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불량식품은 늘 맛있었다.

  • 등록일
    2004/08/31 16:01
  • 수정일
    2004/08/31 16:01

초등학교 주변에 문방구에 배치되어 있던 불량식품들은 늘 맛있는 간식꺼리 였다.

 

서울 처럼 음식이 즐비하게 있지는 않았지만, 촌에 문방구에도 불량식품은 있었다. 내가 자주 애용하는 불량식품은 쫀득이라고 10cm 자모양에 1, 2, 3, 4, 5, ...10 숫자가 써있었고, 무지개 모양은 아니었지만 색깔 줄 칠해져 있던 쫀득이와 가로 10cm * 세로 1cm 마른 포, 꿀맛 같은 검은 액체(설탕을 녹여서 막는 액체였으리라 지금 생각됨.)가 들어 있는 길쭉한 쫀득이를 좋아하였다. 가격은 5원이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참 맛난 음식이였다.

 

간혹 100번대 까지 있어 뽑기로 번호를 맞추면 큰 설탕 사탕을 주는 뽑기도 했고, 학교앞 자전거 탄 아저씨가 큰 투명한 물통을 가져와 오렌지색 색소 음료를 파는 것도 맛났고, 부모님 몰래 비료포대를 훔쳐서 사먹던 아이스께기도 맛난 음식이였다. 5원만 있었으면 이중에 하나는 맛볼 수 있었다. 참 불량식품은 왜이리도 맛났는지.... 산과 들 그리고 강가에 나가면 먹을 것이 즐비했는데.... 그 당시 처음 접한 맛이여서 그랬으리라 짐작만 해본다.



장터에서 늘 부모님을 쫓아와 먹은 것이 풀빵(일명 국화빵과 같은 종류의 볼품없는 빵,,, 빵이라 하기엔 좀 그렇다. 지금 붕어빵과 같은 종류임.... 크기는 붕어빵의 1/10임.)이 였다. 참 맛나게 먹은 것인데.... 불량식품에 비하면 풀빵은 견줄수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유일하게 불량식품을 먹을 수 있는 날은 준비물을 살때 부모님이 학용품사고 잔돈이 남으면 사먹으라는 그 불량식품 참 맛났다. 난 매일매일 준비물이 있어서 불량제품을 사먹었으면 했는데.... 참 쉽지 않은 현실.... 시골이라 가정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을 안 선생님은 준비물을 학급에 비치해 놓아(아마 손수 자신의 돈을 떨었을 것이라 생각됨.)서 학용품이 없더라도 학습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해주었다. 이러다보니 학용품을 살 일이 별로 없었다. 늘 필요한 물건은 대부분 형과 누나가 사놓았던 터라 나는 형이나 누나가 쓰던 물건을 되물림받아 사용하였다. 우씨 형제가 많은 것도 죄다. 물건을 새것도 아니구 그렇다고 학용품을 사면서 떡고물도 떠러지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어서 심통을 많이 내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랴 늦게 태어난 것이 죄지.....

 

지금은 없어졌는지 있는지 모르지만 거북선이 그려진 구릿 빛 5원짜리 동전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존재였다. 그 5원만 있으면 난 방과후 학교 파하고 나면 불량식품을 사먹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돈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골에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돈이 쉽게 샘솟는 것이 아니다. 밭농사 지어보았자... 도매상인들에게 헐값에 내주고, 운송비 빼면 빠듯하게 생계를 이어가고, 쌀농사도 추곡수매가 끝냐야 일년 결산이 나오기 때문에.... 농번기에는 돈이 씨가 마를 정도이다. 일년벌어서 비축한 돈을 야금야금 쓸수 없는 탓에 일년농사 대부분을 빛으로 지낸다. 간혹 집안 경사나 조사가 있으면 쓰기위해 가가호호 소를 3-4마리를 비축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큰형이 서울(그 당시 중학교도 전국구로 모집하여 친척이 광주보다 서울에 많이 있어서 형이 서울중학교로 시험쳐서 들어감. 이것이 화근이지 나도 덩달아 서울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으니.... 나중에 시간되면 12시간 비둘기호 이야기도 써내려가 보겠음.... 비둘기호 타고 영산포역(지금은 금산인가 나주역으로 바뀌었지만)에서 서울로 상경하던 이야기를 해보이겠음... 그리고 고속버스 안내양 누나 이야기도... 중학교때 집에 내려오는 풍경으로 ...)로 중학교를 들어가 학비를 내는 것도 빠듯하다. 나도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학비를 내고 다녔으니까... 지금이야 무상교육이다 하여 초등학교 학비를 내지 않으나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학비가 달달이 냈다. 아직도 기억난다. 누런 봉투(마치 월급봉투) 같은 거를 선생님이 주면 그 봉투에 돈을 담아와 선생님에게 제출하면 선생님이 도장을 찍어주고 부모님께 사인을 받아오라고 하신 말씀..... 조금 늦게 때어날 걸 무상교육의 혜택을 덜 받아 아유 열받아라......... 그러던 터라 부모님은 학비를 내주고 내주거나 집안 큰 일거리가 있으면 쌀을 팔아서 비용을 충당한다. 그리고 감자, 수박, 참외, 배추, 무 농사는 달달이 돈이 필요한 농번기에 용돈 벌이는 된다. 그런 터라 용돈을 받기는 여지간히 어려운 일이다. 간혹 동네에서 큰 일거리가 생기면 도와주고 수고했다고 사먹으라고 주신 5원돈이 전부이다. 

