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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 친일 논란에 대한 사학적 접근 / 박종윤

 

청연 친일 논란에 대한 사학적 접근 / 박종윤


1. 들어가며


청연이 개봉하기 바로 전 논란이 되기 시작했던 친일 논쟁의 대중적 관심은 영화 청연이 친일적인 텍스트인가, 혹은 그렇지 아니한가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 논란이 되고 있던(몇가지 의심쩍은 팩트가 있을 뿐, 친일 인사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류 비행사 박경원에 대한 영화라는 것만으로 대중은 흥분했고, 영화 텍스트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보다 민족주의(혹은 nationalism)에 기반한 감정적인 보이콧으로 표출되었다.


위의 사실에서 주목해야 될 점은 청연 보이콧의 시발점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사학계의 많은 이론은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제 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듯, 우리나라 역시도 (개발도상국식) 민족주의적 특성을 띄게 되었다.(이는 서구의 배타적인 nationalism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서구 nationalism의 대표적 악용 케이스는 파시즘, 독일의 나찌, 그리고 일본이다.) 민족주의적 사학은 현재 친일 논쟁에서의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청연의 주인공인 박경원 역시 친일 인사인가, 그렇지 아니한가를 검증하는 작업 중에 있다.


친일 논쟁에 있어서 과거사 청산을 빼놓을 수 없다. 친일 논쟁의 목표는 과거사에 대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의 과거사 청산 기구였던 반민특위는 친미인사이자, 친일적인 기반을 버리지 않은 이승만에게 실질적으로 활동을 제약당하여 친일 인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작업을 끝내지 못하였고, 민주화 투쟁이 전개된 현재는 국민의 정부 이후 다시끔 큰 규모의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허나, 이러한 과거사 청산 - 달리 말하여 친일파에 대한 단죄에 대하여 역사적인 해석이나 접근은 분분한 상태이다. 크게 식민지 수탈론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 관점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적 관점이 대치되고 있는 순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탈민족, 탈근대주의적인 관점 역시 포함될 수 있겠다. 본 글에서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되어 사학계의 각 입장을 정리하고 청연 친일 논란이 진행되던 당시 대중적으로 그다지 이야기되지 못했던 텍스트 자체에 대한 사학적인 논평을 첨부한다.


2. 민족주의 사학과 근대주의 사학


기본적으로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전 6권으로 출간되었던 논문 모음집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은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적인 텍스트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미군정 시대를 지나 근현대사까지 논하고 있는 이 논문 모음집은 80년대 민주화를 이끌었던 민주세력, 좌파의 당위성에 대한 역사적 근거와 토대를 만들었다. 이 중 청연과 관련되어 주목해야 될 부분은 ‘식민지 수탈론’이다.


식민지 수탈론의 요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 나아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시대별로 조목조목 나누어 비판한 바 있는데, 식민지 시대 말기의 문화 통치 역시도 비판받는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의도했던 바가 한국인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전락시켜 실제로 일본인과 동화되면서 궁극적으로는 군인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세뇌시킨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던 것은 낙성대 연구소의 저작물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다. ‘인식’이 대표적인 좌파 운동의 역사 교과서가 되었던 것과 같이 ‘재인식’은 신보수주의 운동 세력인 뉴라이트의 필독서 중 하나가 되었다. ‘재인식’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는 기존의 ‘식민지 수탈론’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면서 ‘우리나라에 자본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일본이고, 실제로 식민지 시대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근대화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또한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행위범과, 일제 시대의 고위 공직자에 불과했던 당연범은 구분을 하여 처벌해야 됨을 주장한다.


‘재인식’의 등장은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논쟁 포인트를 던졌다. 심지어 ‘인식’의 저자 중 한명이었던 경상대의 장상환 교수는 다시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재인식’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재인식’의 사료들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함과 동시에 ‘식민지 수탈론’을 보다 강화하기도 하였다. ‘인식’의 민족주의적, 민중주의적 관점을 부정하며 만들어진 ‘재인식’은 그럼에도 몇 가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비판받는 대목은 ‘재인식’ 논문 기저에 깔려있는 근대주의이다. 근대의 우월성을 신봉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는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서술한 ‘재인식’은 결국 원래의 의도인 중립적인 역사, 또는 탈정치적인 역사를 보여주려는 시도와는 그 태생부터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되어 조금 더 근원적인 물음으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과연 근대화이고, 역사적인 발전인가도 물을 수 있다.


