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두고두고 잊지 않기 위하여"라는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보관할 생각이었으나, 두고두고 읽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이 시는 양성우 시인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이다. 나는 20대에 막걸리를 마시며 동료들과 이 노래를 외쳐 부르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을 생각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삶도 시인의 삶도, 사람들의 세상살이도. 청산은 멀리 있고 이제 사람들은 흙먼지 잿더미 속에 머리 풀고 고개 꺾고 일어서지 않는다. 이제 이 노래는 더 이상 불러서는 안 된다. 희망을 꺾고 바램을 앗아가는 노래는 더는.

아래는 경향신문에 실린 양성우 시인의 인터뷰 기사다.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겠다. 최소한 5년 동안만이라도.


“김지하가 하면 민주화고 내가 하면 정치냐” (경향신문 08.02.13)

ㆍ이명박캠프서 활약 양성우 시인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겨울공화국’을 쓴 양성우 시인(65)이 이명박 캠프의 핵심인물이라는 소문이 문단에서 조심스레 돌았다. 양성우가 누구인가. 1975년 민청학련 관련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서 시 ‘겨울공화국’을 발표해 광주 중앙여고 교사자리에서 파면되고, 시 ‘노예수첩’이 일본 ‘세카이지’에 실리면서 국제간첩단 사건으로 몰려 2년반 옥살이를 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는 운동가요 역시 그의 시에서 나왔다. 고은·이문구·조태일·박태순 등과 더불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든 평민당에서 12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도 작가회의 자문위원이다.

“수많은 후배들이 찾아와 항의와 협박의 언사를 했습니다. 이명박 지지를 그만두라고. 왜 양성우가 거기 가있느냐고. 김지하, 황석영이 손학규 지지하는 것이나 백낙청이 여권후보 단일화 운동을 벌인 것은 정치가 아닌 지식인의 책무이고, 내가 하는 것은 정치냐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들과 맞설 입장은 아니지요. 대선이 끝난 뒤 서로 쌓인 감정을 많이 풀었습니다.”

설 연휴 직전에 만난 그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해야 하는데…”라면서도 그간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후배나 옛 동지들과의 불화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지만 “내가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처럼 내 생각도 존중받아야 하며 각자의 길이 있다”고 했다.

“이당선인과 알고 지낸 지 오래됐고, 개인적 친분이 깊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고 이 분이 그것을 줄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대권의) 뜻을 세우는 긴 과정에 동참했다고 해야 할까요. 인간적인 면, 탁월한 경영능력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쌓여 뒷전에서 도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는 1년반 정도 캠프에서 뛰었다. 한나라당 경선까지는 대외협력위원회 문화예술담당 부위원장, 경선 이후 당 차원으로 조직이 확대된 이후에는 직능정책본부 문화예술담당 부본부장을 지냈다. 전국의 문화예술인을 끌어모으고 지지를 부탁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만큼 전국을 뛰어다녔지만 “오히려 내가 그를 지지한다는 사실이 역효과로 돌아올까봐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 대해 편협하게 생각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개 정치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자기 예술에 묵묵히 헌신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예스’라는 말을 끌어내는 게 엄청나게 힘들더군요. 저도 시인으로서 자존심이 있는데 자존심 다 버렸습니다. 그분들이 지지의 조건으로 내건 건 딱 한가지, 기초예술을 살려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다른 대가를 바라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이 활동해온 한국작가회의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쪽의 지지는 전혀 얻지 못했다고 자인했다. 대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나 지방의 문화조직 쪽이었다. 그러나 단체를 앞세우기보다는 사람 위주로 접근했다. 그런 그로서는 대선의 과실을 따려는 듯 일부에서 ‘문화권력’ 운운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더구나 ‘좌파문화세력 청산’이란 구호에 대해서는 “실체가 없는, 권력투쟁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좌파이건, 우파이건 문화로 정치하려는 사람들이 물러나야 우리 문화가 발전합니다. 예술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고, 영혼에 속한 문제입니다. 예술가들이 단체를 만드는 건 개인의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술과 상관없이 예술로 정치를 하려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동안 누가 했으니 이제 누가 해야지’하는 식으로 말하는 건 안됩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아직까지 우리 선거판은 기회주의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예술 육성지원에 대한 당선인의 의지가 매우 확고하다고 전했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려면 문화로 한단계 도약해야 하고, 거기에 맞는 정책과 예산투자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이명박 당선인의 공약인 ‘컬처노믹스’가 단순히 문화를 통해 돈을 벌자는 수준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보통교육기관에서의 기초문화예술교육 확대, 대중과 예술의 접점을 늘리는 것 등을 구체적인 문화정책의 사례로 들었다. “최근 문화계 원로들과의 간담회에서 당선인이 청와대 바깥에서 주말을 보내겠다고 한 것은 문화현장을 직접 다니면서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라고 설명했다.

양시인은 “좌우가 아니라 정책과 현장을 결합시켜 우리 문화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골몰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그러면 한국문화의 르네상스를 기대해봄직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명박정부의 문화부 장관은 드골 시대의 앙드레 말로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거기 담긴 뜻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말로는 앙코르와트 도굴사건으로 악명을 얻었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알맹이 없이 명망으로 수십년간 대접받아온 문화계의 ‘행세주의자’들이야말로 물러나야 할 때”라고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는 선거운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지난해 여름 ‘길에서 시를 줍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을 건네면서 특히 ‘청와대 앞길에서’라는 시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저녁 어스름이 깔린 청와대 앞길을 걷는다./드높은 담을 따라 나란히 선 큰 나무들이/을씨년스럽다./웬일인지 중심에 선 사람들이 세상을 흔드니,/기우는 나라에 이미 책을 읽고 글을 쓰는/사람들까지도 그 넋을 팔았느냐?/…/전혀 터무니없이 옳지 않은 것들 앞에서는/목숨을 걸고 맞서던 젊은 옛사람들이 그립다.’

그는 30년을 ‘반골’로 살았다. 조선대부속고 2학년 재학 중 4·19시위를 주도하면서 시작된 길고 긴 ‘반체제 시인’의 길은 1987년의 민주화이후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듯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저항해야 할 대상이 남아있다. “민주화운동이나 진보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도둑질한” 지난 10년간의 정권도 거기 포함된다. 그의 남다른 선택이 많은 생각거리를 남겨준다.

〈 글 한윤정·사진 우철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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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30 16:17 2011/11/3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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