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오류의 제단과 화덕 앞에서의 천국의 기도가 논박당한 후 그 오류의 세속적 실존이 논박에 내 맡겨져 있다. 어떤 초인을 찾던 천상의 환상적 현실 속에서 단지 그 자신의 반영만을 발견했던 인간은 그의 참된 현실을 찾고 또 찾아야만 할 곳에서 이제 더 이상 그 자신의 가상만을, 비인간만을 찯는 경향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비종교적 비판의 기저는 이것이다 :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미 자기 자신을 다시 상실해 버린 인간의 자기 의식이고 자기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 그 자신은 결코 세계 바깥에 웅크리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곧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이며 결사체(Sozietät)이다. 이 국가, 이 결사체는 전도된 세계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의식을 생산한다. 종교는 이 세계의 일반 이론이요, 이 세계의 백과사전적 개요이며, 통속적 형태로 된 이 세계의 논리학이요, 이 세계의 유심론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며, 이 세계의 열망이요,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Sanktion)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 종교는 인간적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간적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그 정신적 향료가 종교인 저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을 위하여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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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2 14:32 2014/01/12 14:32

잡다한 생각

일상 2014/01/06 16:10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언제나 신발에 물이 샌다. 바지 가랭이가 젖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지만 축축한 발을 꺼집에 내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아니 아주 좋지 않아서 매번 망할 놈의 신발!이라는 욕이 튀어 나온다. 21세기에도 신발에 물이 새다니, 끔찍한 일이야. 나는 사실 21세기에는 비에 젖지 않는 옷이나 신발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다. 옷은 비옷도 있고 하니 신발은 당연히 물이 새지 않을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런데 아직 물이 새지 않는 운동화는 등장하지 못한 모양이다.

신발에 대해 말하자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 등산화가 그렇다. 18살 처음 지리산을 오를 때 등산화를 신지 못했다. 그냥 학교에 신고 다니는 운동화를 신었다. 눈이나 진눈깨비가 오는 경우에는 비닐로 신발을 싸매고 산 입구에서 2500원을 주고 싸구려 아이젠을 사서 끼웠다. 나는 이렇게 산 아이젠을 두 번 사용한 기억이 없다. 겨울이건 여름이건 산을 오를 때 가장 괴로운 일은 등허리와 머리에서 쏟아지는 땀을 닦는 거였다. 특히 겨울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다 잠시 쉴 때 등허리의 땀이 식으면서 몸이 으쓱한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이야 좋은 등산복이 나왔다지만 나는 여전히 싸구려 등산바지에 그냥 평소 입고 다니는 잠바를 걸쳐 입고 산을 오른다. 요즘은 산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짐이 가벼워진 것 이외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등산화를 빼면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땀을 잘 흡수하고 잘 마르는 등산 내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겨울 산을 오를 때는 단순한 방한이 아니라 전자 장치가 부착되어 몸을 덥혀주고 따듯하게 해 주는 그런 등산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마 곧 그런 옷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로즈 젤라즈니의 단편을 읽는데, 먼 어느 행성의 산을 오르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이런 부분이 있다. "...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 무렵에는 호흡 장치를 쓰고 있었고, 등산복의 전열 장치도 켜 놓은 상태였다."

 

가벼우면서도 전자적인 전열장치까지 갖추고 있는 등산복이 있다면 분명 획기적일 게 틀림없다. 나야 뭐 전문 산악인이 아니니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이 어떤 장비를 사용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10년 전의 장비와 지금은 많이 다를테고 2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그런데 좀 더 편하고 몸의 땀과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그런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는 것이 더 좋을까? 그런 (과학적으로 디자인된) 등산복을 입는 것과 예전처럼 특별한 장비 없이 산을 오르는 게 더 좋을까? 물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오른다는 목적이 중요하다면 사람들은 그런 옷을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걸 등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등산은 산과 나를 맞추는 방식이 중요하다. 추우면 추운 대로 산과 기후에 나를 맞추어야 하고 내가 더 겸손해야 할 거다. 올해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를 세상에 맞추는 것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좀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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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6 16:10 2014/01/06 16:10

멋진 글이다. 경향신문을 읽고 싶지 않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대근과 김철웅 칼럼은 언제나 읽을만 하다. 민주당의 무기력과 무능력은 태생적으로 기회주의적 속성 탓이다. 기회주의자가 되기는 싶다. 그러나 한번 기회주의자는 영원한 기회주의자로 살아남는다. 그 근성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대근이 민주당을 질타하는 그 애정은 어떤 점에서 애처롭게 보인다. 민주당이 산산이 부서져 한알의 밀알이 될지 썩어 문드러질지는 알아서 판단하겠지만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한국 민주주의를 갉아 먹는 벌레처럼 기생할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대근칼럼]민주당, 박근혜 말고 안철수와 싸워라
이대근 논설위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012047095&code=990399&s_code=ao168


