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칼럼] 과테말라 내전과 마야족 집단학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5월 10일 과테말라의 전 독재자 리오스 몬트(86세)에 대한 재판에서 80년형이 선고되면서 과테말라 내전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본격적인 단죄가 드디어 시작되는 듯 했다. 하지만 과테말라 헌법재판소는 10일만에 판결을 무효화하며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학살당한 원주민과 살아있는 범죄자들의 싸움은 과테말라 원주민이 처한 여러 정황과 현실-인종차별, 경제, 사회적 소외, 남성우월주의와 여성살해 등-을 드러내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과테말라 내전의 맥락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과테말라의 인구는 1380만명으로 남아메리카의 볼리비아와 더불어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원주민 인구 비율이 높다. (세계 개발은행 통계 기준으로 볼리비아 62%, 과테말라 44.4%) 볼리비아는 2005년 12월 에보 모랄레스가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 재임하며 소수 백인 엘리트가 다수의 원주민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해온 구조를 바꿔가고 있는 반면, 과테말라에서는 아직도 원주민에 대한 폭력과 차별의식이 뿌리 깊으며,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과테말라 내전은 원주민에 대한 경멸과 인종주의를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보인 사건이었다.  


내전의 기원은 과테말라에 대해 행한 미국의 내정간섭이다. 1944년 집권한 후안 호세 아레발로 대통령에 이어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정권은 토지 개혁 등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했는데, 당시 바나나 플랜테이션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 초국적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츠 컴퍼니’(United Fruits Company)는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토지 개혁정책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CIA는 과테말라의 쿠테타를 지원해 54년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후 과테말라 정치는 쿠테타와 정치인 암살이 반복되는 혼란상을 보였고, 특히 8년에서 83년 사이에 반공주의로 무장한 군인 통치자들이 게릴라와 전투를 치르며 군대와 민병대를 동원해 원주민 학살을 자행했다. 공식적으로는 1960년에서 96년 사이를 과테말라 내전으로 규정하는데, 내전 기간 전체를 통틀어 25만명이 넘는 이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주거지를 옮기고 망명해야만 했다. 희생자들의 83%는 원주민으로 특히 마야-익실 부족의 피해가 컸다.  

 

 

내전 종식과 진상 규명을 위한 시도 

 

1990년대 들어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93년 6월 대통령에 취임한 라미로 데 레온은 내전 종식위한 준비를 했고, 내전 시기의 인권 유린과 폭력을 조사하고 희생자 숫자를 파악하기 위해 94년 6월 23일 유엔소속의 ‘역사 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차기 대통령 알바로 아르수 이리고엔은 1996년 12월 29일 게릴라 그룹인 ‘과테말라 민족 혁명 연합’(URNG)과 협상을 이끌어내며 과테말라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내전에 대해서는 두 종류의 보고서가 만들어졌는데, 카톨릭 교회에서 후안 헤라르디 주교가 주축이 되어 1998년 4월 역사적 기억 회복을 위한 보고서 《과테말라, 눈카 마스》를 발간했고, 역사 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99년 2월 《과테말라: 침묵의 기억》을 냈다.   


또한, 내전의 실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것과 내전 종식을 이끌어낸 데는 마야-키체족 원주민 여성 리고베르타 멘추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1983년 《내 이름은 리고베르타 멘추입니다. 그렇게 나의 의식이 생겨났습니다》라는 책을 발간해 내전 상황과 마야-키체 부족의 존재와 실상을 알렸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형식적으로 내전이 종결되었으나 학살책임자들을 제대로 처벌할 길은 요원했는데 계기는 바깥에서 왔다. 98년 스페인 판사 발타사르 가르손이 스페인 시민들을 학살한 혐의로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기소하고 그가 영국의 한 병원에서 체포되자 이는 군사독재를 겪은 많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과거의 독재자들을 처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에 리고베르타 멘추는 리오스 몬트를 포함, 원주민 학살의 가장 중대한 책임자 8명을 1999년 스페인 법정에 기소했다. 리오스 몬트는 권좌에서 물러난 뒤 정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에도 출마하는 등 막강한 정치인으로 군림하고 수차례 국회의원직도 맡으며 면책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사법 절차는 느리게 진행되었다. 

