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그냥 좋은 도구다. 도구라는 말이 도구가 가지고 있는 여러 논란들을 단순화해주는 측면이 있다. 그래도 도구는 도구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효과와 기능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책과 컴퓨터의 차이가 엄청난 것처럼 인공지능은 그냥 컴퓨터가 아니다. 인간이 기억력에 한계가 있으니 활자를 통한 기억의 외부화와 컴퓨터로 인간의 기억을 외부화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공지능은 기억을 외부화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외부화한다. 뭐 사람들 대부분 생각하지 않고 사니 누가 생각을 대신해준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어떤 것이 생각을 대신해준다고 큰 차이가 있겠나. 나는 가끔 학생들에게 틱톡이나 쇼츠, 릴스 이런 짧은 영상이 생각을 제거한다고 말하는데, 사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나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어플들의 등장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점차 제거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페이스북에서 세 문장 이상 쓴 글은 잘 읽지 않는다.)

ChatGPT나 Gemini, Claude 같은 인공지능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제거하는 기술로는 단연 최고다. 생각하는 능력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보기 어려운 시점에 도달한 건지도 모른다.

아마 2024년부터 대학에서 인문학 교양과목 강의를 하는 교수들 대부분이 학생들에게 책을 읽고 요약하고 감상문을 작성하는 과제를 성적 평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나는 올해 이번 학기에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는 평가 항목을 없앴다. 이전에는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요약하고 감상문을 작성해서 제출하는 과제를 내면 일부 학생들이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블로그나 여타 웹사이트에서 글을 긁어와서 짜집기해서 마치 자기가 쓴 것처럼 제출했다. 이건 좀 수고를 들여 채점을 하면 걸러낼 수 있었다.

AI가 나오면서 학생들은 그냥 대놓고 AI가 쓴 글을 그대로 긁어서 과제로 제출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과제를 하는 것을 부정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학생들은 AI를 활용하는 건데 뭐가 나쁘냐고 반문한다. “활용”이 뭔지 잔소리하는 것도 귀찮아 이번 학기에는 성적 평가에서 과제 항목 자체를 없앴다. 학생들도 좋아했다. 소위 윈윈했다.

글쓰기는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건 글쓰기가 아니다. 주제를 정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아이디어를 굴리고 다른 것들과 연결하고, 자료를 찾고 주제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찾아 읽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런데 AI는 이걸 사람보다 더 잘한다. 그러니 곧 언론사에서 단순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는 기자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대신할 것이다. 결국 분석 기사와 칼럼도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대신할 공산이 크다.

내가 한겨레 신문의 저 짧은 서평을 읽고 문득 인공지능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칼럼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ChatGPT와 Gemini에게 이런 칼럼을 하나 써보라고 했더니 3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칼럼을 쫙 썼다. ChatGPT는 무료 버전이고 Gemini는 유료 버전이다.

나 : 현재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의 전쟁이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비판적인 칼럼을 1600자 분량으로 작성해줘. 인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독창적인 시각으로.

** ChatGPT :

전쟁은 언제나 인간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왔지만, 오늘날의 전쟁은 더 이상 인간만의 비극으로 머물지 않는다. 현재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 사이의 군사적 긴장은 단순한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지구 환경 전체를 인질로 삼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전쟁을 정치나 안보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기존의 틀을 넘어, 생태적·존재론적 차원에서 다시 사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현대전은 그 자체로 거대한 환경 파괴 기계다. 정밀 타격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공습은 석유 시설, 항만, 산업 기반을 파괴하며 대기와 해양에 막대한 오염을 유발한다. 특히 중동 지역의 석유 인프라가 공격 대상이 될 경우, 그 여파는 단순한 지역적 재난이 아니라 전 지구적 탄소 순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불타는 유전과 유출된 원유는 생태계를 장기간에 걸쳐 황폐화시키며, 이는 인간이 복구할 수 있는 시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이 환경을 ‘부수적 피해’로 간주하는 인식 구조에 있다.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자연은 여전히 전략적 자원으로만 이해되며, 파괴되어도 되는 배경으로 취급된다. 이 점에서 전쟁은 단순한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자연을 침묵시키는 인식의 폭력이다. 다시 말해, 폭격 이전에 이미 자연은 개념적으로 ‘죽어 있는 것’으로 전제되고 있는 셈이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사태는 근대적 주체 개념의 한계를 드러낸다. 국가라는 거대한 주체들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타자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 전체를 희생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여기서 자연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계산되지 않는 것’으로 배제된다. 하지만 기후 위기 시대에 이러한 배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대기와 해양, 생태계는 국경을 인식하지 않으며, 전쟁의 결과 역시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과연 전쟁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들 사이의 갈등이 왜 비인간 존재들의 파괴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만약 전쟁이 필연적이라 주장한다면, 그 필연성은 누구의 언어로, 어떤 존재들을 침묵시킨 채 구성된 것인가?