민주당은 박근혜 정권이라는 폭주 기관차를 멈춰 세울 능력이 없다. 박근혜는 이명박이 아니다. 불리하다고 속도를 늦추지도 방향을 바꾸지도 않는다. 여론의 힘에 위축되지도 않는다. 박 대통령이 ‘비정상의 정상화’를 다짐한 신년사에서도 그걸 읽을 수 있다. 새누리당은 이념·노선이 아닌 기득권의 결집체다. 기득권을 분배할 능력이 남아 있는 한 정권에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똘똘 뭉칠 수 있다. 고뇌를 모르는 단단한 돌멩이라고 할까. 야당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민주당이 박근혜 정권과의 싸움을 소홀히 했다는 말이 아니다. 민주당, 열심히 했다. 바로 이게 문제다. 아무리 강도 높은 투쟁을 해도 국정원·검찰을 제대로 개혁하거나, 복지 후퇴·공안통치·노조 탄압을 바로잡을 수 없다. 최대의 요구는 항상 최소의 결과로 끝난다. 힘의 불균형이 낮은 수준의 타협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걸 두고 민주당이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했다고 평가한다면 쑥스러운 일이다. ‘폭주를 막지 않고 뭐하고 있느냐’는 시민들의 호통소리가 날 때마다 민주당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쁜 한 해를 보냈지만 한 번도 박수를 받지 못했다. 서운해할 것 없다. 구조대원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구조대원과 결혼하지는 않는다. 아직 민주당은 아쉬울 때 잠시 빌려 쓰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의 폭주가 아니더라도 민주당이 박근혜 정권을 버거워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다. 국정원 개혁의 예를 들어보자. 국정원 개혁은 새누리당과 갈등을 빚는 현안이기 전에 민주당 자신의 문제였다. 노무현 정권 때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으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높아지자 열린우리당은 해외정보처를 신설하고 국내 정보는 분리해 총리실로 이전하고 수사권은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개혁을 중단하고 오히려 국내 정보 수집 강화를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때 개혁했다면 대선개입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나는 못했지만 너는 해야 한다’며 근본개혁을 요구하는 게 말로는 할 수 있겠지만 실행될 수는 없는 일이다.

철도 분리, 제주 해군기지,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 새누리당과 맞선 주요 쟁점들도 본래 민주당 정책이었다. 반대니 재검토니 하며 새누리당을 공격해봤자 민주당 자신의 상처에 소금 뿌리고 과거 실패만 부각시킬 뿐이다. 이렇게 민주당의 과거는 새누리당의 오늘과 겹쳐진다. 그 때문에 새누리당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민주당의 얼굴로 민주당과 상대할 수 있다. 새누리당 상대가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안철수 신당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안철수가 신당 추진기구를 띄우자마자 민주당은 휘청했다. 신당 추진기구가 무슨 비전을 제시하거나 제대로 세력을 갖추고 등장해서가 아니다. 뿌리 뽑힌 민주당이 바람도 없는데 저 혼자 흔들린 것이다. 갈대도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다. 지레 놀란 민주당, 안철수를 공격해보지만 안철수를 때릴수록 낡은 것과 새것의 대결 구도만 부각된다. 안철수 신당은 민주당의 잃어버린 반쪽, 민주당의 그림자다. 밟는다고 밟히지 않는다.

앞에서는 박근혜 정권이 산악처럼 버티고 아래에서는 민주당의 과거가 발목을 잡고 뒤에서는 안철수 신당이 찌르고 있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 소리가 들린다. 당장 이 3중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한다. 첫째, ‘과거’ 탈출이다. 집권 때와 야당 때 말을 바꾸고서는 다시 잘해보겠다는 건 아무 소용없다. 그 말 아무도 안 믿는다. 문재인처럼 변명하기보다 고백과 반성으로 털어내야 한다. 둘째, ‘반대하는 정당’ 탈피다. 무엇을 반대한다는 의사 표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하겠다는 실천의지로 지지를 동원해야 한다. 그 방향이 맞든 그르든 실체가 있든 없든 박근혜 정권은 경제부흥을 한다고, 안철수는 새 정치 하겠다고 한다. 민주당도 이젠 뭔가 하겠다는 게 있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 때 민영화·대운하·세종시 수정을 막는, 뛰어난 ‘반MB 업적’이 있었는데 왜 집권에 실패했겠는가. 박근혜 정권 쫓다가 또 날이 샌다.

셋째, 안철수 신당과의 정면승부다. ‘과거’와 신당 모두 민주당의 부산물이자 민주당의 일부다. 말하자면 그것들과의 싸움은 민주당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건 자기를 바꾸는 문제다. 그래서 더 어렵다. 박근혜 정권과 싸우는 건 쉽다. 현재의 민주당으로도 상대할 수 있고 박근혜 정권에 밀려도 제1야당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신당과의 대결은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든가, 사라지든가 양자택일의 생사를 건 승부다. 여기에서 이겨야 한다. 그게 박근혜 정권과의 대결보다 더 중요하고 더 우선한다. 힘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박근혜 정권이 강해 보이는 건 민주당이 약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안철수와의 싸움에서 강해지면 박근혜 정권과 다시 마주 설 기회도 올 것이다.

구조대원이 자기 도움을 받은 이와 결혼할 수 있을지는 구조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결혼할 만큼 매력적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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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2 22:12 2014/01/02 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