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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세계화

>> 회의장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부었다. 그냥 여행길이었다면 근처 어디서 쉴 었다 갈 수도 있었겠지만 도착하기로 정해진 시간이 있어서 걍 빗속을 뚤고 달려달려 회의장에 도착했다. 무사히 도착한 기념으로 사진도 한 장 찰칵!

 

>> 비가 그치고 나타난 무지개, 조짐이 좋다!

 

여행 기간 중 참석했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는 내가 몰랐던 세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번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평화주의, 반군사주의자들은 모두 저마다 활동공간에서의 고민들을 가지고 와 국제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려 하였다. 물론 영어를 더 잘 했다면 더 많은 정보와 논점들을 챙겨들을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 차차 알아갈 수 있을 거라 위안해본다.

 

>> 회의 장소에 도착한 후 너무 배가 고파 바로 저녁식사를 했다. 회의 참가자들 중 베지테리언들이 많아서(국제회의 참가신청서에 이에 대해 묻는 문항이 있었다) 베지테리언용 식사도 매우 훌륭했다. 동양인들은 많이 먹지 않을 것이란 편견을 깨고 우리는 엄청난 식성을 발휘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 식사가 끝나고는 텐트를 쳤다. 텐트에서 자느냐 이 곳 숙소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참가비가 다르게 책정이 된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텐트를 쳤다. 텐트족 말고도 걍 자연과 함께 담요 한 장으로 노숙(?)을 하시는 참가자도 있었다.

 

>> 회의가 그리 빡빡하지 않아 충분한 시간을 갖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잠도 자고 오카리나도 불고 나와 영은은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에 대해 발표할 자료도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밤마다 열렸던 바에서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전에 만났던 반가운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앞으로 내 활동에서 든든한 동지이자 동반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특히 작년 한국에서 있었던 회의에도 참가해서 이미 낯이 익은 르네 아저씨는 우리가 파리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갖은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우리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르네 아저씨와 함께 한 우여곡절 파리여행은 다음번에...


>> 밤마다 열렸던 바에서는 각국의 참가자들이 모여 함께 노래도 하고 춤도 함께 추었다. (맨 왼쪽에 반쯤 잘렸는데) 노래를 부르시는 분은 이스라엘에서 오신 분으로 음악으로 데모하시는 양반이다. 개인적으로는 별음자리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미에서 온 친구들은 발군의 춤실력을 발휘했고 몇몇 친구들은 실력보다는 걍 열심히 추는 데 의의를 두고 나름대로의 해방춤을 선보였다. 한국에서 온 우리들의 춤실력도... ㅋㅋ 상상에 맡기겠삼.


>> 첨엔 그저 서먹하고 어색해서 한국 사람들끼리 놀기도 하였으나 마지막 밤에는 남미와 스페인에서 온 참가자들과 서로서로 데모할 때 추는 춤을 갈켜주면서 광란의 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 개막식 풍경. 젤 왼쪽에 서계신 분은 이번 국제회의 통역을 맡아주셨고 WRI Women's Working group 멤버이기도 하다. 파란 옷을 입고 머리가 하야신 양반이 이번에 새로 WRI Chair로 선출된 하워드 클락.

 

>> 회의장 내부 풍경. 이렇게 쭉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DFG-VK는 이번 국제회의를 호스트 했던 독일 단체 중의 하나. 우리도 한 쪽 구석에 자그맣게 자리를 잡고 평화를 택하라 팩을 팔았다. 팩을 판 수익금은 독일에 망명해서 활동하고 있는 에리트리아 병역거부자들의 활동지원금으로 드렸다.

 

>> 중간에 문처럼 뻥 뚤린 곳 안쪽으로는 평화서점이 문을 열었다. 평화, 비폭력, 직접행동 관련한 갖가지 책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도 회의 끝나면 한국으로 부칠 요량으로 책을 좀 샀는데 결국 요금이 너무 비싸서 여행 내내 싸짊어지고 다녔다. -_-;;

 

>> 본격적으로 개막식이 시작되기 전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참가자들. 오른쪽으로 똑같이 흰색 티셔츠에 반바지를 맞춰 입고 얘기 나누는 사람은 환경, 기술, 비폭력 등 여러 가지 논문들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브라이언 마틴(왼쪽)과 이번에 새로 WRI Council 멤버로 선출된 스텔란 빈타겐이다.

