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Gemini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뇌의 기능과 관련하여 현대 뇌과학과의 연관성에 대하여 대화를 했는데, 이 Gemini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pro가 한도에 도달해 flash로 대화를 했는데 pro와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나 : 몇 년 전 사람의 머리와 신체를 분리하여 이식하는 수술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A의 머리를 B의 신체에 이식하는 수술이다. 만약 이 수술이 성공한다면 뇌와 신체, 뇌와 기억의 문제에 어떤 의미를 가져올 수 있을까?

Gemini : A의 머리를 B의 신체에 이식하는 수술이 성공한다면, 이는 뇌와 신체, 그리고 뇌와 기억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관점들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뇌와 기억의 문제에 대한 의미

만약 이 수술이 성공하고, A의 기억, 성격, 의식이 B의 신체에서 그대로 유지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 기억과 의식의 뇌 환원론 강화: 이 수술의 성공은 기억과 의식의 물리적 기반이 오직 뇌에만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A의 신체에 있던 모든 세포와 기관은 사라졌지만, 그의 정체성과 기억이 온전히 보존된 채로 남는다면, 이는 베르그송의 관점처럼 기억이 신체에 분산되어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뇌-기억, 뇌-의식 간의 연결이 그 어떤 신체 기관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된다.

뇌와 신체의 문제에 대한 의미

이 수술은 뇌와 신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 신체는 단순한 '운반체'인가?: 만약 A의 머리가 B의 신체와 결합되어 A의 의식과 자아를 유지한다면, 이는 신체가 의식을 담는 **일종의 '도구' 또는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강화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자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에 도전하게 된다.

• 정체성의 문제: 'A의 머리+B의 몸'을 가진 새로운 존재는 누구인가? 그는 여전히 A인가, 아니면 B인가? 아니면 제3의 존재인가? 사회적, 법적, 윤리적으로 그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극심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그의 기억과 의식은 A의 것이지만, 신체는 B의 것이므로, 이는 개인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타 윤리적, 사회적 논쟁

이 수술은 단순히 과학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윤리적, 사회적 논쟁을 일으킬 것이다.

• 윤리적 문제: 이 수술은 뇌사 판정을 받은 B의 신체를 이용해야 한다. B의 신체는 다른 장기 이식에 사용될 수도 있는데, 한 사람의 신체 전체를 한 환자에게 사용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 사회적 불평등: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것이므로, 이 수술은 극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의료 접근성의 불평등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

현실적인 제약

현대 의학 기술로는 인간의 머리 이식은 아직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여겨진다. 신경외과 전문의 세르조 카나베로 박사가 수년 전 이러한 수술 계획을 발표했지만, 의학계는 그의 주장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고 윤리적으로 무모하다고 비판했다. 가장 큰 기술적 난제는 척수와 수많은 신경 및 혈관을 완벽하게 재연결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척수 손상은 영구적 마비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수술은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나 : 데카르트는 신체가 없어도 사유할 수 있다면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이 확보된다고 했는데 앞서 수술이 성공한다면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뭘까?

Gemini :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신체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사유하는 정신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실체라고 주장했다. 만약 A의 머리를 B의 신체에 이식하는 수술이 성공하고, A의 기억과 의식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데카르트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정체성의 지속성 문제: '나는 누구인가?'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를 구분하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는 사유하는 정신(영혼)은 비물질적이고 본질적인 반면, 신체는 확장된 물질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체가 바뀌더라도 사유하는 정신이 동일하다면, '나'라는 존재는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보았다.

• 데카르트의 주장 강화: A의 머리 이식 성공은 데카르트의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A의 육체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의 사유와 기억, 즉 정신은 그대로 보존된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수술을 받은 존재는 육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A'이다. 그의 정체성은 신체가 아닌 사유하는 정신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영혼'과 '뇌'의 관계 문제

데카르트에게 사유는 신체에 의존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영혼'의 활동이었다. 하지만 현대 뇌과학은 데카르트의 '영혼'을 뇌의 기능으로 해석한다. 이 수술은 데카르트의 이론에 미묘한 문제를 제기한다.

