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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문화로서의 한국 인디씬의 태동과 발전 / 박종윤

하위문화로서의 한국 인디씬의 태동과 발전

- 크라잉넛부터 노브레인까지, 펑크씬에 중점을 두어


 

1. 태동과 발전


1970년대 말, 영국 노동자 계급의 몇몇 청년들은 마치 일종의 선언같은 노래들을 발표한다. “Anarch in the U.K.(영국의 무정부상태)”, “God save the queen(신은 여왕을 보호한다)"라는 제목의, 형편없는 연주력과 직선적인 록 스타일, 거기에 신경질적인 목소리. 그렇게 4인조 Sex Pistols는 펑크락의 원형을 만들었다. 영국의 매스미디어와 부르주아들은 분노했으나 청년들은 열광했다. 공연마다 폭력사태가 일어났고 그 들은 점점 더 유명해져갔다. Sex Pistols를 위시한 초기의 펑크락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허무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며, 무엇보다도 거침없이 직설적이었다. Sex Pistols의 해체는 우발적이며 감정적이었고, 베이시스트였던 Sid Vicious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다. 과히 펑크적인 말로였다.


1990년대 중반, 홍익대 앞에서는 쉽게 눈치챌 수 없지만 유의미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기존의 우드스탁 류의 락 음악이 있는 술집들과 가게 한 쪽 구석에 밴드들이 연주를 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술집들이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고, 그 구석에서 영미권의 얼터너티브락 혹은 모던락을 카피하여 연주하는 밴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Nirvana, Pearl Jam, R.E.M., U2, Duran Duran, Pet shop boys, Clash, Sex Pistols, Velvet Underground, My bloody valentine 등은 이들의 좋은 역할 모델이었다. 이는 이전의 한영애, 한상원 등 신촌 언더그라운드로 대표되는 블루스 진영이나, 80년대 헤비메탈과 쓰레쉬메탈의 늪에서 허우적대고있던 시나위, 블랙홀, 블랙 신드롬 등의 헤비메탈 진영과는 분명 다른 흐름이었다. 지금은 어느새 중견 인디밴드가 된 언니네 이발관, 코코어(당시의 이름은 버거킹), 노브레인, 크라잉넛, 델리 스파이스 등의 밴드들이 DRUG(지금의 스컹크헬 자리)라는 ‘최초’의 클럽에서 연주를 하면서 자작곡을 쓰기 시작했고, 이는 1996년 5월 명동과 홍대에서 열린 ‘스트리트 펑크쇼’로 대중에게 광범히 하게 노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펑크씬 역시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을 필두로 최초의 씬을 형성해가기 시작한다.


한 때 주류 언론에서도 펑크락, 모던락 등 국내의 인디 음악과 홍대의 인디 씬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며 경쟁적으로 취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본의 원초적인 속성이랄까, 투자한 만큼의 수익성이 보이지 않았을 때 매스미디어는 어느새 등을 돌렸다. 그 뒤로도 최소한의 관심을 선심쓰듯 던져주었지만 자신들이 상품으로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믿는 많은 인디밴드들은 미디어와 쉽게 친화되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몇몇 밴드(예를 들면 자우림, 윤도현 밴드)들은 자본에 완전히 편입되기도, 또 어떤 밴드들은 공사장에서 막일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언더그라운드의 생활로, 그 중간의 어정쩡한 몇몇 밴드들은 또 그런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전업 음악인으로 살아가던, 생계형 부업과 음악을 병행하던, 혹은 음악을 포기하던지간에 어찌되었건 삶은 계속된다.


