. 독일의 점거행동 축제

8. 거대 석유자본 쉘(Shell)에 저항하는 점거행동

9. 덴마크 코펜하겐의 Undomhuset ('청년의 집'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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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점거행동의 정치학 - 우리가 살 곳을 되찾자, 스퀏팅!

 

스퀏팅(점거행동)이란 빈 건물을 점거하여 사용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서 서양의 대도시에서는 거의 매일 각종 점거행동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노숙인들에 의해 매일 점거 행동이 벌어진다. 노숙인들은 주로 역이나 터미널 또는 지하도 등 바람을 막을 수 있고, 비교적 따뜻한 곳에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고 사는 경우가 많다. 정부 측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은 여간 골치 아픈 존재들이 아니다. 영양 및 위생 상태가 엉망인 이들에게서 각종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으며,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또한 모든 구성원이 최저 수준 이상으로 살아가는 복지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 각국 정부가 선전해 마지않는 통치 목표라고 할 때 이들 부랑인들의 존재 자체는 치정자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소위 공무를 담당한다는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들 노숙인들을 정신병원에 감금시키거나 사회와 격리된 특수 교육 시설에 수용하여 강제 노역을 시키곤 했다. 한국 정부도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아 일찍이 이들 부랑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삼청교육대로 보낸 적이 있다. 물론 최근 들어서 한국 정부는 군대에 버금가는 각종 규율을 지켜야 하는 구호시설 등을 만들어 노숙인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배려한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실제로 많은 노숙인들은 '통제를 받기 싫다'는 지극히 실존적인 이유를 들어 그곳에 수용되는 것을 거부한 채 길바닥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진국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경쟁이 더욱 심해지고 재화가 쌓여갈수록 이것은 소수에게 집중되므로 더 많은 사람들이 경쟁에서 낙오되고 궁핍한 하층계급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더욱이 물가가 상대적으로 비싼 많은 도시들의 경우 집세마저 턱없이 높아 이들 하층계급이 거리에 내몰리는 신세에 처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하층민의 생활은 어디나 비슷하지만 이들 서양의 도시거주 하층민들은 주로 점거행동을 통해 살 곳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점거행동이 이뤄지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물론 빈 건물 또는 버려진 건물이다. 이 빈 건물은 어떤 것들인가. 불이 난 뒤 사용이 힘들어진 건물, 지어진 지 너무 오래되어 곧 무너질 것 같은 건물, 건축이 중단된 건물, 재건축을 위해 헐리기 전까지 잠시 비워진 건물, 무자비한 건축으로 임차인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건물 등이 주로 점거행동의 대상이 되는 건물들이다. 또한 폭력과 마약 등으로 얼룩져 주위 환경이 나쁜 동네에 있는 건물도 어느 날 갑자기 스쿼터들의 차지가 되기도 한다.

버려진 건물은 온갖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인구밀도가 높고 숨을 곳이 별로 없는 도시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의 훌륭한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브래드 피트는 전기가 끊기고 물이 차오르는 허름한 버려진 건물에 사는데 이런 공간은 에드워드 노튼이 사는 최신 빌라 즉 각종 현란한 디자인의 비싼 가구가 진열되어 있는 곳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밖에도 [정글 피버]에 보면 어느 버려진 건물에서 떼 지어 마약을 흡입하는 마약 중독 정키들의 충격적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뉴 잭 시티]에서는 아예 빈 건물을 점거한 폭력배들이 이 건물을 마약 제조 공장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버려진 건물 또는 빈 건물을 허락을 받지 않고 차지하고서 가까스로 부랑자의 신세를 면한 빈민, 하층민들은 사회로부터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따가운 눈총을 받기 일쑤다. 그리고 소위 소유권 보호라는 미명 하에 경찰을 앞세운 공권력은 이들 무단 점유자들을 다시 무자비하게 거리로 내몬다. 하지만 서양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점거인들은 경찰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줄기차게 점거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빈 공간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사는 가난한 점거인들에게만 모든 잘못을 전가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영국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1998년 4월 영국 전역에서는 80만 4천 개의 버려진 건물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만 명이 채 되지 않는 홈리스들이 이들 빈 집에 들어가 지친 몸을 뉘게 하는 것을 막는 것은 법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인도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 듯하다.

이렇게 버려진 건물들이 많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홈리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점거행동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즉 소유권 이전 등 복잡한 서류 절차를 밟지 않고도 즉시 건물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진정으로 필요하며 사용을 하는 자가 그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상은 서양을 비롯해 '耕者有田 工者有機' 등에서 나타나듯 동양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이해되어왔다. 점거행동은 바로 절박하게 건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 건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치열하고도 너무나 인간적인 열망에서 비롯된 행위인 것이다. 즉 불필요하게 지어진 건물은 건축업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그냥 방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도록 용도가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 쫓겨난 사람들이 갈 곳이라는 결국 빈 건물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아나키스트들, 자율주의자들, 급진주의 활동가들, 인권운동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점거행동을 지지하는 여러 활동을 펴기도 한다. 점거를 할 수 있는 건물을 알려주고, 이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Homes Not Jails'를 비롯한 각종 조직을 만들어 법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점거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보통 빈 건물들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기 마련이다. 이에 점거인들은 서로 빈 건물을 판별하는 방법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실제로 빈 건물 리스트를 지지운동가들과 함께 만들어 인터넷에 올려놓기도 한다.

