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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바람에 피었다 전쟁의 피바람에 진 꽃, 시리아 혁명

 

텍스트: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아랍의 봄바람에 피었다 전쟁의 피바람에 진 꽃, 시리아 혁명 # 최재훈 / 배경이미지: 건물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집회 인파. 오른쪽 끝에 서 있는 기둥에 아랍 문자들이 적혀 있다.

 

최재훈 / 경계를넘어 회원, 도서출판 경계 대표

 

중동에서도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자리한 시리아의 나라꽃은 그리스어로 ‘바람’을 뜻하는 아네모스(anemos)에서 유래된 아네모네라는 예쁜 이름의 꽃이다. 바람이 불면 아름답게 피어올랐다가 다시 바람이 불면 어느새 지고 마는 허무한 운명의 바람꽃. 그래서 사람들은 그 꽃에다가 ‘사랑의 고통’, 혹은 ‘덧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2019년의 오늘, 시리아 국민들은 그 꽃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민주화 항쟁의 바람은 이내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예멘, 바레인 등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전체를 휩쓸었고, 거기에 시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40년 넘게 이어져온 일당 독재와 그로 인한 부패, 생활고에 지친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자유와 정의와 존엄을 외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민주주의의 꽃은 활짝 만개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잔인한 탄압과 참혹한 내전이라는 강한 맞바람이 불어오자, 그 꽃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떨어뜨린 채 금세 시들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어느덧 8년째에 접어든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만 줄잡아 50만 명,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6백만 명이 전쟁을 피해 나라 밖으로 몸을 피했고, 또 다른 6백만 명이 목숨을 부지할 곳을 찾아 나라 안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시리아의 오늘의 현실은 자유와 정의를 사랑한 대가라 하기엔 너무나 큰 고통을 수반했다. 또한 그렇게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도 이 모든 결과의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독재자와 그 체제가 여전히 건재할뿐더러 오히려 승전가를 준비하기까지 하는 현 상황은 때로 그동안 흘린 피가 너무나 덧없이 느껴지게까지 한다. 불과 8년 전 한바탕 바람처럼 불어 닥쳤던 시리아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어쩌다 이렇게 피비린내로 변해버린 걸까. 과연 이 잔혹한 전쟁이라는 어두운 터널의 끝은 어디일까. 아니, 그 끝이 대체 있기나 한 걸까.

 

시리아 전쟁의 첫 시작은 어찌 보면 간단명료했다. 1963년과 1966년, 1970년, 이렇게 세 차례의 쿠데타를 거쳐 장기집권을 시작한 하페즈 알 아사드 정권과 그가 이끌던 바트당은 원래 아랍 사회주의와 탈식민주의라는 대의명분 아래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토지 개혁을 통한 부의 재분배, 아랍 사회의 혁신 및 근대화를 발판으로 한 서구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야심찬 기획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하페즈 대통령은 권력을 장악함과 동시에 살라 자디드를 필두로 한 당내 진보 세력을 몰아내고, 지지 기반이던 중하층민과 농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길로 곧장 내달았다. 바트당 이외의 모든 정치 세력은 불법화 되었으며, 노동조합은 해체되었고, 그 빈자리는 바트당 내 보수파들이 채웠다. 또한 인종적으로는 다수의 아랍인과 쿠르드, 투르크멘, 앗시리아 등의 소수민족, 종교적으로는 75퍼센트의 수니파 무슬림과 15퍼센트의 시아파 알라위 무슬림, 그리고 소수 기독교인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음에도 그동안 큰 탈 없이 한데 어울려 살아오던 나라를, 대통령 자신이 속한 시아파 알라위들이 나머지 종파를 지배하고, 또 수니파끼리도 도시민들을 지배층에 편입시키는 대신 농촌 인구를 피지배층으로 전락시키는 방식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공기업과 대학을 민영화하고, 가난한 서민들에게 지급하던 보조금을 없애는 방식으로 불평등을 키워갔다. 그 사이 아버지인 하페즈의 사망으로 불과 서른다섯의 나이에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2000년에 잠깐 변화의 조짐(‘다마스쿠스의 봄’)이 보이는 듯도 했으나, 헛된 기대는 이내 더 큰 실망으로 변해버렸다.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반정부 봉기는 바로 그런 40년에 걸친 배반과 불의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집단적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초기의 시리아 항쟁은 무장투쟁 보다는 평화적인 대규모 행진과 시위, 농성, 문화적인 방식의 저항이 오히려 주를 이뤘고, 그래서 더더욱 전 국민적인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바샤르 대통령과 기득권 세력은 시민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치밀했다. 인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독재자 벤 알리와 무바라크가 각각 거리의 시민들에 의해 쫓겨난 걸 지켜보면서 위기감이 극에 달한 정권은 크게 네 가지 전략으로 대응하고 나선 것이다, 

