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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16
    박노자 교수님이 나오는 어떤 여행기행문
    Joshua Lee
  2. 2012/08/15
    [JoshuaLee]마르크스, 공산주의를 비판하다?
    Joshua Lee
  3. 2012/08/15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Joshua Lee

박노자 교수님이 나오는 어떤 여행기행문

  • 등록일
    2012/08/16 16:44
  • 수정일
    2012/08/1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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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만 해도 라면을 나는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사용되는 재료가 신통치 않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들려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라면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라면 열봉지를 김포공항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페테르에 이를

때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손에 들고 다녔으니 그 고지식하고 바보스런 행위를 변명할 길이 없다. 평소 나는 책

한권도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해 누가 밖에서 자기 저서를 사인해 주는 걸 제일 싫어한다. 그나마 라면은 무게가 적어

서 다행이었다.

러시아를 가는데 웬 라면? 그 사연은 이렇다. 열봉지의 라면은 나의 비상식량이었다. 내가 러시아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말 많은 아파트의 이웃 아주머니들이 앞다투어 경고와 조언을 쏟아냈다.

"00아빠 러시아 가신대며? 아유 그런데를 지금 왜 가실까? 우리 애 아빠가 그러는데 거긴 지금 식당에 먹을 것도

없고 거리에 굶은 거지들이 우글우글한데요. 쫄쫄 굶으며 여행하지 않으려면 라면이라도 가져가셔야지."

"여기 라면 가져가면 거기서는 금값이야. 귀찮더라도 라면 한 상자 꼭 가져가시라고요."

러시아를 가면 굶게 된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졌다. 집에서도 이왕 갈거면 구급식량만큼은 반드시 휴대해야 한

다고 강조했다. 하는 수 없이 라면 한상자를 열봉지로 타협해서 휴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빵 귀신이다. 모스크바에서 검은 보리빵에 캐비어를 발라서 먹으니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았다. 보리빵

은 호텔이고 거리고 먹고 남을만큼 흔했고 캐비어는 아직 폭등하기 전이라 원하면 충분히 제공되었다. 나의 식성으로

 볼 때 휴대한 라면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습관이 되어 그 라면 열봉지를 버리지도 못하고 페테르

까지 들고 갔던 것이다.

 

 기차는 페테르의 모스크바역에 아침 일곱시쯤 도착했다. 허름한 버스 한대가 역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는

이른 오전이라 조금 쌀쌀했으나 햇빛이 비치는 걸로 보아 그닥 불쾌하지는 않았다. 유난히 요동치는 밤기차에 시달린

데다가 수면부족으로 일행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각자 짐을 들고 버스에 오르자, 사람들은 잠시라도 부족한 수면을

채워보려고 눈을 붙였다. 그러나 오래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누군가가 버스에 올라와서 그날 하루 일정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의 한국말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았던 것이다. 예사롭지 않다는 말보다 차라리

경이로왔다고 하는 게 적절하겠다. 뒤에 나는 이 러시아인의 한국말 어휘가 작가인 나 보다도 더 풍부한 것 같다는

농담을 동료들에게 했던 것 같다.

 

눈을 떠봤더니 뜻밖에도 겨우 스무살 안팎의 홍안의 러시아 청년이 정장을 단정하게 갗춰입고 우리 앞에 서 있었다.

 페테르부르그 대학 동양어과 2년생인 불라지미르 티호노프가 이 도시 안내자로 우리 앞에 첫 선을 보인 순간이었다.

아마 그에게도 한국의 작가 집단과의 이 우연찮은 상면은 대망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여름 휴가기간을 이용해

잠시 여행사 일을 돌봐주고 있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깨끗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첯눈에도 그가 착하고 성실한 청년

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일행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유창한 한국말 구사능력은 보통 외국인이 학습

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한계치를 우리가 보기에 훨씬 초과한 것이다. 지나치는 건물, 지형에 대한 그의 해설은 보통

가이드의 해설이라기 보다 도시역사를 전공한 교수님이 등장해서 한바탕 현장강의를 베푸는 것만큼 자상하고 정확

하고 세밀했다. 우리 모두는 이 경이로운 이방의 청년에게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호텔로 찾아가기 위해 버스가 네바강을 지나갈 때 저 멀리 바라보이는 페트로 파블로스크 요새에 대한 설명, 그리고

