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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나와 당신의 삶을 규정하는 창을 깨뜨리고 싶다.

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9/15
    도전.
    하늘연
  2. 2005/09/06
    I've lost myself.(1)
    하늘연
  3. 2005/08/26
    솔직하기에, 솔직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글.
    하늘연
  4. 2005/08/26
    0825.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
    하늘연
  5. 2005/08/15
    Fantastic, 4, us.
    하늘연
  6. 2005/07/31
    0730. <식량의 미래>
    하늘연
  7. 2005/07/22
    정체, 파열.
    하늘연

도전.

냉정하게 비판할 지점과 보듬어안고 가야할 지점이 혼재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초침같은 갈림길 속에서 균형을 잡기가 어렵겠지만,

다시 바람 속에 선다.

 

바람이, 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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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lost myself.

다시 귀에 이어폰을 꽂다.

 

내가 왜 미니홈피를 닫고 블로그를 열었는지, 잊어버렸다.

 

4월의 어리던 나를, 성장으로써 감싸안은 것이 아니라

소비함으로써 잃어버린 것임을 이제서야 깨닫다.

 

투쟁은 내 안에서 죽고,

노동은 내 손으로 파괴되고,

페미니즘은 내 입술에서 가장되고,

민주주의는 내 밖에서 소멸하다.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을 지속하려 하는가.

어떤 하늘을, 어떤 창문을 깨뜨리려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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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기에, 솔직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글.

0.

 

늘상 해오던 고민을, 막상 언어화해서 늘어 놓으려 하니 머릿속이 오래된 기계마냥 삐걱대네요. 의도하지 않아도, 지치는 일이에요. 심지어 우리는 - 적어도 05 학번의 경우는 - 일부라도 자주 만나고, 뭔가 유사한 고민을 공유하는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쯤 우리가 와 앉아있을 TS와 앞으로의 2학기가 매우 희망적으로 보이는 듯도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이 무용한 것이라는 달콤한 나른함이 손목과 눈두덩이를 휘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냥- 이렇게 어떻게든 굴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또 언젠가는 굴리는 사람들 - 흔희 말하는 주체들의 힘이 빠져 버릴 테고 또 다시 위기라는 말을 들먹일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지요. 그건 또 그 때의 학회원들이 감내해야 할 당연한 수순의 고민일까요.

 

 



 

1.

 

조금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봅시다.

 

우리는 왜 '학회'라는 공간에 모여 있는 - 혹은 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건가요. 빨갛고 낭만적인 누군가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말로 어긋난 논리를 말할 지도 모르고, 자의식이 강한 누군가는 딱히 들어오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래야만 할 것 같았던 분위기의 3월을 탓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 중간 어디 즈음에서, 학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당위인 것 같기는 한데 왜 그래야 하는 건지, 혹은 지금 학회를 하고 있는 - 혹은 하려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조금만 더 솔직하게 말해 볼까요. (학회의 특정인을 생각하고 쓴 글은 아닙니다만, 어느 부분이 자신에게 더 와닿는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학회는 미련, 혹은 책임 - 조금 더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기억 - 인지도 모릅니다. 과거로부터 해 왔다는 일정 정도의 관성과 함께 당위에 당위가 얹혀진 느낌이랄까요. 어쨌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학회라는 공간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기억들 - 논쟁들, 관계들, 주체화의 과정들 - 이 얽히고 버무려져서, 이 공간의 위기와 부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것으로 다가갈 수도 있을 만큼 자신과 동일화될 지도 모르지요. 거기에, 이제 막 학회라는 공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사한 경험과 기억을 주고 싶다거나, 아직도 학회라는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그녀에게 학회를 계속 하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학회의 당위가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누군가에게 학회는 그야말로 학과 회를 동시에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도 교육을 통해 충족시킬 수 없었던 공부를 세미나를 통해 얻고, 과반 단위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충족시키기 어려웠던 인간 관계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게 해 주는 공간이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지요. 하지만 한 학기 동안 학회를 경험하고 나니, 막상 학회는 그렇게 원하는 자원들이 어느 때나 캐갈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원조차 주체적으로 생산해내야 하는 공간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원을 어떻게 생산할까, 혹은 과연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있는 것일까 하고 고민을 하는가 하면, 어떻게 파 나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라며 삽을 먼저 드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만들든 파내든 일단 뭔가 나오면 가서 같이 나누자고 해야지, 라며 상황을 재고 있는 사람도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무척 단편적인 상황들이고, 또한 이 속에서 무수한 곡해들이 난무하고 상처들이 덧난다 할지라도, 자신이 왜 학회를 붙들고 있는지 - 혹은 놓고 있는지 - 에 대해 최대한 솔직하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다면 늘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포기될 뿐이겠지요.