 

>> 회의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는 이번 회의 기간동안 매일매일 진행될 주제별 그룹들의 홍보부스가 차려져 참가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나와 영은 날맹은 '살상하지 않을 권리(Rfight to refuse to kill)' 주제그룹에 참여하였고 가람, 나동, 아침은 '무기상인들(War Profiteers)' 주제그룹에 참여하였다. 그 이외에도 '경제세계화 속의 군사주의', '군대주둔', '시민들의 비폭력적 개입', '비폭력 전략과 세계화', '초보자를 위한 비폭력트레이닝', '비디오 액티비즘' 등 다양한 주제그룹이 활동하였다.

 

>> 이번 회의는 영어, 불어, 독어, 스패니쉬 4가지 언어로 동시통역 되었다. 통역부스 모습.

 

>> 부스 한 켠에 붙어있던 포스터. 예쁘다.

 

>> 회의장 밖의 모습. 한 참가자의 제안으로 이 곳 어디쯤에서 아침마다 요가 워크샵이 열렸다. 하지만 한 번도 못가봤다. -_-;;

 

>> 회의장 건물 바깥에 이렇게 염손지 산양인지가 뛰어놀고 있었다.

 

국제회의 개막을 선포하다.

 

개막식은 마이켄 쇠렌센(Majken Soerensen)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새로운 의장이 될 하워드 클락(Howard Clark)과 독일 DFG/VK(Deutsche Friedensgesellschaft/Vereinigte Kriegsdienstgegnerinnen, 독일 평화회/전쟁저항자연합)의 현 대표인 위르겐 그래스린(Jürgen Grässlin), 그리고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현 의장인 조앤 쉬헨(Joanne Sheehan)이 첫 전체 모임의 발언자로 나섰다. 하워드의 발언은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혹은 아직 진행 중인 이라크와 같이 세계에 전쟁이 자꾸자꾸 발생되는 시기에 이 회의의 절박한 필요성과 대안적 견해를 계발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처음으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 참석한 나이지리아, 짐바브웨, 수단 그리고 한국의 참가자들에 대해 매우 기쁘다는 인사말도 덧붙였다.
위르겐 그래스린은 DFG/VK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DFG/VK는 4,500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일에 존재하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7개 지부들 중 가장 탄탄한 단체라고 한다. DFG/VK는 1892년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와 알프레드 프리드(Alfred H. Fried)에 의해 설립되었다. DFG/VK의 설립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프로이센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것이었고 1927년 최대 30,000명의 회원들과 함께 20세기 르네상스를 목격하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카를 폰 오시츠키(Carl von Ossietzky)와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와 같은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렇게 확장되어 가던 조직의 규모는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던 시기 5,000명으로 감소하였다.
60년대 DFG/VK는 독일의 재군사화와 베트남 전쟁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독일의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재판을 바로잡은 것은 DFG/VK의 큰 성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DFG/VK는 독일 연방군(Bndeswehr)의 역외개입(out of area-interventions)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로 남아있는 군대를 없애는 것은 군사지출을 연간 5% 줄이는 것과 같은 작은 걸음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그래스린은 설명하였다. 이러한 전술에 대해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에서는 매우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래스린은 오늘날 42개의 진행 중인 전쟁이 있다고 계산했고 미국-이라크 혹은 인도-파키스탄과 같이 민족국가 간의 전통적인 전쟁보다는 내전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스린은 여전히 나토의 해산을 주장하고 있다. DFG/VK는 무기거래 반대 캠페인, 특히 독일 헤클러 & 코흘 G3 전투소총과 같은 소형무기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전투소총은 최근 다푸르(Darfour)/수단과 같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나라들의 시민들을 상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스린은 비록 빈곤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장낸 집단의 능력에 대해 지적하였는데 이것의 매우 성공적인 사례가 소말릴랜드(Somaliland, 동아프리카해안지역)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평화로운 소말릴랜드가 유엔에 의해 인정되고 있지 않다.
그래스린은 죽은 이스라엘 사람 30명 당 300명의 레바논사람이 죽고 있다고 계산하였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시민이다. 그래스린은 레바논뿐만 아니라 가자지역과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도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해야 함을 명확히 요구하였다.
조앤 쉬헨은 세계화에 대한 이번 회의 주제가 참가자들 사이에 새로운 연결과 행동주의 네트워크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표현하였다. 그녀는 반세계화운동의 뭄바이 회의에서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의 감동적인 연설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또한 그녀가 만났던 인도 여성의 사례를 들면서 세계화의 귀결로서 가정폭력과 강간이 국가 차원이 핵실험과 연결되어 있음을 얘기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우리의 차이에 대해 반추하면서 비폭력 혹은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같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다.
전체모임 말미에는 재밌는 게임을 했는데 이것은 서로가 질문을 하고 교환을 함으로써 참가자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워드 클락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16개의 질문이 담겨있는 인쇄물을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유용하고 재미있는 질문들은 서로가 친해질 수 있도록 했으며 재미있는 반응들을 끌어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이 승리하길 바라는 사람을 찾아라.”

