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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까마귀떼 / 회기동 단편선

 

 

organ, guitar, vocal, recording by 박종윤

mixing by 허민

recording at 朴귤

mixing at 찜통

 

07 1 4 ~ 07 1 7

 

검붉은 깃털이 날린다 푸드덕

낮에도 보이지 않도록 까맣게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검은 새

공장 불빛으로 모인다 푸드덕

 

빨간색 날개를 달래

공장의 불이 꺼지면

노란 가방을 살거야

공장의 문이 잠기면 날아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른다

누군가 잘리는 소리가 푸드덕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검은 새

공장 불빛으로 모인다 오늘도

 

빨간색 날개를 달래

공장의 불이 꺼지면

노란 가방을 살거야

공장의 문이 잠기면 날아가 이 도시를 넘어

바람처럼

폭풍처럼

바람처럼

일어나 난 불온한 꿈을 꾸었어

우리가 차고 있는 족쇄를 봤어

까맣게 기름투성인 날 봤어

일어나

 

붉은 피를 흘리는 까마귀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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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고찬용 [After ten years absence]

 

 

커버 아트가 제 취향이 아니라서 향 음악사에서 인디 음반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나온 것은 보았지만, 그냥 바로 넘겼습니다.(심지어 고찬용 씨의 앨범인 줄도 몰랐습니다. 고찬용 씨가 왜 인디 음반에...) 연말까지도 고찬용 씨의 신보가 나온 것을 몰랐었는데, 결산할 때가 되니 -물론 웨이브에서는 일언반구 없었지만- 이곳 저곳에서 좋은 평가가 쏟아지더군요. 그래서 새해가 밝은 저녁, 향음악사로 달려가 예전부터 사고 싶었던 코스모스의 [One and Only]와 함께 두장을 계산하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첫 음반을 플레이 한 후 몇 곡이 지난 후 들었던 느낌은 '좋다'보다는 '당혹감'이었습니다. 90년대의 한국 가요적인 느낌은 강하지만 그 멜로디의 작법에 있어서는 어떤날에서 루시드폴로 이어지는 축이나, 유재하의 축 어느 쪽과도 닮아있지 않습니다.(김현철의 초기 음반들이 간혹 생각나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들의 음악들보다도 좀 더 고집있어진 모습인데, 분명 한국적인 도회감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멜로디의 전개가 (관행에 비해) 계속 전복되면서 귀에 꽃히는 트랙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몇 번 더 플레이를 시킨 지금에서야 귀에 들어는군요.

주목할 점은 이 음반의 모든 연주와 노래, 심지어 믹싱까지도 온전히 고찬용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연주에 있어서는 전문 세션이 한 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앨범 전반을 끌어가고 있는 미디 시퀀싱 역시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고, 무엇보다 고찬용에게 딱 맞는 옷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몇몇 문제점도 발견됩니다. 주로 사운드 상의 문제인데, 마스터링을 외국에서 해서 그런지 사운드는 땅땅하고 꽤나 알차긴 하지만 보컬이 다소 작게 들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연주의 큰 볼륨과 특유의 멜로디 작법에 뭍혀 발음 역시 알아듣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가사가 선명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또한 메인 보컬이 작은 데 반하여 코러스가 다소 큰 느낌이라 약간 아쉬움을 보여줍니다. 몇몇 곡에서는 베이스가 조금 더 강조되었으면 좀 더 리드미컬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찬용의 [After ten years absene]이 지금에라도 출시된 것은 반갑습니다.(심지어 앨범명이 10년의 부재라니...) 몇몇 문제점은 그 노래들을 듣다보면 심지어 사소하게 치부할 수도 있는 정도이고, 무엇보다도 들으면 들을수록 귀에 걸리는 곡이 많아집니다. 툭하 앨범의 중반부에 좋은 트랙들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물론 초반의 [스물셋]도 참 좋지만, 앨범의 백미는 단연 가장 중앙에 포진되어있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디 시퀀싱한 드럼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이 팽팽한 것도 훌륭하고, 잘 정제되어있는 듯한 사운드가 이 곡에서만큼은 터져줍니다. 그 뒤로 [값진충고]와 [겨울이 오네]로 이어지는 플로우 역시 나무랄 데 없습니다.(앨범 말미는 다시 앨범 초반부를 듣는 느낌인데, 나쁘지는 않지만 좀 더 나은 대안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듭니다.)

음반을 몇 회 플레이한 지금 갑자기 이런 물음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고생해서만든 음반이 얼마나 팔릴 수 있을까?" 인디 음반을 들으면서도 항상 생각하는 문제이지만, 낯선 사람들을 기억하며, 또 10년 만의 첫 솔로 앨범이라는 고찬용의 신보를 들으면서 유독 저런 생각이 머릿 속을 왔다갔다 합니다. [스물 셋]이나 [길]이라면, 그리고 다른 트랙들 역시 정성이 가득한 것이 눈에 선하고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결과물들일텐데. 같은 낯선 사람들의 보컬 중 한 명이었던 이소라가 솔로 데뷔를 한 후, 고찬용은 그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뱀발. 같이 구매한 코스모스의 2집 [One and Only]는 제게는 오히려 1집의 [Standard]보다 와닿지 않군요. 물론 사운드나 프로듀싱이라는 면에서는 1집보다 훨씬 나은 점이 많기는 하지만...  제가 코스모스에게 기대할 수 있었던 스타일은 [나쁜 피]나 [Starless Man]이라던지의 음악인데... 1집의 사운드는 분명 원치않은 방향으로 보이나 그 곡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2집도 계속 들어봐야겠군요. 하기는 [나쁜 피]는 정말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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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추석 1 / 회기동 단편선

 

 

 

melodian, guitar, vocal, chorus, recording by 박종윤

mixing by 허민

recording at 朴귤

mixing at 찜통

 

06 12 31 ~ 07 1 3

 

매년 초가을 새벽께 눈 비비며

평소엔 입지도 않던 정장을 입고

아직 졸린 눈 깨지도 않은 얼굴로

방문을 가만히 밀면

누가 화낼까 어느새 휘어지게 차려진 과일이며 백숙에 고기산적

아직도 바쁜 주방을 뒤로 하고 차례가 시작된다

 

술잔 세바퀴 크게 돌리고

저분 탁탁 치면

언제나같이 병풍 뒤에서 5년전 돌아가신 어머니 나오신다

 

오래간만에 온가족 다모여서 그동안 고생밥을 맛나게 먹는 시간

실컷 떠들다 문득 맞은 편 보니 어머닌 오간데 없네

 

아무 말 없이 어데로 가신걸까

혹시 내 앞에 당신은 알고 있나요

꿈에서 본게 아니냐 키득거리며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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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미스 다이어리(2006, 김석윤) 그대로 있어주는 '미자'의 미덕 / 박종윤

[영화] 올드미스 다이어리(2006, 김석윤)

 

그대로 있어주는 '미자'의 미덕 / 박종윤

 

 현재의 팬덤 문화는 문화 상품에서의 근대적 대량 생산-소비 패턴이 형성된 이후로 쭈욱 존재해왔지만, 최근에 한국 영상물에서 나타나고 있는 팬덤의 형상은 이전까지의 한국에서의 팬 문화와는 분명 다르게 보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하이퍼 텍스트로 이루어진 가상현실로 초월하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쌍방향적 매스미디어(매개체)'의 등장으로 소비자는 어느새 상품을 소비하는 것 뿐만 아닌 다시 재생산하는 역할까지를 맡게된다. 마케팅 계에서는 이미 프로슈머(Prosumer = Producer + Consumer)라는 개념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개념이다.