 

저의 경우에는, 학회는 제가 바라던 공동체의 이상적 실현태였습니다. 아니, 그러길 바랬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요. 늘 제 한계를 넘을 것을 요구하는 공부와 그에 수반된 실천을 통해 제가 거듭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물론 이건 지금에 와서는 무척 맹목적이고 그야말로 이상적일 뿐더러, 이기적이기까지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햑회는 물론 '나'가 존재하고 있기에 '나'에게 의미를 갖는 공간이겠지만, 타인의 존재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 공간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또 무엇을 실천하며, 무엇을 통해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 공동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왜 학회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오직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와 나를 구성하는, 내가 구성하는 실체인 '학회'와 '학회원'들에 대한 동등한 물음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다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왜 학회를 할까요.

 

물론 정답도 없고, 답변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장황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겁니다. 고민을 계속하면서 고민 자체가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사람도 있을 테고, 이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조차 1학기로부터 가져오지 못한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기에, 서로에게 학회를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때문에 늘 이 질문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물음이 그 어떤 수능 언어영역 문제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 - 유치한 비유지만 - 을 지금에서야 깨달은 저로서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학회 '적'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꽤 많이 했었습니다. 그건, 지금 이 학회가 저에게 즐거움이며 생산이 아니라 부담이자 소모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부담과 소모의 원인은 외부보다는 오히려 저 자신에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학회를 그만두거나 혹은 자연스레 다른 대안을 찾는 방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회라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 혹은 할 수 있다는 원인모를 희망이 아무리 짓밟혀도 죽지를 않더라는 거지요. (참, 우습지만요..)

 

그러나 이 희망은 학회를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을 구현해낼 공간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학회가 한 사람의 지향에 온전히 들어맞는 모양새로 변화되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그럴 수도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학회원들 개개인이 바라는 학회의 상 - 그것이 이상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 은 학회원들의 머리모양 만큼이나 다를 겁니다. 학회가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출석을 체크하고, 세미나와 뒷풀이를 강제하는 곳이 아닌 자발적 공동체인 이상, 이는 학회가 하나의 정형으로 틀지어져 있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학회는 학회에 대한 바람의 집함이 아니라, 학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실천의 집합, 그 이상이어야 할 것이며 그 실천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끊임없이 접점을 찾아내고 그를 통해 '함께 할' 수 있는 공유 지점을 만들어가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능한' 학회의 모습입니다. 이 '가능한' 학회의 공유 지점들 속에 나의 지향, 곧 하고 싶은 것들을 구현해내기 위해 (그 구현 정도는 다르겠지만) 학회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 그를 통해 내가 학회 안에서 즐거움과 충족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제가 가졌던 희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학회 안에서 어떤 실천을 해 나갈 수 있을까요. 또 해야 할까요. 흔히들 학회를 학(學)과 회(會)의 합이라고들 말합니다. 또한 전반적인 학회의 상황들 속에서 학은 세미나, 회는 뒷풀이로 도식화되는 경향도 존재하구요. 하지만 그런 안일한 인식들 가운데서는 우리 학회의 현재를 조망하고 앞으로를 이야기할 방향성을 찾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학회에서 하는 세미나가, 유사한 주제를 가지고 전문적인 계획을 통해 진행되는 수업이나, 보다 목표점이 명확한 스터디나, 혹은 보다 분명한 논쟁점을 가지고 있는 토론회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만일 이 다른 점, 혹은 (어떤 의미에서든) 보다 '나은' 점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세미나를 하는 이유를 잃게 됩니다. 단순히 사람들과 모이기 위해 세미나를 한다고 했을 때, 그 모임의 장소가 왜 학회가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 논리는 무너지게 되고 마는 것이구요.

