찡짱 고원을 달리다
- 기차에서 보낸 이틀 밤
어제 과음을 했는데도 몸이 말끔하다. 새로운 여행을 맞이하는 긴장감에 몸이 먼저 채비를 갖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40시간에 걸쳐 기차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숙소 근처 대형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주로 먹을거리 위주로 사왔다. 컵라면, 차, 맥주, 과일 등속을 사들고 왔다. 기차 안에 꼼짝없이 갇혀있어서 입이라도 즐겁게 해줘야 한다. 창밖 풍경이 주는 감탄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시각의 무뎌짐을 미각의 새로움으로 끊임없이 보충하기로 한다.
원래 작별은 허겁지겁 하는 모양이다. 라싸역에서 여유있게 오영씨와 작별인사를 하려했는데 대합실에 못 들어가게 하니 밖에서 어설프게 헤어지고 말았다. 어제 밤에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았으니 돌아가서 꼭 연락을 하리라 다짐한다.
라싸역에는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티벳 사람들로 북적인다. 우리처럼 관광객들, 주로 중국인들도 곳곳에 보이고. 찡짱열차는 좌석칸과 침대칸으로 구분이 되어 있는데, 관광객들은 침대칸을 주로 이용한다. 우리가 사용할 6인실 침대칸은 좌우 각 3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2, 3층은 공간이 좁아서 누워있을 수만 있고 앉아 있으려면 하는 수 없이 1층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런 탓에 1층은 공용좌석이나 다름없다. 우리와 함께 2박 3일을 보낼 동행자는 청두에 사는 젊은 부부다.
유럽에서 열차가 처음 생겼을 때는 걸어 다니거나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과 달리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직접 만지거나 들여다볼 수 없는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하다 보니 기차 안에 가만히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낯선 동행자와 어색한 침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독서를 하는 문화가 생겼단다. 귀족들을 위해서 따로 독실도 있었고(볼프강 쉬벨부시, "철도여행의 역사").
젊은 중국인 부부와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는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우리가 1층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들은 복도에 자리를 잡는다. 창밖으로 비슷한 풍경들이 지나칠 때쯤 식당 칸을 찾아나선다. 우리가 12시 45분 기차를 탔으니 따로 점심을 챙겨먹지는 못했다. 기내식당은 한가했다. 메뉴판에 영어와 한자가 병기되어 있기는 하나 그림을 보지 않는 이상 정체를 알기 힘들었다. 일단 맥주(!)를 시키고 생선요리를 하나 주문했다.
라싸를 출발한 찡짱열차는 12시간도 넘게 해발 4~5000m의 고원을 달린다. 달린다기보다는 ‘난다’는 표현이 맞겠다. 저 멀리 눈덮인 봉우리를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고원을 계속해서 달리다보면 높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기차 안에 공급되는 산소 덕분에 높이를 ‘안다.’ 빠른 속도가 풍경의 상실을 가져온다. “총알처럼 빠른 기차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라곤 지리학적 구조와 전반적 피상 뿐”(철도여행의 역사)일지라도 그 피상마저도 눈을 즐겁게 해준다.
오후 4시 반이 되자 기차는 ‘나취역’에 정차한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젊은 부부와 이야기를 나눈다. 더듬더듬 영어가 손짓, 얼굴표정과 만나 대륙을 넘나드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부부는 사범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한단다. 시간강사로는 생활이 어려워 다른 벌이를 해야 한다고. 시간강사로 밥벌이 못하는 건 한국이나 중국이나 똑같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부부 중 혼자 벌어도 생활이 가능하지 않느냐며 부러운 듯 묻는다. 단호하게 ‘노!’라고 답해준다.
쓰촨이 고향인 두 사람은 쓰촨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다며 자랑이다. 비행기랑 책상 다리 빼고는 하늘 아래 있는 거 다 먹는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니 쓰촨은 새발의 피란다. 광둥에서는 원숭이 골 요리도 있고, 사산된 아기도 먹는단다. 그러고는 고추와 함께 절인 닭발을 건네주며 먹어보라고 권한다. 조미 오징어마냥 진공포장으로 간편하게 먹게끔 나오는 모양이다. 우리네는 이걸 빨갛게 양념해서 구워먹는데... 문득 소주가 먹고 싶다.
해는 금세 저문다. 기차는 한창 고원을 날고 있을 텐데 차창 밖은 온통 어둠 뿐이다. 멋진 풍경은 볼 수 없었으나 환한 반달이 계속 우리를 따라온다. 달빛 탓에 주위의 별들은 제 빛을 잃는다. 우린 지금 허허벌판 광활한 대륙에서 인위적인 조명 하나 없이 별빛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 아침 8시 반이 되자 해가 불쑥 솟아오른다. 지평선이 하늘과 땅을 선명하게 가르는 경계선에서 빨간 해가 땅 속에서 솟구친다.
2층 중국인 부부는 밤새 악몽을 꿨단다. 난 편안하게 잘 잤는데. 이들은 티벳에서 네팔까지 넘어갔다 왔단다. 그런데 국경에서 검문을 엄청나게 심하게 겪었나보다. 게다가 네팔은 지저분했고 파업까지 겹쳐 불편했다고. 그래도 좋은 느낌을 받고 온 듯했다. 특히나 중국에선 파업권이 없어서 민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단다. 네팔에서 좋은 음악을 들었는데 CD를 사오지 못해 아쉽단다. 국경을 넘을 때 CD와 책 등을 반입할 수 없다고 한다. 이른바 사상적인 통제인 것 같은데 그게 실효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차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내달린다. 밤잠을 설친 우리칸 식구들은 한가하게 오수를 즐기고 기차는 눈덮인 황색 연봉을 지나친다. 앞으로 15시간 후면 청두역에 도착인데, 벌써 서울 가서 할 일들이 생각나고 지랄이다.
젊은 부부가 우리에게 내일 계획을 묻는다. 비행기 시간까지 좀 여유가 있다고 하니 꼭 들러보라며 관짜이항즈, 진리, 무후사를 추천해준다. 팬더도 보고 싶었으나 거리가 좀 있으니 나중에 다시 오란다. 동선과 소요시간까지 상세히 알려준다.
계속해서 한국 영화 얘기를 물어오는데 아무래도 나보다 한국 영화를 많이 본 게 틀림없다. 주로 어떤 경로로 한국 영화를 보냐고 물었더니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본단다. 자막 파일도 누군가 척척 올려놓는다고. 한류의 주역은 인터넷이었다. 기술과 문화는 마음껏 국경을 넘나드는데 법과 제도는 늘 뒷북만 치고 욕은 욕대로 먹는다.
만난 지 이틀 만에 통성명을 한다. 바로 코앞에 붙어 있으니 굳이 이름을 부를 일이 없었던 탓이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면 바로 대화가 시작되었으니. 행여 다음에 청두를 찾게 되면 왕야오&리루이 부부에게 연락을 하리라.
내일 아침 7시 반에 청두에 도착하기 때문에 오늘 밤에 미리 짐을 챙겨둔다. 고원지대를 벗어난 기차는 도시로 접어들어 어제처럼 별빛을 보기 힘들다. 밤 10시 되자 일제히 소등이 되는데 잠을 쉬 이루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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