이들은 점거를 시작하기 전에 그 건물이 빈 건물이라는 점을 확인해둘 필요가 반드시 있다고 당부한다. 최소 2개월에서 3개월 이상 비어 있어야 점거를 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또한 경찰이 찾아올 경우에 대비에 여러 가지 수칙을 제시해놓은 곳도 있다. 이런 정보에 따르면 경찰에게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 것과 자신은 도둑이 아니며 갈 곳이 없어 임시로 거처하는 점거인임을 당당히 밝히라고 되어 있다. 이때 주의할 점은 문을 부수고 침투했다고 말하면 안 되며 문이 열려 있어서 그냥 걸어 들어왔으며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그냥 살고 있노라고 대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점거를 한 후 그 주소로 자신의 이름을 수신인으로 한 편지를 보낸 후 이것을 각종 증거물로 활용하라는 팁도 성실히 제시하는 사이트도 있다. 물론 이러한 수칙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점거인들을 위한 지지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아직 건물의 소유권에 대한 관념이 비교적 철저한 한국과 같은 후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놀랄만한 일이다. 런던에만 알려진 스쿼터 구호 센터가 5개에 이른다.

점거행동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 곳을 찾아들어간 것으로서 단순히 법을 수호하기 위해 이들의 절박한 행동을 제지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 안락하고 편안한 도시생활의 이면에는 이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점거인, 노숙인, 철거민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들이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공간을 사회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2. 대추리에서 빈집을 점거해 살면서 음반 ‘평화가 무엇이냐’를 만들다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라는 장편 다큐멘터리가 있다. 자본가들이 임금을 체불한 채 떠나버리자 자동차 부품공장을 접수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노동자들 이야기다. 제8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에서 상영된 적이 있어 한국에서도 꽤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번에 만든 음반 ‘평화가 무엇이냐’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 3개가 바로 점거, 저항, 생산인 듯싶다. 나는 이 음반을 평택 대추리에 있는 빈집을 점거해 살면서 만들었다. 그 마을에 들어가 살면서 주민들과 함께 매일 촛불을 들고 정부와 미국에 저항하면서 작사 작곡을 했고, 그렇게 생산해낸 결과물이 이 음반이다.

빈집이나 버려진 공간을 점거해 활동을 펼치는 것을 보통 스쾃(squat)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2004년 8월 홍대 주변의 예술가들이 부족한 창작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예술스쾃을 벌이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높은 임대료 때문에 작업공간을 쉽게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어차피 비어 있는 공간에 들어가 그곳에 거주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저항예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술가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빈 건물을 차라리 그냥 놀릴지언정 임대료를 내지 않은 사람들이 무단으로 점거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자본가들의 욕심 때문에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비슷한 시각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식의 점거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확장을 추진하던 평택 미군기지에 맞서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삶의 공간을 지키고자 싸웠던 것이다. 한국 정부는 결국 법적 절차를 동원해 마을과 논밭 자체를 모두 주민들의 손에서 빼앗아가 버렸고, 주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국방부로 바뀌어버린 집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국방부는 불법점거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때리겠다면서 협박해 들어왔다. 나는 그런 집에 점거자로 들어가 살 결심을 했다. 난 음악가이기도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침략전쟁을 벌이며 수많은 애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보다 쉽게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평택의 기지에 주한미군 전부를 모아놓는다는 계획이 우리의 미래에 얼마나 끔찍한 파장을 일으킬지 알고 있는 평화활동가이며, 동시에 생명을 키워온 소중한 농토가 농민의 손에서 강탈되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양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내가 들어가 살고 있는 평택 대추리 불판집은 전기도 나오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고, 보일러도 없는 완전히 망가져버린 빈집이었다. 내가 그렇게 열악한 조건이었던 불판집을 고치고 꾸며서 살 수 있었던 힘은 국가폭력이 없는 자유로운 공동체이자 평화예술마을로 거듭한 대추리라는 마을이 가진 활력에 있었다. 6, 70대 이상의 노인들이 대부분인 마을에 어느 날부터 예술가들이 들어와 담장에 감동적인 그림들을 그려 넣기 시작했고, 가슴을 울리는 벽시들을 써넣었다.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조각 작품들과 판화와 설치미술들이 마을 곳곳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면 나도 들어가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게다가 농토에 대한 농민들의 애정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분들에게 토지란 자식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매일 촛불을 들고 외쳤다. 이 땅에서 나가지 않고 그저 한평생 살아온 고향땅에 이대로 묻히고 싶다고 말이다. 그 함성이 노래가 되어 이 음반에 실렸다.