3. 청연의 텍스트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 규정했다. 어떠한 텍스트에서 매체로 매개할 때 원판 텍스트는 본래의 성질에서 전혀 다른 유형의 재구성된 텍스트로 변하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회자되는 ‘재현의 정치학’은 그래서 유효하다. 혹 그 것의 원본 텍스트가 실화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청연이 기본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장르는 전기 영화겠지만, 윤종찬 감독은 그 방법론으로 멜로 영화의 틀을 택한다. 멜로 영화의 틀을 택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가상의 인물인 한지혁과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고, 또한 가상의 조선적색단 사건을 가미한다. 조선적색단 사건이터지면서 비교적 밝은 톤의 성장 영화, 혹은 따듯한 감성으로 일관하던 드라마가 순식간에 급반전하는 것이 과연 성공적인 시도였는가는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그 후의 드라마가 파국으로 치닷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즉, 극화의 과정에서 ‘태생적인 비극성’이 포함되었다는 증거이다.


실제 사료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선적색단 사건과 한지혁의 존재는 영화의 큰 축을 구성한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 자체에 ‘태생적인 비극성’이 부여됨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되는 문제이다. 영화는 인물에 대하여 줄곧 좋게 말하면 중립적인,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모호한 - 회피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박경원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인듯한데, 결국 파멸로 이르는 큰 드라마의 줄기에 따라 자칫 실존적 고민과 시대상의 한계로 인하여 자아의 완성을 위하여는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협조, 혹은 적극적인 협력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어떠한 매체에서 역사(=텍스트)를 재매개하는 과정에서 텍스트를 매체의 특성에 맞게 일정부분 재구성하는 것은 매개의 기본 속성이다. 그와 동일한 선 상에서 역사를 매체화 시킬 때 정치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 역시 위에 서술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연결되어 이해될 수 있다. 또한 E.H.Carr의 해석주의 역사관를 인용하여, ‘역사란 사회와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된다.’라는 틀에 기초하여 어떠한 예술적인 결과물(혹은 텍스트)가 ‘누구(어떤 계급,혹은 계층)를 위하여 서술된 텍스트’인지 정치적인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다.


같은 기준을 청연에게 적용시켜 청연이 어떠한 텍스트인지, 나아가 청연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용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결과만을 논하자면 청연은 불행히도 그 재현의 방식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근대주의적 사관의 입장을 취하거나, 위의 서술은 하지 않았지만 회색 지대 속에 있는 듯 하다. 나아가 청연의 수용자에게도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준다.(이는 포커스 그룹 연구의 기록에 포함되어 있듯 ‘당시에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일반인의 토론과 답변에서도 잘 드러난다. 청연을 본 토론자 모두 개인의 성취를 위하여 친일을 택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청연은 분명 미학적인 관점에서 잘 짜여진 드라마이고, 한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자아 실현을 멜로의 방법론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구현한 수작이다. 하지만 그 텍스트가 어떠한 정치적 지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다시 한번 고민해보아야 한다. 청연의 텍스트는 일본을 미화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당시의 친일 행위를 일정부분 변호해준다.(이는 실제로 박경원이 개인의 성취를 위하여 일제에 적극적 협력을 시도했다는 혐의와 결부될 때 더욱 의혹을 뿌리치기 힘들어진다.) 감독의 의도는 그렇지 않을지언정, 중립적이거나 회색적인 입장을 취하려던 텍스트가 결국은 근대주의적 사관의 옹호적이 된 부분에 있어서는 최소한의 책임이 있다. 영화의 텍스트를 인지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보이콧은 공정하지 않은 처사였지만, 영화의 텍스트 역시 최소한의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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