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 캐롤라이나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힐러리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는 기사에 네이버 파시스트 한명이 "흑인은 절대 안됩니다"라는 댓글을 달았길래 보니, 내용이 이러하다. "미국내 흑인들은 반한 감정이 드높습니다. la폭동때도 한국인가게만 골라서 습격했죠. 만일 흑인이 당선된다면 대미관계는 소원해질겁니다." 네이버는 댓글 단 사람의 이전 댓글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기 때문에 이 친구의 이전 글들을 보니 자기주장은 하나도 없고 조선일보와 한나라당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기는 수준이었다.

생각난 김에 경향신문에 올라와 있는 박홍규 선생님의 글을 옮긴다. 요즘은 신문 기사를 전재(全載)하는 행위가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일부만 옮긴다.


... 최근에는 한국제 차나 가발을 팔아 돈을 버는 한국인이 특히 문제여서 더욱 가슴이 쓰리다. 킹의 오랜 친구로 애틀란타 시장과 유엔 대사를 지낸 앤드루 영이 얼마 전, 흑인을 상대로 돈을 벌면서도 흑인을 위해 조금도 봉사하지 않는 한국인을 맹비난해 문제가 됐다. 물론 모든 한국인이 그렇지는 않다. 가령 흑인혼혈 풋볼 영웅 하인즈 워드가 태어난 이곳에서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수 십 년 째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군부대가 많은 이곳에서 그 어머니 세대가 시작한 한국인 이민은 벌써 10만명 정도에 이르러 동양계로서는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까지도 능가하고 있는데 이는 훨씬 늦은 출발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규모다. 그러나 주한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이 이곳에 오자마자 대부분 이혼을 당하면서 시작되었고, 특히 워드를 비롯한 흑인혼혈들이 흑백 인종차별이 극심한 이곳에서 자라 훌륭한 사람들로 성장한 것은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그 혼혈을 한국인이 차별한다는 이야기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전체 내용은 여기)

사실 나에겐 흑인들을 상대로 돈을 버니 흑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말은 익숙하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봉사의 개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라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에 슈퍼마켓이 하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언제나 그 슈퍼를 이용했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그 슈퍼의 아저씨가 인색하고 고약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불친절했고(애들한테 뿐만 아니라) 전혀 인간미가 없었다. 일례로 지폐를 들고 가서 동전으로 교환을 부탁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교환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슈퍼의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 덕에 돈을 벌면서도 동네 사람들을 위해 전혀 봉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봉사하고 있는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봉사라.... 며칠 전 대학원 학생이 학과에서 태안에 봉사활동을 가려고 하는데 정규교수와 비정규 교수들도 참여 해주십사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머뭇거리며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고민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6:06 2011/11/30 16:06

민주노동당 사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말들을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핵심은 "종북주의"다. 그런데, 종북주의는 김창현씨 말대로 실체가 없다. 어떤 면에서 나 역시 이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접근한 면이 있다. "종북주의"는 남한 사회변혁 운동 세력 중에서 NL(민족해방)이라는 정파의 정치 이념의 현실적 경향을 말한다. 그러니 그 경향은 다양한 형태의 행위로 현상하기 마련이고 이를 뭉뚱거려 종북주의라는 표현으로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들이 북한을 추종하든 김정일을 찬양하든 그건 그들의 사상이니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이념과 행위가 남한 전체 인민의 삶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끌고왔다는 점이다. 불과 20여년 전 그들은 한국 사회가 "반봉건식민지" 체제(혹은 식민지반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미제국주의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 반대편에는 또 하나의 편향으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있었다- 뭐 대단한 이론적 논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요즘은 그런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난적이 없어서 아직도 한국 사회를 '반봉건식민지'라거나 '식민지반자본주의'라거나, 또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발전의 심화로 인해 절대 다수의 인민들이 고통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물질적 현상이 아무리 황홀하고 휘황찬란하다 해도 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부르주아들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물질적 풍요의 외양을 힐끔거리며 그 그림자를 밟을 수 있을 뿐이다. 대상은 욕망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욕망의 실현은 댓가를 요구한다. 그 댓가는 노동의 고통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고행이며 노동은 자기 상실이며 온갖 악덕의 근원이 되었다.

인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인민의 삶으로 향하는 길은 어렵다. 인민과 함께 하는 것은 어렵다.


제3의 길, 자주파, 그리고 가짜들

(경향신문. 08.1.16, 이대근_정치·국제에디터)

당내 대통령 경선에서 패배가 예상되자 탈당해 상대당으로 옮겨 다시 경선할 기회를 얻었지만 거기서 또 패배한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정치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요 정당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 손학규가 그렇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된 그는 이 당을 살릴 구원자로 부활했다. 남들이 안 가진 무슨 기사회생의 묘약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남들이 안 가진 것을 가져서가 아니라, 남들이 가진 것을 안 가져서 대표가 되었다. 그는 한나라당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로 대표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병자를 살리겠다며 내놓은 처방이 이미 이 동네에서는 말만 들어도 식상한 ‘진보의 수사학’이었다. 5년전 등장했다 사라진 가짜 진보가 이 엄동설한에 죽지도 않고 또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초기 노무현이 진보 수사를 구사할 때는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만큼 그럴 듯했다. 그에 비하면 손학규의 진보 수사는 그냥 해보는 말이라는 게 바로 드러난다. 사실 그의 성향이 다 알려진 마당이라 그도 차마 진보라고는 말을 못하고 새로운 진보, 제3의 길을 꺼냈을 것이다.

