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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7/31
    0730. <식량의 미래>
    하늘연
  2. 2005/07/30
    I'm.
    하늘연
  3. 2005/07/28
    거칠게.(1)
    하늘연
  4. 2005/07/26
    뒤척뒤척.
    하늘연
  5. 2005/07/24
    0721. 졸음증.(1)
    하늘연
  6. 2005/07/22
    정체, 파열.
    하늘연
  7. 2005/07/17
    불안, 의심, 호흡곤란.
    하늘연
  8. 2005/07/12
    잃어버린, 혹은 잃어져버린.
    하늘연

0730. <식량의 미래>

0.

 

서울은, 괴물같은 도시다. 구획화된 거리와 희뿌연 하늘을 치솟은 건물들의 스카이라인, 내 존재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수많은 인파. 천만의 사람들이, 사막에 건설한 왕국을 바삐 살아간다. 이글거리는 해와 공기가 온통 작렬하는 낮은, 때로는 죽은 듯 때로는 스테로이드를 맞은 듯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때다. 해가 지지 않는 밤, 별이 보이지 않는 밤, 인간이 쌓은 문명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다소 침참한 기분으로, 하찮은 개인에게 말을 건넨다. 마주칠 눈도, 온기를 느낄 실체도 없는 이 무표정한 대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서글프다. 서울을 살아간다는 것, 혹은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문명에 손을 내밀어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자각하면서도 내 존재를 부정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1.

 

광화문 도심의 복판의 한 허름한 미술관에서 국제노동영화제 월례상영회가 매달 열리고 있었다. 오아시스는 존재한다. 기이하게도 이 오아시스는 많은 이들이 물을 퍼마실수록 조금씩 경계를 넓혀 나간다. 외로운 싸움일까. 나는,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2.

 

영화는 유전자 조작 식품과 그에 대한 특허권을 사유화한 다국적 기업들, 자본과 긴밀하게 유착된 미국 정부를 보여주면서 식량의 정치를 말한다.

 



"Whoever controls the seeds controls the market."

 

이라고 당연한 듯 비춰지는 몬산토 간부의 선언은, 종과 생명에 대한 기업 소유권이 농민들의 경작권이나 농촌 공동체의 자주권, 심지어 소비자인 시민의 알 권리에 우선함을 전제한다. 바람에 의해 날아온 '통제 불가능한' (사실 이 말은 '자연적인'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씨앗의 확산에 특허권을 주장하며 소농들에 엄청난 액수의 소송을 제기하는 다국적 기업의 목적은 소농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소농을 노예화라는 것이다. 자본은 농민 스스로가 종자를 보존하는 것을 막고, 종의 획일화를 통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

 

이를 규제하고 개선을 지시해야 할 정부는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지 오래다. 자본에 편입된 '인적 자원' 은 끊임없이 행정부와 식품의약국 등 관리당국에 침투하고, 이들의 논리에 의해 정부는 규제를 완화하고, 대법원에서는 소농이 아닌 다국적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부시 2세의 재선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바와 같이 부시 행정부의 국방부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나 전 법무부장관인 존 애쉬크로프트와 같은 이들은 몬산토의 경영진 출신이거나, 선거 때 몬산토로부터 수천억달러의 지원금을 받았다.)

 

여기에는 정부 보조금이라는 허울좋은 기업 지원책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비싼 비료나 기타 생산가와 낮은 판매가로 인해 밀을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농민들에게는 손해를 안겨준다. 이에 정부는 (유전자 조작 작물의 경우 특히) 보조금을 지급하여 그 손해를 메우는데, 이 과정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농민들에게 값비싼 비료와 제초제 등을 팔아먹는 기업 뿐이다. 농민은 점차 식량생산이라는 생태적 과정으로부터 단절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속에서 농촌공동체가 (생산의 바탕이 되는 농촌공동체가!) 상실되어 가고, '노동'이 상실되어 가고, 농업이 가지는 '가치'가 상실되어 간다. 남는 것은 감당 못할 빚이고, 소송이며, 기업의 노예로 살아가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3.