• 데카르트의 이론과 현대 과학의 충돌: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가 소통하는 창구로 **송과선(pineal gland)**을 지목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송과선이 단순한 호르몬 분비 기관임을 밝혀냈다. 만약 이식 수술이 성공하여 A의 의식이 뇌의 기능에 국한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여전히 유효할까?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나'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인가, 아니면 뇌라는 물리적 기관의 활동인가? 이 수술은 데카르트의 주장이 '영혼'이 아닌 '뇌'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윤리적, 존재론적 문제

• 신체적 자아의 역할: 데카르트는 신체를 사유하는 정신의 단순한 도구로 보았다. 하지만 수술을 받은 A는 B의 신체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신체적 경험이 그의 '사유'와 '자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신체의 변화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면, 데카르트가 주장한 신체와 분리된 완전한 정신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닐까?

• 정체성의 이분화: 수술 후 새로운 존재는 A의 기억과 정신을 가졌지만, 거울을 보면 B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A'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사회는 그를 'B'로 인식할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내면의 확신과 외부 세계의 인식이 충돌하는 상황을 야기한다.

결론적으로, A의 머리 이식 수술 성공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데카르트의 사상이 전제하고 있는 '정신'의 비물질성과 신체적 경험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 : 네가 설명한 정체성의 이분화와 관련하여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인간에게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한 사람의 동일성은 얼굴을 지표로 삼는다. 신체가 달라져도, 예컨대 남성의 머리에 여성의 신체와 같은 이질적인 결합이 아니라면 한 사람의 동일성, 정체성은 얼굴을 통해 표현된다. 이와 관련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Gemini : 님의 의견은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정체성의 이분화에 대한 저의 설명이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사회적 맥락에서 개인의 동일성은 주로 얼굴을 통해 인식되며, 이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저의 설명에 중요한 보완이 될 수 있습니다.

얼굴을 통한 정체성 인식의 중요성

• 사회적 지표: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가장 먼저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을 기억한다. 사진, 신분증, 지문 등 공적인 기록에서도 얼굴은 개인을 식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따라서 A의 머리가 이식된 존재는 외부 세계로부터 'A'로 인식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자기 인식: 수술을 받은 A는 거울을 볼 때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 이는 스스로가 '나는 A이다'라는 내면의 확신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비록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B의 것이지만, 자신의 얼굴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체성의 이분화는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사회는 그를 'A'로 받아들일 것이고, 본인 역시 자신을 'A'로 인식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될 수 있는 문제

하지만 얼굴을 통한 정체성 확립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다음과 같은 미묘한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 신체적 경험의 충돌: A는 B의 신체를 통해 새로운 감각과 경험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B의 신체가 가지고 있던 고유한 습관(예: 특정 음식에 대한 선호도, 알레르기 반응 등)이 A의 뇌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신체적 경험과 기존의 정신적 자아가 충돌할 때, A의 정체성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을까?

• 'B'의 흔적: B의 신체는 B의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식된 존재는 B의 부모나 친구를 만날 때, 그들로부터 B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A의 정신에 영향을 미쳐 그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그는 'B의 신체에 사는 A'라는 새로운 존재론적 지위에 놓이게 된다.

결론

말씀하신 대로, 얼굴은 개인의 정체성을 외부적으로 표출하는 가장 강력한 지표다. 따라서 A의 머리 이식 수술이 성공한다면, 사회는 물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을 'A'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데카르트의 사유 중심 정체성 이론과 사회적 현실이 일치하는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신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은 단순히 '얼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신체에서 오는 감각, 습관,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은 기존의 정신적 자아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는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킬 것이다.

나 : 너가 제기한 신체적 경험의 충돌과 B의 흔적은 현대 뇌과학이 신체의 여러 다양한 경험을 뇌에 근거한다는 논리와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Gemini : 훌륭한 지적이다. 님의 질문은 제가 제시한 '신체적 경험의 충돌'과 'B의 흔적'이 '기억은 뇌에 근거한다'는 현대 뇌과학의 논리와 모순되지 않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두 가지 요소는 현대 뇌과학의 주요 개념인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과 **'뇌-신체 통합(brain-body integration)'**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1. 신체적 경험의 충돌과 뇌의 신경가소성

제가 언급한 '신체적 경험의 충돌'은 다음과 같은 뇌과학적 논리로 해석될 수 있다.