-진보에 수식어는 필요없다-

그러나 진보면 진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진보에 수식어가 필요없다. 새로운 진보니 제3의 길이니 하는 것 자체가 수상한 것이다. 유시민이 탈당하면서 온건, 유연한 진보를 주장하며 또 속임수를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면 이걸 알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에도 시장주의, 성장지상주의가 지배했을 뿐 그 대안의 길을 밟아본 적이 없고 그 대안세력이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낸 적도 없다. 진보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나서 싫증나 제3의 길을 가겠다면 시비할 일이 못된다. 그러나 있어본 적도 없는 것을 극복하겠다면 그건 망상이다. 이런 혼돈은 열린우리당 몸통에 한나라당 머리를 얹힌 인공조합의 불가피한 결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역사 구조적 산물이다. 권위주의 시대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상당기간 진보를 대표할 정치조직의 부재로 인해 진보는 보수정당에 진보의 대표권을 위임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보수와 진보의 미분화는 정당의 정체성 상실 등 정치를 일상적으로 왜곡해왔다.

이제 진보는 진보정치 조직이 대표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정치의 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온전한 의미의 진보정당이 없다. 민주노동당? 자주파가 의미있는 세력으로 잔존하는 한 민노당을 진보당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주파는 한국의 주요 모순을 민족(분단) 문제로 본다. 분단이 해소되면 다른 문제의 해결의 길도 열릴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독재하의 상황인식이다. 민주화 이후 민족문제는 북한문제로 바뀌었다. 한반도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분단이 아니라 북한의 기아, 피폐한 삶, 열악한 인권, 핵무기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도 북한 경제 재건, 북한 인민의 삶 개선, 핵폐기, 평화로 변했다. 다행히 포용정책은 사회적 합의를 얻었고, 남북간 대화와 협력은 국가적 과제로 자리잡았다. 그런 과제는 김대중·노무현정부가 잘해왔고, 통일부를 없앤다지만, 이명박정부도 크게 잘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자주파가 따로 할 일이 없다. 억압적인 김정일 정권을 변명하고, 핵보유 정당성을 설파하며, 부족한 자원을 군비에 쏟는 선군정치를 옹호하는 게 자주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보수나 반동들이 하는 것이다. 진보는 불평등과 맞서고 억압받고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소수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나 민노당 다수파인 자주파가 비밀결사처럼 활동하며 항상 당패권 장악에 골몰한 결과, 민노당 노선을 오도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당은 따분하며 낡고 진부한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자주파의 시효는 소멸했다. 북한문제는 차기 정부와 야당에 맡기는 게 좋다. 모든 번뇌를 잊고 해산하기 바란다.

-서민의 고통을 끌어안아야-

진보당이라면 서민들이 지금 겪는 고통을 자기 가슴으로 느끼고, 그들의 고민을 자기 고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과 공명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공상에 빠져 있는 가짜 진보당에 서민이 흥미를 느낄 것 같은가. 심상정 비대위가 민노당을 진보정당으로 바꾸는 작업을 떠맡았다. 진보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청소하고 겉과 속을 다 바꾸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기대한다. 우리에게도 이제는 반듯한 진보정당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6:01 2011/11/30 16:01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철모르는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웠다. 조금 나이가 더 들어서는 자랑스럽게 조국의 위대함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고,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별 고민없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부끄럽지만 이런 믿음을 깨뜨린 것은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눈을 뜬 것은 학교에서 군림하고 있던 "김일성주의자들"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위 이 어처구니 없는 주사파들로 인해 민족주의에 대한 맹신이 깨졌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물론, 민족주의는 질병에 불과하다는 명석판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건 이성적 사유의 결과로소이다. 껄껄.

좀 지난 얘기지만, 많은 맑스주의자들이(사실 저들이 스스로 그렇게 자부했다. 그때는) 강단을 기웃거리다 사라져가고, 또한 많은 좌파들이 현장에서 스러져가고, 마찬가지로 많은 주사파들이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그가 되어 떠나갔다.