네바강 한켠에 아직도 떠있는 순양함 오로라 호의 유래와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해설을 통해 블라지미르 티호노프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증명되었다. 그렇다고 본인이 으쓱해지거나 자만하는 것 같은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었

다.  여행의 혼돈에 잠시 취해있던 우리는 그의 학술적?인 해설을 듣고 볼세비키 혁명의 개막을 알리는 오로라호의 

축포소리가 당장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정말 이 가이드는 모스크바의 그 심통쟁이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가이드 한사람이

바뀌었는데 여행의 격조가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다니! 국가지도자라는 것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신참 가이드에 너무 정신이 팔린 탓인지 그날 묵게된 호텔엔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필경

페테르의 3류 호텔일텐데 다만 모스크바 경우처럼 유녀들이 밤낮으로 출몰하지 않았던 것만 어렴푸시 기억에 남

아있다.

 블라지미르는 당연히 일행들 사이에 인기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 그 경향이 더욱 심했다. 이때부터

일행들은 페테르의 명소나 유적의 유래에 관한 질문 보다 엉뚱하게 블라지미르 개인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퍼부

었다.

 한국말은 어떻게 배웠느냐?

대학에서 뭘 전공하느냐?

순수 슬라브가 아니면 어떤 계통?

서울에 한번 오고 싶지 않은가? 오겠다면 언제쯤?

애인은 따로 있는가?

이런 질문은 그 도시 일정이 끝날 때까지 멈춰지지 않았다.

 

이 신참 가이드의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에 답하는게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번거롭게 하는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인기를 끈다는 게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는 사례다. 그와 함께 사진을 찍겠다는

지망자가 너무 많아서 그는 네바강 다리에서나 여름궁전의 분수에서는 누구와 먼저 사진을 찍어줘야 할지 몰라

몹시 곤혹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도 물론 이 멋진 이방의 청년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행동이 굼뜨고

비위가 약한 나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이 청년과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는 더더욱 포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여류 작가님들이 항상 그를 독차지하고 좀처

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성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페테르의 그 일정이 다 끝나갈 때까지 블라지

미르 티호노프와 다만 십분, 아니 오분이라도 이야기를 나눌만한 시간을 끝내 포착하지 못했다.

 

엉뚱하게 가이드 이야기로 지면을 많이 소모했으나 페테르란 도시에 관해 말을 하자면 사실 끝이 없을 것이다.

이 도시 자체가 역사와 문화의 박람회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 것이다. 그래도 네브스키 대로의 끝자락 한

모퉁이에 있는 네브스키 사원 얘기는 빠트릴 수가 없다. 네브스키 대로는 도시의 중심도로이고 큰 건물과 여러

가지 상점들, 그리고 푸쉬킨이 결투하러 가기 직전에 들러 마지막 차를 마셨다는 푸쉬킨 카페 건물이 여기에

있다.

네브스키 사원은 서울의 파고다 공원 보다 약간 넓은 지역에 조성된 문화예술인들의 유택공원이다. 여기에

도스뜨엪스끼, 보로딘, 차이꼽스끼,무소르그스끼,우화작가인 끄롤로프 등 수많은 예술인들의 유택과 기념비

가 모여있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는 요즘은 모르겠으나 초기에는 주로 러시아 음악을 담은 CD를 파는 노점

상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도스뜨엪스끼 기념상이 단연 작가들에겐 제일 인기가 있었고 너나 없이 증명사진?

을 찍었다. 나는 장미 한 송이를 사서 따로 차이꼽스끼의 기념비 앞에 바쳤다. 그의 <피아노 삼중주>곡을 비

롯, 러시아 풍경을 담은 그의 피아노 소품들 등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페테르를 말하면 세계3대 미술관인 에르미따주 미술관, 지상의 천국이라는 여름궁전, 유럽의 세번째 큰 성당

이라는 성 이삭 성당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에르미따주에는 렘브란트와 루벤스의 그림, 피카소와 야수파

인 마티스의 그림이 있고  여름궁전은 도심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별천지인데 규모나 짜임새가 프랑스의 베

르사이유와 비견해도 못하지 않으며 그것을 모방한 것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모습이 닮아 있었다.