 

이러한 자본의 논리 하에서 과학은 그에 봉사하는 하나의 권위적 장치로써 기능할 뿐, 비판적 목소리들을 배제하고 이윤 추구에만 몰두한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해서 '착취해낼지'를 연구할 뿐 유전자의 조작이 가져다 줄 부작용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어디론가 떠넘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쉬이 알 수 없는 것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가리고 거짓포장하는 일들은 얼마나 얄팍한가. 어찌 보면 이는 인간의 오만함이 학문이라는 표식을 달고 드러나는 사소한 예일지 모른다. 종의 다양성을 'Land Races' 라고 표현하는 멕시코 농민들의 "사람이 먹는 것을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라는 말은 너무도 투박함에도 진리인 것인데, 인간의 과학은 자연에 침투하면서 '자연' 도, '인간' 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본' 만을 추종하고 있다.

 

대학이 더는 비판적 지식인의 요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동일한 맥락 속에 위치지어진다. 수백, 수천만 달러 (혹은 수백, 수천억원) 을 대학에 투자하는 기업의 입김 하에서 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을 생산해내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하위 기관 정도로 전락해 간다. 그래서 삼성 이건희 회장은 철학'박사'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고등'교육'은 숨을 다해가고 있는 것이다.

 

 

4.

 

시민운동 등의 영향에 따라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미국 내 소비자가 감소하자, 다국적 기업은 유전자 조작 식품이 전세계적인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세계적 기아의 원인을 불균등한 식량 자원의 배분 상태가 아닌 절대적 식량의 양에 돌리려는 의도이며, 나아가 제3세계의 식량 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세계화 작업의 일환이다.  (기아로 고통받는 제3세계의 빈민들의 대부분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던 '농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현재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금융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품종을 단일화하고, 생명과 관련한 특허를 전세계적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 또한 세계화라는 큰 흐름 속에 포괄될 수 있다. 참 두려운 이름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세계화, 국제화라는 말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는 학교 교육과 마치 그것이 손댈 수 없는 필연적이고 당연한 이행인 것처럼 주장하는 정부와 언론의 보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무력화시킨다.

 

반혁명은 존재한다.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는 유기농사를 통해 자생적 농업공동체를 되살리려는 흐름들이 일어나고 있고, 남미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실현되고 있는 듯 하다. 농민과 소비자가 유기농을 직거래하고, 미국의 특정 주에서는 가족 농업 이외의 기업 농업은 허용하지 않는 법을 제정하는 등의 모습도 있다. 여러 자서전과 대안 공동체에 대한 논의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집단공동농장제도를 도입한 소규모의 농업 공동체들도 존재한다. 이런 영상들을 볼 때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는 구호는 꽤나 긍정적으로 구체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유기농사가 농업공동체의 회생과 연결되지 못하고 "웰빙"이라는 이기적인 유행과 결합하면서 자본 논리에 포획되게 되었다. 유기농을 사먹기 위해서는 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유'농약 식품,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을 수 밖에 없다.

 

시민 운동이나 대안 공동체 운동이 반드시 완전한 대안인지도 불분명하다. (아직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전체 사회의 변혁이 아니라 사회 일부의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나 현실 사회를 방기하고 그곳에서 '탈출'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대안에 대해, 즉 희망에 대해 시간을 그닥 할애하지 않는다. 어쩌면, 희망을 창조적으로 생산해내고 과학적 전망을 고민하는 것은 영화를 보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몫이다.

 

 

5.

 

새삼 음식도 기억의 범주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음식, 어떤 재료 하나하나에 사람이 있고,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다. 그 강렬한 기억에서 원 세포를 떼어내고 변형된 유전자를 이식한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가 수십 억 년 동안 (이또한 하나의 주입된 이데올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과 쌓아온 기억들에 대한 파괴행위이기도 하다. 기술발전에 대해 알러지적 반응이 조건반사화되는 것도 그닥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지켜야 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 아닐까.

 

영화가 주요 소재로 다루었던 유전자 조작 옥수수는, 최근에 다녀왔던 신곡 마을에서 먹었던 찰옥수수를 떠올리게 했다. 어머님께서 익숙하게 손으로 털어주신 옥수수 알알을 하나하나 아껴 먹었던, 그런 기억들이 이제는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을 테지.

 

 

6.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먹지 않을 수야 없는 일이다. 원래 이런 방향의, 혹은 이런 질감의 글을 쓰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배고프고 잠이 모자라다 보니 엉뚱하게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영화를 보았다고, 기억을 손끝으로 재구성해 토내했다고 해서 영화읽기라는 과정이 종료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고민하고, 공부하자. 실천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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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I'm not what I write.

