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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운동사회에서 청소년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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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운동사회에 발을 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운동의 존재를 잘 모를 것이다. 혹은 들어는 봤지만 그 운동이 무엇을 목표하고 어떻게 활동하는지는 모른다던가, 대충 알고는 있지만 어딘가 불편하고 동의가 되지 않아 기피하게 되는 운동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공식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자신이나 자신의 조직이 했던 언행에 대해 생각지도 않았던, ‘나이주의적’ ‘청소년 차별적’ 이라는 지적을 받은 경험이 있어 ‘청소년 활동가들은 너무 예민하다’ 거나 ‘늘 다른 운동조직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전 사회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부모-자식 관계든 교사-학생 관계든, 친척이든 이웃이든 어떤 관계로든 주변 청소년과 관계 맺고 있으며, 청소년에 대한 편견과 나름의 ‘지론’을 갖고 있다. 청소년기 이후까지 생존한 인간들은 모두 청소년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을 텐데도, 성인이 된 후 그이들과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상하가 분명하게 나눠진 관계일 가능성이 높아 청소년을 하나의 동떨어진 인간 군상으로 묶어 대체 이해할 수 없다거나 문제적이라거나, 혹은 불쌍하다는,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기 십상이다.

 

청소년활동가는 무엇인가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인간답고 동등하게 대우받는 삶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다. 청소년활동가는 이 운동에 함께 하는 사람을 뜻하며, 현재의 나이와 관계없이 이 운동에 함께하는 사람은 모두 청소년활동가로 칭한다. 청소년활동가는 나이로 따지면 비청소년일지라도 청소년활동가의 위치에서 청소년의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청소년 문제와 관련하여 쟁점이 생겼을 때 청소년과 비슷한 대우를 받기도 하며, 나이는 스물이 넘었더라도 청소년활동가로서 발언하는 일이 잦아 남들은 십대이겠거니 당연하게 짐작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 꼭 당사자만이 그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그래서도 안 되며), 청소년운동은 나이주의와 나이차별을 철폐해야 하는 것으로 놓는다는 점에서 나이라는 것의 필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속성에 따라 나이에 따른 당사자주의는 지양하는 편이다.

 

청소년 운동이 목표하는 것

 

이 사회는 나이에 따라 도달해야 할 과업과 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꽤나 엄격하게 정해두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몇 개월 때쯤엔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십대 때에는 입시에 매진하여 스무 살에 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군대에 가고 취업을 하며 이성과 결혼하고 출산한 후 자식을 잘 키워 은퇴하고 나서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모두가 바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이상향이다. 나이에 따른 금기는 수도 없이 많은데 보통 ‘어린 애가 감히!’ ‘나잇값을 못 한다’ 등의 평가를 받는 일들이다. 그 중에 청소년에게 금지되는 것은 특히 많을뿐더러 제도적으로도 공식적인 금지와 차별대우를, 많은 경우 ‘보호’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다. 어리기 때문에 판단력이 부재하다는 전제 하에 판매 금지되는 술, 담배와 숙박업소, 밤 10시면 내쫓기는 노래방과 찜질방, 게임 셧다운제, 스마트폰 이용시간 규제,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와 매체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정보접근권과 평등권, 성적 권리, 참여권,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이러한 정책과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보호를 위시하여 금기를 정하고 금기를 어긴 청소년(탈학교 청소년, 흡연하는 청소년 등)을 낙인찍고 차별하는 학교 규칙, 언론, 법 제도에 대한 비판도 이어간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주되게 문제 삼는다. 학교와 가정에서의 체벌과 학대, 폭언을 비롯한 폭력을 반대하며, 모든 종류의 체벌은 이유를 불문하고 폭력임을 주장한다. 청소년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늘 등장하는 논리는 이들이 미성숙하다는 것인데, 청소년운동에서는 이 성숙/미성숙의 기준과 경계의 문제점, 청소년을 단일한 집단으로 보는 것의 함정, 무엇보다 한 집단에 미성숙하다는 딱지를 붙이고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 외에도 청소년운동은 운동사회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나이에 관계없이 상호 평등한 관계의 문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운동사회에서 종종 청소년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일방적인 반말, 활동과 뒤풀이에서의 배제, 구호와 문구에서의 청소년 차별과 대상화에 문제제기한다. 