 

그 첫 번째로는 평화적인 시위대를 잔인하게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자연스레 시민들의 무장을 유도해내는 항쟁의 군사화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리아 민중들이 평화적인 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저항의 방식을 바꾼 것이 잘못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정부군과 ‘샤비하’라 일컬어지는 친정부 폭력집단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당하고 끌려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무장은 불가피한 측면이 강했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유혈 진압 명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부 군인들이 스스로 탈영해 ‘자유시리아군(FSA)’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 것도 어찌 보면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이어진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광범위한 대중적 참여에 기초한 비폭력적 저항에서 전투가 가능한 청년층 중심의 무장투쟁으로 항쟁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순간, 나머지 시민사회와 여성, 노년층의 참여는 필연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정부군에 비해 무기와 훈련이 턱없이 부족한 시민군이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불 보듯 예견되는 일이었다. 

 

다음으로는 정권이 2011년과 2012년 사이 수백 명에 달하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을 의도적으로 감옥에서 풀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시민군과 뒤섞이게끔 만든 항쟁의 이슬람주의화를 들 수 있다, 때마침 그 시기는 애초 아사드 정권의 존립 여부를 놓고 머뭇거리다 시민군이 결정적인 승기를 잡아가는 것처럼 보이자 정권 축출 쪽으로 마음을 굳힌 미국 정부가 동맹국인 터키와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국가들을 통해 시민군에게 다량의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그렇게 제공된 무기와 자금은 고스란히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에게 대거 넘어가 오늘날의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즉 이슬람국가(IS)를 탄생시킨 자양분이 됐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아사드 정권의 축출보다는 궁극적으로 칼리프를 정점으로 한 이슬람 신정체제 건설을 더 큰 목표로 삼은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은, 한 편으로는 정부군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군과 지역의 활동가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재정부에 맞선 시민들이라는 단순한 구도에서 출발한 항쟁이 정부군과 시민군, 시민군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는 복잡한 구도로 변해가면서, 아사드 정권은 자신들의 잔학 행위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맞선 정당한 대응으로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주민들과 소수인 시아파 알라위, 그리고 쿠르드족이 서로서로 맞서게 하는 종파주의화였다, 항쟁 초기만 해도 반정부 시위 대열에는 수니파 뿐 만 아니라 알라위파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인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정권은 자신들이 무너질 경우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이 알라위 시민들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자행할 거라는 식의 공포를 부추겨 결과적으로 그들을 시위 대열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로자바‘라 불리는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서 완전한 자치를 꿈꾸던 쿠르드족들을 그들과 국경을 마주한 터키가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걸 용인함으로써 수세에 몰린 쿠르드족이 정부에게 방패막이 되어 달라고 손을 내밀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데도 성공을 거뒀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아사드 정권이 취한 네 번 째 전략은 가장 치명적이고도 결정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전 과정에서 시리아 정부가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린 경우는 적어도 두 차례가 있었는데, 한번은 시리아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반군에게 빼앗긴 정부군이 수도 다마스쿠스와 그 인근 지역에 사실상 고립된 2013년이었고, 또 한 번은 오랜 소모전으로 병력과 무기를 대거 소진한 바샤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다는 절망감을 표출했던 2015년 여름이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정권은 이란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그리고 러시아를 차례로 내전에 끌어들여 위기에서 탈출했고, 그러자 그들과 경쟁, 혹은 적대 관계에 있는 미국은 기존의 간접적인 개입 방침을 폐기하고 시리아 내전에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오늘날 미국은 시리아 내에 12개의 군사기지를 두고 주로 특수부대원들로 구성된 2천 명 가량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그 결과 내전은 러시아와 이란, 헤즈볼라를 한 축으로 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의 서구 국가들과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걸프의 수니파 왕정국가들 및 이스라엘을 다른 한 축으로 한 외세 열강들 간의 국제적인 대리전이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더욱 더 장기화되고 극대화된 전쟁의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시리아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교활하고 파멸적인 전략이 결과적으로 효과를 거둔 셈이 되었고, 오늘날 정부군은 북서부 이들립 주와 남부 요르단과의 국경 지역 일부, 그리고 북부 쿠르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거의 다 장악하고 있다. 반면 탈영병과 시민들로 구성돼 처음 무장 항쟁의 불을 댕겼던 자유시리아군은 상당수가 죽거나 나라 밖으로 탈출하고, 나머지는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편입돼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슬람국가는 정부군과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쿠르드의 협공으로 거의 시리아 영토에서 쫓겨났고, 알 카에다 계열의 ’자밧 파타 알 샴(시리아 정복 전선)‘과 ’아흐라르 알 샴(시리아 자유인 운동)‘, '자이쉬 알 이슬람(이슬람군대)' 같은 이른바 온건 이슬람주의 반군들도 북서부 이들립 주에 고립된 상태다. 그러나 설령 군사적으로 시리아 정부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다 한들, 그 누구도 그것을 가리켜 평화와 안정의 회복이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너무나 많은 증오와 분노가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리아 전쟁이 일방의 군사적인 승리와 그 반대편의 굴욕적인 궤멸로 끝나게 되는 상황은 궁극적으로 그 나라에 결코 씻기 힘든 후유증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는 불과(??) 3년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의 상처가 반세기가 넘도록 제대로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우리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결국 시리아 전쟁의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해법은 군사적 방식의 정반대 편에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 출발점은 모든 적대 행위의 중단이다. 그를 위해서는 미국과 러시아, 터키, 이란 같은 외세 열강들이 각자가 미는 세력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개입을 일절 중단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더 많은 개입은 더 많은 죽음과 고통을 낳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시리아의 미래는 시리아 국민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결정하게끔 놔두어야 한다. 물론 국민들을 상대로 갖은 악행을 저질러온 아사드 정부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 지에서부터 이슬람국가의 퇴치에 이르기까지 넘어야할 산들은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산을 곧장 넘어갈지 에둘러 갈 지를 결정하는 건 철저히 그들의 몫이어야 한다. 한국을 비롯한 이른바 국제사회는 그런 그들의 대화와 협상을 중재하고 응원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그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험난한 과정을 버틸 수 있도록 시리아에 평화가 올 때까지 세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전쟁 난민들을 품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몫인 것이다. 