 

 이는 2006년 초 개봉당시 역대 흥행 순위 1위를 달성했던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에서도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데, 당시 그다지 많은 개봉관을 잡지 못한, 그리고 프로모션 활동에도 같이 개봉했던 타 영화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점차 개봉관을 늘려가고, 결과적으로 흥행 순위 1위를 달성할 수 있게된 기저에는 [왕의 남자]의 열성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도 위력을 떨치고 있는, 오빠 부대로 일컬어지는 10대 중심의 팬 층과는 다르게, 최근 영화에서의 팬덤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가졌으며 사회 전반의 문화적 흐름을 주도해가는 20대 중반 이상의 여성들이 그 중심이 됨으로서 기초적인 입지 자체를 달리한다. 기존의 아이돌 스타의 팬덤이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면 최근의 한국 영화 팬덤은 자신들만의 문화로 남기는 것이 아닌, 보다 적극적이고 실물적으로 영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데 주력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팬덤은 주로 대기업들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수십억대의 제작비를 쏟는 소위 블록버스터 영화들보다는 주로 작은 영화들에서 생겨난다.

 

 굳이 영화의 예를 들었지만, TV에서의 드라마, 시트콤, 코미디의 경우도 이러한 팬덤을 형성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최근 종영한 [환상의 커플]이라던지, 노도철 PD의 [안녕, 프란체스카], [소울 메이트], KBS의 신설 개그 프로 웃음충전소의 [타짱]들이 그러한데, 방송 자체의 시청률과는 그다지 큰 관계없이 붐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역시 팬덤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 김석윤 감독의 [올드미스 다이어리(올미다)] 역시 이러한 적극적인 팬덤을 토대로 삼아 시트콤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영화화가 결정된 케이스이다. 둘째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가 작고한 탓에 서승현 씨로 교체된 것 이외에 나머지 출연진은 동일하고, 감독 역시 같다.(물론 방송 때는 PD 직함이었지만.) 즉, 영화판 [올미다]는 237회 짜리 시트콤 [올미다]의 가지치기이다.

 

 시트콤 [올미다]가 누렸던 인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판 [올미다]는 현명한 전략을 택한다. 제작진은 237회의 시트콤이 일상적인 소재들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바를 비록 매체가 영화로 옮겨졌을지언정 잊지않는다. 짧으면 90분, 길어봤자 120분 정도되는 영화는 그래서인지 큰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 매체가 이동하면서 텍스트는 일상적인 에피소드의 나열에서 비교적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운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거대한 사건보다는 일상의 연속에서 관계의 변증법적 발전을 꾀하고 있다는 점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영화는 흔히 말하는 '낙오자' 혹은 '루저'의 정서로 가득차 있지만 그 표현 양식에 있어서 비루하기보다는 오히려 귀엽다. 보는 우리야 즐겁지만 등장인물은 행복과 불행, 현실과 망상,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계속 줄타기를 한다. 이런 그들을 귀엽게 보여주는 것은 물론 중간중간에 엿보이는 삶의 긍정들 때문이라지만, 실질적으로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미자(예지원 분)의 슬랩스틱 연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는 간과할 수도 있는 측면이지만 그동안 한국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고 나왔던 수많은 영화들이 흔히 '재미'가 없던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기에 훌륭한 코미디를 보여주는 여배우 예지원은 분명 영화 속에서 가장 의미있는 존재이며,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시트콤에서의 탁월한 호흡을 다시끔 재현해낸다. 전작이었던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에서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던 예지원은 여전히 가장 비루한 모습에서 가장 귀여운 순간을 인상적으로 연출해내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그래서 과연 이 영화는 시트콤에 울고 웃었던 수많은 '언니'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일단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의 컬트적인 팬덤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언니'들은 나름대로의 자기 역할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치상으로 흥행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이곳 저곳에서 좋은 소문이 많이 들려오고 있는 것은 영화 역시 공감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물론 시트콤의 열렬한 애청자들이 모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원작과의 다르게 로맨스에 너무 치중한 것이 아닌가'부터 '영화치고는 너무 많은 에피소드를 구겨넣어 산만하다'는 평가까지. [올미다]가 긍정적인 면만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 우리네 같이 '현실이 쉽지 않은' 언니 이하 청춘들에게 '미자'는 그저 옆에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 바램이 있다면 이런 귀여운 '미자'가 마치 누구처럼 입소문을 타고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바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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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김경주

도시인 / 박종윤


리뷰,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김경주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 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 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 우는 것일까.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김경주「내 워크맨 속 갠지스」전문


여기서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 하나, 2006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


사람에 따라서는 열이 받을 정도로 쓸 데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있다. 어떠한 예술품을 이야기 할 때 어느 것의 미학적 가치가 높은가, 라는 답변에는 그나마 대답을 줄 수 잇겠지만 그래서 무엇이 가장 나은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대답하기 힘들다. 그 것은 주관이기 때문이다. 미학은 객관적일 필요성이 있지만 주관의 영역을 배제하는 것은 관념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영화는 순수한 예술품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선두에 섰던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자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를 찍는 데는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라 자조했다 한다.(물론 현재는 technology의 발전으로 자본의 제약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진보란 얼마나 이중적인가!) 즉, 영화는 그 태생부터 상품으로서 기능함을 뜻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물어보자. 2006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 답은 괴물.


괴물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것은 평론가들의 몫일 것이다. 나는 그저 괴물의 거친 장면들 중 하나를 길어올리고자 한다. 강두 역을 맡았던 송강호가 말한다. “근데- 사망- 사망잔데요- 사망은 안했어요-”


이는 영화 속 불편한 진실로서 기능한다. 조직과 시스템화에 대한 불신을 기저에 깔고 있는 괴물 속에서 한 거대한 조직 속에서 그런 진실은 마치 ‘없는 일’처럼 위장된다. 즉, 실재에 대하여 부정한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정, 그러한 일들은 작금의 시대에서는 이미 흔하게 반복되는 일이다.


시 동인 ‘불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경주의 시는 그렇기에 ‘불편’하다. 시의 모티브는 현실에 강하게 기반하고 있지만 그 수사에 있어서는 대중이 없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 는 이유로 우리는 짐짓 초현실주의의 세례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젊은 시인의 시는 또한 지극히 현실적이다.


사족을 하나 띄워보자. 같은 시 동인 불편에서 활동하는 김민정 시인의 글들은 원초적인 폭력성을 띄고 있다. 김민정 시인의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저씨’에 수록되어 있는 짧은 시 ‘내가 날 잘라 굽고 있는 밤 풍경’ 부분을 본다.