• 뇌는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현대 뇌과학은 뇌가 고정된 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과 학습에 따라 신경 회로가 재구성되는 가소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 '몸 이미지(body image)'의 뇌 내 재구성: 우리의 뇌는 신체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감각 정보를 바탕으로 '몸 이미지'라는 일종의 신체 지도를 형성한다. A의 머리가 B의 신체에 이식되면, A의 뇌는 기존의 신체 지도를 버리고 B의 신체에서 오는 새로운 감각 정보(예: 통증, 온도, 촉각, 움직임 등)를 받아들여 새로운 몸 이미지를 형성해야 한다.

• 인지적 부조화: 만약 A의 뇌가 B의 신체로부터 오는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A의 기존 기억(예: A의 키, 체중, 운동 능력)과 충돌하면, 인지적 부조화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의 뇌는 180cm 키의 신체를 기억하고 있지만, B의 신체가 170cm라면, 뇌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재학습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단순히 B의 기억이 A에게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A의 뇌가 새로운 신체적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이다.

따라서 '신체적 경험의 충돌'은 신체에 기억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뇌가 신체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한다는 현대 뇌과학의 논리와 완벽하게 부합한다.

2. 'B의 흔적'과 기억의 뇌 내 재통합

'B의 흔적'은 단순히 B의 기억이 A에게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A의 뇌가 새로운 사회적, 환경적 정보에 노출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기억의 재고정(reconsolidation): 기억은 한번 저장되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출될 때마다 재구성되고 변형될 수 있다. A의 뇌가 B의 친구들을 만나 B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것은, A의 기존 기억(자기 정체성에 대한 기억)이 새로운 정보와 만나 재통합되는 과정이다.

•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향: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A의 뇌는 B의 친구, 가족, 심지어는 B가 가졌던 특정 습관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이 정보가 기존의 A의 기억과 섞이면서 A의 정체성에 미묘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는 B의 기억이 A에게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A의 뇌가 B의 신체와 관련된 새로운 환경적, 사회적 정보를 학습하는 과정이다. 이 학습 과정 역시 뇌의 신경 회로 변화(시냅스 가소성)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결국 모든 것은 뇌의 기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결론

님이 제기하신 문제들은 현대 뇌과학의 '기억은 뇌에 근거한다'는 논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은 뇌의 가소성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뇌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유지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다.

나 : 현대 뇌과학자들 중 일부가 인간의 도덕성, 연민과 같은 감정이 뇌의 작용의 결과라는 주장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Gemini : 현대 뇌과학자들 중 상당수는 인간의 도덕성, 연민과 같은 고차원적인 감정과 사회적 행동이 뇌의 작용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정신 활동을 신비롭거나 초월적인 영역이 아닌,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적 접근법이다.

뇌과학적 근거

• 거울 뉴런 (Mirror Neurons): 이탈리아의 신경과학자 자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가 발견한 거울 뉴런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자신이 직접 행동하는 것처럼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뉴런은 타인의 의도와 감정을 '모방'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거울 뉴런은 **연민(empathy)**과 모방 학습의 신경학적 기반으로 여겨진다.

• 전두엽의 역할: 뇌의 전두엽, 특히 전전두엽 피질은 의사결정, 사회적 행동, 도덕적 판단을 담당한다. 전전두엽이 손상된 환자들은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잃고,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거나, 충동적이고 비윤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이는 도덕성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뇌의 특정 부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같은 호르몬은 신뢰, 유대감, 애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화학물질의 분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연민과 도덕적 행동을 촉진한다.