내가 살던 평택 대추리 불판집 녹음실에는 모니터 스피커도 하나 제대로 없어서 나는 마을을 돌면서 떠난 사람들이 버리고 간 커다란 전축을 찾아야 했다. 모니터 헤드폰도 없어서 그렇게 주민들이 버리고 간 것들로 대신했다. 철조망이 둘러쳐진 마을은 경찰들에 의해 거의 고립되다시피 했으므로 필요한 모든 것을 마을 내부에서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악기는 소프트악기로 처리했고, 믹싱과 마스터링도 소프트웨어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좋았던 점이 있다면 녹음실에 따로 방음시설을 갖출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인구밀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새벽 4시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해도 널찍이 떨어진 옆집에 별다른 소음피해를 주지 않았다.

 

3. 빈민들의 주거공간을 위한 점거행동 - 더불어 사는 집 (2005년 8월 작성. 이후 이 글을 수정해 녹색평론에 기고함)

 

서울 황학동 부근 청계천변에 자리 잡고 서있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오래되고 허름한 삼일 아파트. 그곳에 '더불어 사는 집'이 있다. 한국 최초로 노숙인들에 의해 빈집 점거가 이뤄진 곳. 노숙인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공권력도 결국엔 이들의 점거를 인정하고 삼일 아파트가 철거되는 2005년 8월말까지는 거주를 허락한 곳. 그곳에서 만난 노숙인들은 더불어 사는 집이라는 점거인 공동체를 이루고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직접 찾아가 이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들이 많았다. 결국 나는 2005년 8월 16일 용기를 냈다. 3명의 일본 친구들과 함께 삼일 아파트를 찾았다. 더불어 사는 집의 송재희 대표를 포함해 그곳에 살고 있는 6명의 점거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삼일 아파트는 곧 무너질 것만 같았고, 밤이면 으스스해 귀신이 나올까봐 돌아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낡았지만 그곳은 분명히 더불어 사는 따스한 집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들을 안방까지 안내하고 시원한 음료수까지 대접해주면서 이들은 일본의 노숙인 정책을 질문했고, 자신들의 내밀한 이야기들도 숨기지 않고 풀어놓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삼일 아파트를 점거해 살아가고 있는 이 노숙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생존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법대로 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특히 법의 칼자루를 쥐고 흔드는 자들에게서 이런 말을 훨씬 자주 듣게 된다. 이주노조 위원장 샤말 타파가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의 치밀한 미행 작전으로 잡혀가 결국 네팔로 강제 추방되었을 때 항의 전화를 건 나에게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한 말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불법체류자이고, 법대로 그를 추방시켰을 뿐이라고...

그런데 그 법은 누구의 법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 같은 법치국가에서 법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그런데 과연 그럴까? 더불어 사는 집을 만들어 더불어 살고 있는 노숙인들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형법에 의하면 남의 건물에 무단으로 들어가 사는 것은 중죄이기에 엄벌로 다스린다고 나와 있다. 노숙인들은 법보다 앞서는 것이 생존권이라고 말한다.

 

"사람 살자고 법을 만든 것이지, 사람이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면 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더불어 사는 집의 노숙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을 얻기 위해 법의 테두리를 넘나들며 지난한 투쟁을 이어왔다. 공무원과 경찰과 용역깡패와 단속반원들을 피해 밤에는 낮에는 밖으로 나갔다가 밤이면 돌아와 숨어 잠을 잤다. 삼일 아파트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내쫓기 위해 공권력은 일부러 화재를 내고, 유리창을 깨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치사한 방법까지도 동원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협박과 회유와 폭력 그리고 법대로 하겠다는 으름장도 노숙인들의 생존권을 짓밟지는 못했다. 결국 공권력은 한시적으로 이들의 빈집 점거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노숙인들은 한전에 몰려가 전기를 사용하게 해달라며 농성을 하고 시위를 벌였다. 전기도, 물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철거 예정의 아파트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전기를 달라고 하니 한전에서는 처음엔 당연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돈을 내고 전기를 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생활필수품도 돈을 내고 사야 하는 체제에서 노숙인들이 내세운 것은 생존권이었다. 매년 수십억 원의 이익을 내는 한전은 결국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일 아파트에 무상으로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더운 여름날 선풍기를 켤 수 있게 되고, 전기밥솥으로 뜨거운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물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노숙인들의 자활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인 더불어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법을 내세운 공무원들의 권위적 태도라는 높디높은 벽을 노숙인들은 '단결투쟁'으로 극복한 것이다.