거대한 돌기둥 수십개가 받치고 있는 성 이삭 성당을 보면 대체 이 거대한 돌기둥을 어떻게 세웠는지 믿어

지지 않을 정도로 놀랍기만 했다. 옆에 서있기만 해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그 돌기둥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러나 페테르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간은 역사박물관의 밀랍인형들과 만났던 시간이었다. 그곳에는 러시아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의 실물대 밀랍인형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는데 실제 인물로 착각할 정도로 제조기

술이 뛰어났다. 블라지미르는 레닌과 트로쯔끼와 지노비에프의 실물대 인형을 앞에 두고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초기와 후기 진행과 갈등사에 관해 한차례 강좌를 펼쳤는데 그 시간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이 도시

에 온 보람은 충분했다 싶을만큼 그 강좌내용은 탁월한 것이었다. 밀랍 인형 전시실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일행들은 잠시 조금 전 들었던 러시아 현대사를 재음미하느라고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었다.-계속

 

출저-http://theacro.com/zbxe/?mid=special1&page=11&document_srl=557714

 

박노자 교수님(불라지미르 티호노프)이 나오는 여행기입니다. 저도 박노자 선생님의 글방을 돌다가 발견했습니다.

[JoshuaLee]마르크스, 공산주의를 비판하다?

  • 등록일
    2012/08/15 18:43
  • 수정일
    2013/02/2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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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고 있다. 그리고 제3 초고 제2 장 사유재산과 공산주의를 펼쳤을 때 나는 '드디어 마르크스가 이상사회를 언급하겠구나'라는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마르크스는 이 장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해 끝까지 이 장을 읽은 나는 마르크스가 왜 공산주의를 비판했고 마르크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역사의 운동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다. 마르크스가 어떻게 공산주의를 비판했고 마르크스가 원하는 역사의 운동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공산주의는 그 최초의 형태에서는 사유재산의 보편화와 그 완성에 지나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이중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물적 소유의 지배가 너무 크게 공산주의에 맞서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으로서 만인에 점유될 수 없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공산주의는 폭력적 방법으로 재능 등을 무시하려고 하고, 육체적이고 직접적인 소유를 생활과 생존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긴다. 노동자라는 규정은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인에게 확장된다.  (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초고>) 

 

 여기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최초의 형태에서 사유재산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보편화가 일어나도 아직은 소유의 관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최초의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없는 것, 즉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밖에 없는 재능, 개성 등을 부정하고 이러한 것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억누르려고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마르크스의 예언은 실제로도 역사의 과정을 무시하고 성급하게 공산주의체제를 수립한 소련, 동유럽, 이북 등의 구 공산권 국가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또한 마르크스는 성적인 예시까지 들어가며 공산주의를 조롱했다.

 

 

 사유재산을 보편적인 사유재산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이 운동은 마침내는 결혼을 여성의 공유로 대치하여 이에 따라 여성을 공동체의 공유재산으로 하는 동물적인 형태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여성공유라고 하는 이 사상이야말로, 극히 조야하고 몰사상적인 이 공산주의의 공공연한 비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결혼으로부터 벗어나 보편적인 매춘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부의 전체 세계, 즉 인간의 대상적 본질의 세계 전체가 사적 소유자와의 배타적인 결혼 관계에서 벗어나, 공동체와의 보편적인 매춘 관계로 들어간다. (중략)힘으로서 조직된 이런 보편적인 질투는 소유욕을 만들어 내는 숨은 형태 바로 그것이다, 다만 거기에서는 소유욕이 다른 방법으로 채워질 뿐이다.(중략)조야한 공산주의자란 최소한의 이런 상상된 질투와 평균화의 완성 밖에 되지 않는다.(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초고>) 

 

 

  앞에서 말했듯이 마르크스는 성적인 비유를 들며 공산주의를 조롱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예시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은 결혼을 여성 공유로 대치하여 여자들을 공동체의 매춘부로 만들려고 하는 동물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조롱하고 있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들은 남들이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질투, 욕심에서 나온 욕구를 사회적으로 해소하려는 것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원하는 역사운동은 무엇일까?

