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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24 2019/05/26 21:24

문은 입구이자 출구다. 입구와 출구로서 문은 그 용도가 분명하다. 문은 항상 어떤 곳을 가리킨다. 언젠가 첨성대는 하늘로 향하는 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늘로 향한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인가? 나는 첨성대 안에 직접 들어가본 적은 없지만 내부를 본 적은 있다. 시간이 더 지나 나는 첨성대가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하늘을 향한 문이든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문이든 얼마나 시적인 표현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 어떤 시각장애인이 허공을 향해 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사람은 지상으로 추락했다. 사진을 보니 문은 건물의 벽에 달려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도 걸어서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이었다. 경찰은 사망한 시각장애인이 옥상으로 가는 문인 줄 알고 열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그런데 진짜 옥상으로 가는 문은 잠겨 있었다고 한다. 누가 왜 이런 문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문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문은 크거나 작거나 어딘가로 향하는 통로다. 사람이 다닐 수도 있고 짐승이 다닐 수도 있다. 문이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든 문은 어딘가로 통하는 통로다. 입구가 없는 집이 없고 출구가 없는 집이 없다. 만약 누군가 문이 없는 집을 지었다고 생각해보자. 외관은 집의 모양이겠지만 집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눈은 입구인가 출구인가? 입은 출구인가 입구인가? 귀는, 코는? 얼굴에는 5개의 문이 있다. 나의 눈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고 나가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입과 코로 들고 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귀로 나가는 것은 무엇이고 들어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귀는 단지 입구일 뿐일까? 귀는 어디로 향한 출구일까? 귀로 나가는 것은 무엇일까? 참 기이한 생각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오늘 처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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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22 2019/05/26 21:22

철학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당대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큰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에티카> 원래 제목은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인데, 라틴어로 출판되었다는 것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깊은 위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하다. 당시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유산계급의 귀족들이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든 헛소리에 불과한 말이든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깊은 위안을 받은 사람인데, 특히 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는 언제나 감탄하면서 읽는다. 3부에서 다루고 있는 정서는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고 이로인해 발생하는 미움, 분노, 증오 등의 감정이 대상이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에서 쓴 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기쁨의 감정은 우리를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끌고 우리의 행위 능력을 증가시킨다. 반면에 슬픔은 우리의 행위 능력을 감소시키고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은 우리 신체에 적합하거나 적합하지 않은 신체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감정은 자신의 기원이 되는 관념으로 되돌아올 때, 기쁨은 사랑이 되고 슬픔은 증오가 된다.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에 의하여 명석 판명하게 지각될 수 있을 때 나는 이 원인을 타당한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원인 자체에 의하여 이해될 수 없을 때 나는 그 원인을 타당하지 않은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이건 3부에서 처음 등장하는 [정의] 1인데, 이와 관련하여 올리비에 푸리올이라는 사람은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예를 들고 있다. 물론 이 책이 프랑스에서 바깔로레아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이 사람의 글을 좀 느슨하게 옮기면 이렇다.

 

“적합한[타당한] 원인이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먼저 부적합한[타당하지 않은] 원인이 뭔지 보자. 부적합한 원인 또는 부분적인 원인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과를 이해할 수 없는 원인이다. 그것은 외부의 무언가가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을 예로 들어 보자.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향한다. 만일 누구의 노래처럼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 자신이 그 감정의 적합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의존한다는 걸 말한다. 우리가 그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상, 사랑은 언제든 우리에게서 빠져 달아날 수 있는 대상에 달려 있다.우리가 어떤 돌멩이를 사랑하기는 쉽다. 그 돌을 내 주머니나 집에 보관할 수 있지만 여자나 남자는 사정이 다르다. 나에게 속하지 않는 나 밖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달렸다.(224쪽)”

 

이 부분은 마치 청년 맑스가 니 사랑이 되돌아 오는 사랑을  만들지 못한다면 니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이라고 한 말을 떠올린다. 나는 경철수고의 마지막 단락을 장식하고 있는 맑스의 이 말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정확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등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 너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되돌아 오는 사랑을 만들지 못할 때 그 대상을 증오한다. 말하자면 사랑과 증오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다른 감정이다. 스피노자는 그 대상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내게서 발생하는 감정을 질투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자기가 증오하는 대상이 파괴되는 것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은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3부, 정리 20). 얼마나 시니컬한 표현인가?! 물론 스피노자는 한참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증오는 증오의 보복에 의하여 증대되고 반대로 사랑에 의하여 제거될 수 있다.”(3부, 정리 43)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3부, 정리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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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21 2019/05/26 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