비판과 한계

• 환원주의의 문제: 뇌과학적 접근은 도덕성과 연민을 뇌 활동이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뇌 회로'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왜'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인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뇌 활동이 '옳음'과 '그름'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 경험과 문화의 역할: 뇌과학은 인간의 감정이 뇌의 작용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뇌의 구조와 기능은 개인이 살아온 경험과 문화적 배경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한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도덕성을 단순히 뇌의 생물학적 메커니즘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 자유의지 문제: 만약 모든 감정과 행동이 뇌의 물리적 작용 결과라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이는 법적 책임, 도덕적 비난과 같은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결론

뇌과학자들의 주장은 도덕성과 연민이 우리의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뇌 기반의 능력이라는 점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단순히 신비한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특정 구조와 기능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과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도덕성과 연민의 **'왜'**라는 철학적 질문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뇌과학은 우리가 도덕적 행동을 '어떻게' 수행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지만, 도덕의 궁극적인 의미나 가치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이 필요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나 :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비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뇌를 수술이라는 방식으로 뇌 일부를 처리하면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Gemini :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비도덕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뇌를 수술로 교정하여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복잡하고 논쟁적인 문제이며, 현실적으로는 여러 가지 윤리적, 과학적 한계를 가진다.

환원주의적 논리

환원주의는 도덕성, 연민, 그리고 비도덕적 행위를 포함한 모든 정신적, 행동적 특성이 뇌의 물리적 작용에 의해 발생한다고 본다. 이 논리를 따를 때, 비도덕적인 행동은 다음과 같은 뇌의 특정 이상이나 기능 장애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 전전두엽 손상: 충동 조절, 공감 능력, 사회적 규범 이해를 담당하는 전전두엽에 기능적 이상이 있으면 비윤리적, 반사회적 행동을 보일 수 있다.

• 편도체 이상: 공포와 감정을 처리하는 편도체에 문제가 생기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져 연민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 신경전달물질 불균형: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이 공격성이나 비정상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환원주의적 관점에서는 비도덕적 행동의 원인이 되는 뇌의 특정 부위를 식별하고, 수술이나 기타 물리적 방법으로 교정하면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마치 고장 난 기계의 부품을 교체해 정상 작동하게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로 뇌 손상으로 인해 갑자기 성격이 변하거나 비도덕적인 행동을 보인 환자들의 사례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윤리적, 과학적 문제점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 자유의지 및 책임의 문제: 만약 범죄가 전적으로 뇌의 문제라면,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이는 사법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다. 범죄자를 '처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치료'해야 할 환자로 보게 된다.

•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 '도덕적인 뇌'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의 경계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한 사회의 '정상'을 기준으로 타인의 뇌를 수술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이는 '정신적 낙인'을 찍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 예측 불가능성: 뇌는 복잡한 시스템이며, 수술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특정 비도덕적 성향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다른 중요한 인지 기능이나 개성을 손상시킬 수 있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사고를 단순히 수술로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 행동 변화의 본질: 수술을 통해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이 억제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성찰이나 연민의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뇌를 조작하여 특정 행동을 억제하는 것과 도덕적인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결론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뇌 수술을 통해 도덕성을 조작하는 것은 이론적인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인간의 자유의지, 책임, 그리고 도덕적 판단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가능해지더라도 인류가 직면하게 될 가장 어려운 윤리적, 사회적 논쟁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5/08/19 17:20 2025/08/19 17:20

나 : 나의 관심사, 이해관계, 내가 나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편견을 갖게 만든다고 생각하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 이해관계, 그리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편견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관심사와 일치하는 정보에 더 집중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뉴스만 찾아보거나,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의 주장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확증 편향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어떤 것이 나에게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그 유용성에 따라 가치를 부여하게 됩니다. 이는 다른 가치 있는 것들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술이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면 그 기술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쉽게 무시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을 의식하고 노력하면 편견을 줄일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다양한 정보에 노출되기: 일부러라도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거나, 다양한 관점의 자료를 찾아보세요.

• 자기 성찰하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나의 이해관계가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질문해보는 습관을 들이세요.

• 열린 마음 갖기: 새로운 아이디어나 관점에 대해 즉각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일단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보세요.