소금을 듬뿍 두른 변기솔로 내가 날 구석구석 닦는다 한 입에 한 배꼽에 한 음핵에,  두 눈에 두 귀에 두 콧구멍에 두 젖꼭지에 두 난소에, 꽃삽을 쑤셔박아 내가 날 데코레이션한다 늑막이 터지도록 허리를 졸라매고 고기걸이용 쇠걸이에 목을 찍어 내가 날 옷걸이에 건다 터진 수도관에 입이 물린 고무장갑처럼 살이 불 때까지 내가 날 꼬집어 뜯는다 하키스틱만 한 낫을 갈아 뒤통수부터 엉덩이까지 내가 날 자로 댄 일자로 찍어내린다 폐 한가운데에 식칼을 대고 살 껍질을 훌러덩 뒤집어 내가 날 까버린다 서둘러 군불을 지피고 그 위에 석쇠를 달궈 내가 날 통째로 얹는다 지글지글 내가 날 굽는 냄새가 피어오르자 해골들과 부위 모를 뼈다귀들이 앞다투어 모여든다 석쇠 위에 고여 있던 핏물이 선지로 돌돌 말아 빚은 완자처럼 지져져 더욱 쫀쫀해진 내가 날 엿가위로 한 입 두 입 잘라 굽는다 따각따각 아귀 터지게 턱 벌리는 해골들에게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바싹 태워 먹여준다 오일 바른 상아 같이 매끈매끈한 뼈다귀들이 몸에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파스처럼 붙여준다 불가에 모여 앉은 해골들과 뼈다귀들이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먹고 입고 점점 나로 살쪄간다 일곱의, 스물의, 스물일곱의 제각각의 내가 날 쳐다보며 나야 나야 손을 흔든다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들을 다 트림하고 나로 자란 그대들이 방방마다 걸린 액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찰칵찰칵 기념촬영을 한다 내가 날 잘라 구워 먹고 난 달궈진 석쇠 위에는 열세 개의 꽃삽만이 꽃게처럼 익어가고 있다


                                   - 김민정「내가 날 잘라 굽고 있는 밤 풍경」부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극단적인 폭력과 허무의 미학으로 점철된 김민정 시인의 시는 주로 반여성적인 기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서 남성중심적인 사회에 일침을 놓는, 그런 사회의 실체를 해부하고 접근한다. 말하자면 불편한 진실을 공격적인 어휘로 까발림으로서 그 안으로 과감히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방법론은 마치 악몽같이 묘사된다. 20세기 초 초기의 초현실주의에서는 정신병자가 거침없이 내뱉는 일반적이지 않은 서사를 가진 언어의 조합을 진지하게 연구하였는데, 어떠한 이성이 제거된 병자만이 실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김민정의 시는 그러한 정신병, 혹은 편집증 환자의 것처럼 재현되기도 한다.


역겨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혐오로 가득찬 김민정 시인과는 달리 같은 ‘불편’ 동인에서 활동하는 김경주 시인은 그 내면으로 침잠한다. 또한 어법 역시 지극히 현실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소재들은 밖에서 찾아지지만 그 주체는 종국에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를테면 서정시의 다른 한 단면이라 볼 수 있다.


시를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제거해보면, 뜻밖에 김경주 시인의 끝은 존재론적인 외로움에 닿아있다. 마치 유화로 그린 그림을 그린듯, 섬세하게 덧칠된 시어들은 그 본연의 결핍을 간절한 색을 입힌다. 근대화 된 사회, 인간의 작용이 없어도 자본과 자본만의 교류로서 존재할 수 있는 현실에서 인간의 소외, 그리고 그러한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망은 초월한 세계로의 몽상으로 이끈다. 여기저기 붕붕 날아다니는 이미지, 시인은 그 이미지를 담기만 하면 된다. 김경주 시인의 시 모음을 읽으면서, 문득 우리가 어떠한 미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품을 만드는 근원적인 이유에 대하여 생각했다. 김경주 시인이 그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기호화된 현실과 실재의 경계에서, 어느 곳으로도 쉽사리 미끄러지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 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관조하지 않으며 잠식당하지도 않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도전이다.


속칭 ‘미래파’라 불리며 문단에 등장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약진은 놀랍다.(물론 김민정, 김경주 등 그 흐름의 주축에 있는 시인들은 평론가 들의 이러한 장르화에 대하여 완강히 부정한다.) 시인 권혁웅이 시집 뒷 표지에 실었던 ‘이 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이란 문장이 정말로 실현될까는 답을 아직은 할 수 없다. 그 것은 시집을 몇 번 더 읽어보고, 그리고 또 시간이 좀 더 지나가면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경주 등의 시인이 현대 시문학 계에서 이끌어가고 있는 그러한 흐름이 훗날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문학을 더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아니, 현재로서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뜬금없는 질문 하나. 진짜로 2006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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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문화로서의 한국 인디씬의 태동과 발전 / 박종윤

하위문화로서의 한국 인디씬의 태동과 발전

- 크라잉넛부터 노브레인까지, 펑크씬에 중점을 두어


 

1. 태동과 발전


1970년대 말, 영국 노동자 계급의 몇몇 청년들은 마치 일종의 선언같은 노래들을 발표한다. “Anarch in the U.K.(영국의 무정부상태)”, “God save the queen(신은 여왕을 보호한다)"라는 제목의, 형편없는 연주력과 직선적인 록 스타일, 거기에 신경질적인 목소리. 그렇게 4인조 Sex Pistols는 펑크락의 원형을 만들었다. 영국의 매스미디어와 부르주아들은 분노했으나 청년들은 열광했다. 공연마다 폭력사태가 일어났고 그 들은 점점 더 유명해져갔다. Sex Pistols를 위시한 초기의 펑크락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허무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며, 무엇보다도 거침없이 직설적이었다. Sex Pistols의 해체는 우발적이며 감정적이었고, 베이시스트였던 Sid Vicious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다. 과히 펑크적인 말로였다.


1990년대 중반, 홍익대 앞에서는 쉽게 눈치챌 수 없지만 유의미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기존의 우드스탁 류의 락 음악이 있는 술집들과 가게 한 쪽 구석에 밴드들이 연주를 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술집들이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고, 그 구석에서 영미권의 얼터너티브락 혹은 모던락을 카피하여 연주하는 밴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Nirvana, Pearl Jam, R.E.M., U2, Duran Duran, Pet shop boys, Clash, Sex Pistols, Velvet Underground, My bloody valentine 등은 이들의 좋은 역할 모델이었다. 이는 이전의 한영애, 한상원 등 신촌 언더그라운드로 대표되는 블루스 진영이나, 80년대 헤비메탈과 쓰레쉬메탈의 늪에서 허우적대고있던 시나위, 블랙홀, 블랙 신드롬 등의 헤비메탈 진영과는 분명 다른 흐름이었다. 지금은 어느새 중견 인디밴드가 된 언니네 이발관, 코코어(당시의 이름은 버거킹), 노브레인, 크라잉넛, 델리 스파이스 등의 밴드들이 DRUG(지금의 스컹크헬 자리)라는 ‘최초’의 클럽에서 연주를 하면서 자작곡을 쓰기 시작했고, 이는 1996년 5월 명동과 홍대에서 열린 ‘스트리트 펑크쇼’로 대중에게 광범히 하게 노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펑크씬 역시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을 필두로 최초의 씬을 형성해가기 시작한다.