2. IMF와 공황, 그리고 크라잉넛


한국에서의 최초의 인디 밴드 히트곡은 노브레인의 ‘바다 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것은 최초로서의 의미만이 존재한다. 진정한 히트곡의 정의가 동시대를 같이 한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다는 의미라면 최초의 히트곡은 마땅히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로 돌아가는 것이 순서일 듯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공황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맑스의 자본론을 굳이 펴보지 않는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최소한 서민들은) 예상할 수 없었던 공황은 결국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아시아 전지역을 덥친다. 이는 한국 역시 피해갈 수 없었는데, 투기 자본의 비윤리적 태도로 말미암은 공황(원인 중 일부는 재벌기업에게서 촉발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결과론적으로는 외국 투기 자본에게 분명한 책임이 있다.)은 초유의 구조조정 아래서 수많은 실직자, 실업자, 명예퇴직자들을 양산해내었고 사회는 언제 빠져나올지 모르는 불황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필연적으로 사회 전반에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와중 1998년 드디어 크라잉넛의 첫 번째 앨범 ‘말달리자’가 발매된다. 단순한 리듬과 역시 단순한 구조 그리고 위악적인 보컬과 가사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곡은 그 전까지의 많은 대중적인 음악적인 문법들을 무시한 형태였다. 그럼에도 따라 부르기 쉽고 재미있으며 파격적이었던 이 곡은 금새 대중에게 전파되기 시작한다.(같은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모던락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 이석원은 대중 음악 웹진 가슴과의 인터뷰에서 ‘말달리자’의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응원가와 비슷한 속성을 논하며 크라잉넛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존경을 드러낸 바 있다.)


근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현실은 복잡하고 강압적이며, 노동을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의 소외를 겪게 만드는데, 그런 환경일수록 필연적으로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질 수 밖에 없다.(한국이 90년대 초중반의 초보적인 PC 통신 환경에서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게 된 시기도 우연치 않게 IMF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는 물론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벤처를 육성한 탓도 크긴 하다.) 지금에서야 보면 분노의 ‘목적지’가 불분명한 완성도 높지 않은 가사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대중들의 정서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1998년 1집의 성공과 2집에서의 발전을 거쳐 크라잉넛의 최대 절정기는 2001년의 3집까지 였는데, 그 뒤로 군대가기 전 2002년에 4집,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후 2006년에 5집을 발매했지만 그 판매량과 인기는 초창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 시기는 IMF 구제 금융 시기와 묘하게 겹치는 데 구제 금융 시기가 끝나는 2001년, 크라잉넛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게 된다. 1998년 매스미디어에 의하여 경쟁적으로 보도되던 인디 밴드 관련 기사들이 ‘예전 같지’ 않아진 것 역시 이때 쯤이었다.


크라잉넛이 수많은 펑크 밴드들 중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음악을 규정하는 태도에서의 차이였다. 클럽 DRUG을 중심으로 한 펑크 밴드들이 대부분 무정부주의적이고, 저항적이며, 공격적이고,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이며 위악적인 음악을 하는 와중에 크라잉넛은 활동초창기부터 펑크락으로서는 독보적으로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접근을 시도하였다.(1집의 갈매기, 펑크걸 등의 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씬의 다른 밴드들에 비하여 비교적 덜 저항적이었는데 음악에 아주 심한 욕설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고, 저항적인 면모를 보이되 그 대상은 불분명한 형태를 띄었고(노브레인 등의 밴드가 인디 레이블 문화 사기단을 조직하고 Anti-서태지 운동을 전개한 것이나, 매스미디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정치적으로는 좌파적이었을지 몰라도 정작 음악은 다분히 축제적이었으며 카니발적이었다.(여기서의 카니발은 사회에서 열어놓은 안전한 일탈로 정의한다.) 이러한 크라잉넛의 음악은 경제적으로 힘겨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대중, 그리고 대안적인 방향에서 수익을 창출하되 권력에 강한 위협이 가해지는 것을 꺼려하던 자본 둘 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졌다. 크라잉넛의 의도와는 무관할지 몰라도 대중과 자본은 그들을 적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그 들은 ‘예전 같지’ 않아 졌다.


2002년 군입대 직전 크라잉넛과 아웃사이더에서 가진 인터뷰를 첨부한다.


(전략)


지 - 성격들이 굉장히 낙천적이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음악에서는 젊은이의 절망을 많이 노래하는 것 같은데요, 요즘 세대가 이전 세대에 비해 절망적이라고 보십니까?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한 - 예전 세대는 잘 모르겠구요. 일단 저희 노래예요. 저희 노래를 하면 우리 세대들이 공감을 하는거죠.

김 - 예전 세대는 절망할 틈도 없었잖아요.(웃음)

박 - 나름대로 고민이 있지 않겠어요.

지 - 가사를 보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요.