 


 익실족 집단 학살과 이에 동반된 성폭력    

 

1978년부터 86년까지는 무장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조직적으로 마야 원주민에 대한 집단 학살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이다. 특히 1982-83년 집권한 리오스 몬트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게릴라와 전투를 벌이며 원주민을 집단적으로 학살했다. 그는 시민방위대(PAC)라는 민병대 조직을 만들어 민간인을 반강제로 포섭했고, 군대와 시민방위대가 게릴라 장악 지역으로 들어가 마야 원주민 공동체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마야의 일족인 익실(ixil)족 공동체 지역이었다.


남성들에 대한 학살과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은 병행되었다. 군대와 민병대가 마을을 장악해서 여자아이들과 성인 어른과 노인들을 격리한 다음 그들을 강간한 뒤 남성들을 학살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내전 진실규명 위원회는 내전의 폭력과 사망, 실종, 고문, 강제 이주 등의 양상, 원주민 집단살해 양상을 조사하며 수많은 생존자 여성들의 증언을 들었다. 여성들은 가족의 죽음과 실종을 이야기하며 자신들이 겪은 여러 형태의 성폭력을 증언했지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숫자가 매우 크고 성폭력이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은 내전 기간에 저질러진 가장 중요한 범죄 중 하나이자 집단살해의 전략으로서 다뤄지기 시작했다. 2011년 이후 군부의 성범죄 관련 조사를 맡고 있는 스페인 변호사 팔로마 소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전 기간동안 여성에 대해 극심하고 조직적인 성범죄가 자행되었으나 이것은 사법 절차에서는 간과되었습니다. 증인들이 그것을 이야기했지만 곡식을 불태우거나 가축을 훔치는 것처럼 군인들이 저지른 행동 중 하나처럼 여겨지고 지나갔습니다. 이러한 개별적인 범죄들이 집단 살해의 증거가 된다는 인식이 없었죠. 군인들은 종족을 파괴할 목적으로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http://www.laprensagrafica.com/mujeres-que-transforman-el-dolor-en-justicia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두한 익실족 여성

 

2013년 3월 리오스 몬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고 4월 2일에는 익실족 생존자 여성 10명이 법정에 출두하여 자신들에게 일어난 성폭력을 생생히 증언했다. 여성들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증언했는데, 이는 원주민 여성들이 과테말라 사회에서 갖고 있는 낮고 비천한 지위, 중남미 사회에 뿌리깊은 남성 우월주의, 그리고 보복범죄의 가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군인들에 의한 집단 강간으로 뱃속의 아이를 잃은 임산부, 여러 명의 군인들에 의한 집단 강간과 성노예화, 어머니나 딸이 성폭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던 상황 등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하고 잔인했고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충격은 생존자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다. 내전 기간 동안 익실족 여성을 포함 원주민 여성 10만명이 강간당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슬픔, 죄책감, 공포를 느끼며 육체적으로 심하게 병이 든 상태인 경우도 많다. 법정에 섰던 한 증인의 말이다. “나는 너무 슬픕니다. 나는 항상 몸이 아프고, 집밖으로 나가지 않아요. 가슴이 아픕니다.” 


재판 이후 두달동안 여러 증거와 증인들이 채택되었고, 5월 10일에는 리오스 몬트에게 익실족 1771명을 살해한 혐의로 30년, 인권범죄로 50년 총 80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판결 10일 뒤 과테말라 헌법재판소는 재판절차를 문제삼아 재판을 4월 19일 상태로 되돌리라고 말하며 그 날 이후의 판결을 무효화해버렸다. 리오스 몬트를 심판한 세 명의 판사들은 자신들이 이미 적법한 판결을 내렸다며 재판을 번복할 수 없다고 말해 재판의 최종 결과는 불투명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판결 당일 익실족 여성을 껴안는 리고베르타 멘추 툼  (출처 : www.elfaro.net)

 

이 재판은 과테말라 내전에 저질러진 범죄의 일부만을 다루므로 최종 결과가 어떠한 가에 따라 나머지 범죄 처벌과 원주민 인권 문제의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그 힘이 영향력을 가져야 하며, 그 경험은 원주민들이 1492년 유럽세계와 처음 만난 이후부터 부정된 자신들의 생존권과 존엄을 회복해나가는 데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월 10일 재판과 판결의 여러 사진들을 볼 수 있는 사이트
 

 

 

 

 

 

본문 PDF파일 다운받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