결국 오늘날의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종말을 드러내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갈등을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평화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 이해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전쟁을 멈추는 일은 곧 자연을 다시 말하게 하는 일이며, 그것은 인간 자신을 다시 사유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 Gemini :

잿빛 하늘 아래의 승자는 없다: 중동 전쟁이 지구에 새기는 지울 수 없는 흉터

2026년 현재, 중동에서 들려오는 포성은 단순히 국경선의 변화나 정치적 주도권의 향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란과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이 얽힌 이 거대한 화약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발을 딛고 선 대지를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이 전쟁을 바라볼 때,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이 지구라는 공동의 터전을 어떻게 제물로 삼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1. 탄소 발자국으로 뒤덮인 전장
우리는 흔히 전쟁을 총칼과 미사일의 숫자로 기억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공할만한 규모의 환경 파괴가 숨어 있습니다. 첨단 전투기가 한 번 출격할 때마다 뿜어내는 탄소량은 수만 명의 시민이 일 년 내내 일회용품을 줄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아낀 노력을 단숨에 무력화합니다.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장갑차가 질주하는 전장은 거대한 '탄소 공장'과 다름없습니다. 평화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자행되는 대규모 군사 작전은 역설적으로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 위기를 가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동의 하늘을 뒤덮은 것은 승리의 깃발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를 갉아먹는 검은 연기입니다.

2.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영토를 죽이는 모순
전쟁의 당사국들은 모두 '내 땅'과 '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싸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밀 타격이라는 미명 아래 석유 시설이 불타고 담수화 공장이 파괴될 때, 그 피해는 국경을 가리지 않습니다. 유출된 원유는 페르시아만의 푸른 바다를 죽음의 빛깔로 물들이고, 폭발로 발생한 유독 물질은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은 땅을 지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토양이 중금속으로 오염되고 지하수가 독으로 변한 곳에서 거둔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 패배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인간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대지의 생명력을 탕진하는 행위는 미래 세대의 자원을 미리 훔쳐 쓰는 '세대적 도둑질'과 다름없습니다.

3. 국경보다 소중한 '숨 쉴 권리'
전쟁은 인간의 시야를 국경선이라는 좁은 틀 안에 가둡니다. 적을 섬멸하고 영토를 탈환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하여, 우리가 지구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지구 환경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중동의 비극은 곧 북극의 빙하를 녹이고, 태평양 섬나라의 몰락을 앞당기며, 결국 우리 모두의 식탁을 위협합니다.

인간이 만든 법과 정치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무력합니다. 폭탄이 터질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상대 진영의 군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뿌리 내리고 살던 나무와 이름 모를 생물들, 그리고 그 생태계에 기대어 사는 무고한 생명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총구 앞에 선 적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총구가 겨누고 있는 지구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결론: 새로운 평화의 정의가 필요할 때
이제 평화는 단순히 '총성이 멈춘 상태'를 넘어 '지구와 함께 공존하는 상태'로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고결한 명분을 내세워도 지구의 숨통을 조이는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2026년의 중동 전쟁은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증오하며 파괴적인 기술력을 과시하는 동안, 우리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집인 지구가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제는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의 테이블에 앉아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입니다.

잿빛 하늘 아래 승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상처 입은 지구와 그 위에서 신음하는 우리 모두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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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생존, ‘언어력’에 달렸다(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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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6 04:56 2026/04/26 04:56

나의 자유

일상 2026/02/04 05:00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건 사실 전혀 다른 이야기다. 더구나 나처럼 게으른 사람은 읽고 보는 것을 즐길 수 있지만 뭔가를 생산하는 건 잘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전혀 다른 것으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편이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도 좋다. 