혁 - ‘오늘을 잘 살아가자’는 말이 아닐까요? 사실 저희 모토가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자’.

김 - 오늘 못한 일은 내일로 미루자.

혁 - 나는 오늘 할 일인데.

김 - 덧붙이자면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런거죠.(웃음)

혁 - 저는 ‘내일은 해가 뜬다’ 이런 식보다는 ‘오늘이 있다’가 더 좋아요.

한 - 지금을 열심히 살자는 거죠. 어차피 포기하고 허망해지면 좀 편하거든요.

지 - 좀 짓굳은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란 가사가 많이 나오고, 젊은이들의 절망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크라잉 넛은 음악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성공해나가고 있는데, 절망감에 공감하면서 동질감을 느낀 팬들이 나중에 정서적인 배신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계속 희망이 없는데, 알고 보니까 크라잉 넛은 성공해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요.

혁 - 그렇게 많이 성공 안했는데.

한 - 그래도 저희는 약간은 소외된 사람들의 애환을 노래하고 싶어요.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잘되는 건 좋은거고, 아픈 사람들을 달래 줄 사람은 필요하잖아요.

혁 - 거짓말 하면서 음악하긴 그렇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쓰는거죠.

한 - 그렇다고 우리가 가사에서 ‘우리는 노동계급이다’라고 한 적도 없고, 그래서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후략)

3. 전향한 펑크락, 노브레인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초기의 노브레인은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등의 모던락 밴드는 물론 같은 펑크 씬의 크라잉넛 등의 밴드들에 비해서도 좀 더 위악적이고, 저항적인 모습으로 소개되었다. 이성우(보컬)과 차승우(기타)를 축으로 노브레인은 비록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음악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달성해나갔다. ‘바다 사나이’와 ‘청춘 98’이라는 명곡 필두로 서서히 씬 내부에서 입지를 굳혀가던 노브레인은 2000년 여름 첫 번째 Full-length 앨범이자 2CD로 제작된 그네들의 최고작 ‘청년폭도맹진가’ 앨범을 내놓게 된다. ‘난투편’과 ‘청춘예찬편’으로 나뉘어진 이 데뷔 앨범에서 저항적인 메타포와 진일보한 확장된 사운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스카, 레게적인 요소를 차용한 것도 그렇지만 주 멤버였던 차승우(기타)가 군대에 갔다옴에 따라 ‘군가’적인 요소가 적절히 차용된 면이 다른 밴드들과의 분명한 구별점이었다. 가장 수직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국군 군가의 요소를 음악에 심어놓아 미학적인 역설을 꾀한 것이다.


밴드는 2번째 앨범 'Viva No Brain'을 내놓을 때까지 말 그대로 ‘잘’ 굴러갔다. 일본제국기를 찢는 퍼포먼스 등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마니아에서 마니아로, 노브레인의 음악적 커리어는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갔다. 하지만 변화는 갑자기 일어났다. 노브레인 음악의 거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기타리스트 차승우가 2002년 갑자기 밴드에서 탈퇴한 것이다. 그 다음해 2003년에 나온 노브레인의 앨범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앨범이었다. 이에 대중 음악 웹진 가슴의 음악평론가 김학선씨의 2003년 리뷰를 첨부한다.


(전략)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차승우의 흔적을 노 브레인이라는 이름에서 하루빨리 털어 내고 싶었더라도, 또 그게 당연하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저 한번쯤은 신나게 달려주기를 원했고, Oi!!라는 함성을 한번쯤은 더 들려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들은 차승우의 흔적과 함께 이 모든 것들도 지워버렸다. 이제 이 앨범에서 더 이상 노 브레인만의 것이라 믿었던 분노와 에너지는 들리지 않고, 가슴 벅차던 Oi!!의 함성이 끼어들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건들대던 '동네 노는 애들'은 이제 '반듯한 모범생들'이 되었고, "다 죽여버리겠어"라고 외치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희망'에 대해서 노래한다.