 

두 가지 운동이 함께?

 

제24차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는 우리 모두가 지지하는 두가 운동이 함께 모일 수 있었다. 반세계화운동(혹은 “다른 종류의 세계화를 위한 운동”)과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로 대표되는 비폭력운동이 그것이다. 첫 번째 운동은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the movements)”으로 불려왔는데 왜냐하면 G8 정상회담 공격 혹은 이라크 전쟁 반대 등과 같은 반전캠페인을 조직할 때 대안운동, 인종차별반대운동, 페미니즘운동, 아나키스트운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동자운동(1995년 프랑스 파업과 2006년 학생-노동자 시위)까지도 함께 묶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화를 위한 이러한 운동들 내에서 아주 다양한 비폭력직접행동이 있어왔으나 전체로서의 운동은 스스로가 비폭력적이 되는 것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인원이 많기 때문에 저항방법의 다양성을 고려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더 적합하다. 다른 운동, 즉 세계적인 비폭력운동은 보다 오래된 운동으로 세계적 차원의 캠페인을 조직했던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이 운동은 스스로를 반세계화운동의 일부로 여기로 있지는 않다.
함께 만나는 것의 첫 단계는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세계화 시대에 권력과 지배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적절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최근 세계화 과정에서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마리아 미스(Maria Mies)는 인도에서 여성운동에 참여했던 그녀의 경험을 끌어 설명하였다. 1997년 다자간투자협정(Multinational Agreement on Investments, MAI)에 반대하는 반신자유주의 캠페인에서부터 시애틀 세계무역기구 총회 시위까지 그녀는 이 모은 움직임이 성공적이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코소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들, 그리고 이러한 전쟁들과 세계화와의 연관성에 대해 분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세계화의 단 하나의 행위자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인 거대 초국적기업들이다. 그래서 무역과 경제는 더 이상 평화적이지 않고 전쟁은 이러한 경제를 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초국적기업들은 기업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곳에서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권리, 어떠한 국가적 간섭 없이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권리로 세계화를 정의한다. 이것이 우리가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와 싸우는 이유이다. 우리는 세계경제전쟁 안에 살고 있고 그 곳에서는 시민사회와 전쟁사회 사이에는 아무런 국경이 없다. 세계화는 소규모 상인, 소농들, 많은 나라들의 생존능력을 파괴하는 거대 초국적기업의 자유를 뜻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테러리즘을 본다면 그것은 적에게 어서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테러리즘은 전쟁조직을 계속 가동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국경 없는 전쟁이다. 유럽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사는 척 할 수 없다. 유럽 헌법은 이전의 군사적 개입을 기술, 경제, 그리고 성장과 같은 분야와 별개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 미스는 프랑스 사람들이 그러한 헌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민투표를 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그녀는 우리가 우선 평화로운 사회가 어떨 것인가 생각하기 전에 이러한 현실을 봐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긍정적인 세계화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그녀의 슬로건은 세계화대신 지역화를!
마리아 미스는 오랫동안 다른 세계화운동에 참여해왔으며 특히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운동에 함께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쾰른(Cologne)에 살고 있으며 퇴임한 사회학 교수이자 세계화에 관한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저서들의 저자이다.
주제별 그룹과 워크샵이 끝나고 오후 기조연설에서는 사이몬 하락(Simon Harak, 미국)과 앤 펠트햄(Ann Feltham, 영국)이 그들의 주제별그룹 주제이기도 한 “민간안보회사(private security enterprises)와 무기상인들”에 대한 분석을 이어갔다.
앤 펠트햄은 민간안보회사들이 국가경제의 역할을 점점 떠맡게 되는 것을 지적하며 민영화 전술을 비판했던 마리아 미스의 발언을 이어갔다. 무기거래에서 그것은 점점 더 그들의 이윤전략을 정부에게 지시하는 경향이 있는 록히드(Lockheed, 미국),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 프랑스, 독일), BAE 시스템(BAE-System, 영국) 사(社)와 같은 거대 기업들이다.
사이몬 하락은 최종적으로 정부를 기업들의 단순한 도구, 사적인 용무의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얘기하였다. 그는 방위를 위해 1985년에 설립된 미국위원회(US-comittee)의 민간회사 로비스트들의 약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글자 그대로 180억 달러의 이익이 얼마만큼 인지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보여주려 애썼지만 그래도 실패하였다. 그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많은 돈이었다. 과거 초국적기업들이 전쟁 바깥에서 이윤을 만들어 욕을 먹었으나 오늘날, 하락이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는 거대 기업들이 이윤을 위해 전쟁을 만든다.
대부분의 발언자들이 초국적기업들의 지배적 역할에 대해 강조를 했고 그것과 비교해서 다른 것들은 매우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단순한 초국적기업의 마리오네트처럼 평가한 것은 매우 전형적인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화는 르완다 대량학살, 밀로세비치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이라크의 후세인과 같이 지역독재자들이나 군대의 대량학살 등에 대해 간과하고 지나칠 수 있다. 세계화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고 그것에 대한 저항은 초국적기업, 군대, 경찰국가화 추세, 지역 군벌 등 매우 다양한 적들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락이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에 대한 군사개입을 고찰한데 반하여 펠트햄은 유럽에 집중하였다. 사이몬 하락은 윤리학 교수이자 ‘전쟁저항자연맹(War Resisters League, WRL)’의 반군사주의 책임자이다. 그는 “죽음의 상인을 저지하라”는 이름의 캠페인에 집중하고 있다. 앤 펠트햄은 영국 ‘무기거래반대캠페인(campaign against arms trade, CAAT)’의 활동가이다.