 

과거에 좌파 학생들이 제도권 교육에서 배제된 맑스주의와 정치경제학 비판을 공부하기 위해 학회 학술 운동을 조직했다고 한다면, 더이상 사회 변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닌 우리들이, 제도권 교육으로 포섭된 학술을 바라보며 세미나가 무엇인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보편적인 시대적 고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학회 세미나를 학교 교육을 보완 또는 보조하는 수단으로 파악하거나, 흥미나 취미 위주의 내용으로 우회하거나, 혹은 학술 자체를 버리고 '회(會)'만을 남기는 변화의 흐름들을 마냥 거부하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과거와의 차이를, 혹은 다른 모임들과의 차이를 '목적 의식의 부재'라고 둔다면 잘못된 문제 설정일까요. 세미나를 통해 학회 차원에서 획득할 수 있는 정체성이나 지향점이 없고, 개별 학회원들이 얻고자 하는 학술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모여있다는 것,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거지요.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 대다수의 학회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 학회 세미나의 목적이 '교양 학회'로서 대학생이 알아야 할 제반 교양을 자생적이고 대안적으로 학습하고 논쟁한다는 것 정도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관념들의 다발만으로는 - 즉, 실체가 없이는 - 여전히 온전한 의미의 목적이 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제별로 텀별로 진행되는 세미나에 각자의 목적 의식을 투영하면서 우리의 학술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그것들이 수렴될 수 있는 학회의 방향성을 설정해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방향성은 이념적이거나 (소위 말하는) 정치적인 그것이라기보다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정도의 공동체적 정체화 과정의 한 도달점이자 진행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속에서, 왜 학술을 하는 곳이 학회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그저 그 답을 학회는 학술을 하는 곳이라는 순환 논리에서 찾고 있었다는 점과, 개인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학술과 학회에서 지향하는 학술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 점은 제가 간과한 점이네요.)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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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5.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

 

 

[WORKERS] Going up the Serra Pelada mine, Brazil, 1986

 

 

내가 세상에 없었을 지도 모를 때, 혹은 동일한 규모와 조건의 노동이 우리나라의 어느 조선소에선가, 공장에선가 행해지도 있었을 때.

 

사진은 기억이다. 작가와 대상 뿐 아니라, 제3자의 기억을 담는 미디어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억하는 사진들에게서 나는 막연히도 안타까움과 경탄, 눈물겨움이 이지러진 감정을 발견할 따름이었다.

 

다만, 다만- 나는 사진을 통해 이들도 사진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 작가가 아니기에, 작가일 수 없기에, 감상에 빠지거나 냉소하거나 혹은 자책하지 않고, 나의 기억과 나의 경험을 위해 내가 발딛고 선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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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tic, 4, us.

사실은 영화가 중요한 게 아닌 거다.

 

관계 속에서 희망을 얻고, 그곳에서 고민의 지점들이 교차하고 공감하면서 하나의 공동체가 다시금 생성될 동력을 얻는 것이다. 거기에서 메카니즘을 찾아내고 싶다는 건, 어찌보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되었다.

 

내게도, 다시 흐물흐물해진 일상에 찬물을 끼얹고, 조금은 긴장할 기회가 왔다. Our time is running out- 그러나, 지나간 시간 또한 없었던 마냥 죽어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역사나 그랬듯이, 변혁과 시작에는 정체와 끝이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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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0. <식량의 미래>

0.