 

I'm what I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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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함께 대화하면 즐거운 사람, 소위 말해 '무거운' 이야기를 해도 그 끝이 한숨이 아닐 수 있는 사람, 얼굴 맞대고 아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그런 인간이고 싶다.

 

 

늘, 늘 그렇지 못했어. 

 

지치고 질려서 눈 밑에 그늘진 다크서클을 "그렸어?" 라고 농담인 양 걱정하던 누군가에게 난 미안하단 말 못했어. 진흙탕에 빠져 발도 못빼고 움직이지 못하던 내게 차분히 조언하던 누군가에게 난 그저 짜증만 냈어. 숨쉬기도 힘들 만큼 아프다고, 인상 잔뜩 찌푸리며 건넨 "힘내" 라는 말에 고맙다고 응수해주는 누군가에게서 그런 식으로 보상받기를 늘 당연히 원해왔어.

 

사실은, 과거엔 더는 도망치고 싶어도 받아 줄 공간이 없고, 소리치고 싶어도 귀기울여 줄 사람이 없어. 그래서 더 내 존재를 지금 이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고, 이 공간이 내가 마음놓고 숨쉴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래. 내가, 욕심이 많은 걸까.

 

 

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밥 한 끼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그저 한 학기 분의 잠을 몰아 자듯 누워만 있었어. 중첩되고 뒤틀어진 꿈 속에서조차 나는 지쳐가고 있었던 것 같애. 잠결에 들려오는 휴대폰 소리에 몸을 일으키려 해도, 가위에 눌린 마냥 손끝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어. 나는 그냥, 내 몸뚱아리 따위 포기해 버려도 좋다고 생각했어. 이대로 이 공간이 며칠동안만 온전히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부루마불을 하다가도 가끔은 무인도에 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나도.. 좀 쉬고 싶다고.

 

농활 갈 때까지만 지치지 말라던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한 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난 그렇게 약해빠지지 않았어, 무책임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말이지, 지금에 와서야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껴.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줘도, 그 손을 잡고 지탱하고 있기조차 힘이 들어. 차라리 내가 기대고 싶어.

 

 

어쩌면, 지금일까. 멍이 들고 생채기가 나도, 손톱이 부러지고 붉은 물이 들어도, 무릎을 딛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서 일어나야 할 때일까. 이제는 물어보지 않을게요. 이제는 정답 따위..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만,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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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뒤척.

1.

 

땀이 옷 위로 촉촉히 배어나오는 찌는 듯한 방에서, 차라리 이대로 탈수되어서 침대 시트 아래로 잦아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처음부터 조금 간사할 필요가 있었다. 수술 자국 투성이의 내 몸뚱아리를 굳이 내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2.

 

미련하고, 철없어서, 빈곤해서, 욕심이 많아서, 비현실적이라서,

 

그래서 나는 또 혼자다.

 

나는 그 시간들이 아까울 수가 없었어. 원래 그 시간들은 그를 위해 온전히 헌납된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내 뇌신경 하나하나를 지치고 절망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속에서도, 나는 내가 해야할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었어.

 

... 그래서 내가 멍청한 놈인 거지.

 

 

3.

 

당신에겐 따뜻함이 없어. 당신에게선 뛰는 심장소리도, 살가운 떨림도 찾을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나를 나로 대하지 않으면서도 제발 좀 나답게 살라는 당신의 말을 도무지 따를 수가 없었어.

 

이제.. 그만해요. 그만 좀.

 

 

4.

 

가슴이 먹먹해서, 어떤 모국어도 목구멍 밖으로 나오질 못해. 고작 이딴 식으로 밖에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숨막혀.

 

웃기보다는, 밥먹기보다는, 만나기보다는, 숨쉬기보다는, 살기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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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1. 졸음증.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아.

아무 말도 해야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른하게 들려오는 공무도하가.

나는, 옆에서 졸고 있어도 티나지 않는 장식같은 것.

 

난 나이지 않을 때가 가장 편해.

 

춘광사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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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파열.

말없는 구유에 무게를 실었다네.

동냥할 곳 없이 살아보려 우네.

울음은 때로 주저앉음이고,

간혹 지치지 않는 나아감이네.

 

나는, 유리조각을 가득 밟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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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의심, 호흡곤란.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쓰기 위해 타이핑을 한다는 것, 타이핑을 하기 위해 기억의 잔상들과 내면의 그늘을 구체화한다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성찰을 요구한다.