 

세계적인 비폭력행동

 

이 대규모 운동은 비폭력직접행동의 훌륭한 실천을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성공하였다. 거기에서 우리 모두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초국적 협력과 연대행동은 새로운 연결과 네트워크를 창조하였다.
팔레스타인의 비폭력활동가 시린 알-아잡(Shireen Al-Ajab)은 영국 주재 독일대사관에 의해 비자가 오래 거부당했었는데 다행히도 결국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를 테러리스트라고 추측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는 전체모임에서 이 여행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독일 당국이 소말릴랜드의 사미라 자마 엘미(Samira Jama Elmi)의 비자를 승인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날의 전체 모임은 원래 계획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사미라와 소형무기에 대해 발언할 예정이었던 폴 루스만(Paul Russmann) 대신 힐랄 데미르(Hilal Demir)와 안드레아스 스펙(Andreas Speck)이 터키의 빈군사주의 캠페인에 대한 발언을 하였다.
오전 모임은 바깥에서 온 평범한(?) 뉴스로 시작되었다. 레바논 전쟁이 400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 중 380명이 레바논 시민이라는 것이다. 해서 군사주의와 전쟁이라는 환경 아래서 어떻게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것인가 라는 주제는 더 없이 긴급한 것이었다.
터키 이즈미르에서 온 비폭력트레이너인 힐랄 데미르는 먼저 터키 병역거부 운동의 역사를 소개하였다. 1989년 첫 선언으로 시작하여 19세기 초반 세계병역거부자 회의(International Conscientious Objectors' Meeting, ICOM)까지. 터키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오스만 무랏 울케(Osman Murat ϋlke)가 박해를 당하던 1996~99년 국제연대는 절정에 달했다. 병역거부운동 연합인 ISKD는 강연회와 비상네트워크를 조직했고 터키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오스만이 풀려난 후 ISKD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해산했다. 이 과정에 대해 힐랄은 그들이 다뤄야할 일종의 “군사주의”라며 한탄했다. 남성지배 때문에 여성들은 2년 간 따로 만나서 해결방안에 대해 논의했고 그 이후 그들은 운동에 젠더적 관점이 필요함을 얘기하고 토론을 요구하였다. 터키 운동에는 현재 많은 여성병역거부자들이 있다. 비록 여성에 대해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군사주의에 대한 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고 한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활동가인 안드레아스 스펙은 터키 정부에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 유럽인권법원(European Human Rights Court)의 판결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터키에서는 사회적으로 병역거부에 관한 법을 도입하는 것에 관해 심각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국제연대캠페인 동안 상호 기대치와 능력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언어의 문제가 발생해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터키 여성 병역거부자에 대한 책을 출판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하워드 클락은 병역거부자들의 존재가 터키 군대와 쿠르드 노동자당(PKK) 사이의 전쟁을 실제로 예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서 포괄적인 긍정적 평가를 줄였다. 더욱이 스펙 또한 오늘날 병역거부자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군사주의 운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오후 전체 모임의 초점이었다. 이 전쟁은 이전에 실행되었던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비폭력직접행동을 무색하게 하였다. 특히 비폭력직접행동과 장벽건설에 반대하는 국제적 활동, 그리고 이스라엘과 펠레스타인 간의 모든 다양한 종류의 대화를 위한 그룹들의 활동들 말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사례들로서 고려될 수 있다.
몇몇 국제연대행동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명령전략(dictating strategy)이라고 비판받아왔다. 국제적 그룹과 지역 운동가들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첫 번째 발언자는 앤지 첼터(Angie Zelter)로 국제여성평화봉사(International Women's Peace Servie, IWPS)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이었다. 그녀는 먼저 중세 이후 유대인과 무슬림 공동체 사이 평화적 공존의 세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하였다.
3, 4년 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는 뉴프로파일(New Profile), 분리장벽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Anarchists Against the Wall), 블랙런드리(Black Laundry,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와 같은 새롭고 젊은 다양한 비폭력 그룹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은 국제연대운동(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 ISM)의 지원을 받고 있다. 비록 이러한 연대가 도움이 되는가 사실 방해가 되는가에 대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그룹들 사이에 토론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행동과 자유행진은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초국적 네트워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만나고 함께 행동그룹들을 만들 수 있는 안전지대를 제공했다.