한 때 주류 언론에서도 펑크락, 모던락 등 국내의 인디 음악과 홍대의 인디 씬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며 경쟁적으로 취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본의 원초적인 속성이랄까, 투자한 만큼의 수익성이 보이지 않았을 때 매스미디어는 어느새 등을 돌렸다. 그 뒤로도 최소한의 관심을 선심쓰듯 던져주었지만 자신들이 상품으로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믿는 많은 인디밴드들은 미디어와 쉽게 친화되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몇몇 밴드(예를 들면 자우림, 윤도현 밴드)들은 자본에 완전히 편입되기도, 또 어떤 밴드들은 공사장에서 막일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언더그라운드의 생활로, 그 중간의 어정쩡한 몇몇 밴드들은 또 그런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전업 음악인으로 살아가던, 생계형 부업과 음악을 병행하던, 혹은 음악을 포기하던지간에 어찌되었건 삶은 계속된다.


2. IMF와 공황, 그리고 크라잉넛


한국에서의 최초의 인디 밴드 히트곡은 노브레인의 ‘바다 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것은 최초로서의 의미만이 존재한다. 진정한 히트곡의 정의가 동시대를 같이 한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다는 의미라면 최초의 히트곡은 마땅히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로 돌아가는 것이 순서일 듯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공황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맑스의 자본론을 굳이 펴보지 않는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최소한 서민들은) 예상할 수 없었던 공황은 결국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아시아 전지역을 덥친다. 이는 한국 역시 피해갈 수 없었는데, 투기 자본의 비윤리적 태도로 말미암은 공황(원인 중 일부는 재벌기업에게서 촉발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결과론적으로는 외국 투기 자본에게 분명한 책임이 있다.)은 초유의 구조조정 아래서 수많은 실직자, 실업자, 명예퇴직자들을 양산해내었고 사회는 언제 빠져나올지 모르는 불황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필연적으로 사회 전반에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와중 1998년 드디어 크라잉넛의 첫 번째 앨범 ‘말달리자’가 발매된다. 단순한 리듬과 역시 단순한 구조 그리고 위악적인 보컬과 가사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곡은 그 전까지의 많은 대중적인 음악적인 문법들을 무시한 형태였다. 그럼에도 따라 부르기 쉽고 재미있으며 파격적이었던 이 곡은 금새 대중에게 전파되기 시작한다.(같은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모던락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 이석원은 대중 음악 웹진 가슴과의 인터뷰에서 ‘말달리자’의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응원가와 비슷한 속성을 논하며 크라잉넛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존경을 드러낸 바 있다.)


근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현실은 복잡하고 강압적이며, 노동을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의 소외를 겪게 만드는데, 그런 환경일수록 필연적으로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질 수 밖에 없다.(한국이 90년대 초중반의 초보적인 PC 통신 환경에서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게 된 시기도 우연치 않게 IMF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는 물론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벤처를 육성한 탓도 크긴 하다.) 지금에서야 보면 분노의 ‘목적지’가 불분명한 완성도 높지 않은 가사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대중들의 정서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1998년 1집의 성공과 2집에서의 발전을 거쳐 크라잉넛의 최대 절정기는 2001년의 3집까지 였는데, 그 뒤로 군대가기 전 2002년에 4집,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후 2006년에 5집을 발매했지만 그 판매량과 인기는 초창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 시기는 IMF 구제 금융 시기와 묘하게 겹치는 데 구제 금융 시기가 끝나는 2001년, 크라잉넛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게 된다. 1998년 매스미디어에 의하여 경쟁적으로 보도되던 인디 밴드 관련 기사들이 ‘예전 같지’ 않아진 것 역시 이때 쯤이었다.


크라잉넛이 수많은 펑크 밴드들 중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음악을 규정하는 태도에서의 차이였다. 클럽 DRUG을 중심으로 한 펑크 밴드들이 대부분 무정부주의적이고, 저항적이며, 공격적이고,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이며 위악적인 음악을 하는 와중에 크라잉넛은 활동초창기부터 펑크락으로서는 독보적으로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접근을 시도하였다.(1집의 갈매기, 펑크걸 등의 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씬의 다른 밴드들에 비하여 비교적 덜 저항적이었는데 음악에 아주 심한 욕설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고, 저항적인 면모를 보이되 그 대상은 불분명한 형태를 띄었고(노브레인 등의 밴드가 인디 레이블 문화 사기단을 조직하고 Anti-서태지 운동을 전개한 것이나, 매스미디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정치적으로는 좌파적이었을지 몰라도 정작 음악은 다분히 축제적이었으며 카니발적이었다.(여기서의 카니발은 사회에서 열어놓은 안전한 일탈로 정의한다.) 이러한 크라잉넛의 음악은 경제적으로 힘겨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대중, 그리고 대안적인 방향에서 수익을 창출하되 권력에 강한 위협이 가해지는 것을 꺼려하던 자본 둘 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졌다. 크라잉넛의 의도와는 무관할지 몰라도 대중과 자본은 그들을 적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그 들은 ‘예전 같지’ 않아 졌다.


2002년 군입대 직전 크라잉넛과 아웃사이더에서 가진 인터뷰를 첨부한다.


(전략)


지 - 성격들이 굉장히 낙천적이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음악에서는 젊은이의 절망을 많이 노래하는 것 같은데요, 요즘 세대가 이전 세대에 비해 절망적이라고 보십니까?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한 - 예전 세대는 잘 모르겠구요. 일단 저희 노래예요. 저희 노래를 하면 우리 세대들이 공감을 하는거죠.

김 - 예전 세대는 절망할 틈도 없었잖아요.(웃음)

박 - 나름대로 고민이 있지 않겠어요.

지 - 가사를 보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요.

혁 - ‘오늘을 잘 살아가자’는 말이 아닐까요? 사실 저희 모토가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자’.

김 - 오늘 못한 일은 내일로 미루자.

혁 - 나는 오늘 할 일인데.

김 - 덧붙이자면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런거죠.(웃음)

혁 - 저는 ‘내일은 해가 뜬다’ 이런 식보다는 ‘오늘이 있다’가 더 좋아요.

한 - 지금을 열심히 살자는 거죠. 어차피 포기하고 허망해지면 좀 편하거든요.

지 - 좀 짓굳은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란 가사가 많이 나오고, 젊은이들의 절망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크라잉 넛은 음악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성공해나가고 있는데, 절망감에 공감하면서 동질감을 느낀 팬들이 나중에 정서적인 배신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계속 희망이 없는데, 알고 보니까 크라잉 넛은 성공해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요.

혁 - 그렇게 많이 성공 안했는데.

한 - 그래도 저희는 약간은 소외된 사람들의 애환을 노래하고 싶어요.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잘되는 건 좋은거고, 아픈 사람들을 달래 줄 사람은 필요하잖아요.

혁 - 거짓말 하면서 음악하긴 그렇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쓰는거죠.

