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차별받는 것과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다. 특별대우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 사람이 자신만을 특별히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차별받는 것과 달리 누군가를 차별하려고 하는 건 더 쉬운 것 같다. 선생은 똑똑하고 예쁜 학생들을 좋아한다. 조카가 둘이면 똑같이 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면 아무리 애쓰도 차별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주위에 동성애자가 한 둘은 있기 마련이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더 티가 나는 법이라 처음에는 다소 낯설고 어색한 것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동성애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 반응이 조금씩 다르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말에 혐오의 가시가 살짝 보이기도 하고 동성애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보인다. 편견이란 한쪽만 보는 것이고 선입견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재단하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완전히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편견과 선입견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별별시선]차별받지 않을 권리 ‘동성애’/ 경향신문, 2017. 5. 27.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을 다시 세우겠다고 천명한 이후에도, 군에서는 인간사냥이나 다름없는 동성애자에 대한 색출과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 짧은 글에서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동성애자의 인권을 옹호해보려 한다.

 

먼저 ‘동성애를 차별하지는 않지만 너무 강한 발언 방식 때문에 없던 반감이 생기려 하는’ 분들을 위한 설득을 해보겠다. 동성애는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이거나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니다. 동성애는 인류의 역사, 혹은 생명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일정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자연스러운 행위 중 하나다. 동성애자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쾌락만을 좇는 변태성욕자가 아니고, 그저 호감을 느끼고, 섹스를 하고, 사랑을 하는 대상이 동성인 평범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는 그 어떤 의학적 소견에서도 질병이 아니고, 전염되지도 않는다. 에이즈는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자연 발생한 병이 아니라 동물에게서 유래한 바이러스이며,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들로부터 에이즈가 전염될 개연성도 매우 낮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꺼려진다면 약간 이야기가 어려워지지만, 근본주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에서 동성애를 탄압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경전의 구절들은 다분히 취사선택적인 것이다. 그 경전들에 따르면 당신은 현대사회에서 현대 문물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구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장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종교 공동체에 헌납하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면 당신도 안 지키는 그 규율들을 애먼 사람들에게 들이대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냥 그들이 알아서 사랑하도록 놔두기만 하면 된다. 동성애자들의 입대를 공식적으로 허용한 나라에서 그것 때문에 전투력이 하락했다는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동성애자들이 가족을 꾸릴 권리를 보장하는 것 역시 추가 비용은커녕 행정적 문제들에서의 편의성이 증가할 뿐이다. 동성 부부가 합법화된다고 해서 출산율이 떨어지거나 이성 부부가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원래부터 존재해왔던 동성애자들이 좀 더 당당하게 자신들을 드러낼 것이라는 변화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로 바뀔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정도는 부족할까? 그럼 읍소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이 생각지도 못할 가공할 만한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며, 그 존재 자체를 사회로부터 부정당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꽃이 핀 공원을 거니는 일이, 그들에게는 목숨을 건 모험이 될 수도 있다. 감금, 교정치료, 폭력이 이들의 일상에 도사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교정강간이나 살해에 이른다. 동성애자들의 높은 자살률은 동성애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차별에서 비롯되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현상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당신이 아는 그 누구일 수도 있다. 당신이 평생 동안 만나왔던 가족, 친구, 동료 중에는 분명히 동성애자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결혼을 한 이성애자이고,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가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 당신 때문에 세상에 나왔고, 당신에게 기쁨과 사랑과 삶의 이유를 주었던 그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가? 

 

 

이마저도 안 통한다면 남은 것은 경고다. 무슨 짓을 하든 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사랑할 것이고 언젠가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당신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그러한 것처럼 어리석음의 전당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리라. 혹여 이들이 패배한다면 그때는 더 큰 문제다. 이들을 휩쓸어간 그 광기가 당신의 어떤 정체성을 못마땅해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민주주의적 공존은 어려운 게 아니다. 인권은 지켜주고 사생활은 신경 끄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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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19 2019/05/26 21:19

"에이젠슈테인은 변증법에 온전히 영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 유기체를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인 개념으로 만들었다."(운동-이미지,  tr. 74)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를 이렇게 평가한다. <변증법에 온전히 영화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방법이 변증법적 방법과 상응한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물론 여기서 <변증법>은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변증법의 세 가지 법칙을 말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체계화된 엥겔스의 변증법은  째 양질전화의 법칙 , 둘째 대립물의 통일, 셋째 부정의 부정 법칙이다. 에이센슈테인 이 중에서 양질전화의 법칙과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이라는 변증법의 원리를 자신의 몽타주 이론에 도입했다. 
에이젠슈테인은 독립적인 쇼트들의 충돌이 이념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했는데, 개별 쇼트들의 연결은 양적 축척을 통해 질적 비약을 발생시킨다. 쇼트들의 충돌은 어떤 이행을 나타낸다. 몽타주는 이러한 양적 단위에서 질적 단위로의 이행을 표현한다. 몽타주의 이념은 곧 질적 비약을 통해 발생하는 어떤 이질적인 것의 출현을 의미한다. 
몽타주를  통해 표현되는  이념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연결되는 쇼트들로 환원될 수 없는, 각각의 독립적인 쇼트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연결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는 쇼트들을 잠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개별적인 쇼트들의 연결은 이러한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킨다. 그래서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를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은 쇼트들의 연결을 통해 발생하는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수직과 수평, 바다와 육지, 하나와 다수 등  대립의 몽타주와 견인의 몽타주는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의 이행과 새로운 질의 돌연한 출현"이라는 양질전화의 법칙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의 돌연한 출현"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행을 통해 발생하는 새로운 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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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17 2019/05/26 21:17

다음과 같은 흄의 인용,
정의의 규칙은 그 보편성과 절대적 불변성으로 인해 자연(본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자연적 경향이나 동기로부터 직접 창조될 수 없다.(62)
도덕적인 것이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도덕이라(57)는 말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선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지 공감능력을 통해 세계와 관계한다는 것이다. 공감은 우리의 본성에 의해 제한을 받을 뿐만 아니라 편파적이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나의 가족, 나의 친지,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대함이 본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56)면 이런 한정된 범위를 어떻게 세계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가능한가? 흄은 <우리에게 생생한 충격을 주는 현재의 어떤 정황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미디어의 이미지가 우리를 자극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자연과 문화는 하나의 전체나 복합체를 형성한다. 흄 역시 정의를 포함해 모든 것을 자연에 부여하는 주장, 의미와 덕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정치와 교육에 부여하는 주장을 모두 거부한다. 전자는 문화를 잊은 채 자연의 일그러진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후자는 자연을 잊고 문화를 왜곡한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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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15 2019/05/26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