두 번째 발언자였던 도로시 나오르(Dorothy Naor)는 뉴프로파일이라는 반군사주의그룹의 활동가이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맞서는 많은 비폭력직접행동에 참여해왔다. 그녀는 보다 회의적이었는데 평화운동이 여전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변부라고 강조하였다. 그녀에게 점령은 196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엔이 이스라엘에게 영토의 55%를 배분한 194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 비율은 겨우 6~8%였다. 그녀는 모든 여성의 50%가 징집되는 지구상 단 하나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군사화 된 나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군사화 된 사회를 시민적, 진정으로 시민적 사회로 바꾸는 것이 평화운동의 목표라며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 발언자는 팔레스타인인인 시린 알-아잡이었다. 몇 년 동안 그녀는 이스라엘과 아랍사람들이 함께 구성한 그룹에서 활동해왔고 나중에는 독일연합에서 활동하였다. 시린은 예루살렘에서 평화와 분쟁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고 최근에 영국에서 두 번째 학위를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 여성으로서 비폭력 운동의 전망에 대해 얘기하였다. 그녀가 비폭력에 대해 실천하는 근거는 3가지이다. 첫째 무슬림 여성으로서 그녀의 신념은 살상을 금하고 있다. 둘째 사실상 그녀는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총을 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녀는 적과 닮아가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저항의 도덕률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다.
시린은 또한 1936년 영국 위임통치에 저항하여 6개월 파업을 벌였던 Ez Eddeen Alquassam 운동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했던 비폭력저항의 사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러한 전통과 반대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폭력사용을 옹호하였다. 세상에 의해 이러한 전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폭력은 첫 번째 인티파다(1987~1991) 기간에 나타났다고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첫 번째 인티파다는 마드리드 평화회의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소련 멸망과 걸프전쟁 이후 오슬로 평화협정은 마드리드과정(madrid process)으로 대체되었다. 시린에게 오슬로는 그들의 땅에 대한 일종의 자동분할로 큰 실수였다. 이후 1993년부터 이스라엘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각종 장애물과 검문소를 이용해 압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비안간화 과정은 11명의 살아있는 목숨을 대가로 한다. 팔레스타인 자살폭탄이라는 현상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로 봉쇄에 대한 반응으로 1993년 처음 시작되었다.
심지어 시린의 시각에서 두 번째 인티파다의 첫 한 달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억압적으로 무기와 폭탄을 사용한 전술을 강화했다. 서구 나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모든 기반시설은 다시 파괴되었다. 종종 곧바로 복구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또한 국제연대캠페인을 방해하고자 했다. 가장 최근의 법률 중 하나는 전 세계에서 온 방문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시린에게 팔레스타인은 미국에서 인디언을 위한 정부지정보류지에서 토착 미국인들이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의 형태인 것이다.
레바논 전쟁에 저항하는 우리의 대응행동으로 그녀는 남아프리카의 사례에서 성공적으로 실행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을 유럽인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이해에 근거해서 거의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비폭력저항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살폭탄은 개인적인 실천이며 팔레스타인 집단적인 저항으로 봤을 때 중요한 게 아니다.
세 발언자들은 모두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지역에서 비폭력그룹들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관해 보여주었다.
토론에서 시린은 조금 있으면 두 국가 해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팔레스타인 국가는 원래 영토의 단지 22%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팔레스타인 주류는 한 국가 건설이라는 결론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인티파다가 진정으로 비폭력적이었던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녀는 이스라엘은 심지어 언어폭력 등 어떤 것도 폭력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함께하는 그룹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폭력의 행위자가 아니라 항상 스스로를 피해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실지적 전쟁을 마주하고 있는 시린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이 있는 독일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보이콧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나왔다. 차라리 이스라엘에 독일 무기를 공급하는 공급원에 대한 공격 등의 다른 방법과 전술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전략을 찾아!