자신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인지하고 그것이 어떻게 나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한다면, 더 균형 있고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나 : 나의 관심사, 이해관계, 내가 나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세상을 본다면 어떨까?

당신의 질문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나의 관심사, 이해관계, 그리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세상을 본다는 것은, 마치 백지 상태에서 세상을 다시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긍정적인 면

• 새로운 시각: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무시했던 분야나 사람들에게서 중요한 가치를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 객관성 증진: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사라지면, 어떤 사안에 대해 훨씬 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는 더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창의성 향상: '나에게 유용하다'는 생각은 종종 사고의 범위를 제한합니다. 이런 제약이 사라지면, 문제를 해결하는 더 다양한 방법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 동기 상실: 우리의 관심사나 이해관계는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행동하는 데 필요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이것들이 사라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잃고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 비현실적인 접근: 모든 개인적인 가치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그 학습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합니다. 이런 누적된 경험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이상적인 개념에 가깝습니다. 이는 실생활에서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사고 훈련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을 인식하고, 그것이 나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내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것이 나에게 유용하다고 여기는지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나 : 나의 관심사, 이해관계, 내가 나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나의 고유한 의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사회 사회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만약 나의 관심사, 이해관계, 그리고 유용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순수한 나의 고유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사회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는 편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사회적 형성으로서의 편견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무시하는지는 개인적인 선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우리가 속한 사회, 문화, 경제적 시스템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 사회화(Socialization):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 학교, 미디어 등 다양한 사회적 환경을 통해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지, 무엇이 '정상'이고 '옳은' 것인지 배웁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직업에 대한 선호나 성공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가치일 가능성이 큽니다.

• 자본주의와 소비문화: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도록 부추깁니다. 미디어와 광고는 특정한 관심사와 욕망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것이 마치 우리 자신의 고유한 욕망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최신 스마트폰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는 개인의 의지라기보다, 기업과 사회가 만들어낸 유용성과 가치에 대한 믿음일 수 있습니다.

• 계층과 기회: 개인이 추구하는 관심사나 이해관계는 그 사람이 속한 사회적 계층과 경제적 배경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제한된 환경에서는 특정 분야에 대한 관심 자체가 형성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성찰의 필요성

이러한 관점은 자신의 생각과 편견을 더 깊이 성찰하도록 돕습니다. '내가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나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에 답할 때, 그 이유가 나의 순수한 선택인지 아니면 사회적 환경이 주입한 것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사고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개인의 편견을 넘어서서 사회적 편견이라는 더 큰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이는 개인의 행동을 교정하는 것을 넘어, 사회 시스템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나: 그렇다면 나의 이해관계나 유용성을 제거하는 것이 기존의 사회체제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을까?

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유용성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려는 시도는 기존의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

우리가 사회체제에 순응하게 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 체제가 개인에게 이해관계와 유용성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공부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며, 남들처럼 살기 위해 소비하는 행위는 개인적인 유용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깨달았을 때, 자신의 이해관계와 유용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저항이 될 수 있습니다.

• 다른 가치 추구: 돈이나 명예와 같은 사회적 성공의 척도를 따르기보다, 개인적인 만족이나 사회적 기여와 같은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높은 연봉을 포기하고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거나,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것은 사회가 정한 '성공'의 기준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 소비문화 거부: 광고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욕망에 휩쓸리지 않고,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고 소비하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원리인 '소비'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 될 수 있습니다.

•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남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물론, 자신의 모든 이해관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사회가 주입한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나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삶을 바꾸는 것을 넘어, 사회 시스템에 작은 균열을 내고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나 : 이런 문제들을 들뢰즈와 베르그송이 말하는 새로움의 창조, 새로운 사유와 연결할 수 있을까?