한국의 노숙자 정책은 이들을 군대와 같은 분위기의 수용소에 처넣어 사람들의 시야에서 이들을 지워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이 그런 수용소 같고 군대 같은 쉼터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런 노숙인들을 위해 더불어 사는 집 사람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얻은 성과를 나눠 갖자고 말한다. 더불어 사는 집이기에 더불어 살자는 것이다. 이들은 노숙자들의 재활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집'과 '서로를 돕는 공동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여명의 노숙인들은 엄격하지 않은 분위기의 삼일 아파트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지내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다른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등 자신이 얻은 것을 베풀려고 한다. 다른 노숙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슬을 맞으며 자지 말고 함께 아파트에 들어와 살자고 권하기 위해서다. 보통 노숙인들은 많이 속고 당해본 사람들이라서 쉽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더불어 사는 집 사람들은 먼저 일주일에 한 번씩 무료 급식을 하면서 노숙인들과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려 하는 것이다. 빈집 점거에 성공한 노숙인들이 자유로운 공동체를 결성하고 나아가 다른 노숙인들까지 돕는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 '더불어 사는 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몸으로 겪어본 공무원들의 권위주의에 진저리가 난 노숙인들은 적어도 직접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며 평등하게 살아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모두 모여서 중요한 일들을 함께 결정한다고 한다. 더불어 사는 집은 형식적으로 대표, 사무국장, 사무차장 등의 위계적인 직책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들의 인간관계까지 위계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 8월 말이 되면 이들은 정든 삼일 아파트를 떠나야 할까? 글쎄. 민주적 소양을 갖춘 준법시민이라면 모를까, 더불어 사는 집의 노숙인들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것 같지는 않다. 준법시민이란 곧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더불어 사는 집에서 보낸 1시간 동안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법이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저항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삼일 아파트는 헐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빈집 점거 운동이, 점거 투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이들이 점거할 수 있는, 그리고 집 없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점거되어야 하는 빈집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공무원노조의 도움으로 점거가 가능한 빈집의 정보를 얻고,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노조가 더불어 사는 집의 점거노숙인들을 돕고, 이 노숙인들은 다시 다른 곳을 점거해 공간을 마련하고 길거리 노숙인들을 도와 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적자생존과 무한경쟁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상호부조의 가장 좋은 예가 아닐까. 나도 그곳에서 이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

 

4. “레아살롱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아요” - 용산참사 현장에서 보낸 1년 (2010년 1월 20일 오마이뉴스 기고문)

 

어느새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나고, 이제 이곳을 나가야 하는 시점이 되니 마음이 무척 복잡해집니다. 제 발로 걸어 나가야 하는데, 그냥 잊고 돌아서야 하는데, 아무리 1월 25일까지 용산 현장을 비워주기로 합의했다고 하지만, 짠한 눈물과 찐한 애정으로 범벅이 돼버린 남일당과 레아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저 말고도 레아에서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활동가 친구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겁니다. 몇 차례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고민을 했는데,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미련 없이 정리하자"고 하는데,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요. 그래서 또 예전 평택 대추리에서 생활할 때가 떠오릅니다. 거기서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했던 2007년의 봄 말입니다.

935일 동안 이어졌던 팽성 농민들의 촛불행사가 공식적으로 끝났을 때, 대추리 마을에서 함께 살던 지킴이들은 '촛불이 꺼졌다'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라도 촛불을 들자고 하고 비공식적인 촛불행사를 밤마다 이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마을 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되고, 집들이 하나둘씩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침내 우리도 짐을 싸서 그곳을 나와야 했지만, 우리는 모두 겨우 몸뚱이만 빠져나오고 나머지 모든 것은 마을에 그대로 두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년 후 그 지킴이들과 용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대추리 마을 한편에 고이 묻어두었던 마음들을 오랜만에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넌 또 왜 여기 와 있는 거냐고.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래도, 왜 당사자도 아닌데 철거민도 아니고 유가족도 아닌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용역깡패와 경찰폭력이 난무하는 재개발 현장에 제 발로 찾아와 생활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스스로 물어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2009년 4월로 돌아간다면 다시 레아로 들어가 생활할 것이냐고.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다시 겪으라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속은 타고, 시간은 촉박하고 하루하루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달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이상림 열사와 가족 분들이 운영하던 레아 호프를 촛불미디어센터와 촛불방송국으로 바꿔서 새롭게 문을 열었을 때 천주교인권위 김덕진 활동가는 "용산4구역을 서울의 명물거리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그 포부가 실현된 것 같습니다. 부서진 건물과 흉측한 낙서로 살벌하던 이곳에 연인원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해 용산참사의 해결을 위해 힘을 모았으니까요. 남일당과 레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렇게 다섯 열사들은 용산을 잊지 않고 끈질기게 현장을 찾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부활했을 것입니다.

처음 레아에 들어왔을 땐 분위기도 험악하고 살벌했지만, 언제 명도소송이 끝나 레아와 주변 4구역 건물들이 철거될지 몰라 불안했습니다. 가까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는 것은 참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처지가 십분 공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니 할 수 있는 것, 해보고 싶은 것을 미루지 말고 지금 다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일단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라도 해본다면 쫓겨나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널찍한 공간이 새로 생겼으니 조건도 좋았습니다. 1평에 1억이나 한다는 값비싼 곳에서 우리가 언제 다시 미술전을 열고, 거리 공연을 하고, 1인 시위를 하고, 연극과 영화를 보고, 활동가들과 자유롭게 수다를 떨고, 언감생심 낮잠을 자볼 수 있겠습니까.

우선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습니다. 언론을 통해 덧칠된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그래서 고통스런 육신의 소리 그 자체가 소중했습니다. 남을 통해서 대변된 것 말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 가는 일상생활이 궁금했습니다. '행동하는 라디오'를 만들어서 현장의 소리를 가감 없이 전파하고자 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집회 같은 데에서 마이크 잡고 발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같은 투쟁의 현장에서 마이크 한 번 못 잡아보고 매일 밥만 하는 사람들의 조그만 목소리도 흘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불타는 망루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고 절규하던 열사들이 바라던바 아니었을까요.