 

서울은, 괴물같은 도시다. 구획화된 거리와 희뿌연 하늘을 치솟은 건물들의 스카이라인, 내 존재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수많은 인파. 천만의 사람들이, 사막에 건설한 왕국을 바삐 살아간다. 이글거리는 해와 공기가 온통 작렬하는 낮은, 때로는 죽은 듯 때로는 스테로이드를 맞은 듯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때다. 해가 지지 않는 밤, 별이 보이지 않는 밤, 인간이 쌓은 문명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다소 침참한 기분으로, 하찮은 개인에게 말을 건넨다. 마주칠 눈도, 온기를 느낄 실체도 없는 이 무표정한 대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서글프다. 서울을 살아간다는 것, 혹은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문명에 손을 내밀어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자각하면서도 내 존재를 부정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1.

 

광화문 도심의 복판의 한 허름한 미술관에서 국제노동영화제 월례상영회가 매달 열리고 있었다. 오아시스는 존재한다. 기이하게도 이 오아시스는 많은 이들이 물을 퍼마실수록 조금씩 경계를 넓혀 나간다. 외로운 싸움일까. 나는,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2.

 

영화는 유전자 조작 식품과 그에 대한 특허권을 사유화한 다국적 기업들, 자본과 긴밀하게 유착된 미국 정부를 보여주면서 식량의 정치를 말한다.

 



"Whoever controls the seeds controls the market."

 

이라고 당연한 듯 비춰지는 몬산토 간부의 선언은, 종과 생명에 대한 기업 소유권이 농민들의 경작권이나 농촌 공동체의 자주권, 심지어 소비자인 시민의 알 권리에 우선함을 전제한다. 바람에 의해 날아온 '통제 불가능한' (사실 이 말은 '자연적인'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씨앗의 확산에 특허권을 주장하며 소농들에 엄청난 액수의 소송을 제기하는 다국적 기업의 목적은 소농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소농을 노예화라는 것이다. 자본은 농민 스스로가 종자를 보존하는 것을 막고, 종의 획일화를 통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

 

이를 규제하고 개선을 지시해야 할 정부는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지 오래다. 자본에 편입된 '인적 자원' 은 끊임없이 행정부와 식품의약국 등 관리당국에 침투하고, 이들의 논리에 의해 정부는 규제를 완화하고, 대법원에서는 소농이 아닌 다국적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부시 2세의 재선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바와 같이 부시 행정부의 국방부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나 전 법무부장관인 존 애쉬크로프트와 같은 이들은 몬산토의 경영진 출신이거나, 선거 때 몬산토로부터 수천억달러의 지원금을 받았다.)

 

여기에는 정부 보조금이라는 허울좋은 기업 지원책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비싼 비료나 기타 생산가와 낮은 판매가로 인해 밀을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농민들에게는 손해를 안겨준다. 이에 정부는 (유전자 조작 작물의 경우 특히) 보조금을 지급하여 그 손해를 메우는데, 이 과정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농민들에게 값비싼 비료와 제초제 등을 팔아먹는 기업 뿐이다. 농민은 점차 식량생산이라는 생태적 과정으로부터 단절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속에서 농촌공동체가 (생산의 바탕이 되는 농촌공동체가!) 상실되어 가고, '노동'이 상실되어 가고, 농업이 가지는 '가치'가 상실되어 간다. 남는 것은 감당 못할 빚이고, 소송이며, 기업의 노예로 살아가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3.

 

이러한 자본의 논리 하에서 과학은 그에 봉사하는 하나의 권위적 장치로써 기능할 뿐, 비판적 목소리들을 배제하고 이윤 추구에만 몰두한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해서 '착취해낼지'를 연구할 뿐 유전자의 조작이 가져다 줄 부작용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어디론가 떠넘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쉬이 알 수 없는 것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가리고 거짓포장하는 일들은 얼마나 얄팍한가. 어찌 보면 이는 인간의 오만함이 학문이라는 표식을 달고 드러나는 사소한 예일지 모른다. 종의 다양성을 'Land Races' 라고 표현하는 멕시코 농민들의 "사람이 먹는 것을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라는 말은 너무도 투박함에도 진리인 것인데, 인간의 과학은 자연에 침투하면서 '자연' 도, '인간' 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본' 만을 추종하고 있다.

