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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울은, 괴물같은 도시다. 구획화된 거리와 희뿌연 하늘을 치솟은 건물들의 스카이라인, 내 존재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수많은 인파. 천만의 사람들이, 사막에 건설한 왕국을 바삐 살아간다. 이글거리는 해와 공기가 온통 작렬하는 낮은, 때로는 죽은 듯 때로는 스테로이드를 맞은 듯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때다. 해가 지지 않는 밤, 별이 보이지 않는 밤, 인간이 쌓은 문명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다소 침참한 기분으로, 하찮은 개인에게 말을 건넨다. 마주칠 눈도, 온기를 느낄 실체도 없는 이 무표정한 대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서글프다. 서울을 살아간다는 것, 혹은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문명에 손을 내밀어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자각하면서도 내 존재를 부정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1.
광화문 도심의 복판의 한 허름한 미술관에서 국제노동영화제 월례상영회가 매달 열리고 있었다. 오아시스는 존재한다. 기이하게도 이 오아시스는 많은 이들이 물을 퍼마실수록 조금씩 경계를 넓혀 나간다. 외로운 싸움일까. 나는,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2.
영화는 유전자 조작 식품과 그에 대한 특허권을 사유화한 다국적 기업들, 자본과 긴밀하게 유착된 미국 정부를 보여주면서 식량의 정치를 말한다.
"Whoever controls the seeds controls the market."
이라고 당연한 듯 비춰지는 몬산토 간부의 선언은, 종과 생명에 대한 기업 소유권이 농민들의 경작권이나 농촌 공동체의 자주권, 심지어 소비자인 시민의 알 권리에 우선함을 전제한다. 바람에 의해 날아온 '통제 불가능한' (사실 이 말은 '자연적인'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씨앗의 확산에 특허권을 주장하며 소농들에 엄청난 액수의 소송을 제기하는 다국적 기업의 목적은 소농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소농을 노예화라는 것이다. 자본은 농민 스스로가 종자를 보존하는 것을 막고, 종의 획일화를 통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
이를 규제하고 개선을 지시해야 할 정부는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지 오래다. 자본에 편입된 '인적 자원' 은 끊임없이 행정부와 식품의약국 등 관리당국에 침투하고, 이들의 논리에 의해 정부는 규제를 완화하고, 대법원에서는 소농이 아닌 다국적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부시 2세의 재선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바와 같이 부시 행정부의 국방부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나 전 법무부장관인 존 애쉬크로프트와 같은 이들은 몬산토의 경영진 출신이거나, 선거 때 몬산토로부터 수천억달러의 지원금을 받았다.)
여기에는 정부 보조금이라는 허울좋은 기업 지원책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비싼 비료나 기타 생산가와 낮은 판매가로 인해 밀을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농민들에게는 손해를 안겨준다. 이에 정부는 (유전자 조작 작물의 경우 특히) 보조금을 지급하여 그 손해를 메우는데, 이 과정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농민들에게 값비싼 비료와 제초제 등을 팔아먹는 기업 뿐이다. 농민은 점차 식량생산이라는 생태적 과정으로부터 단절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속에서 농촌공동체가 (생산의 바탕이 되는 농촌공동체가!) 상실되어 가고, '노동'이 상실되어 가고, 농업이 가지는 '가치'가 상실되어 간다. 남는 것은 감당 못할 빚이고, 소송이며, 기업의 노예로 살아가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3.
이러한 자본의 논리 하에서 과학은 그에 봉사하는 하나의 권위적 장치로써 기능할 뿐, 비판적 목소리들을 배제하고 이윤 추구에만 몰두한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해서 '착취해낼지'를 연구할 뿐 유전자의 조작이 가져다 줄 부작용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어디론가 떠넘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쉬이 알 수 없는 것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가리고 거짓포장하는 일들은 얼마나 얄팍한가. 어찌 보면 이는 인간의 오만함이 학문이라는 표식을 달고 드러나는 사소한 예일지 모른다. 종의 다양성을 'Land Races' 라고 표현하는 멕시코 농민들의 "사람이 먹는 것을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라는 말은 너무도 투박함에도 진리인 것인데, 인간의 과학은 자연에 침투하면서 '자연' 도, '인간' 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본' 만을 추종하고 있다.
