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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특별했던 시월의 마지막 밤

오늘, 시월의 마지막 밤이다.

글쎄... 오늘 같은 날은 누구든 뭔가 낭만적인 기억 한 두가지 정도는 가슴에 담고 있을 법한 그런 날이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하지만 서른 몇 번이나 넘게 경험했던 시월의 마지막 날 중에서 가장 특별한 기억은 안개낀 분위기에 로맨틱한 대화를 나누던 그런 것은 아니다.


2001년 10월 31일.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진균 선생님께서 선생님이 계시는 과천으로 오라고 부르셨다. 그 때 나는 사회진보연대라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그 단체 대표를 맡고 계셨다. 나와, 함께 상근을 하고 있었던 다른 활동가와 빨리 과천으로 오라 하셨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대낮부터 활동가들을 오라가라 하실 분이 아니라서 어떤 일 때문인지 무척 궁금했다. 정확이 말하면 불안했다. 당시 편안하게 선생님을 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 불안했다. 선생님께서 대장암 판정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모두가 그 소식에 슬퍼하고 안타까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뵌다는 건 반갑기도 하지만 그만큼 무거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좋지 않은 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성폭력으로 제소된 동국대 교수가 교육당국으로부터 해임을 당했는데, 그 사람의 복직서명에 선생님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과천에 도착해서 선생님을 뵙자 다짜고짜 뭐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시며 우리를 끌고 고기집부터 들리셨다. 선생님은 매번 그러셨다. 활동가들을 볼 때마다 삼겹살에 소주한잔 씩은 꼭 사주셨다. 돈이 없고 바쁘기도 해서 이래저래 잘 먹지도 못했던 활동가들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던지 정말로 볼 때마다 고기를 사주셨다. 또 그 맛에 우리들은 선생님 오실 때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으니...


그런데, 그 대장암이란 것이 십년이상 삼겹살에 소주를 먹으면 대장암 걸릴 확률이 절반 가까이 된다고 한다. 결국 선생님 대장암 걸리게 한 공범이 되었으니, 그 고기가 잘 넘어 갈 리가 있는가. 하지만 선생님은 별로 게의치 않으셨고 잘 먹고 많이 먹으라고만 하셨다. 


고기집을 나오니 어스름히 저녁이 되었다. 동네를 잠시 걷고서는 이 번에는 술을 한잔 사겠다하여(선생님은 병 중이라 술을 안하셨지만) 우리는 술집으로 갔다. 그런데 왜 우리를 부르신 건지 계속 궁금할 따름이었다.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여러 가지 일상 잡사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 꺼내 놓듯이 옛날 사건들과 관련된 이야기, 책에 대한 이야기, 공부하시던 이야기 등등... 좋은 이야기, 즐거운 대화였지만 대체 왜 부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의중을 헤아려보려고 해도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분위기를 심리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 몇몇을 더 불렀다. 사람들이 많아지면 뭔가 하시려던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솔직히 듣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다. 동국대 성폭력 교수의 복직서명을 철회하겠다는 그 말씀을 너무 듣고 싶었다. 혹시 그 이야기 하시려고 부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김진균 선생이 복직서명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많은 활동가들이 반발하였고 내부에서도 그 문제를 논의하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같이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활동가 몇몇이 선생님과 논의하기로 하였고 그 책임을 맡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모두 네차례 토론에 임해 주셨다. 생각해보라, 대장암 판정을 받고 요양 중인 사람이 몇 시간씩 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사람으로서 못할 일이다. 한 두 시간이 지나자 선생님 얼굴은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활동가들의 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논의를 그만두어도 된다고 하셨는데도 선생님께서는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몇 번을 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는 우리가 더 보지 못해서 나머지 이야기는 필담으로 나누기로 하고 만나서 논의하는 것은 그만 두었다.


하지만 선생님도 당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성폭력 사건과 교육당국의 교수직 해임건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의 우려도 많았고 누구누구가 가서 설득해 보자는 이야기, 어느 분이 가서 만나셨다는 이야기... 빨리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여러분들이 애쓰시고 계셨지만 여전히 선생님은 복직서명을 철회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런 일들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시월에, 그것도 마지막 날에 갑자기 보자하셨으니...


저녁 때 몇 분이 더 오셨고 마침 서울대 민교협 선생님들이 관악산 등산을 갔다가 뒤풀이 하는 중에 만나게 되어 판이 무척 커졌다. 아예 바깥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노래도 부르며 시월이 가는 소리 가을을 보내는 아쉬움을 그렇게들 털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보냈다. 처음에 보자했던 둘에게는 차나 한잔 더 하자시며 사모님도 오시라고 하여 찻집에서 넷이 도란도란 차를 마시며 시월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두 분이 만나게 된 이야기, 살아오셨던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 그러나 이 시간도 잠시. 막차가 끊기기 전에는 가야하고 그 날 선생님이 너무 무리를 한 듯해서 들어가봐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도대체 우리를 왜 부른지 도통 알 수가 없었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 궁금한나머지 결국 우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생님, 오늘 왜 보자하신 거예요?”

“글쎄, 시월의 마지막 밤을 너희들과 보내고 싶어서...”


그리고 이틀후 선생님께서는 복직서명을 철회하셨다...

 

그 얼굴 다시 뵈니, 오늘 밤 또 이상하게 눈물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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