한 - 그렇다고 우리가 가사에서 ‘우리는 노동계급이다’라고 한 적도 없고, 그래서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후략)

3. 전향한 펑크락, 노브레인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초기의 노브레인은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등의 모던락 밴드는 물론 같은 펑크 씬의 크라잉넛 등의 밴드들에 비해서도 좀 더 위악적이고, 저항적인 모습으로 소개되었다. 이성우(보컬)과 차승우(기타)를 축으로 노브레인은 비록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음악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달성해나갔다. ‘바다 사나이’와 ‘청춘 98’이라는 명곡 필두로 서서히 씬 내부에서 입지를 굳혀가던 노브레인은 2000년 여름 첫 번째 Full-length 앨범이자 2CD로 제작된 그네들의 최고작 ‘청년폭도맹진가’ 앨범을 내놓게 된다. ‘난투편’과 ‘청춘예찬편’으로 나뉘어진 이 데뷔 앨범에서 저항적인 메타포와 진일보한 확장된 사운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스카, 레게적인 요소를 차용한 것도 그렇지만 주 멤버였던 차승우(기타)가 군대에 갔다옴에 따라 ‘군가’적인 요소가 적절히 차용된 면이 다른 밴드들과의 분명한 구별점이었다. 가장 수직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국군 군가의 요소를 음악에 심어놓아 미학적인 역설을 꾀한 것이다.


밴드는 2번째 앨범 'Viva No Brain'을 내놓을 때까지 말 그대로 ‘잘’ 굴러갔다. 일본제국기를 찢는 퍼포먼스 등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마니아에서 마니아로, 노브레인의 음악적 커리어는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갔다. 하지만 변화는 갑자기 일어났다. 노브레인 음악의 거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기타리스트 차승우가 2002년 갑자기 밴드에서 탈퇴한 것이다. 그 다음해 2003년에 나온 노브레인의 앨범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앨범이었다. 이에 대중 음악 웹진 가슴의 음악평론가 김학선씨의 2003년 리뷰를 첨부한다.


(전략)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차승우의 흔적을 노 브레인이라는 이름에서 하루빨리 털어 내고 싶었더라도, 또 그게 당연하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저 한번쯤은 신나게 달려주기를 원했고, Oi!!라는 함성을 한번쯤은 더 들려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들은 차승우의 흔적과 함께 이 모든 것들도 지워버렸다. 이제 이 앨범에서 더 이상 노 브레인만의 것이라 믿었던 분노와 에너지는 들리지 않고, 가슴 벅차던 Oi!!의 함성이 끼어들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건들대던 '동네 노는 애들'은 이제 '반듯한 모범생들'이 되었고, "다 죽여버리겠어"라고 외치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희망'에 대해서 노래한다.


(중략)


물론 이는 이들의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하며 예전의 앨범들을 다시 꺼내 듣고, <청춘구십팔>과 <잡놈패거리>, <어둠 속을 걷다>를 그리워하는 이의 푸념일수도 있고 미련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 브레인은 변했다는 것이고, 나는 이런 식의 변화에는 쉽게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깊은 마음 속의 투혼을 목 터질 듯 불러보리라"던, "이 맘 영원하리라"던 노 브레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슴이 아프다.


분노와 에너지가 거세된 노브레인의 음악에 남아있는 것은 재기발랄함과 전에 없었던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였다. 많은 음악 매니아와 팬덤은 실망했고, 또 떠나갔다. 더 이상 노브레인에게 저항과 분노는 없었다. 그 사이 노브레인은 빠르게 라인업을 정비하고 음악적인 스타일을 바꾼다. 이전의 군가적인 향취, 문어체의 가사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새로운 기타리스트와 함께 마치 80년대 본조비가 그랬듯, Pop metal 혹은 LA metal적인 펑크락을 만들기 시작한다. 3.5집의 첫 곡 제목은 ‘넌 내게 반했어’, 4집의 첫 곡 제목은 '미친 듯 놀자‘ 였다. 기존의 팬덤은 이를 일종의 음악적인 선언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성우(보컬)의 위악적인 보컬은 그대로였지만 이미 노브레인은 이 전과는 전혀 다른 밴드였다. 슬프지만 진실(Sad but true)이랄까, 노브레인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3집의 'Little baby'가 소폭의 히트를 기록한 후였다. 3.5집의 ’넌 내게 반했어‘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끌게 된 노브레인은 이제 노래방에서도 즐겨 불리는 레퍼토리가 되어 가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제 노브레인을 듣지 않는다.


최고작이라고 불리웠던 1집 ’청년폭도맹진가‘가 나왔던 2000년의 겨울, 12월 15일에 웹진 가슴과의 인터뷰를 첨부한다. 2006년 현재의 노브레인을 보며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략)


박준흠 : 앞으로 나올 2집에 대해서 얘기를 해달라.

※ 2집 [viva No Brain]은 2001년에 발매되었다.


차승우 :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마음을 비워 놓고 있는 상태이다.

이성우 : 계속 곡 만들고 그러고 있다. 지금 당장 얘기할만한 건 없다.

차승우 : 많은 걸 해보고 싶다. 물론 지금까지 노브레인의 모습을 견지하긴 하겠지만 점점 변해갈 것이다. 더 정제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박준흠 : 바라건데, 노브레인은 지금 보여주는 '분노'를 삭이지 말았으면 한다. '이 사회(시스템)에 만족하는 노브레인'이란 문구는 생각하기만 해도 너무 실망스럽다.


차승우 : 원단이 다 사회부적응자라 그럴 일은 진짜 없을 것이다.

이성우 : 아마 세계종말이 온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웃음)


박준흠 : 앞으로 노브레인은 세상과 어떻게 맞서 싸울 생각인가?


차승우 : 별로 맞서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고...(웃음), 우리는 그냥 이 병들어버린 사회 안에서 기생하는 기생충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게 계속 기생을 하면서 소소한 독설을 내뱉는 게 우리의 일일 것이다.


4. 헤프닝, 1997년 MBC 삐삐 롱스타킹 사건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기본 속성은 최대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다.(최소한의 투자의 효율성보다는 최대한의 효과에 축이 있다.) 그러한 속성으로 인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주류 문화는 기본적으로 親자본적인 속성을 띄게 되지만, 검증된 상업성만 제시가 된다면 叛자본적인 하위 문화 역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하위문화에서도 자본의 발전에 결정적인 균열을 가할 수 있는 텍스트들은 수용하지 않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는 자본의 중심부로 갈수록 심해지고 반대로 자본의 주변부으로 갈수록 덜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몇몇 사례로 증명된다. 자본에 종속적이지 않은(혹은 종속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하위문화를 가차없이 내친 경우를 우리는 1997년의 MBC 삐삐 롱스타킹 사건, 그리고 2005년의 MBC 카우치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삐삐 롱스타킹은 박현준, 강기영(달파란), 권병준(고구마)로 이루어진 남성 3인조 밴드로서 잘 알려진 삐삐 밴드의 후속격인 밴드이다. 이 중 박현준과 강기영은 H2O 등의 밴드 활동으로 90년대 초를 전후하여 헤비 메탈 계에 몸 담기도 하였다. ‘안녕하세요’, ‘딸기’ 등 진취적인 포스트 펑크 음악과 이윤정의 생짜로 짜내는 듯한 곤혹스러운 발성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삐삐 밴드는 1집 ‘문화 혁명'과 2집 ’불가능한 작전‘을 끝으로 해체한다.(3집 붕어빵은 정규 앨범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어 논외로 한다.) 당시의 삐삐 밴드와 삐삐 롱스타킹이 인디씬에 머물러있었다고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으나 그 후 멤버들 각각의 활동(스타일리스트 활동한다는 이윤정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는 영화음악, 일렉트로니카 등 인디 씬 내에서 다양한 위치를 점하였다.)와 밴드의 키치적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당시의 인디 씬의 몇몇 조류와 비교적 맞아떨어졌다는 데에서 인디 씬과의 연계성을 찾을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공교롭게도 삐삐 롱스타킹이 활동을 시작한 후 첫 방송이었다. ‘바보 버스’를 ‘립싱크’하던 박현준이 카메라에 생방송 임에도 불구하고 침을 뱉은 영상이 전국으로 방영되었기에 그 들은 1년간 모든 방송국에 방송 출연을 금지당했다.(방송 출연 금지 기간 1년이 지나기 전에 삐삐 롱스타킹은 해체하였다.) 침을 뱉은 행위 외에도 생방송 무대에 ‘우리는 지금 립싱크 중입니다’라는 현수막을 설치한다던지 마스크를 착용한다던지, 또한 발차기를 하는 등의 행위가 구설수에 올랐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KINO의 1997년 4월호에 실린 삐삐 롱스타킹의 인터뷰는 참조할만한다.