레아 1층을 근거지로 삼아 라디오를 만들고 있자니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 자리가 마치 현관 안내 데스크 같아서 사람들은 항상 제게 묻습니다. 누구 어디 갔는지 아는지, 무슨 모임은 몇 시에 하는지,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 커피를 마실 수 있는지. 사실 내가 레아에 들어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 것도,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상대하고 관계를 쌓는 일이었습니다. 미술평론가 김준기는 '여기 예술이 있다'라는 기고글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은 물론, 현장의 주민들과 방문객을 맞이하고 대화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라고 적고 있더군요.

용산 현장에서 라디오와 노래를 만들 수 있었던 힘이 여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많은 사연을 안고 살고 있잖아요. 레아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초면인데도, 참 반가운 마음이 먼저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역에서 벌어지는 재개발로 인해 누구나 철거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나 역시 잠재적으로 용산참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마음을 사람들은 갖고 있습니다. 레아에 있다 보면 그게 보입니다. 제가 '무릎팍도사'라서가 아닙니다. 용산참사라는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시대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참사 현장에서는 여전히 공권력과 자본의 횡포가 기승을 부립니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보낸 355일이 매일 참사의 연속이었고 인권이 부정되는 나날들이었기에,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흘러나온 것 같습니다. 예술은 그런 가슴 아픈 사연들의 표현방식이었습니다. 김준기는 이어서 "용산 참사 현장예술은 지난 1년간 사회적 망각에서 용산 이슈를 지켜내는 유효한 방식이었다"고 씁니다.

백원담 교수는 '용산이 드리는 선물'이라는 글에서 "진정한 행복이란 더불어 삶을 사는 자들만이 이룰 수 있음을 꼼꼼하게 알려주는 '레아'라는 문화전선의 신화, 그것은 용산이 이 땅 모든 사람에게 드리는 새해 선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어쩐지 제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 약간 쑥스러워집니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레아 앞길을 쓸었던 이상림 열사처럼 저도 그냥 정성스럽게 이곳을 가꾸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친구들과 하나하나 하다 보니 어느새 레아는 활동가들의 회의실도 되고, 손님들의 수다방도 되고, 기자들의 프레스센터도 되고, 마음껏 커피를 마시는 카페도 되고, 방송국도 되고, 녹음실도 되고, 영화상영공간도 되고, 미술작업실도 되었습니다.

1년 사이에 이렇게 무한히 증식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미디어 활동가 여백은 '레아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는 라디오 수다 프로그램에서 "레아는 살롱과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자유로운 담론과 표현과 주장과 논쟁이 벌어지는 곳 그래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들이 저수지처럼 모여 있는 곳이라는 의미겠지요. 우리는 용산 레아에서 많은 실험과 놀이와 작당을 했습니다. 레아 활동가 설해는 '용산에 관한 그치지 않는 수다, 레아 사랑방 이야기'라는 글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미술가들과 작가들, 음악가들이 레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보니 활동가들 간에 경계도 희미해져 미디어활동가가 연극을 하거나 작가가 카메라를 들거나 나 같은 사람이 노래를 하게 되기도 한다. 요즘 나는 누가 요즘 뭐하고 사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나 요즘 밴드 해'라고 이야기한다. 1인 시위 음악회를 하며 길거리 직접행동의 참맛을 보았다고나 할까. 다양한 활동 영역의 사람들이 만나서 생길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투쟁 현장에 작업 공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샘솟는 것 같다.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 68 호 / 2010년 01월 05일>)"

 

길거리 직접행동의 참맛을 보게 해준 레아를 뒤로 하고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용산참사는 1년간 참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많은 사람들은 참사의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짓밟힌 권리를 되찾는 많은 활동을 통해, 또한 남일당과 레아라는 대안적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고통을 치유해나가는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체험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아픈데, 솔직히 나는 시간을 되돌려 2009년 4월이 되면 다시 레아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너무 즉흥적이지 않고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용산을 정겨운 마을로 만들고 싶습니다. 도심텃밭도 제대로 만들어서 투쟁의 현장에서 먹거리를 직접 수확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아, 진짜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2009년 4월이 아니라 그 훨씬 이전으로 가야겠네요. 용산참사가 일어나기 훨씬 전으로 말입니다. 재래시장 우동포차와 박물관 식당과 책대여점과 153 당구장과 삼호복집 등이 공존하며 약간은 촌스러워도 정겨움이 넘치던 따뜻한 공동체로 말입니다. 재개발 같은 것은 전혀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보람을 느끼던 시절로 말입니다.