‘핏줄의 민족’ 버리고 ‘주체적 우리’ 고민할 때

김상봉 한겨레신문 2007. 12. 22

민족주의가 ‘집단적 자기’에 대한 집착이라면, 민족주의를 해체하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절박한 실천적 과제다. 아집이 어리석은 것은 집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집이란 자기동일성에 대한 집착인데, 살아 있는 어떤 것도 순수한 자기동일성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동일성이란 플라스틱처럼 죽은 사물의 특징인 것이다. 하물며 개인도 아닌 집단인 민족을 두고 고정된 동일성을 몽상하는 것은 계몽된 시대에 어울리는 자기인식이라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민족의 구분기준은 너무도 야만적이다. 현행 중학교 도덕 교과서는 민족을 “씨족이나 종족, 부족 등의 단어와 마찬가지로 공통의 조상을 가진 한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정의한 뒤에 너무 자연스럽게도 민족을 “하나의 큰 가족”이라고 이르고 있다.(도덕 II, 156) 민족을 가족과 같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맞지 않은 것은 물론이지만, 민족이 핏줄로 규정되는 나라에서 민족 구성원들에게는 맹목적 충성이 강요되는 반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다른 사람들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은 세계화된 시대에 정말 심각한 질병이다.

한편에서는 차라리 감옥에 갈지언정 군대 가서 총을 들 수 없다는 젊은이들은 핏줄이 같다 해서 군대에 끌려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살면서 이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싶어도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군대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다. 새로 결혼하는 일곱, 여덟 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하는 나라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핏줄의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린다면, 머지않아 우리 사회는 이 사회의 주류에게 까닭 없이 배제되고 차별받은 소수자들의 좌절과 증오가 집단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근절되지 않는 까닭은 민족주의 없이는 개인을 국가의 부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훈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 실린 국기에 대한 맹세는 우리에게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조국은 언제나 민족을 팔아 충성을 강요한다. 그렇게 홀로주체로서 군림하는 조국과 민족 아래에서 개인은 주체성을 빼앗기고 전체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런즉 민족주의는 개인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타자와의 참된 만남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타파해야 할 이데올로기이다. 더러는 계급이 민족과 만나야 강해진다거나,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그나마 민족주의가 자기를 지키는 방파제가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질병을 다른 질병을 통해 고치겠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사회의 도를 넘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이제는 노골적인 인종주의로까지 타락한 상태이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히 국가주의에 저항하고 민족주의를 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민족주의를 비판할 뿐 그것의 존재 근거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질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다. 민족은 실체가 아니라 주체이다. 주체성은 자기인식에 존립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스스로 욕구할 줄 모르면서 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꿈과 동경 속에서 이상적 자기를 욕구하는데, 안정된 자기인식은 기억 속의 자기와 동경 속의 자기가 조화를 이룰 때 형성된다.

이 기억과 동경의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자기인식은 필연성과 자유라는 두 계기 사이에서 생성된다. 필연성은 고정성으로서 이를 통해 나의 존재는 안정성을 얻는다. 반면 자유는 유동성이지만, 이것이 없다면 나는 노예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자유로운 필연성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긴장 속에서만 자기를 주체로서 인식하고 실현하게 된다. 고정되어 주어진 나의 존재로부터 자유롭게 나를 형성할 때 비로소 나는 자기를 온전한 주체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주체성은 결코 고립된 홀로주체성일 수 없다. 나의 기억과 동경은 언제나 너의 기억 및 동경과 맞물려 있다. 그런즉 나는 오직 너와 더불어 우리가 될 때, 참된 주체가 된다. 이것이 서로주체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체성의 현실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성과 자유가 같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가족은 필연적 공동체일 뿐 자유의 현실태는 아니다. 반면 정당이나 기업 같은 사회적 결사체는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공동체이지만 필연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는 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가족 속에서는 자유의 결여 때문에, 그리고 계급 속에서는 필연성의 결여 때문에 참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필연성과 고정성을 가지면서도 자유의 현실태인 공동체가 바로 나라다. 나라는 내가 그 속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에서 이미 주어진 나의 과거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내가 적극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다른 어떤 공동체보다 나라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강렬하게 확인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족이란 그런 나라를 이루는 집단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한에서 민족이란 인종처럼 생물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범주로서, 그 속에서 나는 참된 의미의 주체 곧 시민적 주체로서 나를 인식하고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을 계급적 연대나 다른 탈민족적인 만남 속에서 해체하자는 제안은 세계시민적 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제안이지만, 민족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제안은 온전한 나라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방치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국가기구와 법률을 결국은 악한들의 손에 내맡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민족과 국가가 폭력적인 홀로주체로 군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능동적으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라를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로서 우리의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를 같이 만들어야 할 서로주체인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수백년 동안 이 땅에 살아왔지만 분단되어 반세기 이상을 떨어져 살아온 사람들과 새로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과 이 땅에 살다가 다른 나라로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불러모을 수 있는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민족의 문제는 오직 이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을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민족의 역사를 개방적으로 해석하는 박노자의 상상력과 고체화된 민족과 국가를 비판하는 권혁범의 이성과 온전한 나라를 형성하려는 김동춘의 열정을 모두 필요로 한다. 그런즉 지금은 민족주의에 대한 서양 이론의 한 끄트머리씩을 붙잡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지를 서로 묻고 같이 대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5:57 2011/11/30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