 

대학이 더는 비판적 지식인의 요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동일한 맥락 속에 위치지어진다. 수백, 수천만 달러 (혹은 수백, 수천억원) 을 대학에 투자하는 기업의 입김 하에서 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을 생산해내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하위 기관 정도로 전락해 간다. 그래서 삼성 이건희 회장은 철학'박사'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고등'교육'은 숨을 다해가고 있는 것이다.

 

 

4.

 

시민운동 등의 영향에 따라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미국 내 소비자가 감소하자, 다국적 기업은 유전자 조작 식품이 전세계적인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세계적 기아의 원인을 불균등한 식량 자원의 배분 상태가 아닌 절대적 식량의 양에 돌리려는 의도이며, 나아가 제3세계의 식량 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세계화 작업의 일환이다.  (기아로 고통받는 제3세계의 빈민들의 대부분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던 '농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현재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금융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품종을 단일화하고, 생명과 관련한 특허를 전세계적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 또한 세계화라는 큰 흐름 속에 포괄될 수 있다. 참 두려운 이름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세계화, 국제화라는 말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는 학교 교육과 마치 그것이 손댈 수 없는 필연적이고 당연한 이행인 것처럼 주장하는 정부와 언론의 보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무력화시킨다.

 

반혁명은 존재한다.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는 유기농사를 통해 자생적 농업공동체를 되살리려는 흐름들이 일어나고 있고, 남미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실현되고 있는 듯 하다. 농민과 소비자가 유기농을 직거래하고, 미국의 특정 주에서는 가족 농업 이외의 기업 농업은 허용하지 않는 법을 제정하는 등의 모습도 있다. 여러 자서전과 대안 공동체에 대한 논의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집단공동농장제도를 도입한 소규모의 농업 공동체들도 존재한다. 이런 영상들을 볼 때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는 구호는 꽤나 긍정적으로 구체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유기농사가 농업공동체의 회생과 연결되지 못하고 "웰빙"이라는 이기적인 유행과 결합하면서 자본 논리에 포획되게 되었다. 유기농을 사먹기 위해서는 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유'농약 식품,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을 수 밖에 없다.

 

시민 운동이나 대안 공동체 운동이 반드시 완전한 대안인지도 불분명하다. (아직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전체 사회의 변혁이 아니라 사회 일부의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나 현실 사회를 방기하고 그곳에서 '탈출'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대안에 대해, 즉 희망에 대해 시간을 그닥 할애하지 않는다. 어쩌면, 희망을 창조적으로 생산해내고 과학적 전망을 고민하는 것은 영화를 보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몫이다.

 

 

5.

 

새삼 음식도 기억의 범주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음식, 어떤 재료 하나하나에 사람이 있고,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다. 그 강렬한 기억에서 원 세포를 떼어내고 변형된 유전자를 이식한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가 수십 억 년 동안 (이또한 하나의 주입된 이데올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과 쌓아온 기억들에 대한 파괴행위이기도 하다. 기술발전에 대해 알러지적 반응이 조건반사화되는 것도 그닥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지켜야 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 아닐까.

 

영화가 주요 소재로 다루었던 유전자 조작 옥수수는, 최근에 다녀왔던 신곡 마을에서 먹었던 찰옥수수를 떠올리게 했다. 어머님께서 익숙하게 손으로 털어주신 옥수수 알알을 하나하나 아껴 먹었던, 그런 기억들이 이제는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을 테지.

 

 

6.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먹지 않을 수야 없는 일이다. 원래 이런 방향의, 혹은 이런 질감의 글을 쓰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배고프고 잠이 모자라다 보니 엉뚱하게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영화를 보았다고, 기억을 손끝으로 재구성해 토내했다고 해서 영화읽기라는 과정이 종료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고민하고, 공부하자. 실천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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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파열.

말없는 구유에 무게를 실었다네.

동냥할 곳 없이 살아보려 우네.

울음은 때로 주저앉음이고,

간혹 지치지 않는 나아감이네.

 

나는, 유리조각을 가득 밟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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