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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귄위 인터뷰 1 - 쇼바에겐 남편이 없다.

  • 등록일
    2011/05/10 15:26
  • 수정일
    2011/05/10 15:26

쇼바에겐 남편이 없다.

□ 프롤로그

1999 년 한국에 들어온 방글라데시인 쇼바, 지금 쇼바 곁엔 남편이 없다. 대신 열 살의 씩씩한 아들이 있다. 남편은 1994년 한국에 들어왔다. 2002년까지 8년간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일하다 다른 회사로 옮긴지 7일 만에 사망했다. 사인은 뇌출혈이다. 동료들과 사장, 쇼바는 안다. 부인의 입국비용과 생활비, 이제 막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밤낮 안 가리고 몸을 부려야 했던 그가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는 것을. 그러나 사장은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쇼바는 당장 누구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될지 몰랐다.

아 들 라핀은 몸이 약했다. 방글라데시로 가면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 어떻게든 견디고 싶었다. 하지만 아픈 아이를 데리고 단속에 떨며 지내야 하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게다가 불경기로 일자리까지 없었다. 결국 2005년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심장이 약한 라핀의 치료를 위해 다시 2007년 한국 땅에 왔다. 공장 한 켠 구석진 방에서 생활한지 3년이 지난 2010년 8월 31일, 라핀과 쇼바는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어차피 한국 땅에 살 수 없는 몸, 라핀이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방글라데시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떠났다. 라핀이 좋아하는 고추장과 쌈장을 챙겨서.

□ 라핀과 그의 엄마, 쇼바

라핀의 국적이 궁금한가?

한 눈에 보기에도 초등3학년이라 하기엔 너무 왜소했다. 라핀은 쇼바가 한국에 입국한 지 2년 만에 태어난 아들이다. 1.7kg으로 세상에 나와 한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살아야 했다. 월 소득 130만원으로 한푼 두푼 모아두었던 돈 1,500만원을 고스란히 병원비로 지불했다. 간신히 인큐베이터는 벗어났지만 심장과 간에 이상이 있었다. 2005년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도 라핀의 치료 때문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다. 방글라데시로 돌아간 뒤 또 아프면 어떻게 해야 될지 지금으로선 대책이 없다.

라핀은 1,2학년 때까지도 아이들로부터 “너희 엄마는 한국에 돈 벌러 왔지? 어서 돌아가라”며 놀림을 받곤 했다. 그래서 일까? 라핀이 유일하게 받은 사교육은 태권도였다. 월 9만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지만 쇼바는 이 돈이 아깝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음식보다 미역국과 된장국을 좋아하는 아이, 한국말을 잘 하냐고 묻기가 무색할 정도로 유창한 다국어 습득자, 피부색만 다를 뿐,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그 아이에게 미등록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어느 국적이냐고 묻는 질문은 어쩐지 폭력 같다.

쇼바도 한때는 누군가의 부인이었다.

쇼 바는 방글라데시에서 통계학을 전공했다. 대학생활 중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은 한국으로 떠났다. 5년의 시간이 지나고, 남편은 한국 돈 400만원을 브로커에게 주고 쇼바를 초청했다. 그때가 1999년으로 쇼바 부부는 드디어 한 가정을 이루었다. 한국에 들어와 적응이 어려웠던 쇼바는 임신중독증을 앓았다. 임신하면서 일을 할 수 없었고, 남편 혼자서 일해야 했다. 그렇게 재회한지 3년 만에 남편은 과로로 사망했다. 그때 라핀은 3살이었다. 지금도 아쉬운 건 단속이 두려워 남편과 가까운 시내로 외출 한 번 못해 본 일이다.

무조건 참고 견뎌야 했다

라핀을 임신한 동안 임신중독증을 앓았다. 낯선 땅과 언어, 24시간 돌아가는 기계음,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미등록 신분, 공장 골방,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200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심한 몸살과 고열로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졌다. 2009년엔 결석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만성 소화불량으로 매일 소화제를 먹어야 했다. 병원비가 너무 비싸 출국 직전까지 방글라데시에서 언니가 보내 준 소화제를 먹었다. 야간 일로 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견딜 만했다. 아니 견뎌야 했다.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공장에서 일하다

라 핀과 쇼바는 공장에 붙어 있는 조그만 방에 살았다. 24시간 내내 기계소음이 들리는 곳이다. 화장실과 부엌은 다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사용했다. 2007년 다시 한국에 왔지만 경기가 좋지 않아 일자리가 없었다. 이곳저곳 아르바이트를 하다 2009년 6월부터는 한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남편이 8년 동안 일했던 회사였다.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보상도 해주지 않은 회사라고 생각하면 정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점이 미안한지 사장은 잘 대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주는 퇴직금을 쇼바만 챙겨주었다. 쇼바는 사장님을 오빠처럼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시급이지만 야간작업이기 때문에 한 달에 많을 때는 200만원까지 벌 수 있었다. 생활비 제하고 나면 120만원이 남았고 모두 저금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방글라데시로 돌아가면 가게 하나 얻을 만큼의 돈은 모았다.

“하느님, 오늘도 엄마가 잡혀가지 않게 해주세요..”