(전략)


KINO : 이번 방송 금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구마 : 우리(달파란과 고구마)는 몰랐는데, 나중에 차타고 집에 가는데 매니저한테 전화가와서 알았어요.

달파란 :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 사람들이 괜히 지나치게 생각해서는... 1년씩이나 못하게 하냐? 참 답답한 사람들이죠, 뭐. 무례하고 불손하고 도대체 이럴수가, 동방예의지국에서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한 것 같아요.

KINO : 박현준 씨는 이에 대해 어떻게 발하나요?

달파란 :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KINO : 박현준 씨, 침은 왜 뱉으셨어요?

박현준 : 그건 잘해보려다가 그런 거예요. (일동 웃음) 멋있게 해보려다가. 비디오에 그런 것들이 나오잖아요? (목소리 톤이 바뀌며) 인기가요 50에서 카메라가 자꾸 얼굴로 와요. 내 얼굴에만 자꾸 가까이 와서 자꾸 그러잖아요. 아, 그러면 뭔가를 해야 되겠구나(웃음), 그래서 침을 뱉은건데...

KINO : ‘가요계에 침을 뱉어라!’로 생각해도 되나요?

박현준 : 가요계에 침을 좀 뱉어야해요. 우리도 가요지만, 꿈이 메말라버린 것 같아요. 지저분한 것 같고, 구질구질하고... 나도 지저분하지만.

KINO : 앞으로는 라이브 위주로 활동하겠네요?

달파란 :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고구마 : 홍보를 하는 것은 의미를 만들어 가는 작업인 것 같아요. 이런 의미도 있다, 저런 의미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꾸 의미 부여가 되는 건데, 어쨌거나 방송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조금 중요한 의미 부여 수단을 잃은 것 같거든요. 그래도 뭐 그다지 그렇지도 않지만, 공연 때 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걸까 생각을 해봤어요. 1,2,3잡애 비꼬는 것이나 자기 파괴적인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뭘 알고 좋아하나’ 하는 기분이 되나봐요.


(후략)


당시 대중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는데(당시의 대표적인 통신 ‘나우누리’의 갈무리된 웹 문서를 참조), 이는 후의 카우치 사건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분명한 팩트는 삐삐 롱스타킹이 1년간 출연을 정지당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달리 말하면 방송사가 권위를 가진, 성역으로서 기능함을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저항적인 락커의 모습은 미디어에서 줄곧 소비되며 수익을 가져다주는 통로 중 하나로서 기능하지만, 자본 자체를 원천 부정(립싱크에 대한 적극적인 폭로)와 헤게모니 파괴 행위(카메라에 침을 뱉음)에 대해서는 대중적인 노출을 봉쇄하는 자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2005년의 카우치 사건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표상된다.


5. 불행한 시간들, 2005년 MBC 카우치 사건


오버 그라운드에서 다시 인디 씬으로 위치를 이동한 삐삐 롱스타킹의 멤버들과 다르게 럭스(RUX)는 인디 씬의 태동과 함께한 노장 밴드다. 1996년 결성되어 근 10여년간을 이어온 밴드는 크라잉넛, 노브레인, 레이지본 등 초창기의 펑크 밴드들이 오버 그라운드로 올라간 경우와는 상반되게 자체적으로 제작, 유통 경로(1998년 스컹크 레이블 창립)를 만들고 공연, 생활 공간(2002년 스컹크헬 개장)을 만듬으로서 펑크씬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다.(펑크 씬의 경우 인디와 오버의 경계가 모호하여 크라잉넛, 노브레인의 멤버들이 종종 스컹크헬에 보이곤 한다. 방송을 타느냐, 타지 않느냐의 차이일지도.) 럭스는 음악적으로는 오이 펑크, 정치적으로는 중립 혹은 중도를 지향하는 밴드이다.


사건은 역시 럭스가 첫 방송을 하는 와중에 일어났는데, 그 주체가 럭스가 아닌 (무대에 댄서 자격으로 올라온) 밴드 카우치의 일원 2명이라는 점이 삐삐 롱스타킹의 경우와 다르다. 럭스가 ‘지금부터 끝까지’를 연주하는 와중 무대에 올라와있던 (럭스의 친구들인) 댄서들 중 카우치가 바지를 벗고 하반신을 노출한 것이 사건의 전모이다. 후에 ‘생방송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증언한 카우치는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럭스와 함께 방송이 끝난 직후 연행되었다.


삐삐 롱스타킹 사건이 표현의 자유와 공중파의 신성 불가침에 관한 찬반 토론이 강하게 맞붙는 형국이었다면, 카우치 사건은 이와는 다르게 사회 전반적인 분노와 일부의 안타까움으로 나타났다. 사회의 분노는 각 입장마다 다른 관점을 보였는데, 가령 페미니즘 진영의 남성 성기의 기호화, 일반 여성들의 성적 수치심, 공중파의 신성 모독 등이었다. 특이하게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인디 밴드들의 비난도 있었다. ‘인디 밴드들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통로를 모두 막아버렸다.’는 힐난이었다. 음악 평론가 박준흠(인디 음악 웹진 가슴 운영)씨는 ‘음악 외적인 부분으로 음악 자체가 평가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의견으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또한 일부 펑크락 매니아들은 연행 후 대국민 사과를 접한 후 ‘좀 더 뚝심있고 과격하게 밀고 나갔어야 된다.’라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2005년 7월 30일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10월 26일에 인터넷 신문 프로메테우스와 럭스의 리더 원종희 씨와 나누었던 인터뷰의 일부를 가져온다.


(전략)


프로메테우스 : 원종희 씨가 펑크락 뮤지션으로 살아온 10여 년의 세월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한국 땅에서 펑크뮤지션을 살아간다는 것은 ‘난 바보입니다’하고 이마에 새겨놓고 사는 것과 같다.


