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홈쇼핑 그리고 귀농

꼬뮨 현장에서 2006/11/13 23:29

1. 지킴이네 집에서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마리아가 마루에 있다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날 보고

 

"너 그 안에서 외계인과 접선했니?"

묻는다.

 

나는 섬찟 놀랐다.

'아니, 그걸 어떻게-_-;;??'

 

마리아가 그러는데, 내가 혼잣말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길레 외계인과 접선하는줄 알았다고 한다.

내가 원래 대화상대가 없을 때 혼잣말을 잘 한다.

혼자 A가 되고 B가 되어 마치 두 명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혼자서 나와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난 이중인격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 급하게 끝마칠 원고가 있어서 아침부터 솔부엉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인터넷을 써야했기 때문이다.

마침 토요일 아침이었는데, 내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우와 지영이가 들어온다.

지영이는 이날따라 내 옆에서 장난을 치면서 내가 잘 놀아주지 않으니까 내 머리카락을 뽑는다.

내가 머리카락 뽑지 말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내가 입고 있는 두꺼운 옷에서 삐져나온 오리털을 몇 개씩 뽑아서 내 옆에 갖다 놓는다.

며칠 전에 본 조카도 내가 자고 있으니까 새벽부터 날 깨우며 내가 일어나지 않자 머리카락을 뽑았다.

왜 아이들은 뽑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까??

 

11월 8일에 저들이 황새울 남은 곳에 추가로 가시철망을 치려고 왔을 때 나는 머리를 다 말아서 모자 속에 집어 넣고 있었다.

아이들이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날 보더니 깜짝 놀란다.

지우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도희가 칼진 목소리로 묻는다.

 

"어, 약골, 머리 짤랐어????"

 

왜 아이들은 내 머리카락에 그렇게 관심을 갖는 것일까?

 

3. 빈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는 행위를 대추리에서는 '홈쇼핑'이라고 부른다.

홈에서 필요한 것들을 맘대로 쇼핑한다는 뜻이다.

내가 입고 있는 옷들도 물론 홈쇼핑으로 구한 것이다.

지영이가 뽑았던 오리털이 가득 들어 있는 외투도 홈쇼핑으로 얻은 것인데, 결혼식에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다들 '멋진 옷을 입고왔구나!'며 칭찬이 자자하다.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마디 해줬다.

 

"응, 홈쇼핑으로 구한 옷이야!"

사람들이 부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4. 11월 11일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것을 기리는 종전기념일이다.

세계 각지에서 전쟁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행사들이 열렸다.

서울 보신각에서도 '평화를 원한다면 대추리를 지켜라' 마지막날 행사가 열렸다.

평화를 원하기에 대추리를 지키고 있는 주민들과 함께 그곳에 갔다.

음악에 취했는지, 사람들에 취했는지, 분위기에 취했는지 나는 마약에 뿅간 듯 연신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신났다.

 

거기서 철조망을 불판으로 친구들도 만났다.

그중 하나는 지리산 자락으로 이번 달 안에 귀농을 하러 간다고 했다.

자기 먹거리부터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책임지겠다는 자세다.

좋다.

자립이야말로 혁명의 시작이요, 뿌리다.

 

나는 대추리로 내려가 사는 삶이야말로 '평화를 지키는 귀농, 인권을 지키는 귀농, 혁명을 일구는 귀농'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5. 며칠 전 '불판 커피전문점'에 치르가 놀러왔었다.

한가한 오후였다.

향긋한 커피를 함께 나누며 그와 나눈 대화들이 맘에 들었다.

 

대추리에 살면서 나는 열쇠나 자물쇠가 필요 없는 삶을 누리고 있다.

열쇠와 자물쇠가 없는 집에서 살아본 것은 내 생애 처음이다.

여기에서 문을 잠그는 경우는 똥을 눌 때와 목욕을 할 때뿐이다.

누구든 언제든 들어올 수 있도록 내가 사는 불판 커피전문점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이런 삶이 가능한 이유를 곰곰히 살펴보았다.