 

청소년의 시민권 또한 청소년운동의 중요한 의제인데, 현재 한국에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심지어 선거운동을 할 권리까지도 만 19세 이상으로 한정되어 있어 선거권 연령 낮추기/없애기가 청소년운동의 과제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생존권, 노동권, 교육권 등 사회권의 문제도 다루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권을 지키고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새롭게 이야기되고 있는 의제로는 원가족을 벗어난 탈가정 청소년의 자립과 주거권이 있는데, 현재 시행되는 일시적인 보호와 원가정 복귀 중심의 가출 청소년 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적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사회적 지원에 대한 논의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학교를 진정한 배움의 공간이자 학생이 주체적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의제는 청소년운동이 가장 주력해왔던 부분이다. 일제고사 반대, 대학입시 거부 등 입시경쟁에 대항하는 운동과, 두발복장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의제로 학교 내 학생인권침해에 대응하고 학생인권을 제도화하는 운동, 특히 각지에서 학생인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은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올바른 시행을 위한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감시와 처벌 위주가 아닌 인권과 소통의 방식으로 학교폭력을 다루어야 한다는 목소리, 실질적인 학생회의 자치권을 획득하고 학교 운영에 학생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움직임, 질 좋은 시설과 급식의 보장을 위한 운동도 이어지고 있다.

 

그 외에도 구체적으로는 정당 내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청소년 정책을 만드는 정당 청소년위원회 운동, 학생이 정말 주인인 대안학교를 설립한 운동, 재정적 자원이 열악한 청소년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네트워킹운동, 지역에서 청소년 커뮤니티를 만들고 지역 단위에서부터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 등 여러 갈래의 청소년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운동사회에서 청소년이 겪게 되는 일들

 

청소년에게 기본권과 평등권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미성숙한 아랫사람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전제된 사회에서, 사실 운동사회라고 그렇게 많이 자유롭지는 않다. 청소년활동가들이 회의에 참석하면 ‘누구 따라왔니?’ 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성인 활동가들이 일방적인 반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일은 너무 많으며, 설령 대놓고 청소년활동가에게 그러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거나(특히 돈과 관련된 일) 업무에서 은근히 배제하는 분위기는 팽배하다. 뒤풀이가 술자리로 열리면 청소년활동가들의 참여를 막거나 눈치를 주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공식적인 음주가 포함된 행사에서는 아예 대놓고 청소년 입장 불가를 써 붙이기도 한다. 2008년 FTA와 광우병소고기 수입 반대로 촛불의 열기가 올랐을 때는 집회 주최 측에서 10시 이후 청소년들의 귀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최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는 녹색당과 환경단체들이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문구를 사용해온 것에 대해 규탄하는 성명을 내었다. ‘‘아이들’은 ‘여러분’과 함께 핵 없는 세상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품은 이 성명에 많은 논쟁이 오갔다. 아이들을 대상화한 보호주의적 언행이 아니라 탈핵운동의 특성상 미래세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항변부터, 아수나로의 성명이 ‘일률적인 평등 주장’이라는 비판을 담은 글이 기고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운동단체에서 이런 아동, 청소년의 존재를 자신의 의제를 위해 대상화하여 활용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시의회에서 통과되기 전 조례 안의 성소수자 권리 관련 조항들이 논란이 되며 삭제될 위기에 처하자 성소수자인권운동에서 사람들의 지지와 결집을 모으는 홍보물에 ‘내 새끼 구출작전’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FTA든 국정원이든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의제가 만들어질 때면 늘 ‘우리 아이를 위해’하는 구호가 등장하며, 촛불집회 때면 촛불을 든 어린이의 얼굴은 늘 클로즈업 되어 사진이 찍힌다. 

 

사실 아동, 청소년이 탈핵을 외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주장하고, 촛불집회에 나가는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아닐뿐더러 집회 결사와 정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이들의 권리가 그만큼 보장되고 있다는 것, 혹은 그러한 권리 보장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주체들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일 것이다. 투쟁의 이유가 오로지 ‘나’ 때문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며, 그것이 인류나 자연에 대한 사랑이든, 혹은 가까운 사람들과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싶은 열망이든 소중한 마음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다는 식의 선전이 투쟁의 효과를 높여주는 면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이 나이 적은 주체들이 다뤄지는 방식이 ‘대상화’이며, 그 관점은 ‘보호주의’적이고, 이들을 절대 함께 투쟁하는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이가 아닌 이들 뿐이다.