 

사실 게으른 삶이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즐기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지런하다는 말은 주어진 것들에 충실하게 자신을 맞춘다는 말과 같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또는 하루 일과를 계획적으로 진행하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오늘 반드시 처리한다는 것은 자유로운 정신의 활동과 거리가 멀다. 

 

나의 정신의 자유로움, 사람들이 게으름이라고 말하는 나의 정신의 자유를 보다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이 책을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집에는 없는 것 같다. 아마 현재 나의 정신의 자유를 옳아매고 있는 일과 무관한 책들을 모두 박스에 넣어 두었는데 어느 박스 어디에 들어 있는 모양이다. 

 

나처럼 정신의 자유로움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26836890&start=mosearch_auto&fbclid=IwdGRleAPvNylleHRuA2FlbQIxMQBzcnRjBmFwcF9pZAo2NjI4NTY4Mzc5AAEeXaWOqF-TzV16TCWOpSjKgUyrsmkFFkq1caD_9JEHU372mDFV-aPJ8wMhFi4_aem_quMKNsz780KKU4dyh5Qg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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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4 05:00 2026/02/04 05:00

이젠 단어 찾아 번역하는 것도 귀찮다. 훌륭한 챗지피티가 다 번역해주는데 굳이 내가 번역할 필요를 못느낀다. 이게 진짜 좋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편하니 좋다.
아래 글은 monthlyreview 올 2월호 글인데, 중국에서 무슨 맑스주의 대회가 열린 모양이다. 내용을 좋은데, 맨 아래 9번은 읽기가 거슬린다.

***

생태-마르크스주의와 유물론적 변증법의 재구성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4차 세계 마르크스주의 대회 개막식에서 발언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생태-마르크스주의의 발전과 그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 전체와 맺는 관계에 대해 논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생태-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의 또 하나의 분파가 아니라, 오히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생태-마르크스주의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이 광범위하게 포기된 상황에 맞서 하나의 교정(corrective)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생태-마르크스주의는 행성적 차원의 생태 위기와 결부된 물질적 필연성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생태 문제를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철학 전통 속에서 버려졌던 자본주의 상품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일부―즉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심층적인 유물론적·변증법적 관점―를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생태학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그 선두에 서 있었으며, 1950~1970년대에 등장한 환경운동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의 환경운동은 주로 방사성 핵종, 석유화학 산업과 결부된 합성 화학물질의 증가 등 새로운 인간 기원의 생태적 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생태사회주의라는 개념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성하는 것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1단계 생태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자본주의만큼이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향해 비판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서구의 1단계 생태사회주의 주요 이론가들 대부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른바 ‘프로메테우스적 기계론(Promethean mechanism)’에 빠져 있었다는 관점을 수용했습니다. 냉전 시기, 인간에게 불과 계몽을 가져다준 고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프로메테우스를 계몽의 상징으로 찬미했던 마르크스를 비판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주의에 반대되는 극단적인 기계론적·도구주의적 철학으로 냉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비판받았습니다.

이는 수천 년 동안 이해되어 온 고대 그리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왜곡이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한 왜곡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단계 생태사회주의자들 자신이 이러한 냉전적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반생태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연적 한계를 자신의 분석 속에 통합하지 못했으며, 이 점에서 반동적 인구론자 토머스 맬서스보다도 열등하다는 비판까지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생태사회주의자들의 해법은, 이미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과 자연 변증법이 상당 부분 제거된 서구 마르크스주의 위에 녹색 이론, 혹은 자유주의적 환경주의의 관념론적·도덕주의적 개념들을 접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극단적인 버전에서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조잡한 생산주의의 산물이며 “자연의 적”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1단계 생태사회주의의 이러한 약점과, 실질적인 생태적 실천을 창출하지 못한 한계는 1990년대 말 ‘2단계 생태사회주의’의 등장을 촉발했습니다. 이는 흔히 ‘대사 균열 이론(metabolic rift theory)’으로 불리지만, 그 분석의 범위는 훨씬 넓습니다. 이것은 고전적 역사적 유물론에 뿌리를 둔 진정한 생태-마르크스주의로, 마르크스 사상 속에 내재된 생태적 유물론을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 접근을 전 세계의 생태 조건과 위기에 적용함으로써, 혁명적 생태사회주의 실천과 궤를 같이하는 ‘3단계 생태사회주의’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속가능한 인간 발전에 초점을 둔 대사 균열 이론은, 주로 중국 생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발전한 생태문명 분석과 수렴하게 되었습니다.

