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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의 <마흔아홉 통의 편지>를 읽고

당신, 혁명을 꿈꾸시오? 요즘 부쩍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다. 며칠 전에도 어떤 활동가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럴 때면 그냥 웃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질문을 피해 나갔다.
꿈을 꾼다는 점에서는 맞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어떤 혁명인지 나는 잘 모른다. 총파업과 봉기, 정치권력의 접수,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 수학 공식처럼 잘 짜여진 혁명론을 '학습'하면서 꿈을 키워 가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수많은 문명의 가치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짧은 경험이지만,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혁명을 위해 더 복잡한 공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혁명을 이제는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속시원하게 답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과연 무엇이 혁명인지 알 수도 없게 된다.

 

세상이 복잡해지다보니 여러 가지 웃지 못할 일들이 많다. 대통령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해 손 발 다 걷어 부치면서도 시민혁명이라고 외치고 있다. 안타까운 건 이렇게 개혁이 혁명으로 둔갑한 세상을 살면서도 가슴이 먹먹한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은 소수다.



그리고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의 소설이다. 작가 후기에서도 밝혔듯이 '손석춘의 독자는 소수지만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라는 조세희 선생의 평가가 딱이다. 그런데 바벨탑이 무너진 자리에서 손석춘은 도대체 어떻게 혁명을 하자고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는가?

 

이 소설은 <아름다운 집>, <유령의 사랑>에 이은 손석춘 연작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손석춘은 3부작을 통해 분단공간에서 고뇌하는 사회주의자, 유령이 된 맑스 그리고 빨치산과 그 후예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혁명이란 무엇이고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진지한 고민을 던진 작가는 죽은 맑스를 부활시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냥 거기까지였으면 혁명을 꿈꿨던 이들의 후일담 소설이라 했겠지.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물어왔다. 그것도 아주 격정적인 방식으로.

 

<마흔아홉 통의 편지>는 주인공 홍련화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소설의 대강은 이렇다. 스웨덴으로 입양된 주인공이 생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찾던 중 어머니가 빨치산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홍련화의 뿌리 찾기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호랑이었던 이현상과 주변 인물들에게로까지 가게 된다.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를 이루려 했던 투사들의 열정과 불굴의 의지. 그러나 패전의 책임, 숙청과 배신 그리고 죽음. 살아 남은 투사들의 고뇌와 방황, 사랑 속에서 남한의 현대사의 희비극이 사회주의자의 눈으로 조망된다.

 

눈치챘겠지만 49통의 편지는 49재와 같은 의미로 빨치산 투사들의 복락을 비는 글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제문이 아니라 질문이다. 련화가 편지를 보내는 '당신'은 이 소설의 독자들이고, '세상을 바꾸려는 깨끗한 열정이 당신 안에 타오르고 있지요'라며 다시 물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석춘은 3부작을 통해 왜 혁명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구성해 내고 있다. 해방과 분단의 모순을 넘어서, 맑스의 사랑과 꿈을 통해 해방의 미래를 살려내고, 빨치산 투사들이 역경을 헤치고 투쟁하며 산화해 간 바로 그 자리 그 길에서 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현상의 심장이 멎은 이 지점에서 여러분이 다시 길을 찾기 바랍니다. 월북했던 이현상이 왜 다시 남쪽으로 왔는지, 그가 남쪽에서 정녕 걷고자 한 길은 무엇이었는지,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성찰해보시기 바랍니다. 이현상의 심장이 멎은 여기 이곳에서 말입니다."

 

......

 

9월 18일은 이현상 동지의 기일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추석 연휴하고 겹쳐 버렸는데...아무래도 매년 이날에 지리산에 가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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