대학이 더는 비판적 지식인의 요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동일한 맥락 속에 위치지어진다. 수백, 수천만 달러 (혹은 수백, 수천억원) 을 대학에 투자하는 기업의 입김 하에서 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을 생산해내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하위 기관 정도로 전락해 간다. 그래서 삼성 이건희 회장은 철학'박사'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고등'교육'은 숨을 다해가고 있는 것이다.
4.
시민운동 등의 영향에 따라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미국 내 소비자가 감소하자, 다국적 기업은 유전자 조작 식품이 전세계적인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세계적 기아의 원인을 불균등한 식량 자원의 배분 상태가 아닌 절대적 식량의 양에 돌리려는 의도이며, 나아가 제3세계의 식량 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세계화 작업의 일환이다. (기아로 고통받는 제3세계의 빈민들의 대부분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던 '농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현재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금융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품종을 단일화하고, 생명과 관련한 특허를 전세계적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 또한 세계화라는 큰 흐름 속에 포괄될 수 있다. 참 두려운 이름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세계화, 국제화라는 말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는 학교 교육과 마치 그것이 손댈 수 없는 필연적이고 당연한 이행인 것처럼 주장하는 정부와 언론의 보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무력화시킨다.
반혁명은 존재한다.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는 유기농사를 통해 자생적 농업공동체를 되살리려는 흐름들이 일어나고 있고, 남미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실현되고 있는 듯 하다. 농민과 소비자가 유기농을 직거래하고, 미국의 특정 주에서는 가족 농업 이외의 기업 농업은 허용하지 않는 법을 제정하는 등의 모습도 있다. 여러 자서전과 대안 공동체에 대한 논의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집단공동농장제도를 도입한 소규모의 농업 공동체들도 존재한다. 이런 영상들을 볼 때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는 구호는 꽤나 긍정적으로 구체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유기농사가 농업공동체의 회생과 연결되지 못하고 "웰빙"이라는 이기적인 유행과 결합하면서 자본 논리에 포획되게 되었다. 유기농을 사먹기 위해서는 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유'농약 식품,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을 수 밖에 없다.
시민 운동이나 대안 공동체 운동이 반드시 완전한 대안인지도 불분명하다. (아직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전체 사회의 변혁이 아니라 사회 일부의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나 현실 사회를 방기하고 그곳에서 '탈출'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대안에 대해, 즉 희망에 대해 시간을 그닥 할애하지 않는다. 어쩌면, 희망을 창조적으로 생산해내고 과학적 전망을 고민하는 것은 영화를 보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몫이다.
5.
새삼 음식도 기억의 범주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음식, 어떤 재료 하나하나에 사람이 있고,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다. 그 강렬한 기억에서 원 세포를 떼어내고 변형된 유전자를 이식한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가 수십 억 년 동안 (이또한 하나의 주입된 이데올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과 쌓아온 기억들에 대한 파괴행위이기도 하다. 기술발전에 대해 알러지적 반응이 조건반사화되는 것도 그닥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지켜야 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 아닐까.
영화가 주요 소재로 다루었던 유전자 조작 옥수수는, 최근에 다녀왔던 신곡 마을에서 먹었던 찰옥수수를 떠올리게 했다. 어머님께서 익숙하게 손으로 털어주신 옥수수 알알을 하나하나 아껴 먹었던, 그런 기억들이 이제는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을 테지.
6.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먹지 않을 수야 없는 일이다. 원래 이런 방향의, 혹은 이런 질감의 글을 쓰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배고프고 잠이 모자라다 보니 엉뚱하게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영화를 보았다고, 기억을 손끝으로 재구성해 토내했다고 해서 영화읽기라는 과정이 종료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고민하고, 공부하자. 실천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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