나는 서울에서 살면서 항상 열쇠꾸러미를 들고 다녔다.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하면서, 행여 내가 집문을 잠그지 않고 나왔나 두 번 세 번 돌아보았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문을 세 겹 네 겹으로 잠궈놓고서야 나는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안심이 아니었다.

불안한 삶이었다.

잠궈놓는다는 것 말이다.

 

그런데 난 이 마을에서 살면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난 안심을 하고 있다.

열쇠나 자물쇠라는 개념이 아예 필요 없는 곳에서 나는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낀다.

이것을 영어로는 security 라고 하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는 거의 다 안보(安保) 등으로 번역해 사용한다.

하지만 시큐리티의 진짜 의미는 '안심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마을 사람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은 누가 들어와 어떤 물건을 가져간다고 해도, 그 물건은 마을 안에 머무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그걸 쓸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누구든 들어와 홈쇼핑을 하면 된다.

 

서로 나누는 것이 당연한 곳에서 나는 살고 있다.

그 마을에서 서로 잘 아는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보면서 반갑게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안심을 하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살았다면 절대로 가능하지도 않았을 커다란 축복이라도 받으며 사는 것 같다.

여기에 사는 것이 나는 참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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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3 23:29 2006/11/13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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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넝쿨 2006/11/13 23:50 Modify/Delete Reply

    나는 돕이 홈쇼핑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봐ㅎㅎ
    예식장에서의 에피소드는 재밌는걸^^

  2. 디디 2006/11/14 00:01 Modify/Delete Reply

    안심하며 사는 것. 사람들을 아는 것. 너무 좋아요.

  3. 아침 2006/11/14 00:02 Modify/Delete Reply

    그런 홈쇼핑이라면 중독이 되어도 좋을듯 ㅋㅋ 울엄마도 그런 홈쇼핑맛을 보면 좋으련만 ㅎㅎ 돕이 좋다니 좋다. ㅎㅎ

  4. 오리 2006/11/14 00:47 Modify/Delete Reply

    시큐리티의 진짜 의미, 맞다. 그것이다. 예전에 평화인권연대 친구들이랑 다같이 '볼링포콜럼바인'을 보고 와서 다들 입버릇처럼 '문 잠그지 마란 말이야'를 외쳤는데 며칠 후 바로 도둑이 들어 없는 살림에 거금을 도둑맞았드랬다. @.@ 세상 곳곳이 지금 돕이 사는 대추리같았으면 좋겠다. 어여~

  5. Rory 2006/11/14 02:09 Modify/Delete Reply

    나도 혼자 목욕탕에서 대화하는데..ㅋㅋ 가끔 비 오는 날은 우산 속에서도 그래. 나도 모르게 연기에 빠져들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ㅋ 돕이랑 언제 4인 대화를 해볼까나

  6. dakkwang 2006/11/14 15:35 Modify/Delete Reply

    ㅋㅋ 홈쇼핑이라 ^^ 근데 불판커피전문점엔 따땃하고 달디단 음료도 있나요? :)
    이번주에 들어갈건데, 고런 것을 찾아도 쓰련지 ;;;

  7. 2006/11/14 16:15 Modify/Delete Reply

    넝쿨/ 나는 너가 좋아^^
    디디/ 디디만 보면 안심이 되요.
    아침/ 어머니 데리고 대추리에 오삼. 내가 멋진 홈쇼핑의 세계로 안내를 할께.
    오리/ 안심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
    로리/ 4인 대화는 아까 만나서 우리 했었다, 그지?
    다꽝/ 따땃하고 달디단 음료도 있습니다. 터키에서 가져온 사과차가 있응께 어서 오삼.

  8. navi 2006/11/15 01:12 Modify/Delete Reply

    문득 11월 11일 밤의 당신의 싱글싱글 웃음이 생각나는군요.ㅋ
    (술먹은줄 알았어..-_-)

  9. manic 2006/11/30 17:12 Modify/Delete Reply

    나비님 그 느끼짱 웃음 말씀이군요.ㅋㅋ

  10. navi 2006/11/30 17:30 Modify/Delete Reply

    느끼짱 웃음이라,, 그런 명칭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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