 

- 덧붙이는 글 : 지난 연말인 2018년 12월 20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돌연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시리아에 주둔 중인 2천 여 명의 미 지상군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나의 대통령 임기 동안 우리가 그 곳에 주둔했던 유일한 이유였던 이슬람국가(ISIS)를 (완전히) 격퇴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곧 미 백악관 내부와 워싱턴 정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사실상의 항명의 뜻을 담은 편지를 남긴 채 자리를 내던졌고, 존 볼튼 국가안보 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철수시기를 늦추도록 대통령을 설득하는 한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 지역의 동맹국들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다. 물론 트럼프가 하루아침에 지역민의 자결권을 존중하고 평화를 옹호하는 대통령으로 변신했다고 믿을 근거는 전혀 없지만, 시리아를 둘러싼 미국 정부 내의 갈등과 혼란 속에서 지상군을 철수하기로 한 트럼프의 결정은 옳았다. 다만 지상군 철수 선언과 동시에 트럼프가 시리아에서의 공습을 더욱 더 강화하라고 지시한 사실 또한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두어 달 뒤 미 지상군이 실제로 시리아에서 모두 철수하더라도 이슬람국가 격퇴를 명분으로 한 미국의 군사개입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며, 시리아를 놓고 연신 계산기를 두들기는 러시아, 터키, 이란, 사우디 등 열강들의 행태도 곧 중단될 것 같지는 않다. 즉 불행히도 시리아 국민들이 겪는 고통 역시 당분간 계속 이어질 전망이라는 이야기다. 

 

헤더 배경 이미지 ⓒ syriana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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