 

억압의 고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나는 태어난 지 열여섯 해가 지난 후 즈음 운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열아홉 해를 살았다. 매일 체벌이 일어나고 신발과 가방, 양말 색깔까지 규제하며 교사는 학생에게 모욕감을 주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 학교를 다녔었고, 나 자신을 이렇게 부당한 인권침해에 방치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중학교를 자퇴한 후, 내가 학교와 사회에 가진 불만을 공유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억압받는 사람이 그 억압이 부당하다는 걸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가고, 그것을 통해 행동하고, 함께 행동할 사람을 만나는 건 유난히도 행복한 일이다. 아마 다들 이렇게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곧, 운동사회도 바깥의 이데올로기와 억압구조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비슷한 지향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내가 받는 억압에 일조하는 위치에 설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운동사회에서 청소년활동가들이 다른 조직들의 나이주의적이고 청소년을 차별하는 문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본인이 속한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함이고, 이른바 대 사회 투쟁을 하기 위해서도 운동사회 내 문제의식의 공유와 문화의 변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동사회 내 지속적인 청소년활동가 재생산을 위해서도 청소년인권친화적인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만들고 운동을 할 때 그 시선을 유지하는 것은 어떤 운동에게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억압하는 족쇄들은 얽혀있고, 우리 안에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운동조직들이 문제제기를 잘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거부하고 듣지 않으려는 곳도 있고, 그저 절차적으로 듣고 처리해버리는 곳도 있다. 청소년 차별이나 나이주의와 관련하여 문제제기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들은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과도하게 들이댄다’ ‘이미 사회구조가 이런데 우리만의 잘못이냐’ ‘형식(기계)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냐’ ‘근데 문제제기를 하려면 예의 있게 해라’ 등이다. 

 

어떤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것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으로 여겨진다. 청소년활동가들은 청소년 인권의 문제가 당연하고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투쟁한다. 사회구조가 이미 그런데 사실 그 조직이나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사회구조를 이루는 것은 공동체와 개인들이며, 자신이 운동의제로 삼는 어떤 당사자들만이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꾼다면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활동가들은 형식적 평등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들이 문제제기하는 그 문제가 그저 ‘형식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면 왜 그 많은 감정노동과 위험을 무릅쓰고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자. ‘문제제기를 하려면 예의 있게 해라’라는 말은 여러 변주로 청소년활동가들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반응인데, 이건 스스로가 청소년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걸 증명해 보이는 말이다. 문제제기를 할 때조차 예의 있기를 요구받는다면 이건 문제제기의 원인이 된 사건보다 실제가 더 심각한 상황임을 드러낸다.

 

청소년활동가임을 밝히면 종종 ‘그런데 청소년활동가들은 왜 그렇게 공격적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청소년운동이 어떤 방식의 전략을 택할 것인지, 문제의식을 어떻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할 것인지는 분명 고민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 맥락을 생각해보면 문제제기를 하겠다는 결정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제기를 고민하게 되는 상황은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지 않은 때일 텐데,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겠다는 판단, 혹은 운동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해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문제제기를 하고 난 후 내가 이곳과 다시 함께 잘 운동할 수 있을지, 이 공간에서 나의 위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누가 나의 문제의식에 공감할지를 머리 싸매고 계속 고민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여 문제의식을 전달하고, 자신이 한 문제제기가 한동안은 매일 스스로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때로는 마음까지 갉아먹는 문제가 된다. 청소년활동가들은 이런 과정 없이 쉽게 문제제기를 할까? 아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청소년 차별, 나이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단체의 공식적인 구호나 입장에서는 청소년인권친화적인 요소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회원이나 활동가 간에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은 누군가가 고민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방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이 청소년과 나이주의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면, 자신이 활동하는 조직에서부터 한 번쯤 청소년인권 교육을 다 같이 받아보고, 내규를 제정할 때 청소년이 활동하기 편한 조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보고, 평소에 청소년 인권의 중요성을 동료들에게 설득하는 작업은 해 볼 수 있다. 청소년활동가들은 청소년운동조직이 아닌 다른 조직에서 활동할 때 이 문제에 관해 혼자 고민하고 혼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고립감을 자주 느끼기 때문에, 이런 실천들은 분명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문제제기를 받았을 때는, 문제제기를 한 당사자가 겪었을 과정과 마음을 한 번만 더 헤아려보자. 공격이 들어왔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이 조직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이 조직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그렇게 하면 되냐고? 너무 나이브한 것 아니냐고? 투쟁이란 게 싸움을 동반할 때도 있다는 건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하지만 본디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었을, 어떤 측면에선 더 풍족하고 편한 삶 대신 운동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그 마음은 청소년활동가들의 마음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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