쇼 바는 18개월 동안 거의 매일 저녁 7시 출근해 아침 8시 퇴근했다. 일요일도 거의 없었다. 일요일 혼자 작업할 때면 슬며시 눈물도 나지만 라핀만 생각하며 달렸다. 휴식시간에 잠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고 있는 라핀을 꼭 안아주는 것이 유일한 돌봄이었다. 아침에 퇴근해 라핀에게 밥을 먹이고 학교차에 태워 보낸다. 그런 일상에 익숙해질 법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애틋함이 더했다. 어차피 이곳에 익숙해진다 한들, 그리고 라핀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느낀다한들 미등록 신분이고, 이곳은 떠나야 할 나라일 뿐이었다. 라핀은 또 다른 나라, 엄마의 나라로 돌아가 적응해야 한다.

엄마가 출근하는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라핀은 혼자다. 주로 TV를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든다. 쇼바는 아침에 돌아와 잠들어 있는 라핀을 볼 때가 가장 속상하다고 했다. 낮에 외출할 때 쇼바는 항상 라핀과 함께 한다. 아이가 같이 있을 때는 단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을 라핀도 잘 안다. 집 근처 앞길에만 나가도 라핀은 엄마를 보디가드처럼 따라 붙는다. 매일 아침 라핀은 기도한다. “하느님, 오늘도 엄마가 잡혀가지 않게 해주세요.”
8월 31일 라핀과 쇼바는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쇼바는 라핀이 의사가 되길 원했다. 기회만 된다면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대학교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다. 훌륭한 의사가 되어 방글라데시로 돌아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디나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다 있어요.”

한 국 사람들이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 것 같던가요? 라고 묻자 “방글라데시건 한국이건 어디나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있어요.”라며 경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람마다 다를 뿐, 특별히 한국인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주민들의 현실을 아직 모른다고 해야 할지, 방글라데시 특유의 낙관성이라고 해야 할지 잠시 난감했다. 대신 한국정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미 등록 노동자는 비자만 없을 뿐 죄 지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성실하게 10년 이상 일한 이주노동자들에게 불법 딱지 대신 편안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모가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음 편히 학교에 가고, 학원도 다닐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플 때 치료비가 무서워, 단속이 무서워 병원을 못 가게 되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그만 가게, 큰 희망

많은 돈은 아니지만 방글라데시에 사는 엄마 집 앞에 조그만 가게 하나를 사 두었다. 식료품 가게를 할 생각이다. 한국에서 더 벌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라핀을 위해서는 지금 떠나야했다. 얼마 전 TV에서 스리랑카인 엄마가 단속에 걸려 보호소에 걸려 들어간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그때 4학년이던 아들이 스리랑카로 돌아가 적응하지 못해 너무 힘들어 한 장면을 보고 라핀이 4학년이 되기 전 반드시 떠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는 1월부터 학기가 시작된다. 지금 들어가 적응해야 1월에 무사히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어느 엄마가 자식에 대해 애틋하지 않을까만, 쇼바의 라핀에 대한 사랑은 유난했다. 남편과의 짧은 인연과 인큐베이터에서 첫 숨을 내쉬어야 했던 아들과의 첫 만남이 그토록 만들었을 것이다.

□ 에필로그

행복지수 1위 방글라데시인?

“한 국에 왜 왔냐?”는 질문에 쇼바는 “방글라데시엔 일 없어요. 돈 못 벌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행복지수 1위 나라 사람도 돈 앞엔 별 수 없구나, 싼 노동력을 그냥 먹으려는 자본주의 한국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달려든 이주 노동자 현실의 결정판이지 싶었다.

그런데 쇼바의 다음 말이 의아했다. 다른 이주민들을 만나보니 방글라데시가 정말 좋은 나라인 것 같다고 했다. “의술이 부족해 치료라도 받을라치면 먼 나라까지 원정을 가야 하는데 그래도 좋냐?”고 묻자 똑같은 대답이었다.

정 말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자본과 편리에 물든 인간들이 느낄 수 없는 비밀스런 행복의 묘약을 갖고 있는 걸까? 뱁새가 어찌 황새의 뜻을 알까 하며 그냥 묻어두어야 할까? 쇼바에겐 미안하지만, 그건 타향살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 일 뿐, 특별한 묘약 때문은 아닐 듯싶다. 그들처럼 가난해 보지 않고, 그들처럼 배고파 보지 않고 계량화된 질문지를 가지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타자 특유의 오만한 시선일 수도 있다.

불법노동자로 만들고 얼마나 부자나라 될까?

배 고픈 것은 본능이고, 본능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 또한 너무나도 본능적이다. 그들에게 배고파도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딱지는 허무맹랑하다. 이런 신비주의 때문에 사업주들은 노동력을 착취한다. 감히 한국 노동자들에겐 내밀 수조차 없는 조건을 내밀고 감사하라고 한다. 이들의 노동력 없이 중소기업은 굴러갈 수 없다. 중소기업 저질 체력의 주범인 정부는 체질개선의 노력 없이 이주노동자를 불법 노동자로 만들었다. 내재된 불신을  단속과 범죄 소탕이라는 카드를 가지고 이주노동자에게 돌린다.

한 번 드러내놓고 계산할 일이다. 미등록 노동자 없이 중소기업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중소기업이 사라지면 그 피해가 누구의 몫이 될지, 보험이 되지 않아 병원에 갈 수 없는 그들의 고통을 알면서 그렇게 ‘아끼고’ 눈감아서 한국정부가 얼마나 부자가 될지 정말 계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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