(중략)


물론 이는 이들의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하며 예전의 앨범들을 다시 꺼내 듣고, <청춘구십팔>과 <잡놈패거리>, <어둠 속을 걷다>를 그리워하는 이의 푸념일수도 있고 미련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 브레인은 변했다는 것이고, 나는 이런 식의 변화에는 쉽게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깊은 마음 속의 투혼을 목 터질 듯 불러보리라"던, "이 맘 영원하리라"던 노 브레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슴이 아프다.


분노와 에너지가 거세된 노브레인의 음악에 남아있는 것은 재기발랄함과 전에 없었던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였다. 많은 음악 매니아와 팬덤은 실망했고, 또 떠나갔다. 더 이상 노브레인에게 저항과 분노는 없었다. 그 사이 노브레인은 빠르게 라인업을 정비하고 음악적인 스타일을 바꾼다. 이전의 군가적인 향취, 문어체의 가사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새로운 기타리스트와 함께 마치 80년대 본조비가 그랬듯, Pop metal 혹은 LA metal적인 펑크락을 만들기 시작한다. 3.5집의 첫 곡 제목은 ‘넌 내게 반했어’, 4집의 첫 곡 제목은 '미친 듯 놀자‘ 였다. 기존의 팬덤은 이를 일종의 음악적인 선언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성우(보컬)의 위악적인 보컬은 그대로였지만 이미 노브레인은 이 전과는 전혀 다른 밴드였다. 슬프지만 진실(Sad but true)이랄까, 노브레인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3집의 'Little baby'가 소폭의 히트를 기록한 후였다. 3.5집의 ’넌 내게 반했어‘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끌게 된 노브레인은 이제 노래방에서도 즐겨 불리는 레퍼토리가 되어 가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제 노브레인을 듣지 않는다.


최고작이라고 불리웠던 1집 ’청년폭도맹진가‘가 나왔던 2000년의 겨울, 12월 15일에 웹진 가슴과의 인터뷰를 첨부한다. 2006년 현재의 노브레인을 보며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략)


박준흠 : 앞으로 나올 2집에 대해서 얘기를 해달라.

※ 2집 [viva No Brain]은 2001년에 발매되었다.


차승우 :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마음을 비워 놓고 있는 상태이다.

이성우 : 계속 곡 만들고 그러고 있다. 지금 당장 얘기할만한 건 없다.

차승우 : 많은 걸 해보고 싶다. 물론 지금까지 노브레인의 모습을 견지하긴 하겠지만 점점 변해갈 것이다. 더 정제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박준흠 : 바라건데, 노브레인은 지금 보여주는 '분노'를 삭이지 말았으면 한다. '이 사회(시스템)에 만족하는 노브레인'이란 문구는 생각하기만 해도 너무 실망스럽다.


차승우 : 원단이 다 사회부적응자라 그럴 일은 진짜 없을 것이다.

이성우 : 아마 세계종말이 온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웃음)


박준흠 : 앞으로 노브레인은 세상과 어떻게 맞서 싸울 생각인가?


차승우 : 별로 맞서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고...(웃음), 우리는 그냥 이 병들어버린 사회 안에서 기생하는 기생충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게 계속 기생을 하면서 소소한 독설을 내뱉는 게 우리의 일일 것이다.