 

활동가들은 비폭력직접행동에 어떤 전술을 취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의 구조에 함께 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할까?
오랫동안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운동은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국제금융기구들에 도전해왔다. 이러한 운동들은 세계적으로, 대륙별로, 그리고 지역 사회포럼의 자체적인 구조들을 창조해왔다. 오전 전체모임에서 전 트라이던트 보습만들기(Trident Ploughshares) 활동가이며 현재 스웨덴의 고텐부르그 평화와 개발연구소(Gothenburg Peace and Development Research Institute)에 있는 스텔란 빈타겐(Stellan Vinthagen)은 위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전쟁” 전술과 “용병술”을 개발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들로 능력을 길러 세계사회포럼에 함께해야 한다.
빈타겐에 의하면 이러한 “운동들의 운동”은 세계사회포험에서 사실상 힘을 가지고 있으며 무장투쟁조직과 마찬가지로 정당 정치인들도 참여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누구도 세계사회포럼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이 운동 내에는 다양한 운동들의 연합이 있다. 비폭력행동은 그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1976년 시브룩(Seabrook, 핵발전부지를 비폭력적으로 점거하는 경향을 만들었던 직접행동. 그 행동에서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방법이 개발되었다)에서 개발된 원형은 시애틀 반세계화 활동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조제 보베(Jose Bove)는 비폭력행동을 옹호하고 있으며 지구적민중행동(People's Global Action)도 비폭력전통에 의존하고 있다.
빈타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캠페인들은 너무나 자주 폭력적 충돌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왜 그랬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빈타겐은 활동가들의 일부가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운동 내에 오래된 평화운동가들의 참여 부재가 원인이라 주장한다. 그것이 이 운동의 약점이라는 것이다. 빈타겐은 이어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대안들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사회포럼 구조 안에서 누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가? 무슬림들, 아프리카인들, 동유럽활동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을 던졌다.
세계적인 비폭력운동이 여기에 참여해서 이러한 약점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것의 의미가 바로 비폭력의 세계화이다. 그러나 빈타겐은 오래된 운동은 그것의 실천과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였다. 요즘에도 국가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어떠한 세계적 기구도 유독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정부 없는 세계적 가버넌스가 있다. 대신에 민간기구들이 힘을 가져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빈타겐은 세계적 규모의 투쟁뿐만 아니라 지역적 투쟁을 제안한다. 다차원적 접근, 협력관계 구축,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기구 개발.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경제적 대안을 개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현재는 기술이 발달한 시기(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정무역 등)이기 때문에 비폭력 활동가들은 그들의 활동방법들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토론에서의 반응들은 그의 전술적 사고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보내는 것에서부터 이러한 전술들이 진정으로 비폭력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매력이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들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것들이 투쟁과 캠페인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는 것으로서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토론 시간에 제기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운동들에 비폭력적인 성격을 강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다국적 회사들의 권력구조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 시민불복종은 얼마나 중요할까? 전쟁무기상인들에 맞서 우리는 어떤 행동들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목표들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비폭력혁명을 달성하기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단순히 항의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