원종희 : “저도 그냥 한국의 평범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저 놈들이 뭘 알겠어?’ 이런 식이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넌 그런 음악이나 하니까 바보야’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처음에는 ‘난 바보 아니에요’하면서 부정을 하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그래, 나 바보다’하게 되죠. 대부분의 펑크밴드들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음악캠프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엉뚱한 이야기를 유포시키면서 몰아붙이는 데는 뭐라 대응해야 할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래요. 우린 바보고 아무 생각 없습니다. 머리 비어서 그랬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 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프로메테우스 : 음악캠프사건으로 대화가 진행되자 원종희씨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방송에 임했던 자신들도 문제지만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로 취급받은 것은 정말 ‘X 같고 화나는 일’이라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원종희씨는 펑크음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아야 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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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평양

디어, 평양



Dear, 의 사전적 의미는 친애하는, 으로 해석된다. 친애하는 평양, 혹은 귀여운? 그리운?


 다큐멘터리가 끝날 무렵, 유독 흐느끼는 사람이 많았던 듯 싶다. 대충 들려오는 소리만 해도 10명 남짓, 어쩌면 그 것보다 조금 더 많이. 씨네콰논의 작은 공간이 아주 들이찬 편도 아니었는데, 그러고보면 다큐멘터리인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 순전히 ‘맛난 것 먹자’라는 생각으로 잠시 갔었는데, 바로 밑 학번 동생의 생일자리 때문에 얼마 있을 수 없었다. 버거킹에서 조금 더 걸어간 자리에 있는 동동주 집. 이미 술에 취한 동생들은 내게 대뜸 ‘사람 좀 되라고’ 화를 냈다. 왜 이렇게 여자에 정신 못 차리냐고. 다 오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괜히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약간 오바해서 밤새 술을 먹기로 결정했다. 생일이었던 동생과 함께. 성수역 前의 해장국 집에서 선지하고 뼈하고 한 개씩 시켜놓고 부어라 마셔라 소주를 먹고 또 걔한테 먹히고 있는데 뒷 자리에 어떤 중년의 남녀와 학생들이 들어왔다. 이야기를 가만 듣자하니 외대 학보사 기자와 담당 교수 같았는데, 정말 무지하게 혼나고 있었다. 학생들 머리를 계속 기분 나쁘게 툭- 툭! 치면서 ‘네가 외대 발전을 아냐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냐고’ ‘너 나이가 몇이냐고’ 학생들이 가만히 듣고 있는 와중, 몇 시간이나 지나갔다.


 외대 학보사 기자가 나갈 때 쯤, 술에 취해서 그랬는지 따라 나갔다. 그 때 시간이 새벽 3시 쯤 되었던 것 같다. 걸어가는 기자의 등을 툭툭 치고 그 사람이 돌아봤을 때 말해주었다. ‘정말 수고 많으시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시라고’


 술자리는 이윽고 끝났고,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와 다음 날 수업에 간답시고 과실에서 잤다. 물론 그 다음날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해 아침 수업에 늦은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아침 수업에 간신히 출석 체크를 하고 밖으로 나와보니 어느새 청운관 앞에 사람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FTA 총궐기 전단’을 나눠주고 있는 몇몇 선배가 있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선배한테 핫쵸코를 한잔 사면서 김일성주의에 대해 물어보았다.


 누가 그랬었는데, 어쨌든 시간은 잡을 수 없는 것이고, 어찌 되었건 간에 삶은 계속된다고. 최근에는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또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져보고 있다. 머리를 잘라서 그런지 약간 센치해진걸까.


디어, 평양은 내게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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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 친일 논란에 대한 사학적 접근 / 박종윤

 

청연 친일 논란에 대한 사학적 접근 / 박종윤


1. 들어가며


청연이 개봉하기 바로 전 논란이 되기 시작했던 친일 논쟁의 대중적 관심은 영화 청연이 친일적인 텍스트인가, 혹은 그렇지 아니한가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 논란이 되고 있던(몇가지 의심쩍은 팩트가 있을 뿐, 친일 인사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류 비행사 박경원에 대한 영화라는 것만으로 대중은 흥분했고, 영화 텍스트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보다 민족주의(혹은 nationalism)에 기반한 감정적인 보이콧으로 표출되었다.


위의 사실에서 주목해야 될 점은 청연 보이콧의 시발점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사학계의 많은 이론은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제 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듯, 우리나라 역시도 (개발도상국식) 민족주의적 특성을 띄게 되었다.(이는 서구의 배타적인 nationalism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서구 nationalism의 대표적 악용 케이스는 파시즘, 독일의 나찌, 그리고 일본이다.) 민족주의적 사학은 현재 친일 논쟁에서의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청연의 주인공인 박경원 역시 친일 인사인가, 그렇지 아니한가를 검증하는 작업 중에 있다.


친일 논쟁에 있어서 과거사 청산을 빼놓을 수 없다. 친일 논쟁의 목표는 과거사에 대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의 과거사 청산 기구였던 반민특위는 친미인사이자, 친일적인 기반을 버리지 않은 이승만에게 실질적으로 활동을 제약당하여 친일 인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작업을 끝내지 못하였고, 민주화 투쟁이 전개된 현재는 국민의 정부 이후 다시끔 큰 규모의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허나, 이러한 과거사 청산 - 달리 말하여 친일파에 대한 단죄에 대하여 역사적인 해석이나 접근은 분분한 상태이다. 크게 식민지 수탈론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 관점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적 관점이 대치되고 있는 순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탈민족, 탈근대주의적인 관점 역시 포함될 수 있겠다. 본 글에서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되어 사학계의 각 입장을 정리하고 청연 친일 논란이 진행되던 당시 대중적으로 그다지 이야기되지 못했던 텍스트 자체에 대한 사학적인 논평을 첨부한다.


2. 민족주의 사학과 근대주의 사학


기본적으로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전 6권으로 출간되었던 논문 모음집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은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적인 텍스트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미군정 시대를 지나 근현대사까지 논하고 있는 이 논문 모음집은 80년대 민주화를 이끌었던 민주세력, 좌파의 당위성에 대한 역사적 근거와 토대를 만들었다. 이 중 청연과 관련되어 주목해야 될 부분은 ‘식민지 수탈론’이다.


식민지 수탈론의 요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 나아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시대별로 조목조목 나누어 비판한 바 있는데, 식민지 시대 말기의 문화 통치 역시도 비판받는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의도했던 바가 한국인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전락시켜 실제로 일본인과 동화되면서 궁극적으로는 군인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세뇌시킨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던 것은 낙성대 연구소의 저작물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다. ‘인식’이 대표적인 좌파 운동의 역사 교과서가 되었던 것과 같이 ‘재인식’은 신보수주의 운동 세력인 뉴라이트의 필독서 중 하나가 되었다. ‘재인식’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는 기존의 ‘식민지 수탈론’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면서 ‘우리나라에 자본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일본이고, 실제로 식민지 시대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근대화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또한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행위범과, 일제 시대의 고위 공직자에 불과했던 당연범은 구분을 하여 처벌해야 됨을 주장한다.


‘재인식’의 등장은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논쟁 포인트를 던졌다. 심지어 ‘인식’의 저자 중 한명이었던 경상대의 장상환 교수는 다시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재인식’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재인식’의 사료들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함과 동시에 ‘식민지 수탈론’을 보다 강화하기도 하였다. ‘인식’의 민족주의적, 민중주의적 관점을 부정하며 만들어진 ‘재인식’은 그럼에도 몇 가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비판받는 대목은 ‘재인식’ 논문 기저에 깔려있는 근대주의이다. 근대의 우월성을 신봉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는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서술한 ‘재인식’은 결국 원래의 의도인 중립적인 역사, 또는 탈정치적인 역사를 보여주려는 시도와는 그 태생부터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되어 조금 더 근원적인 물음으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과연 근대화이고, 역사적인 발전인가도 물을 수 있다.