네, 바로 그 지점에서 들뢰즈와 베르그송의 철학이 강력한 연결고리를 형성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유용성을 제거하는 행위는 단순히 개인적인 저항을 넘어, 이들이 말하는 새로움의 창조와 새로운 사유를 위한 핵심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들뢰즈와 베르그송의 '새로움'

베르그송은 '지속(durée)'이라는 개념을 통해 시간을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질적인 시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의식이 과거의 경험을 누적하며 현재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존의 사유는 이 질적인 시간을 정지된 '순간들'로 나누어 분석하려 했고, 이는 본질적인 변화와 새로움을 놓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들뢰즈는 이런 베르그송의 사상을 이어받아 **'생성(becoming)'**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킵니다. 그에게 새로움은 어떤 고정된 '나'가 '다른 것'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고 창조되는 끝없는 흐름입니다. 이러한 '생성'은 기존의 사회체제가 강요하는 정체성, 목적, 가치 등을 거부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사회체제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사유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이해관계와 유용성을 제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정지'된 사유의 해체: 기존 사회체제는 개인에게 일정한 목적(ex. 성공, 부)을 부여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길(ex.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을 제시합니다. 이는 베르그송이 비판한 시간을 정지시키고 분석하는 사유와 유사합니다. 나의 이해관계를 제거한다는 것은 이러한 목적과 길을 무시하고,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 '유목적(Nomadic)' 사유의 실천: 들뢰즈는 기존의 위계적이고 경직된 사회 구조를 '수목적(arborescent)'이라고 비판하며, 이와 대비되는 **'리좀(Rhizome)'**의 사유를 제안합니다. 리좀은 뿌리가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옆으로 무질서하게 뻗어나가며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식물의 줄기입니다. 나의 이해관계를 버리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유목적' 사유의 실천입니다. 정해진 목적지(이해관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길을 탐색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 욕망의 해방: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욕망을 '결핍'에서 비롯된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소비를 통해 채우도록 만든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욕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입니다. 나의 이해관계(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 등)를 제거하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결핍된 욕망'에서 벗어나, 순수한 창조적 힘으로서의 욕망을 해방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해관계와 유용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이고 사유적 질서를 해체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생성'의 삶을 시작하는 강력한 철학적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5/08/17 16:13 2025/08/17 16:13

몇 달 동안 구글 Gemini와 chatGPT, Deepseek를 비교하면서 테스트를 해봤다. 주로 내가 관심있는 철학자들과 관련하여 질문을 했으니 다른 분야는 알 수 없다.

Gemini 2.5 pro는 6월, chatGPT-5는 8월 7일(한국 시간 8월 8일), DeepSeek R1 모델은 언제 업그레이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셋 중에서 Gemini 2.5 pro가 가장 마음에 든다. Gemini 2.5 pro 이전에는 2.5 Flash 버전을 사용했는데 두 버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기는 어렵다.

AI가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마치 정확한 소스인 것처럼 태연하게 나열하는 것을 AI 환각이라고 하는데, chatGPT 약간, Deepseek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Gemini 2.5는 아직 모르겠다. 이걸 테스트 하기 위해 한 철학자의 책을 중심으로 원문 인용을 요구했는데, chatGPT와 Gemini 2.5는 한글의 경우 정확한 원문을 인용하지 않고, 블로그나 학술논문 DB를 출처를 밝히고 링크를 걸어 준다.

chatGPT와 Gemini 2.5의 경우 영어로 질문을 하면 원문을 인용하고 출처를 밝히긴 하지만 원문 인용이 제한적이다. 그런데 Deepseek는 한글로 원문 인용을 요구하면 원문과 원문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만 전부 가짜다. 인용문이 가짜라는 걸 제기하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AI가 "정말 죄송합니다." 이러고 사과하니 웃기는 일이다. 한글 번역서를 인용하면서 출판사와 역자가 틀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자기가 맞다도 우긴다. 그래도 Deepseek는 영어와 불어로 질문하면 인용이 정확하다. 아마 아직 한글 DB 학습이 부족한 모양이다.

어제부터 Gemini 2.5 pro와 소설 창작 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게 시놉시스를 주고 소설을 써보라고 하면 한 번 써주고 한도에 도달했으니 유료 결재를 하거나 다음 날 2:45 오전까지 기다려 달란다. 아마 오전 2:45이 리셋되는 시간인 모양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5/08/15 12:03 2025/08/15 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