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생각하기 싫은 과거를 들춰보다.

  • 등록일
    2004/12/20 21:18
  • 수정일
    2004/12/20 21:18

과거를 들춰보았다.

나는 살아오면서 엄마를 많이 원망했다.

왜 재혼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늘 아버지를 만나고 오면 혼났던 기억들.... 아버지와 살고 있는 형을 만나도 혼났던 기억...

 

그런데 난 집에 있기가 싫었다.

왜 늘 내가 있는 공간에서 난 늘 혼자이어만 했다. 누나가 서울로 떠나간 후에는...

누나가 서울로 공부하러 가기 전까지는 그나마 나에게 힘내라는 말도 많이 해주었고, 늘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늘 고마웠고 늘 누나가 엄마보다 더 큰 힘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나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서운하고 서러웠던 기억이 난다. 상을 타오면 한번도 칭찬받아보지 못했던 난 상을 타는 것도 기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어리광 부린 기억조차 없다. 지금도 종종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어리광 부리는 모습을 보고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어머니는 나에게 시선을 준적이 별로 없다. 그냥 뭐해라 알았다가 우리 일상사의 대화이다. 그리고 내가 서울 생활할때도 별로 올라오지 않았다. 참 말도 하고 싶고 어리광도 부려보고 싶었던 난.... 서럽거나 외롭거나 그럴떄면 우리집 뒷산 소나무 앞에가서 소나무와 종종 혼잣말로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는 어머니는 그런 존재였다. 마음속으론 사랑했겠지만 표현을 하지 않았던 분... 전화한통화 안했던 분.... 모질고 정말 독한 분이라 난 생각하였다. 그러던 차... 내가 교도소에 있을때 면회를 두번 오신 기억... 그리고 이듬해 출소를 며칠 앞두고 저 세상 사람이 됐다는 소식....

 

그나마 어머니와 나눈 인생 몇 분의 대화가 우리 모자의 대화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 당시 면회와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본 나는... 그래 어머니는 혼자 강해질려구 나에게 모질게 대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늘 아버지에게 대들면 싸리빗자루로 곡이 나게 맞았던 기억... 어머니는 자식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난 강하지 못했다. 그 당시 어머니의 정에 목말랐다.

 

그래서 난 운동회, 소풍이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상타면 누구는 자식이 상타왔다고 자랑하러 이동네 저동네 돌아다닌데지만 난 상이라도 타오면 저기 박스에 갔다 얹어놔 하고 일나간다. 동생들 밥챙겨먹고 소 밥 챙겨 줘라... 이 말이 다다. 난 이에 서러워 우리 집 뒷산 소나무 밭으로 간다.

 

양아버지 또한 말이 없다. 그렇다고 나쁜 분은 아니다. 반항기때 많이 대들었지만 늘 마음 따스한 분이셨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면 맛난거 사먹어라 돈을 주머니에 넣어주신 그런 따스한 분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 분이시다.

 

늘 학교를 갔다오면 반복되는 일... 아이들과 놀거나 아니면 소 여물주러 들녘으로 나가는데 내 일상의 전부이다. 그나마 동네 급우들이 있었기에 그다지 외롭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난 집에만 들어가면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던 기억이 가물가물 한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늘 꾸중을 듣거나 아니면 방에 가서 혼자 놀아야 했던 기억들 뿐이다.

 

그래서 서울로 중학교 올라와 전학왔을때 집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기분이 뜰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난 나혼자 시간을 많이 보냈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 처음 듣던 니네집 달동네지... 하며 놀리던 같은반 급우.... 그래서 때론 학교가 가기 싫어져 학교를 벗어나고 픈 충동에 학교를 몇일간 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서울에 올라와 낮선 환경과 낮선 사람들에 뭍혀 살려니 정말 숨이 막혔다. 중학교 1학년 동안은 그랬다. 그런던 중 친구가 하나 생겼다. 전학온 친구...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자신의 집도 있다며 매일 같이 학교가자 하던 그 친구... 아마도 그 친구가 없었다면 난 학교에 다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는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공포의 공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놀림받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무진장 싸움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나부터 타박하고 본다. 어머니 모시구와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럴때마다 누나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싹싹빌고 같은반 급우 어머니에게 욕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1때까지 난 거의 싸움꾼이었다. 아이들이 놀리면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가 아이들 눈알을 밤탱이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반 거짓말 약간 보태 65명의 급우중 반 이상의 학부용의 얼굴을 다 알정도 였으니 얼마나 아이들과 많이 싸웠겠는가? 시골에서 올라왔으니 힘은 무진장 쎄지 맞더라도 한놈만 죽어라 때리지 그러니 자연스럽게 친구 사귀기는 어렵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던 차 위에서 말한 그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많은 위안과 많은 도움을 받았다.

 

대학교 입학후 난 간혹 집에다 안부 전화만 하고 혼자 학교에서 기숙하며 살았다. 그나마 사립대를 다니지 않아 수업료는 저렴하였다. 그렇다고 그리 싼 편도 아니었다. 시골에 뭐 돈 있겠냐...

 

대학교 1학년 친아버지가 찾아왔다. 니 형 죽었다고.... 왜 죽었냐고 물어봤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죽었다고.... 그리고 전보를 보여준다. 그랬다 형은 군대를 면죄받기 위해 나이지리아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 알았지만 형이 봉사활동을 한 동네가 나이지리아 반군지역이라 동네 전체가 학살될때 같이 죽었다고 한다.(정부군이 반군에 밀리면서 마을을 반군 아지트로 착각하여 나이지리아 대사관에서 확인 결과) 

 

이 소식을 전했을때도 어머니는 담담했다.

그런 어머니가 나에게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던 그 교도소 면회소.... 몸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몰랐다. 난 허망했다. 이제 누구에게 내가 마음이 아플때 원망하며 소리지르랴... 난 비빌 언덕이 없어졌다.

 

참 허망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미워했지만 사랑했던 친아버지, 어머니, 형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인지 난 우울하게 혼자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결코 달갑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그토록 해보지 못했던 응석이라도 부려보게...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