3. 청연의 텍스트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 규정했다. 어떠한 텍스트에서 매체로 매개할 때 원판 텍스트는 본래의 성질에서 전혀 다른 유형의 재구성된 텍스트로 변하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회자되는 ‘재현의 정치학’은 그래서 유효하다. 혹 그 것의 원본 텍스트가 실화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청연이 기본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장르는 전기 영화겠지만, 윤종찬 감독은 그 방법론으로 멜로 영화의 틀을 택한다. 멜로 영화의 틀을 택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가상의 인물인 한지혁과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고, 또한 가상의 조선적색단 사건을 가미한다. 조선적색단 사건이터지면서 비교적 밝은 톤의 성장 영화, 혹은 따듯한 감성으로 일관하던 드라마가 순식간에 급반전하는 것이 과연 성공적인 시도였는가는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그 후의 드라마가 파국으로 치닷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즉, 극화의 과정에서 ‘태생적인 비극성’이 포함되었다는 증거이다.


실제 사료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선적색단 사건과 한지혁의 존재는 영화의 큰 축을 구성한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 자체에 ‘태생적인 비극성’이 부여됨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되는 문제이다. 영화는 인물에 대하여 줄곧 좋게 말하면 중립적인,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모호한 - 회피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박경원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인듯한데, 결국 파멸로 이르는 큰 드라마의 줄기에 따라 자칫 실존적 고민과 시대상의 한계로 인하여 자아의 완성을 위하여는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협조, 혹은 적극적인 협력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어떠한 매체에서 역사(=텍스트)를 재매개하는 과정에서 텍스트를 매체의 특성에 맞게 일정부분 재구성하는 것은 매개의 기본 속성이다. 그와 동일한 선 상에서 역사를 매체화 시킬 때 정치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 역시 위에 서술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연결되어 이해될 수 있다. 또한 E.H.Carr의 해석주의 역사관를 인용하여, ‘역사란 사회와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된다.’라는 틀에 기초하여 어떠한 예술적인 결과물(혹은 텍스트)가 ‘누구(어떤 계급,혹은 계층)를 위하여 서술된 텍스트’인지 정치적인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다.


같은 기준을 청연에게 적용시켜 청연이 어떠한 텍스트인지, 나아가 청연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용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결과만을 논하자면 청연은 불행히도 그 재현의 방식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근대주의적 사관의 입장을 취하거나, 위의 서술은 하지 않았지만 회색 지대 속에 있는 듯 하다. 나아가 청연의 수용자에게도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준다.(이는 포커스 그룹 연구의 기록에 포함되어 있듯 ‘당시에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일반인의 토론과 답변에서도 잘 드러난다. 청연을 본 토론자 모두 개인의 성취를 위하여 친일을 택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청연은 분명 미학적인 관점에서 잘 짜여진 드라마이고, 한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자아 실현을 멜로의 방법론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구현한 수작이다. 하지만 그 텍스트가 어떠한 정치적 지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다시 한번 고민해보아야 한다. 청연의 텍스트는 일본을 미화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당시의 친일 행위를 일정부분 변호해준다.(이는 실제로 박경원이 개인의 성취를 위하여 일제에 적극적 협력을 시도했다는 혐의와 결부될 때 더욱 의혹을 뿌리치기 힘들어진다.) 감독의 의도는 그렇지 않을지언정, 중립적이거나 회색적인 입장을 취하려던 텍스트가 결국은 근대주의적 사관의 옹호적이 된 부분에 있어서는 최소한의 책임이 있다. 영화의 텍스트를 인지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보이콧은 공정하지 않은 처사였지만, 영화의 텍스트 역시 최소한의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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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자본주의, 예술 / 박종윤

맺음말, 자본주의, 예술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텐데, 그래도 제법 날씨가 선선할 때였다. 그 날 중 하루를 잡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친한 후배와 함께 남산을 올랐다. 산을 워낙에 좋아하는지라 북한산으로 등산을 가자는 후배의 연락에 냉큼 수락을 했는데, 갑자기 쏟아진 비에 결국은 남산이라도 가보자고 했던게다. 그렇게 산 오르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몇 년 째 계기가 없어 등산을 게을리 했었는데 그동안 붙은 살에 겨우 계단 오르면서도 숨차했다. 그러기를 한 30여 분, 짧은 길이라 금방 남산 타워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지고있던 해는 들어가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잠시 남산 타워 안에 들어가 구경하다 나왔을 때 어느새 하늘은 까맣게 물들고 거리에 네온 사인은 반짝였다. 반짝이던 서울은 비록 인공적인 빛이기는 하였으나 황홀했다. 도시의 밤은 불빛으로 시작한다고 누가 말했던가.


 지하철에서 등교를 하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더 많은데,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이리저리 치이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 엉뚱하게도 자동문 위에 있는 광고 때문에 잠시 웃음이 났던 기억이 있다. 공익 광고였는데, 책을 땅바닥에 나이테처럼 말아놓고, ‘책 속에는 지식의 나이테가 있습니다’라는 카피였다. 결국은 책읽기를 권유하는 내용이었지만, 왠지 훈훈해지는 마음이 좋았다. 일전에 공익 광고 공모전을 준비하면서도 괜히 다시 한번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모든 이미지가 복제되는 현대의 예술에도 아직 아우라(Aura)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광고 역시 그 예술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대량생산시대가 도래한 이후 광고는 인류가 가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일종으로 자리잡았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마케팅 활동을 부정하지만, 그러기에 이미 우리 곁엔 너무나 많은 광고가 일상적으로 자리잡았다. 영상으로, 사진으로, 음악으로, 이미지로. 그리고 대부분의 광고들은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은연 중에 강화하고, 설파한다. 그래서 가끔은 불쾌하기도, 강요당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가끔은 지친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마음을 비우게 되기도 한다. 이중적일까, 항상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는 광고를 만나는 것은 묘하게 지루하지가 않다.


 가끔 길을 걷다 지나치는 광고를 주시하라. 그 곳에는 우리 사회의 폭력, 아름다움, 부조리, 성차별, 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이 담겨있다. 도시의 밤은 불빛으로 시작한다.

 

 

 

 

 

경희대학교 대학주보 마지막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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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바람부는 인사동 : 10시 / 회기동 단편선


guitar, organ, programming, vocal, recording by 박종윤

fx, mixing by 허민

recording at 朴귤

mixing at 찜통

 

06 8 26 ~ 06 8 29

 

만날 수 있을까 

네가 걷던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을까 

천천히 선명해지는 흠집

 

막연한 기대감

 

추억, 저 곳 서면 

단홍색이 어울렸던 가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을까 

지금 이 문으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을까

 

바람오는 길목에서

나는 너를 찾고 있어

나는 너를 묻고 있어

나는 너를 잡고 있어

 

http://cyworld.com/hoegidong

http://blog.jinbo.net/hoegidong

http://blog.naver.com/danpyun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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