4. 헤프닝, 1997년 MBC 삐삐 롱스타킹 사건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기본 속성은 최대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다.(최소한의 투자의 효율성보다는 최대한의 효과에 축이 있다.) 그러한 속성으로 인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주류 문화는 기본적으로 親자본적인 속성을 띄게 되지만, 검증된 상업성만 제시가 된다면 叛자본적인 하위 문화 역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하위문화에서도 자본의 발전에 결정적인 균열을 가할 수 있는 텍스트들은 수용하지 않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는 자본의 중심부로 갈수록 심해지고 반대로 자본의 주변부으로 갈수록 덜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몇몇 사례로 증명된다. 자본에 종속적이지 않은(혹은 종속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하위문화를 가차없이 내친 경우를 우리는 1997년의 MBC 삐삐 롱스타킹 사건, 그리고 2005년의 MBC 카우치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삐삐 롱스타킹은 박현준, 강기영(달파란), 권병준(고구마)로 이루어진 남성 3인조 밴드로서 잘 알려진 삐삐 밴드의 후속격인 밴드이다. 이 중 박현준과 강기영은 H2O 등의 밴드 활동으로 90년대 초를 전후하여 헤비 메탈 계에 몸 담기도 하였다. ‘안녕하세요’, ‘딸기’ 등 진취적인 포스트 펑크 음악과 이윤정의 생짜로 짜내는 듯한 곤혹스러운 발성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삐삐 밴드는 1집 ‘문화 혁명'과 2집 ’불가능한 작전‘을 끝으로 해체한다.(3집 붕어빵은 정규 앨범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어 논외로 한다.) 당시의 삐삐 밴드와 삐삐 롱스타킹이 인디씬에 머물러있었다고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으나 그 후 멤버들 각각의 활동(스타일리스트 활동한다는 이윤정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는 영화음악, 일렉트로니카 등 인디 씬 내에서 다양한 위치를 점하였다.)와 밴드의 키치적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당시의 인디 씬의 몇몇 조류와 비교적 맞아떨어졌다는 데에서 인디 씬과의 연계성을 찾을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공교롭게도 삐삐 롱스타킹이 활동을 시작한 후 첫 방송이었다. ‘바보 버스’를 ‘립싱크’하던 박현준이 카메라에 생방송 임에도 불구하고 침을 뱉은 영상이 전국으로 방영되었기에 그 들은 1년간 모든 방송국에 방송 출연을 금지당했다.(방송 출연 금지 기간 1년이 지나기 전에 삐삐 롱스타킹은 해체하였다.) 침을 뱉은 행위 외에도 생방송 무대에 ‘우리는 지금 립싱크 중입니다’라는 현수막을 설치한다던지 마스크를 착용한다던지, 또한 발차기를 하는 등의 행위가 구설수에 올랐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KINO의 1997년 4월호에 실린 삐삐 롱스타킹의 인터뷰는 참조할만한다.


(전략)


KINO : 이번 방송 금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구마 : 우리(달파란과 고구마)는 몰랐는데, 나중에 차타고 집에 가는데 매니저한테 전화가와서 알았어요.

달파란 :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 사람들이 괜히 지나치게 생각해서는... 1년씩이나 못하게 하냐? 참 답답한 사람들이죠, 뭐. 무례하고 불손하고 도대체 이럴수가, 동방예의지국에서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한 것 같아요.

KINO : 박현준 씨는 이에 대해 어떻게 발하나요?

달파란 :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KINO : 박현준 씨, 침은 왜 뱉으셨어요?

박현준 : 그건 잘해보려다가 그런 거예요. (일동 웃음) 멋있게 해보려다가. 비디오에 그런 것들이 나오잖아요? (목소리 톤이 바뀌며) 인기가요 50에서 카메라가 자꾸 얼굴로 와요. 내 얼굴에만 자꾸 가까이 와서 자꾸 그러잖아요. 아, 그러면 뭔가를 해야 되겠구나(웃음), 그래서 침을 뱉은건데...

KINO : ‘가요계에 침을 뱉어라!’로 생각해도 되나요?

박현준 : 가요계에 침을 좀 뱉어야해요. 우리도 가요지만, 꿈이 메말라버린 것 같아요. 지저분한 것 같고, 구질구질하고... 나도 지저분하지만.

KINO : 앞으로는 라이브 위주로 활동하겠네요?

달파란 :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고구마 : 홍보를 하는 것은 의미를 만들어 가는 작업인 것 같아요. 이런 의미도 있다, 저런 의미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꾸 의미 부여가 되는 건데, 어쨌거나 방송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조금 중요한 의미 부여 수단을 잃은 것 같거든요. 그래도 뭐 그다지 그렇지도 않지만, 공연 때 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걸까 생각을 해봤어요. 1,2,3잡애 비꼬는 것이나 자기 파괴적인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뭘 알고 좋아하나’ 하는 기분이 되나봐요.


(후략)


당시 대중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는데(당시의 대표적인 통신 ‘나우누리’의 갈무리된 웹 문서를 참조), 이는 후의 카우치 사건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분명한 팩트는 삐삐 롱스타킹이 1년간 출연을 정지당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달리 말하면 방송사가 권위를 가진, 성역으로서 기능함을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저항적인 락커의 모습은 미디어에서 줄곧 소비되며 수익을 가져다주는 통로 중 하나로서 기능하지만, 자본 자체를 원천 부정(립싱크에 대한 적극적인 폭로)와 헤게모니 파괴 행위(카메라에 침을 뱉음)에 대해서는 대중적인 노출을 봉쇄하는 자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2005년의 카우치 사건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표상된다.