오후 전체 모임은 평상시와 다른 방법으로 개최되었다. 아쉽게도 초청된 발언자인 펠릭스 콜브(Felix Kolb)와 시안 존스(Sian Jones)가 참석하지 못해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의장인 조앤 쉬헨이 전 세계사회포럼 주최자인 자이 센(Jai Sen)과 함께하였다. 진행자인 하워드 클락은 생생한 토론을 위해 전형적인 발표대신 두 발언자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성공적인 운동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쉬헨은 시브룩과 같은 과거 성공적인 운동에 대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것의 조직모델(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은 전쟁저항자연맹 활동가들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회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쉬헨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여성회의를 시작하던 1975년으로 초점을 옮겨갔다. 그 회의에서 페미니즘과 비폭력에 관한 토론이 시작되었고 1992년 유명한 방콕 여성회의를 이끌었다. 그리고 쉬헨은 몇몇 서적들과 사회적 방어에 관한 국제회의를 인용했다. 그녀는 빈타겐이 제안했던 캠페인 계획과는 약간 의견을 달리했고 지역적 요구와 의식과정에 집중했고 풀뿌리 차원의 사례연구가 보다 많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다함께 하는 전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뭄바이 세계사회포험의 공동주최자인 인도의 자이 센은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주류의 문제가 있는 발전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이 중산층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는 시민사회를 상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빈타겐과 대조적으로 자이 센(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생각하는)은 대규모 행동과 보다 활동적인 참가자들의 연합을 위해 열려있는 전술을 옹호했다. 그는 트레이너들이 혹은 주최자들이 어떻게 활동할지, 그래서 그것으로 지역 공동체 사람들이 힘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공식화했다. 그는 나아가 어떻게 국가 구조가 진정으로 민주화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토착주민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사회의 주변부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은 그들의 힘을 만들어낸다. 주변화라는 이러한 서술(“궁핍한 사람들”)은 정말로 북반구 부자들의 시각이다. 자이는 세계사회포럼 구조 안에서 무장그룹의 활동가들이 토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토론이 점점 더 독단적이 되어 가고 있으며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포용력이 줄어들어가거나 혹은 새롭게 대안적인 사회포럼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 센은 세계사회포럼에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참여하는 것을 옹호한다.
토론에서는 두 명의 참가자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세계사회포럼 참여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다. 한 여성은 지난 아테네 유럽사회포럼(European Social Forum, ESF)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그곳의 많은 대표자들이 더 이상 반군사주의자들이 아님을 참가자들이 인지해줄 것을 원했다. 그녀는 반제국주의 그룹들뿐만 아니라 많은 트로츠키 그룹들이 아테네 회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 곳에서의 시위도 서로간의 물리적 충돌까지 갈 뻔했다고 한다. 칠레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지부에서 온 페라오 까발로(Pelao Cavallo)는 카라카스 사회포럼에 대해 비판했다. 소위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혁명에 대해 축하하는 잔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정부가 사회 안에서 주요한 군사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식적으로 칠레의 병역거부는 인정이 되지만 실지로 거부당한다. 준군사조직들이 국가통제주의자 차베스의 하부구조에서 다시 부흥하고 있다. 카라카스에서 있었던 사회포럼의 경험이 목격했던 것처럼 보다 넓고 자유로운 공간과 관용을 믿는 사람들과 반대되게 차베스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차베스의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세계사회포럼과 베네수엘라 당국자들에게는 파시즘과 같은 것이다. 점점 더 활동가들이 차베스를 지지해야 할 것인가 반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적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고 페라오 까발로는 말했다. 그래서 모든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평화주의, 반군사주의, 반군사주의 페미니스트, 비폭력 아나키스트 참가자들도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적 캠페인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국제비폭력운동과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 이 두 가지 운동이 서로 함께하는 것이 가능했던가? 첫째 날, 우리는 함께 활동하는 것의 실제적 가능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였다. 무엇이 이러한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가?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권력구조,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구성되는가? 둘째 날은 세계적 규모의 비폭력행동에 대해 분석하는 것에 할애되었다. 최근 들어 다른 세계화 운동에서 비폭력행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세계적 규모의 비폭력행동을 전파해왔다. 셋째 날, 이러한 분석은 세계화 시대 비폭력저항의 전략에 대한 실질적 토론으로 이어졌다.
전체 회의기간 동안 매일 반복해서 만났던 주제별그룹(theme group)의 활동 결과 발표와 토론에 의해 이러한 전략들은 보다 단단해졌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러한 결과들은 다가오는 해 펼쳐질 활동들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이번 회의는 네트워킹 행사였다. 만약 워킹그룹들이 만나고 반전캠페인들이 시작된다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이러한 회의 사이에서만 오로지 존재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국제적 캠페인은 레바논 전쟁을 끝장내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견고한 세계적 거부행위야말로 오로지 살상을 저지하고 뚫고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있다.