생태-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 근본 명제를 포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자연/생태는 모든 물질적 존재의 토대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단순한 경제적 교의가 아니라, 자연의 자기-매개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토대에까지 미칩니다. 인간 사회는 유물론적 변증법에 부합하는 자연의 출현적 형태입니다.

2. 자연/생태는 엥겔스가 말했듯 “변증법의 증명”이다.
사회의 변증법은 중요하지만, 자연의 변증법과 분리될 경우 전체성과는 무관해집니다.

3.노동의 소외는 동시에 자연의 소외이다.
인간은 노동과 생산을 매개로 자연과 대사적 관계를 맺으며, 이는 인간의 종적 존재를 규정합니다.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는 곧 생산의 자연적 조건으로부터의 소외이며, 이는 자연의 소외에 근거합니다.

4. 마르크스의 생태 분석은 자연의 보편적 대사, 사회적 대사, 대사 균열이라는 삼중 구조에 기초한다.
‘자연의 보편적 대사’는 자연과학적 의미에서 자연 전체를 포괄하며, ‘사회적 대사’는 생산을 통한 인간 특유의 자연 관계를 의미합니다. 대사 균열, 즉 “생명 자체의 자연법칙에 의해 규정된 사회적 대사의 상호의존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회복 불가능한 균열”은 사회적 생산 대사가 자연의 보편적 대사와 충돌할 때 발생합니다. 마르크스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연구를 바탕으로, 토양의 영양분이 식량과 섬유 형태로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자본주의 도시 중심으로 이전되고 다시 토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토양이 황폐화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이는 그의 대사 균열, 즉 생태 위기 이론의 토대가 되었으며, 주기적 전염병 등 다른 영역에도 적용되었습니다.

5. 생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는 권력 관계를 통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희생시키며 더 많은 자연적 사용가치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르크스는 식민지 아일랜드가 영국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간접적으로 자국의 토양을 수출했으며, 그 결과 아일랜드인들이 극심한 기아와 빈곤에 노출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6. 생태적 가치형태 분석은 마르크스 자본 비판의 핵심이다.
마르크스의 경제 비판은 자연-물질적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분에 기초합니다. 자본주의는 상품 물신주의와 교환가치에 기반하지만, 사회주의는 생태적·사회적 차원을 지닌 질적인 사용가치를 중시합니다.

7.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비전은 지속가능한 인간 발전이었다.
이는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에 반대하며, 필수적인 자연 조건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부정적 측면을 거부합니다. 진정한 사회적 진보는 인류가 미래 세대를 위해 지구를 유지·보존하는 것, 즉 ‘선한 가장(boni patres familias)’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합니다.

8. 노동계급의 물질적 조건은 경제적일 뿐 아니라 생태적이기도 하다.
이는 가장 광범위하고 혁명적인 형태에서 환경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리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착취와 수탈은 공기·수질 오염, 식량 부족과 식품 위조, 열악한 주거, 전염병, 의료 접근의 불평등, 노동계급의 높은 사망률과 장애 등 환경적 파괴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인종, 젠더, 삶의 조건과 관련된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는 환경적 프롤레타리아트였습니다. 오늘날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투쟁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환경적입니다.

9. 완전한 사회주의는 생태문명의 발전을 요구한다.
생태 마르크스주의는 궁극적으로 생태문명을 지향합니다. 이 개념은 1970~80년대 후반 소련에서 등장했으며, 중국에서 즉각 수용되어 더욱 풍부하게 발전했습니다. 생태문명은 실질적 평등과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갖춘 완전한 사회주의와 동일시되었습니다. 시진핑이 말했듯 “푸른 산”은 “금산·은산”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또한 생태문명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는 현대화”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생태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파(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미침)에서 중국의 도가 사상에 이르기까지, 전통 사회와 유기적 유물론 속에 축적된 오랜 생태 사유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생태문명을 향한 생태 마르크스주의의 투쟁은, 인간을 지구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발전하는 유기적 존재로 이해하는 이러한 전통적 관념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https://monthlyreview.org/articles/eco-marxism-and-the-reconstruction-of-materialist-dialec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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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1 22:25 2026/02/01 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