 

초등학교 입학 후 불량식품과 친구가 되어 정말 군침을 삼키면서 어린 학창시절을 보내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방과후 문방구 불량식품 코너를 물끄러미 처다보고 있는 일이 종종 생각난다. 뒷산과 앞뜰에 나가면 산과실들이 먹을 수 있는데도.... 그 불량식품에 혀의 미각을 빼앗긴 나는 도저히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어린 유년 먹거리가 늘 고정되어 있던 내 미각에 불량식품은 새로운 맛이었을 것이다. 불량식품을 들고 15리(6Km) 길을 걸으면 이도 정말 신난다. 15리 길을 걸으면서 불량식품을 혀로 빨면서 가는 그 길.... 참 행복함에 도취해 걸었던 유년시절이 생각난다. 불량식품을 사먹는 날은 15리 길이 왜 이리도 멋진 것인지.... 하늘에 뭉게구름이 내 불량식품을 탐내지는 않은지.... 상상하면서 걸었다.

 

지금이야 먹거리가 풍성해 아이들이 패스트푸드로 인해 비만화가 심각하다는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참 아이들이 도시라는 각박한 공간에서 닭과 돼지처럼 사육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우리때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고팠다. 먹은 것이 없어서 아니다. 그만큼 산과 들에게 뛰어놀수 있는 공간이 많았고, 놀이문화가 많았다. 아이들과 소나무에 올라가 치타가 되보기도 하였고, 강가에서 멱감(수영)으며 놀고, 산과 들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다. 그리고 농사일은 뭐 이리도 많은지 소 여물줘야지,... 닭과 돼지 밥줘야지..... 놀고 뛰고 일하고 정말 정신없이 자연과 벗삼으로면서 일상생활을 하였다. 지금 초등학생 1학년  아이들에게 학교를 가기 위해 15리(6Km)거리를 걸어가라면 아이들 대부분이 개거품을 물겠지... 그나마 난 학교 친구들중에 그리 멀지 않는 거리를 걸어다녔다. 최고로 멀리 오는 친구는 한 25리(10Km)를 걸어오는 초등학교 같은반 급우가 있었다. 이렇듯 나와 내 동네친구들 그리고 내 연배사람들은 시골에서 이렇게 학교를 다녔다. 읍내나 면 중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도보로 학교를 다녔다. 대중교통 수단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대중교통 수단이 아예 없었으니까.... 길은 구불구불... 저수지를 지나서 산을 넘고 또 산을 넘고... 개천을 넘어서 도착한 학교... 면 중심은 나에게 신천지 였다.... 신기한게 많았으니까... 깡촌에서 살면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깡촌에서 살아도 5일장 날은 정말 분비는 날이다. 먹거리도 풍성하고 그 시골 동네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이 직접 재배하거나 채취한 것이나 기른 것들은 교환하고 분주하다. 또 가을운동회는 면 전체민의 축제의 장이다. 하하 재미난 것들이 많았구나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불량식품은 나에게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불량식품으로 접한 것은 더 큰 면중심으로 내가 진출하면서 새롭게 각인한 맛이고, 읍내로 나가서는 더 큰 것들을 보게되었다. 깡촌의 내가 불량식품을 통해서 세상과 하나둘씩 인연을 맺어갔다.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문방구에서 군침흘리면서 불량식품을 바라보던 나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히 아른거린다.

 

불량식품을 한번 사먹어 봐야 겠다.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