>> 국제회의 3일째 되는 날, 뜻밖의 손님들이 회의장을 찾았다.


>> 자전거를 타고 벨기에에서 모스크바로 평화순례를 하고 있는 'Bikers for Peace' 였다. 그 면면도 굉장히 다양했는데 이제 한 5살 정도밖에 안보이는 꼬마아이에서부터 다리 한 쪽을 잃은 아저씨까지. 참, 한국사람도 있었다. 독일에 살고 계신 분이었는데 집 앞으로 'Bikers for Peace'가 지나가는데 너무 멋있고 좋아 보여서 그 길로 자전거를 타고 따라나섰다는 분이다. 평화를 택하라 팩도 사주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시기도 하였다.

 

>> 'Bikers for Peace'의 무대. 석유를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모두 자전거를 타자고 외쳐서 참가자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 회의가 끝나고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텐트를 걷었다.

 

>>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소나기와 함께 우박도 내려서 우리는 하루 더 이 곳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이 곳 회의장에는 실내 수영장도 있고 탁구대도 있어 탁구도 치고 수영도 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저녁엔 텐트를 치기가 너무 귀찮아서 우리도 하루 노숙을 경험해 보기로 하였다. 잼있었다.


>> 다음 날 길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근데 회의 기간 동안 친해진 외국 친구들이 부득이하게 먼저 간 사람들 식권을 걷어서 우리에게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돈 안내고 공짜로 하루 점심을 해결하고 또 광란의 밤을 보내면서 친해진 남미와 스페인 친구들이 몰래몰래 음식들을 싸들고 와서(회의 기간 동안 식사는 부페식으로 운영되었다) 길떠나는 우리를 응원해 주었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 헤어지는 아쉬움을 사진으로. 서있는 사람들 왼쪽부터 스페인에서 온 츄치, WRI 런던 사무국의 안드레아스, 터키에서 온 힐랄, 아침, WRI Chair로 선출된 하워드, 나, 나동, 가람. 아래 줄 앉은 사람도 역시 왼쪽부터 오랫동안 평화운동 여성운동을 해온 WRI Women's Working group의 조앤, 미국에서 온 페트릭, WRI 런던 사무국의 하비엘, 스페인에서 온 요안나, 칠레에서 온 페라오.


>> 이번 회의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참가자도 여럿 있었는데 느므느므 귀여웠다. 젤 왼쪽에 서 계신 분은 미국의 'Veterans for Peace(평화재향군인회)'에서 오신 분인데 한국의 평택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는 분이다. 평화를 택하라 팩을 달고 계셨는데 때문에 우리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다. 과거 군인이었을 때 본인은 정말 바보같았다고 하시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평택의 얘기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 하비엘, 요안나와 함께 한 컷 더! 하비엘은 칠레에서 왔고 요안나는 스페인에 살고 있다. 둘 다 모두 스패니쉬와 영어에 능통하다. WRI 활동이 남미에서도 활발한데 이런 분들의 도움으로 남미 쪽과는 꾸준하게 연대를 해오고 있다.

 

>> 역시 하비엘, 요안나와. 요안나는 스페인의 'Women in Black'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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