 

5. 두리반은 지금 가장 뜨거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화여대 대학원 신문 72호 기고글)

 

서울 신촌과 홍대를 잇는 동교동 삼거리에 위치한 유명 칼국수집 두리반이 강제철거를 당한 날은 2009년 12월 24일이었다. 그날 나는 용산참사 현장에 마련된 ‘복합투쟁문화공간’ 레아에서 ‘불법음악회’라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난 후 가까스로 용산참사로 목숨을 잃은 철거민들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용산이라는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작은 용산’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특히 두리반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1년간 용산참사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고, 나 역시 그 현장에서 지내며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건설자본만을 편드는 법과 제도는 바뀐 것이 없고, 여전히 돈 한 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철거민이 되어 쫓겨나고 있었다. 끝이 언제일지 모를 투쟁으로 지쳐 있었지만 나는 토건 중심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막개발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입게 될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더욱 더 질기고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폐허가 되다시피 한 두리반에서 느꼈다.

2010년 1월 말, 용산 현장을 나온 뒤 처음으로 찾아간 두리반 농성장은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곳을 지키던 사람들은 비장한 결의에 차있었지만 분명 ‘철거용역 깡패들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한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생존권을 짓밟히고서 이대로는 내쫓길 수 없다는 각오로 철거 다음날 두리반 정문을 막아놓은 철제펜스를 뜯긴 했으나 여전히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공기는 무거웠다. 순수하게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체제는 너무나 부당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날 나는 안종녀와 유채림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었다. 용산이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또 다른 철거민들이 절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활동가로서 뭔가 해야지 싶었지만 아직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쉬면서 오랜 농성으로 지친 몸을 추스르던 그해 2월, 두리반에서 몇몇 음악인들이 공연을 연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용산 현장에서 자주 보던 엄보컬, 김선수 그리고 홍대 부근에서 활동하면서 사회 현안에 대해서도 활발히 참여하던 자립음악가들이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에 공연을 열어 두리반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나는 용산에서 지내며 무거운 농성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문화예술의 힘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나 역시 몇 년간 음악을 만들고 노래로 연대하면서 많은 현장 예술인들을 알게 됐기에 함께 힘을 모은다면 작은 도움이나마 두리반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금요일마다 칼국수를 다시 먹게 될 그날까지, 즉 강제 철거된 두리반이 다시 식당을 열어 주인부부가 장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 문화행사를 열며 두리반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렇게 3월 초에 칼국수 음악회가 시작됐고, 두리반 농성이 500일이 훌쩍 지난 바로 오늘까지도 이 행사는 이어지고 있다.

사실 언제든 철거용역이 쳐들어와 다시 한 번 강제철거를 자행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두리반 사람들은 24시간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는 무엇보다 ‘항상 이곳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도록 만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집중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답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었다. 소설가는 소설가의 방식대로, 음악인은 음악인의 방식으로, 종교인은 종교인처럼, 그리고 활동가인 나는 활동가의 방식으로 두리반과 연대해 싸우기로 했다. 일견 무서워 보일 수 있는 철거농성장에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대중적인 문화행사들을 계속 여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는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대 부근에 위치해 있는 두리반은 여러 가지 장점들이 있었고 두리반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행사들이 계속 열리면서 두리반은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됐고, 2010년 5월 1일에 열린 전국자립음악가대회에는 69밴드가 공연을 펼쳤고, 무려 3천명의 관객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조그만 철거농성장이 당당히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명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활력을 나누며 새로운 실험을 벌여나갔다. 나는 두리반 주변 무너진 건물 잔해를 걷어내고 땅을 일궈 도심 게릴라 텃밭을 만들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고추, 상추, 오이, 시금치, 쑥갓, 돌미나리, 얼갈이배추가 자라고 있다. 두리반을 내쫓고 이곳에 16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을 지어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을 얻고자 하는 GS건설에서는 한국전력과 공모해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두리반 건물의 전기를 불법적으로 끊는가 하면 철거 현장에서 폭력성으로 이름이 높은 삼오진건설을 고용해 두리반을 여러 차례 협박해왔다. 마포구청은 부당한 개발 사업을 용인해주고 모른 체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는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고, 주중에 두리반 주변에서 매일 한 시간씩 생방송을 진행한다. 나는 이곳을 열린 학교처럼 만들어 누구나 무료로 수업을 배우고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며 가르칠 수 있도록 영어강좌를 개설했고, 이후 많은 수업들이 생겨나 두리반의 문턱을 낮췄다.

그래서 2011년 이제 두리반은 노는 사람들에게 놀이터가 되었다. 농성장이고, 공연장이었던 두리반이 라디오 방송국이 되었고, 도시농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료 텃밭을 내주었다. 강연자에게 강당이 되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교회가 되었다. 교실이 되었고, 돈이 없어 시간당 13,000원을 내기 힘든 가난한 음악인들에게 연습실이 되어 24시간 큰소리로 기타를 치고 드럼을 두들기고 노래를 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가장 뜨거운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토론을 하고, 작당모의를 하며, 춤을 춘다. 이제는 매일 그렇게 한다. 평일 낮에도, 주말 저녁에도 두리반에서는 뭔가 쿵짝쿵짝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누군가 이걸 총괄 기획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 맞게 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연대를 했고, 나 역시 그랬을 뿐이다. 서로 자극을 받아 잘 되는 모습을 보며 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새로운 작당을 벌여왔기에 두리반이 이렇게 커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폭염과 혹한에도 굴하지 않고 300일 넘는 단전과 500일 넘는 철거농성을 이어온 것은 물론 안종녀와 유채림 부부가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연대해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인권을 위해 싸워나가면서, 다시는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고귀한 의식이 두리반의 저변에는 흐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누구든 자유롭게 여기서 자신들이 계획한 것을 실험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이곳을 지배한다. 그래서 운동권이 아닌 사람도 위화감 없이 어울릴 수 있다. 이 정부가 저지른 4대강 죽이기로부터 개발사업의 폭력성을 느낀 당신도 두리반에 온다면 어느 순간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억눌린 목소리를 제각각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두리반에 남은 일은, 우리들이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 목소리를 낸다면 반드시 값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오늘은 두리반에서 벼룩시장과 돌잔치와 출판기념회가 동시에 열렸다. 내일은 두리반에서 또 다른 모임이 개최된다. 두리반에 모인 힘은 다시 팔당 두물머리로, 대학 청소노동자들과의 연대로, 청소년 인권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두리반은 지금 질래야 질 수 없는 가장 뜨거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6. 멕시코 와하까 꼬뮨의 점거행동 (2006년 11월 작성)