5. 불행한 시간들, 2005년 MBC 카우치 사건


오버 그라운드에서 다시 인디 씬으로 위치를 이동한 삐삐 롱스타킹의 멤버들과 다르게 럭스(RUX)는 인디 씬의 태동과 함께한 노장 밴드다. 1996년 결성되어 근 10여년간을 이어온 밴드는 크라잉넛, 노브레인, 레이지본 등 초창기의 펑크 밴드들이 오버 그라운드로 올라간 경우와는 상반되게 자체적으로 제작, 유통 경로(1998년 스컹크 레이블 창립)를 만들고 공연, 생활 공간(2002년 스컹크헬 개장)을 만듬으로서 펑크씬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다.(펑크 씬의 경우 인디와 오버의 경계가 모호하여 크라잉넛, 노브레인의 멤버들이 종종 스컹크헬에 보이곤 한다. 방송을 타느냐, 타지 않느냐의 차이일지도.) 럭스는 음악적으로는 오이 펑크, 정치적으로는 중립 혹은 중도를 지향하는 밴드이다.


사건은 역시 럭스가 첫 방송을 하는 와중에 일어났는데, 그 주체가 럭스가 아닌 (무대에 댄서 자격으로 올라온) 밴드 카우치의 일원 2명이라는 점이 삐삐 롱스타킹의 경우와 다르다. 럭스가 ‘지금부터 끝까지’를 연주하는 와중 무대에 올라와있던 (럭스의 친구들인) 댄서들 중 카우치가 바지를 벗고 하반신을 노출한 것이 사건의 전모이다. 후에 ‘생방송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증언한 카우치는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럭스와 함께 방송이 끝난 직후 연행되었다.


삐삐 롱스타킹 사건이 표현의 자유와 공중파의 신성 불가침에 관한 찬반 토론이 강하게 맞붙는 형국이었다면, 카우치 사건은 이와는 다르게 사회 전반적인 분노와 일부의 안타까움으로 나타났다. 사회의 분노는 각 입장마다 다른 관점을 보였는데, 가령 페미니즘 진영의 남성 성기의 기호화, 일반 여성들의 성적 수치심, 공중파의 신성 모독 등이었다. 특이하게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인디 밴드들의 비난도 있었다. ‘인디 밴드들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통로를 모두 막아버렸다.’는 힐난이었다. 음악 평론가 박준흠(인디 음악 웹진 가슴 운영)씨는 ‘음악 외적인 부분으로 음악 자체가 평가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의견으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또한 일부 펑크락 매니아들은 연행 후 대국민 사과를 접한 후 ‘좀 더 뚝심있고 과격하게 밀고 나갔어야 된다.’라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2005년 7월 30일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10월 26일에 인터넷 신문 프로메테우스와 럭스의 리더 원종희 씨와 나누었던 인터뷰의 일부를 가져온다.


(전략)


프로메테우스 : 원종희 씨가 펑크락 뮤지션으로 살아온 10여 년의 세월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한국 땅에서 펑크뮤지션을 살아간다는 것은 ‘난 바보입니다’하고 이마에 새겨놓고 사는 것과 같다.


원종희 : “저도 그냥 한국의 평범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저 놈들이 뭘 알겠어?’ 이런 식이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넌 그런 음악이나 하니까 바보야’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처음에는 ‘난 바보 아니에요’하면서 부정을 하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그래, 나 바보다’하게 되죠. 대부분의 펑크밴드들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음악캠프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엉뚱한 이야기를 유포시키면서 몰아붙이는 데는 뭐라 대응해야 할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래요. 우린 바보고 아무 생각 없습니다. 머리 비어서 그랬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 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프로메테우스 : 음악캠프사건으로 대화가 진행되자 원종희씨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방송에 임했던 자신들도 문제지만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로 취급받은 것은 정말 ‘X 같고 화나는 일’이라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원종희씨는 펑크음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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