 

 

 분명히 공산주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긍정이며, 따라서 바로 가까이에 다가온 역사적 발전에 필연적인 인간의 해방과 회복의 현실적인 계기이다. 공산주의는 바로 가가이에 다가온 미래의 필연적인 형태이며, 활동적인 원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공산주의 그 자체는 인간적 발전의 목표는 아니다.(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초고>)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공산주의는 자연스러운 역사적 발전운동의 한 과정일 뿐 인간적 발전의 목표의 최종점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마르크스를 이상가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상가가 아니다. 그는 역사의 운동과 인류의 전진을 통찰한 예리한 학자이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 등록일
    2012/08/15 16:12
  • 수정일
    2013/02/2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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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의 두 영웅이다. 그러나 둘의 행보는 갈라졌다. 한 명은 자신의 이상을 향해 멈추지않고 돌진하다가 볼리비아의 총에 죽음을 당했으며 또 한 명은 쿠바를 50년 가까이 통치하며 최근에 은퇴했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각각 이상주의적 혁명가와 현실주의적 혁명가의 대표적인 예가 된 그 둘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썸네일

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오른쪽)<사진1>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이다. 체 게바라란 이름에서 체는 스페인어로 사람을 부를 때 쓰는 ‘어이’ ‘이봐’ 정도의 의미를 지난 말로 체 게바라가 혁명에 뛰어 들면서 스스로 이름을 이렇게 고쳤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중상류층 백인 가정 출신이다. 1930년대 아르헨티나는 세계 경제순위 7위를 할 정도로 부유한 나라였고 남미에서 가장 잘 살았다. 하지만 이 풍요는 아르헨티나의 백인 상류층들이 구가하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남미 민중들과 비슷하게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양친은 바스크와 아일랜드계의 백인으로 남미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톨릭을 믿고 있는데 반해 그의 어머니는 무신론자였다고 한다.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와 안정된 경제적 환경속에서 체 게바라는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난 데다 2살 무렵 극심한 폐렴을 앓은 탓에 평생 매우 중증의 천식을 지병으로 가지고 살았다. 체 게바라의 양친은 몸이 약한 아들을 위해 천식 치료에 좋은 곳으로 몇 번이나 이사를 할 정도로 장남 체 게바라에게 정성을 쏟았다. 천식으로 호흡곤란이 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늘 산소 흡입기를 소지해야만 했지만 체 게바라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럭비나 수영 등 힘든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지병을 조절해갔다.

 

열일곱살의 체 게바라<사진2>

 

 스물 다섯 살에 의학박사학위를 딴 후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체 게바라는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진보정권을 이루어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하던 과테말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체 게바라는 자신의 삶에 있어 두 가지 큰 변화를 맞는다.

  하나는 페루에서 학생운동을 벌이다가 과테말라로 망명 온 3살 연상의 여성 혁명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 결혼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 선거로 이룬 과테말라의 아루벤스 진보정권이 미국자본의 지원을 받은 아르마스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체 게바라는 비폭력적 개혁은 한낮 꿈일 뿐, 남미 민중을 위한 진정한 혁명은 무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썸네일

남아메리카 민중을 위한 혁명은 무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체 게바라<사진3>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동쪽 끝 올긴 주의 한 소도시에서 출생. 1945년 말 아바나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침공에 합류하기도 하였였다. 1948년에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였다. 1953년 당시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5월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바티스타 정권 타도 계획을 세웠다. 