 

멕시코 와하까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중 혁명운동에 대해서 몇 달 전부터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만 먹고 있었지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인디미디어와 날코뉴스 등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는 혁명의 소식들과 그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들, 그리고 국가폭력에 대항해 와하까 주를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대안을 일궈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읽으며 혼자 감동하기도 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와하까 주의 주지사 울리세스 루이스 오르티스(Ulises Ruiz Ortiz)를 몰아내고 와하까 지역을 꼬뮨으로 만든지 100일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와하까 민중들은 1871년의 파리꼬뮨이 겨우 50일간 지속되다가 와해된 것, 1905년 러시아의 상페테스부르크의 소비에트 역시 50일을 넘기지 못한 것을 기억하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있습니다. '대추리 꼬뮨'은 오는 11월 9일이면 800일이 됩니다.

와하까의 교육노동자들과 주민, 그리고 활동가들이 모여서 와하까 민중의회(영어로는 the Popular Assembly of the Peoples of Oaxaca라고 하고, 현지 스페인 어의 어순에 따라 줄여서 보통 APPO라고 합니다)를 만들고, 이 단체를 중심으로 멕시코 주정부를 축출하고, 와하까를 자치지역으로 선포해 자치를 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방송국과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해 민중들의 소식을 계속 보도하고 있습니다. 멕시코 국영방송이 민중들의 소식을 외면해온데 분개해 와하까의 민중들이 나선 것입니다. 와하까 주정부와 멕시코 연방정부의 폭력에 대항해 철저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연마하고 있습니다. 와하까 시 여기저기서 매일 자기방어 워크샵이 열립니다. 고되고 힘든 단련과정이지만 와하카 민중들은 굳세게 버텨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대안 시장을 열어서 자급자족 경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건물들을 점거해 공공의 필요성을 위한 공간들로 탈바꿈시키고 있습니다. 정권의 공격을 막기 위해 주요 도로마다 바리케이드를 쳐두고 규찰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와하까 코뮨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소식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멕시코 정부에서는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진압경찰과 용역깡패 그리고 준군사집단까지 동원해 와하카 민중들을 살해하고, 혁명을 진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요즘 멕시코 정부의 탄압이 노골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멕시코 민중들이 힘들게 가꿔온 '와하까 꼬뮨'이 어쩌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들어서 와하까 혁명투쟁을 좀 더 상세히 한국어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와하까 민중들의 자신감 넘치는 투쟁을 보며 평택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용기와 힘을 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아울러 추운 겨울이 성큼 다가온 대추리 꼬뮨에도 보다 따뜻한 혁명의 온기가 활짝 피어오르기를 염원합니다.

 

7. 독일에서 반국가 직접행동 축제가 벌어집니다! (2006년 8월 작성)

 

지난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독일 남부 프라이부르크 부근에서 '국가에 저항하는 직접행동 축제(DIY against the state)'가 열렸다. 이 행동에 참여한 수백 명의 빈집점거자들과 아나키스트들, 자율주의자들 그리고 다양한 급진 활동가들은 서로 만나 인사를 하고, 서로의 투쟁과 상황을 공유하며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국가체제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을 모아 실천에 옮겼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이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반권위주의, 반국가, 반자본주의 활동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Do It Yourself)'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함께 모였다. 매일 수십 개의 워크샵이 열렸으며, 토론과 관련 비디오 상영도 이어졌다. 워크샵에서는 반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가기, 반국가 공동체 꾸리기 등의 주제로 다양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활동사례들을 발표하고, 이런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워크샵들은 프라이부르크 시에 산재하고 있는 좌파 대안운동 공간들에서 주로 열렸고, 독일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참가한 300명가량의 국제 활동가들은 프라이부르크 시 외곽에 빈집들을 점거해 만들어놓은 토지에 캠프를 차려놓고 함께 생활하며 행사에 참여했다고 했다. 행사의 준비부터 철저하게 반자본주의와 반국가주의를 실천한 셈이다.