 

나는 왜 여러 사람의 손에서 버려진 공간 아닌 공간을 붙든 채 그곳에서 숨막혀 하는 건가. 왜 백지보다 의미없을 제안서 따위를 써내려가기 위해 내 시간의 숨을 참아야 하는 건가. 나는 과연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나는 과연, 누구에게 시간의 무게를 지우려 하는가.

 

나는 여태 묻지 않았어요. 묻지 않고서도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 진한 화장같은 나의 말들과 불편한 어리광들을 굳이 누군가에게 감내시켜가면서까지 그것들을 이해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늘, 늘, 늘 닿지 않아. 나는 아예 손이란 게 없는 것 같아요. 어깨로만 아무리 애를 써도 차갑고 희뿌연 허공만 남아.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이런 나도 옳은가요.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이렇게 또 한숨소리에 시간을 실어 보낸다. 내가 욕망하는 관념의 무게를 감당해 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 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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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혹은 잃어져버린.

1.

 

10일 동안 내가 있던 공간, 내가 발화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 아마 그랬을 거다.

 

관계'들'이 치열하게 싹을 틔우고 잎이 푸르러가는 동안, 나는 그 관계'들'의 언저리에서 그저 웃음소리를 더해주는 방관자였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상처들을 덧나게 해서 나와 타인들에게 흉터를 남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서툰 범죄자였다.

 

 

2.

 

정말, 그래요. 내가 다른 거라곤 단지 조금 더 아는 것 밖에 없어요. 어쩌면 그 '조금 더' 가 이제 점점 더 줄어가니까 내가 불안한 건지도 모르겠어.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고민할 수 있는, 나만 할 수 있는 건 정말 없으니까. 그나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느낌이에요. 나는, 선배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싶었어요. 어떤 게 맞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말하는 명제를 이해하고, 옳다고 판단해요. 그렇지만 그게 나의 논리는 아닌 걸.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구요.

 

 

3.

 

손이 닿는 데까지는 늘 솔직해져버려서, 나는 보기보다 관계에 서툰 사람이고, 관계에 대한 확신도 없어서 늘 의심하고 고민하다 지레 상처받고 지쳐버리곤 한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언어화된 설명으로 나에 대한 이해를 타인에게 요구하는 건 과연, 그/그녀에게 폭력이 아닐 수 있을까.

 

나는 함께 있기에 그리 유쾌한 사람이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타인에게 나와 시간을 같이 보내 달라고, 나와 함께 무언가를 하자고 제안하는 건, 혹은- 단지 같이 무언가를 하게 된 상황 자체가 그들에게 폭력은 아니었을까.

 

 

4.

 

최고라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는 기억의 재잘거림들 속에서 또 나의 위치는 선 밖이다. 나는 공유할 것도, 기억해낼 것도 그닥 남아있지 않다. 나는 일기도 쓰지 않았고, 편지도 많이 쓰지 못했다. 그저 그날그날의 회의를 위해 기록해둔, 비판과 불만으로 가득 찬 평가와 패배감과 자괴감 속에서 토해낸 끄적거림 몇 개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즐겁지 않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실망하진 않았다. 그저, 내가 있음으로 인해 더 즐거울 수 있었던 농활이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과, 타인에게 실망만을 안겨줄 뿐인 내 모습이 안쓰러웠을 뿐이다. 나를 보며 안쓰러워한 몇몇 사람들에게 나는 다소 지친 표정으로 애서 웃음을 만들어보고도 싶었다. 고마워요, 그렇지만 나는, 나는 당장 모든 걸 다 쳐내고 도망가고 싶을 만큼 힘들다구요.

 

나는, 즐겁지도 않다. 경험도 없는 '주제에' 관성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 정작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즐거운 사람들이 부럽고, 나는 그 속에 끼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5.

 

덜렁덜렁 베인 살점 달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베인 살점이 맞기는 해요? 확신은 늘 내 몫인가요?

 

6.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누군가, 그랬지. 네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 과정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내가 왜 농활을 갔는지, 심지어 갔다 '왔는지' 조차도 잘은 모르겠다. 그래서 늘 '결국' 이고 '다행'이다. 무엇에도 확신은 없다.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것들, 혹은 잃어져버린 것들만 선명하다.

 

다시, 도망치고 싶다. 왜 어두운 밤길을 달려 서울로 와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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