 

썸네일

젊은 피델 카스트로<사진4>

 

  1955년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일다 가데아의 소개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를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아는 강인하면서도 온화한 새로운 지도자’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해방 운동에 동참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86명의 동지들과 휴양용 요트를 개조한 배에 올라타 멕시코에서 쿠바로 떠났다. 그러나 좋지 않은 기상상태와 이들의 상륙을 간파한 바티스타정권의 공격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12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 들어가 이때부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다. 산간지역을 전전했지만 곧이어 쿠바 내 반정부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게랄라의 세력은 급성장 하였다. 마침내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로 망명하면서 반군들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혁명을 성공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가 되었고 체 게바라는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쿠바국민이 되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 정부의 각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피델 카스트로(맨 왼쪽)과 체 게바라(맨 오른쪽)<사진5>

 

  1959년부터 1965년까지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 정국에서 라 카바니아 요새 사령관, 쿠바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 장관 등을 거치며 서방세계로부터 쿠바의 두뇌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5년 4월,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돌연히 사라진 것에는 그가 권력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더 많은 민중을 혁명으로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쿠바 혁명 성공 후 피델 카스트로와의 불화가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체 게바라는 쿠바가 미국이나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경제적 독립을 하기를 원했지만 피델 카스트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강대국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는 쪽을 쉽사리 선택했고, 이는 체 게바라의 신념과 한배를 탈 수 없는 것이었다.

  쿠바에 작별을 고한 체 게바라는 돌연히 아프리카 콩고로 가 혁명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혁명군은 체 게바라가 이때껏 접해온 남미사람들과는 달랐다. 아프리카만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체 게바라는 실패하고 다시 남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금 볼리비아의 혁명에 가담했다.

  당시 볼리비아는 1952년에 국민 혁명이 성공했지만 1964년 바리엔토스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국민혁명정부가 무너지고 군사독재로 접어들고 있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반독재 혁명군에 참가하여 남미대륙에서 혁명운동의 거점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체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은 볼리비아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외국인인 체 게바라보다는 볼리비아인 혁명 대장을 원했고 혁명군 내에서도 조금씩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체 게바라의 지병인 천식은 고산지대인 볼리비아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농민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실패한 체 게바라는 산악지역을 전전하며 게릴라 활동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1967년 체 게바라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독재정권의 정부군에 체포되었다. 부상을 입은 그는 마을 학교에 포로로 잡혔다. 체 게바라의 남미에서의 인기와 그의 활동으로 남미 국가들을 장악하는데 골머리를 앓던 미국은 체 게바라의 총살에 동의했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마리오 테란이라는 볼리비아의 하사관의 손에 의해 사살되었다. 

 

볼리비아에서의 체 게바라<사진6>

 

  한편 카스트로는 총리에 취임한 뒤 토지 개혁,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 등의 평등 정책을  실시하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강제로 접수하는 등 사회 개혁을 진행하였고, 그 해 9월 제1차 아바나 선언을 발표하여 라틴 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그 후 카스트로는 1976년 국가 평의회 의장(원수)에 취임하여 당·정부·군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 등 동구권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쿠바의 국가원수인 피델 카스트로는 2003년 3월 국가평의회 의장에 재선출되어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비롯해 각료평의회 총리·쿠바공산당 제 1 서기·혁명군 총사령관 등을 겸임하고 있으며, 국민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으며 최고지도자의 지위에 있다. 또한 활발한 대외 정책으로 제 3 세계에서도 지도적 존재가 되고 있다. 쿠바 공산정권 수립 이래 미국의 제재조치에도 불구, 다른 나라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001년 카스트로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쿠바는 작고 가난한 나라지만 여전히 개발도상국들을 돕기 위해 의사, 기술자, 봉사 요원들을 파견하느라 계속 애쓰고 있다. 그리고 2008년 2월에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사임하고 권력을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겼다.

 

노년의 피델 카스트로<사진7>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둘 다 쿠바 혁명의 영웅이며 자신이 옳다 생각한는 방법으로 혁명을 진행했다. 체 게바라는 세계 사회주의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죽는 날까지 콩고, 볼리비아 혁명에 참여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민생 안정을 명목으로 쿠바에서 총리 17년, 평의회 의장 32년의 권력을 잡으며 쿠바의 국민들에게 토지 개혁,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 등의 평등 정책을  실시하고, 의사, 기술자, 봉사 요원들을 파견하며 세계의 혁명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의 민생 안정 정책과 체 게바라의 총살로 끝내 쿠바 혁명은 한 나라에 정체되고 말았다.

 

썸네일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사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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