한편 독일 경찰은 이러한 급진적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행사를 탄압해온 경찰은 워크샵이 열리던 프라이부르크 시의 KTS 급진사회운동센터 건물 앞에서 참가자 한 명을 연행하고, 이밖에 행사 참가자들의 만들어 세우려던 구조물들을 파괴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행사 자체를 '불법시위'로 규정짓고, 일체의 활동을 탄압했다고 한다.

프라이부르크 시는 독일 내에서도 좌파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으로 꼽히는데, 특히 환경활동이 가장 왕성하게 이뤄지는 곳이다. 한 예로 이 지역 의회는 독일녹색당이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프라이부르크 시 지역에 있는 다양한 좌파 활동가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반국가, 반자본주의 활동을 전개해나가기 위해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개최하는데 힘을 쏟았다. 결국 많은 참가자들이 모여 경찰의 탄압을 뚫고 대부분의 행사를 치룰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한국의 대추리, 도두2리처럼 경찰의 검문과 탄압이 가혹하게 이뤄지는 곳에서 열렸기에, 이번 국가에 저항하는 직접행동 축제의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국가의 폭력을 넘어선 민중들의 자율적이고 비권위적인 연대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이번 직접행동 축제를 평가했다. 이번 행사는 내년에도 열린다.

 

8. 거대 석유자본 쉘(Shell)에 저항하는 점거행동 (2006년 2월 작성)

 

거대 석유자본 쉘(Shell)에 저항하는 반대행동이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쉘은 아일랜드 서부에 있는 로스포트(Rossport)에 초고압송유관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로스포트 지역의 토지와 가옥을 매입해 기존 송유관보다 압력이 4-5배 높은 초고압송유관을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송유관을 건설한 뒤에 그곳에 정유공장을 만든다는 것이 쉘의 애초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된 후 2005년부터 로스포트 거주민들은 송유관 건설 반대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주민들은 그 지역이 산사태가 발생하는 지역이어서 초고압송유관이 건설되면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고, 송유관 공사로 주변의 습지가 모두 매립이 될 것이며, 정유공장에서 배출하는 유독물질과 오염물질로 인해 주변 캐로우모어(Carrowmore) 호수와 브로드헤이븐(Broadhaven) 만에 심각한 환경오염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즉각 반대운동에 돌입하였다.

2005년 6월 이 지역에는 로스포트 연대캠프(Rossport Solidarity Camp)가 차려져 지역 주민들과 다양한 활동가들이 모여 활발하게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쉘은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이 같은 대규모 공사를 막무가내로 진행시키려고 했으나, 자신들이 살아온 땅과 가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일랜드 로스포트 주민들의 쉘 반대 투쟁은 매우 절박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도 법원은 역시 기업의 편이었다. 아일랜드 고등법원은 주민들에게 쉘의 초고압송유관 공사를 막지 말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 명령을 어긴 주민 5명은 결국 구속되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아일랜드와 주변국에서 온 환경활동가들과 평화운동가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저항운동은 연대캠프를 중심으로 일상화되었고, 더욱 거세게 전개되었다. 연대캠프에는 식당이 들어서서 활동가들이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텐트를 치고 숙박을 해결하였으며, 회의장과 공지사항을 알리는 게시판이 마련되어 활동가들 상호 의사소통이 활발히 이뤄지게 되었다. 또한 이 캠프에는 인분을 퇴비화 하는 퇴비화장실(compost toilet)과 퇴비장이 마련되어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한 자원을 훌륭히 재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2005년 6월 30일 연대캠프를 중심으로 한 저항과 투쟁이 계속되어 쉘은 당분간 공사를 중단하게 되었고, 8월에는 쉘의 송유관을 선적한 거대한 배가 어민들의 봉쇄투쟁으로 항구에 입항하지 못하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구속된 5명의 주민들을 석방하라는 대중들의 요구가 빗발쳐 결국 9월 30일에 이들은 모두 가석방되었다.

현재 공사는 중단된 상태이지만 2006년 3월에는 초고압송유관 공사가 재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맞춰 잠시 문을 닫았던 로스포트 연대캠프도 곧 다시 문을 연다. 거대 석유회사 쉘의 탐욕에 맞서 지역주민과 활동가들은 다시 투쟁을 시작하고 있으며, 유럽 각국에서 연대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영국 리버풀에서는 2006년 2월 17일 지역 활동가들이 모여 지역 쉘 주유소를 점거하는 행동이 벌어졌다. 영국 노팅엄과 런던에서는 2006년 2월 18일 토요일에 맞춰 석유에 반대하는 자전거 활동가들이 떼거리로 모여서 자전거를 타고 쉘 주유소를 점거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4시간 동안 쉘 주유소를 점거한 채 쉘(Shell)이 실은 지옥(Hell)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널리 알렸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도 쉘 주유소 사무실 입구를 활동가들이 봉쇄하고 선전활동을 진행했다고 한다.

로스포트의 주민들은 쉘이 벌이려고 하는 위험천만한 초고압송유관 공사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지금도 투쟁을 벌이고 있다. 거대 석유회사의 횡포에 맞서 지역 주민들과 환경운동가, 자전거 타는 사람들, 평화활동가, 아나키스트들이 연대해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끝.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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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8 03:12 2011/06/28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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